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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8권, 현종 4년 5월 25일 임진 4번째기사 1663년 청 강희(康熙) 2년

관학 유생 이적 등이 올린, 남중유 등에 대한 변론 상소문

관학(館學)의 유생 이적(李積) 등이 또 상소하여 남중유(南重維) 등이 이이(李珥)성혼(成渾)을 헐뜯은 정상에 대해 변론을 하고 이어 문묘에 종사하자고 청하기를,

"남중유 등 몇 명이 서로 거느리고 떼를 지어 방자하게 소를 올렸으니, 행동거지가 사리에 어긋나고 망령스럽습니다. 선비들의 의논을 비난하고 배척하며 대각을 꾸짖고 모욕했으니 무함하는 추악한 말은 참으로 입에 올려 그들과 다투어 변론할 것조차도 없습니다. 그러나 위로 선현을 모욕하여 감히 ‘도학이 거칠고 얕으며 가리기 어려운 흠이 있다.’고 말한 데 대해서는 또한 대략 변론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 나라 성리학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에 이르러서야 훌륭한 논저가 나왔으니, 그의 공이 매우 성대합니다. 이황을 뒤이어 일어나 우뚝하게 도학으로 자임하면서 이 도를 세상에 더욱 밝힌 데 있어서는 이 두 신하에 이르러 공렬이 있었으니, 이는 이제까지의 모든 선생과 어른들이 이미 결정한 의논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무리들이 감히 그들의 도학이 거칠고 얕다고 말한 것은 과연 어디에서 근거한 것이겠습니까. 예로부터 성현들은 뭇 소인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누군들 한때 흠이 있다는 비방을 면할 수 있었겠습니까마는, 이 두 신하는 불행히도 당론이 일어나던 세상에 태어나 사악한 무리들에게 미움을 받았으니, 정인홍(鄭仁弘)·정여립(鄭汝立) 등 여러 흉적들의 무함이 어찌 끝이 있었습니까. 흉적들이 주벌된 뒤에 채진후(蔡振後)·유직(柳稷) 등이 앞에서 창도하였고, 지금 중유 등이 또 뒤따라 그 뒤를 이었습니다. 그들은 간사하고 치우친 데 깊이 빠져 있으니,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이는 타고난 자품이 매우 높아 어릴 적부터 이미 도를 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선학(禪學)을 보고 기뻐하여 종사했지만 일 년도 못 되어서 그것이 그르다는 것을 알고서 곧바로 이황을 방문하여 친히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이(理)를 궁구하고 경(敬)에 거하는 학문에 마음과 뜻을 기울였으므로 이황에게 크게 추중과 장려를 받았고 그 글들이 모두 남아 있으므로 속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황이 매우 미워하여 통렬히 배척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아, 저들도 사람인데 어찌 감히 허망한 말을 만들어 내어 한결같이 이런 데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황이 일찍이 인심도심(人心道心)과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해 논하였는데, ‘사단은 이(理)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氣)가 발한 것이다.’는 설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이성혼이 왕복해 변론하여 이황의 논설이 온당하지 못하다고 하였는데 이기(理氣)의 설이 여기에 이르러 남김없이 다 파헤쳐졌습니다. 가령 이황이 그때까지 살아 있어 같이 강론했더라면 반드시 흔연히 서로 일치되었으리란 것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이것을 가지고 이이이황을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아, 주자(朱子)정자(程子)를 존숭했지만 경전을 해석하는 데는 다른 점이 매우 많았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주자정자를 비방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동서(東西)의 당론이 국가에 화를 끼치게 되자 이이만 홀로 단연코 망국의 화를 불러오는 근원이라고 여겨 진심을 다하여 구제하면서 원망과 비방을 돌아보지 않았으며 계미년021) 에 다시 임금을 만나게 되었을 적에 반드시 개혁을 실시하여 좋은 정치로 돌리고자 하였는데, 질투하는 무리들이 사방에서 떼 지어 일어나 헐뜯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저들은 감히 정권을 제멋대로 휘둘러 나라를 그르쳤다는 말로 뒤집어 씌었습니다. 아, 사람의 말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망극하다고 하겠습니다.

성혼은 가정의 가르침을 받아 매우 빨리 도를 들었으며 초야에서 뜻을 기르며 관직에 뜻을 끊었습니다. 높은 풍도와 준절한 절개는 온 세상의 종사(宗師)였으며 선비들의 의논이 존중히 여겨 아무런 이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성혼이 계미년에 한 번 소를 올려 이이에 대해 거듭 아뢰어 사특한 당류들의 비위를 거슬리자 바른 사람을 추악하게 여기는 의논이 고슴도치 털처럼 들고 일어났는데 무너뜨리고 모함하는 것이 이이에게 한 것보다 더 심했습니다. 정여립 등이 모반한 기축년022) 변란 때 성상의 전교가 끊임없이 재촉하였기에 잠시 나아가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인홍은 부르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나왔다고 공공연히 배척하였습니다. 임진 왜란 때 성혼은 초야에 있는 신하로 당파를 짓는다는 지목을 받고 있었으므로 부르는 명이 내리지 않으면 감히 스스로 나가지 않았는데 뒤에 분조(分朝)의 부름으로 인해 의주까지 나아갔으니, 그의 출처(出處)와 진퇴(進退)에는 대개 따로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홍로의 무리들이 하수인들을 선동하여 참소하는 말을 하는 것이 마침내는 증삼(曾參)이 사람을 죽였다는 말이 세 번 이르자 그의 어머니가 의혹했던 것처럼 성상의 의혹을 불러오고 말았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아, 예로부터 현인 군자로서 한때에 무함을 받아 죽은 뒤에까지 비방거리를 남긴 경우가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처럼 붕당의 설을 끼고서 날이 갈수록 더욱더 심해지는 경우는 아직 없었습니다. 이처럼 인심이 착하지 못하고 사악한 설이 비등한 날을 당해서는 굳건한 결단을 내려 속히 사문(斯文)의 성대한 법전을 거행해서 근본적인 법규를 바르게 하고 나아갈 바를 정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1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역사(歷史)

○館學儒生李積等, 又上疏, 辨南重維等誣詆李珥成渾之狀, 仍請從祀文廟曰:

南重維等若干人, 相率成群, 肆然投疏, 擧措悖妄。 非斥士論, 詬辱臺閣, 誣辭醜語, 誠不足掛諸齒牙, 與之爭辨, 而至於上侮先賢, 敢以道學粗淺, 疵累難掩爲言, 則亦不可不略辨也。 吾東性理之學, 至文純公 李滉, 然後論著發揮, 其功甚盛。 繼而作興, 卓然以道學自任, 使斯道, 益明於世, 則至兩臣而有烈, 此皆向來先生、長者已定之論。 然則此輩之敢以粗淺爲言者, 果何所本哉? 從古聖賢, 慍于群小, 孰免一時疵累之謗, 而兩臣不幸, 生於黨論之世, 爲邪黨所仇疾, 仁弘汝立等諸匈賊, 所以構誣者, 豈有紀極哉? 匈賊旣誅之後, 蔡振後柳稷等, 旣倡於前, 今重維等, 又從而繼其後。 其邪詖陷溺之深, 豈非可駭之甚乎? 李珥天分甚高, 其在童年, 已有求道之心。 見禪學而悅之, 從事未一年, 而旋覺其非, 卽訪李滉, 親承旨訣。 專心致志於窮理居敬之學, 大爲李滉所推重奬許, 其書俱存, 非可誣也。 彼乃曰, 李滉深惡而痛斥之。 噫! 彼亦人耳, 何敢搆出虛妄之言, 一至此哉? 李滉嘗論人心道心、四端七情, 有四端理發七情氣發之說。 成渾, 往復辨論, 以李滉之說, 爲未安, 理氣之說, 到此竭盡無餘。 使李滉在世而相與講論, 則其必歡然契合無疑也。 彼乃以此謂。 嗚呼! 以朱子之尊程子, 而至於解經處, 異同甚多。 以此而謂朱子之謗程子可乎? 及其東西黨論, 將禍國家, 而獨斷然以爲亡國之禍胎, 血誠救解, 不顧怨謗, 及至癸未際會, 必欲更張設施, 以回至治, 而媢嫉之徒, 群吠四起。 彼乃敢以專擅誤國等語加之。 噫! 人言至此, 可謂罔極矣。 成渾襲訓家庭, 聞道甚早, 養志丘園, 絶意仕宦。 高風峻節, 擧世宗師, 士論歸重, 靡有間然。 而逮夫癸未一疏, 申白李珥, 觸忤邪黨, 則醜正之論蝟起, 其傾陷構誣, 視殆甚。 己丑之變, 聖敎敦迫, 不得不暫出, 而仁弘公然以無召自至, 斥之。 壬辰之亂, 以山野之臣, 方被鉤黨之目, 召命未下, 不敢自至, 後以分朝徵召, 轉赴灣上, 則其出處進退, 蓋自有道理。 而弘老輩, 煽俑讒說, 卒致母之惑, 豈不痛哉? 嗚呼! 自古賢人君子, 被誣於一時, 貽謗於身後者, 何代無之? 而未有如今日之挾以朋黨之說, 而愈往愈甚者也。 當此人心不淑, 邪說騰拏之日, 正宜廓揮乾斷, 亟擧斯文之盛典, 以正統紀, 以定趨向也。

上不許。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1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사법-탄핵(彈劾) / 인물(人物) / 변란-정변(政變)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