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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5권, 현종 2년 1월 5일 을묘 2번째기사 1661년 청 순치(順治) 18년

흥정당에 나아가니 영의정 정태화·우의정 원두표가 공사를 가지고 아뢰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 및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판중추 송시열의 구황 수의(救荒收議)에 따라 옥당이 주자(朱子)의 구황장(救荒狀)을 초록하여 올렸는데, 그 조목에는 일곱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곧 죄수를 처결하는 정한(程限)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근래 사송(詞訟)을 담당한 관원들은 이 의미를 생각하지 않고 시일을 끌어 처결하지 아니하여 옥송(獄訟)이 적체되게 하고 있으니, 중외(中外)에 신칙하지 않아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둘째는 곧 재상(災傷)을 검핵(檢覈)할 때 속이고 사실대로 하지 않은 관리를 출책(黜責)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도 국초로부터 이런 법을 실시해 왔는데 근래 기강이 해이하여 관리된 자들이 대부분 속이므로 그 사이의 허실(虛實)을 적발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우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강진(康津) 고을의 경우 현감 김징(金澄)의 상소로 인하여 검핵할 때 사실대로 하지 않은 것을 이미 알아서 특별히 그 부세를 견감하였거니와, 그 밖의 재(災)를 실(實)로 삼은 수령들도 아울러 적발하여 죄를 처단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태화(太和)가 아뢰기를,

"그 세째는 곧 구황곡(救荒穀)을 바친 사람에게 상을 주기를 요구한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 순창(淳昌) 사람 양운거(楊雲擧)는 재산이 넉넉하여 미곡을 많이 바치고 있습니다. 매양 흉년 때마다 개인의 저장 곡을 가지고 주린 백성을 구제하므로 그 생명을 보전한 자가 매우 많으니 먼저 상전(賞典)을 베푸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하고, 두표(斗杓)는 아뢰기를,

"운거(雲擧)는 선조(先朝)에서 특별히 가선첩(嘉善帖)을 하사하였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습니다. 또 듣건대 그 사람은 또한 거두어 쓸 만하다고 하니, 이와 같은 사람에게는 격려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뒤에 운거에게 사옹 참봉(司饔參奉)을 제수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 넷째는 곧 저수지(貯水池)의 파괴된 곳에 인부를 모집하여 역사를 시키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제방을 쌓아 물을 저장하면 그 이익이 매우 큰데 법령이 해이하여 거의 다 파괴되고 있습니다. 현재 제방이 파괴된 곳에서 부당하게 경작하는 자는 일체 금지시키고 예전대로 수축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다섯째는 곧 곡식을 모집하여 진제(賑濟)하는 일과 다른 지방의 유민에 대해서는 그들이 현재 있는 고을에서 일체로 구활(救活)할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곡식을 모집하는 일은 일찍이 이미 품정하였습니다. 벼슬을 파는 일은 비록 명기(名器)에 손상이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만, 지금의 형세는 이미 최악의 지경에 이르렀으니 부득불 그렇게 해야 하겠습니다. 다른 지방에서 온 유민을 일체로 구활하는 일은 여러 도로 하여금 신중한 마음으로 거행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그 여섯째는 곧 조세(租稅)를 분납케 하거나 아니면 아예 면세해 주거나 하는 일 외에 전미(錢米)를 많이 풀어서 진제(賑濟)를 준비하고, 여러 해 동안의 잔영미(殘零米)와 본년(本年)에 응당 납입해야 할 쌀을 아울러 본읍(本邑)의 진적(賑糴)에 머물려 두고 본년의 하세(夏稅)를 임시로 정지시키며, 포흠(逋欠)과 사채(私債)는 아울러 독촉을 정지하는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포흠과 사채는 조복양(趙復陽)의 상소 및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납입을 중지시키자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잔영미는 곧 지금의 대동여미(大同餘米) 따위인데, 각읍이 대부분 봉류(捧留)하지 않고 있으니, 도신(道臣)으로 하여금 불특정 고을을 제비뽑아 핵실하게 한 다음, 봉류하지 않고 있는 고을의 경우는 그 수령을 죄주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 일곱째는 곧 주현(州縣)·촌락(村落)의 도적에 대해서는 진실로 단속해야 마땅하나 또한 모름지기 먼저 위덕(威德)을 베풀어야 할 것이니, 강명(剛明)한 사신(使臣)으로 하여금 왕의 덕을 받들어 선포하도록 해야 할 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우리 나라는 토포사(討捕使)와 포도장(捕盜將)을 설치하였고, 혹은 막(幕)을 설치하여 밤 도적을 사찰하기도 하니, 단속하는 방법은 지극하다고 할 만한데, 해마다 풍년이 들지 아니하여 백성에게 항산(恒産)이 없으므로 서로 모여서 도적질을 하게 되니, 그 형편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도적을 그치게 하는 근본 방법은 오직 조정에서 먼저 위덕을 베푸는 데 달려 있을 뿐이며, 별도로 사신을 보내는 것은 한갓 음식과 거마의 제공에 따른 폐단만 끼칠 뿐입니다. 짧은 시일에 두루 돌아다니는 것으로 어떻게 항시 일어나는 도적을 그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사신은 보내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아울러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지방의 진제는 으레 관문(官門)에 설치한다 하니, 큰 고을의 경우 외촌(外村)은 관문과의 거리가 매우 멀텐데, 기민(飢民)이 일제히 모여와서 먹기가 어려울 것 같다."

하니, 두표는 아뢰기를,

"큰 고을의 경우는 외창(外倉)이나 먼 마을에다가 몇 군데 더 설치하여 모여서 먹기에 편리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외처에서 죽을 쑤어 기민에게 먹일 경우, 수령도 또한 수시로 두루 다니면서 친히 살핀다면 빠뜨리고 소략한 폐단을 없앨 수 있습니다. 수령을 주의시키는 일은 감사에게 달려 있으니, 백성 중에 굶어 죽은 자가 발생할 때에는 감사가 그 죄를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별도로 어사를 보내서 진정(賑政)을 검핵하면 꽤 이익되는 바가 있겠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어사가 별안간 순시하는 일은 반드시 실효가 있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 번거로운 폐단만 더할 것이니, 보내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옥당이 차자로 진달한 포적(逋糴)의 폐단은 어찌 그토록 극심한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매년 납입하지 못한 건 진실로 수령의 과실입니다마는, 근년에 연달아 흉년을 만났으므로 수령이 비록 납입을 독촉하려고 해도 그 사세가 역시 어렵습니다. 그 중에는 더러 사망하거나 유리한 자가 있어 침징의 일이 족린(族隣)에 미치기까지 하니, 참으로 원통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제도(諸道)에 명하여 징수할 곳이 없는 대상을 상세히 조사하여 계문한 뒤에 처치하도록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혁파할 일을 진달하였습니다. 반정 초의 위의(危疑)할 때에 그것을 임시로 설치한 일이 있었는데, 지금은 전과 달라 별로 숙위(宿衛)에 관계가 없고 국고가 탕갈한 때에 한갓 관의 곡식만 소비하고 있으니, 신과 좌상은 다 혁파할 만한 것이라 말하는데 우상이 미루고 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1천 명이 넘는 군관은 대부분 재주와 용맹이 있는데 일시에 혁파해 보내는 것은 참으로 아깝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결코 혁파할 수 없는 것이라 여깁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는 그것은 혁파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라고 힘써 말하니, 상이 이르기를,

"원임 대신에게 수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훈국 군병(訓局軍兵)을 감원할 것과 군자 별창(軍資別倉)을 설치할 일을 진언하였는데, 창고를 설치하는 일은 반드시 각 아문과 여러 궁가의 어전·염분을 변통한 뒤에야 바야흐로 의정(議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또 군액(軍額)은 감해야만 하고 어전과 염분은 군자(軍資)에 옮겨 보충해야 한다고 힘껏 진언하였다. 두표는 아뢰기를,

"군병은 더 뽑지 않으면 저절로 원액(元額)이 감수되고, 어전과 염분은 원수(元數)가 많지 않으니, 비록 혁파한다 하더라도 크게 이익될 것이 없습니다."

하고, 유계는 아뢰기를,

"나누어 가지면 비록 적지마는, 합해 모으면 또한 적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군병의 경우는 궐원이 생겨도 보충하지 말도록 이미 영을 내렸으니 우선 형세를 보아야 할 것이고, 별창의 경우는 각 아문·여러 궁가 및 각도의 감영·병영·수영의 어전과 염분의 총수가 얼마인가를 아울러 정확히 조사해본 뒤에 처리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어린애에게 베 거두는 것을 감면할 일을 진언하였는데, 어린애 같은 유는 그 수가 1만여 명이나 되니, 매년 감면한다면 국가 예산이 따라서 고갈될 것이므로 정말 계속 감면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자, 유계는 또 그 애긍한 상황을 힘껏 진언하고, 또 아뢰기를,

"비록 이해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어린애의 나이를 올려서 군안(軍案)에 기록하고 나이가 50세가 못 되어서 노제(老除)시키고 있는 것을 지금 만일 그 어린애들이 장성함을 기다려서 베를 거두고 실제 나이가 60세에 이르러서 비로소 제대시킨다면 50세 후에 거두는 수가 족히 어린애 때 감면한 수를 충당할 것이니, 다소를 계산하여 실로 차이가 없을 것입니다. 국가는 한갓 목전의 수용에만 급급하여 선처의 방법을 생각지 않아, 백성을 학대하여 원성을 취하고 있으니, 매우 애석한 일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우선 금년에 거두는 베를 감면하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유계가 아뢰기를,

"조군·수군에서 어린애에 대한 폐단이 더욱 심하니 또한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홍명하(洪命夏)는 아뢰기를,

"조군·수군은 대대로 그 역(役)을 전해가니, 군역(軍役) 중에서 가장 괴로운 것입니다. 이에 세초(歲抄) 때에 정장(丁壯)을 얻기 어려운 것이 다른 병정에 비하여 더욱 심합니다. 조군의 경우에는 장선(裝船)과 납량(納糧)의 역(役)이 있고, 수군의 경우에는 입번(立番)과 수조(水操)의 역이 있는데, 한 번 역에 응하면 이미 반년의 물자를 허비하니, 장정도 오히려 지탱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어린애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풍년에도 오히려 감당하기 어려운데 하물며 흉년에야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유계의 말이 참으로 옳은데 다만 아울러 감면한다면 경비를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수군의 경우에는 이름은 비록 입번이라 하나 변장(邊將)이 그 번포(番布)를 받아 대개 사사로이 사용하여 한갓 군민(軍民)의 원망만 취하고 방비는 허술하니, 참으로 한심합니다. 이와 같은 흉년에는 우선 입번을 파하는 것도 혹 하나의 방편이 됩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가령 위급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군병이 없는 배를 장차 어떻게 쓰겠습니까. 변장이 군병을 놓아주고 베를 거두는 일은 비록 얄미운 일이나, 산골에 사는 자는 배 부리는 일을 익히지 않았으니, 비록 입번케 하더라도 바로 쓸모없는 군병입니다. 그런데도 양식을 싸가지고 와서 머물게 하면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진(鎭) 근처에 있는 군병을 대신 입번시켰습니다. 이로써 한편으로는 먼 데서 와서 오래 머무는 폐단을 제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토병(土兵)의 의식(衣食)의 물자를 삼으니, 그 사이에 비록 변장이 난잡하게 구는 일이 없지 않으나, 만일 번군(番軍)을 혁파한다면 원근의 사람이 모두 병들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옥당의 차자 중에서 어영군의 입번을 제거할 일을 진언하였습니다.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처음 이런 논의를 하였으니, 지금 그렇게 행하더라도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하고, 유계가 잇달아 진언하니, 상이 따랐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전번에 승려를 환속시키라는 분부가 계셨으니 이는 매우 거룩한 처사입니다. 그러나 갑자기 시행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는데 옥당의 차자에서도 역시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다시 생각해보니 도태시키는 것이 진실로 마땅하나 소란스러울 염려가 없지 않으니, 지방에서는 일단 서서히 하고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우선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바로 역대 제왕에게 없었던 거룩한 일이니, 성상께서 만일 과단성있게 행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듣건대 연로하여 의탁할 데 없는 후궁이 으레 이원에 거한다 하는데, 지금 만일 이런 것을 갑자기 혁파하면 그들이 돌아갈 데가 없을까 싶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선묘조(宣廟朝)에서 은혜를 받은 상궁 박씨(朴氏)가 늙어 의지할 데 없어 삭발하고 여승이 되어 자수원(慈壽院)에 나가 거주하였었는데 지금은 이미 서거하였다."

하였다. 유계가 아뢰기를,

"이원을 헐어버리라는 분부는 실로 이단을 물리치려는 성상의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더구나 선조(先朝)의 후궁은 이원에 나가서 거주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는데 어찌 이것으로 구애할 바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의 두 이원은 모두 혁파하고 여승의 나이 40세 이하인 자는 모두 환속시켜 시집가는 것을 허락하고, 늙어서 돌아갈 데 없는 자는 모두 도성 밖의 이원으로 내치되, 나이가 비록 40세가 넘었더라도 환속하려고 하는 자는 들어줄 것이며, 또 자수원에 봉안된 열성 위판(列聖位版)은 지난해 봉은사(奉恩寺)의 예에 의하여 예관(禮官)으로 하여금 매안하게 할 것을 속히 거행하라. 그리고 두 이원의 여승으로서 환속할 자가 몇 명이며 도성 밖으로 방출될 자가 몇 명인가도 아울러 일일이 아뢰어 알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통진 해량(通津蟹梁)의 일은 대관이 아뢴 지 이미 오래이고 옥당의 차자도 또 이와 같으니, 다시 조사하는 것을 그만두고 속히 궁노(宮奴)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유계가 아뢰기를,

"시시한 궁노가 성상의 이목을 속여 가리우고 기탄없이 방자하게 구는 태도에 대하여 사람들은 모두 놀라고 분노합니다. 전하께서는 대간의 아룀과 신들의 차자를 가지고 이숙(李䎘)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라고 여기십니까. 그렇지 않으면 전하께서는 어찌 한 궁노를 아끼고 공론을 따르지 않습니까. 전하께서 만일 저런 쥐 같은 무리를 다스리지 않으신다면 장차 어떻게 간사한 자를 징계하고 체통을 세우겠습니까."

하고, 좌상 심지원(沈之源)은 아뢰기를,

"일이 매우 세세한 것인데, 위에서 오래도록 윤음을 아끼시니, 아랫사람들의 심정이 더욱 의혹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여기에는 곤란한 일이 있으므로 이미 다시 조사하도록 하였으니, 그 조사하여 아뢰는 것을 보아서 처치하여도 늦지 않다."

하자, 태화가 또 아뢰기를,

"대간이 자주 체직되는 폐단을 옥당이 차자로 말하였으니, 이는 마땅히 변통해야 할 일이나, 그 사이에는 또한 쉽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폐단은 이미 오래된 것인데 어떻게 해야 제거할 수 있겠는가?"

하니, 유계는 아뢰기를,

"염치에 관계되는 일을 제외하고는 일체 체직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바로 폐단을 제거하는 방법입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대관(臺官)의 체면은 보통의 관료들과는 다르니 추고를 당하고 있으면서 행공하는 것도 역시 부당할 것 같습니다."

하고, 명하(命夏)는 아뢰기를,

"대간의 직책이 싫어서 피하는 자 가운데는 혹 월과(月課)를 짓지 않거나 삭서(朔書)를 쓰지 않거나 혹은 길에서 재상을 만났을 때 일부러 범하여 피하지 않고서는 허물을 끌어다 체직을 도모하는 경우가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조신(朝臣)이 임금에게 경계를 진언하면 반드시 마음을 바르게 하라고 말하는데, 자신의 행동은 이와 같으니, 이를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는가. 사대부가 옛글을 읽고 조정에 올라 임금을 섬기면서 이처럼 임금을 속이고 있으니 자못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하니, 유계가 아뢰기를,

"염치에 관계가 있어서 인입(引入)하는 경우라면 용서할 만하지만 싫어서 피하고 일부러 범하는 유는 참으로 통탄할 일입니다."

하였다. 집의 목겸선(睦兼善)이 아뢰기를,

"해량(蟹梁)의 일은 날마다 논계하였는데 오늘 입시한 대신과 유신이 주달한 바가 본부의 계사보다 더욱 간절하니, 사람들이 더욱 답답해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윤음을 내리소서."

하고, 또 선척의 수를 정할 것을 아뢰고 내사(內司)의 관원을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이내 승지 이경휘(李慶徽)에게 이르기를,

"명례궁(明禮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과 내수사(內需司) 선척외의 그 나머지 제 궁가 선척을 외방(外方)은 2척, 경강(京江)은 4척으로 수를 정하고, 그 나머지는 아울러 세를 거두도록 하며, 각 아문의 선척은 해조로 하여금 수를 정하여 품처하도록 하라."

하였다. 정언 여성제(呂聖齊)가 아뢰기를,

"대간이 혐의를 끌어 자주 체직되는 것은 참으로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전번 헌관(憲官)을 처치할 때 특명으로 체직하지 말게 하셨으니, 실로 이는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성상의 거룩한 뜻이었으나, 대신(臺臣)의 거취는 서관(庶官)과 다르므로 규정을 정함이 있기 전에는 단연코 체직되고 나서 도로 그냥 있는 이치가 없기 때문에 신이 또 체직을 청하였습니다. 지금 들으니, 옥당의 차자 가운데 ‘근래의 규례를 답습하여, 임금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지 못한다.’고 지척하였다 합니다. 재차 그르친 잘못을 신이 실로 져야 할 것입니다."

하고, 인피하여 체직을 청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판윤(判尹) 이완(李浣)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에서 일찍이 포보(砲保)의 충정(充定)에 대한 폐단을 진언하고 따라서 부당하게 소속된 모든 무리들을 조사하여 여정(餘丁)으로 정해 가지고 포보 대신으로 옮겨 충정하기를 청하였더니, ‘다 조사한 뒤에 다시 품의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이제 이미 조사하여 파악해 보니, 그 수가 2천 3백여 명에 이르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1천 5백 명은 도감(都監)으로 옮겨 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12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재판(裁判)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재정-잡세(雜稅) / 재정-창고(倉庫) / 왕실-비빈(妃嬪)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군사-병참(兵站)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군정(軍政) / 재정-공물(貢物) / 재정-역(役)

○上御興政堂, 引見大臣及備局諸臣。 領議政鄭太和曰: "因判中樞宋時烈, 救荒收議, 玉堂抄進, 朱子救荒狀, 其條有七。 其一, 卽決囚程限也。 近來詞訟之官, 不念此義, 延拖不決, 以致滯獄, 不可不申飭中外矣。 其二, 卽黜責檢覆災傷, 欺罔失實官吏也。 我朝自國初, 亦有此法, 而近來紀綱解弛, 爲官吏者, 率多欺瞞, 其間虛實, 摘發甚難矣。" 右議政元斗杓曰: "康津一邑, 因縣監金澄上疏, 旣知檢覆失實, 特蠲其賦, 其他以災爲實之守令, 竝宜摘發科罪矣。" 太和曰: "其三, 卽乞推獻助之賞也。 卽今淳昌楊雲擧, 饒於財, 多納米穀。 每於凶歲, 以私儲分濟飢民, 全活甚多, 似當先施賞典矣。" 斗杓曰: "雲擧於先朝, 特授嘉善帖辭而不受。 且聞其人亦合收用云, 如此之類, 不可無激厲之擧矣。" 【後除雲擧爲司饔參奉。】 太和曰: "其四, 卽水利廢壞處, 雇募作役也。 築堰貯水, 其利甚大, 而近來法令解弛, 擧皆廢墜。 目今破堰處冒耕者, 一切禁斷, 仍爲修築宜當矣。 其五, 卽募粟賑濟他處流民, 所在郡縣, 一體救活也。 募粟一款, 曾已稟定矣。 賣爵雖曰有傷名器, 而卽今形勞, 巳到十分渴急之地, 不得不如此也。 至於他處流民, 一體救活事, 則宜令諸道, 惕念擧行矣。 其六, 卽年分分數放免之外, 多發錢米, 准備賑濟, 累年殘零米及本年應納之米, 竝留本邑賑糶, 本年夏稅, 權行停止, 逋欠、私債, 竝行住催也。 私債與逋欠, 因趙復陽疏及玉堂箚, 有停捧之議。 殘零米, 卽今大同餘米之類, 而各邑多不捧留, 令道臣抽栍覈實, 未捧邑則不可不罪其守令矣。 其七, 卽州縣、村落盜賊之患, 固當禁約, 亦須先施威德, 使剛明使臣, 得以奉承宣布也。 我國之設討捕使、捕盜將, 或設幕伺察夜寇, 禁約之方, 可謂至矣, 而年比不登, 民無恒産, 相聚爲盜, 其勢固然。 熄盜之本, 惟在朝廷先施威德而已, 別遣使臣, 則徒貽廚傳之弊。 片時周行, 何能止常常竊發之盜乎? 此則勿遣可矣?" 上竝從之。 上曰: "外方賑濟, 例於官門設置云, 大邑則外村距官門甚遠, 飢民似難齊會來哺矣。" 斗杓曰: "大邑則或外倉或遠村, 加設數處, 以便聚食矣。" 太和曰: "外處設粥守令, 亦時周行親審, 則可無虛踈之弊。 而飭勵守令, 在於監司, 民有飢死者, 監司難免其罪矣。" 上曰: "別遣御史, 檢覈賑政, 則頗有所益乎?" 太和曰: "御史瞥然巡視, 未必有實效, 秪益其煩弊, 不如不送矣。" 上曰: "玉堂箚所陳逋糴之弊, 何至此極?" 太和曰: "每年未捧, 此固守令之過, 第近歲連値凶歉, 守令雖欲督捧, 其勢亦難。 其中或有死亡與流徙者, 侵徵之擧, 至及於族隣, 誠冤矣。" 上命諸道, 詳査指徵無處之類, 啓聞後處置。 太和又曰: "玉堂箚中, 陳扈衛軍官革罷事矣。 反正初危疑之際, 有此權設, 而今則異前, 別無關緊於宿衛, 國儲罄竭之時, 徒費廩粟, 臣與左相, 皆謂可罷, 而右相持難矣。" 斗杓曰: "滿千軍官, 多有才勇, 一時罷遣, 誠爲可惜。 臣意則以爲, 決不可罷。" 副提學兪棨, 力言其不可不罷, 上曰: "原任大臣處, 收議可也。" 太和又曰: "玉堂箚中, 陳訓局軍兵減額, 及設置軍資別倉事, 設倉則必須變通各衙門、諸宮家漁箭、鹽盆, 而後, 方可議定矣。" 又力陳軍額不可不減, 漁箭、鹽盆不可不移補軍資。 斗杓曰: "軍兵勿爲加抄, 則自減於元額, 漁箭、鹽盆元數不多, 雖罷似無大益。" 曰: "分占則雖少, 合聚則亦不貲矣。" 上曰: "軍兵則已令有闕勿補, 姑且觀勢, 而別倉則各衙門、諸宮家、各道監兵水營漁箭、鹽盆, 都數幾何? 竝令査覈後, 處之可也。" 太和又曰: "玉堂箚中, 陳兒弱收布蠲免事, 兒弱之類, 其數萬千, 每年減除, 則國用隨竭, 誠非可繼之道。" 又力陳, 其哀矜之狀, 又曰: "雖以利害言之, 兒弱增年錄案, 年未五十而老除, 今若待其長成而收布, 至實年六十始除, 則五十後收捧, 足當兒弱時蠲減之數, 計量多少, 實無差殊。 而國家徒急目前之需, 不思善處之道, 厲民取怨, 深可惜也。" 太和請姑減今年收布, 上從之。 曰: "漕、水軍兒弱之弊, 尤甚, 亦不可不變通也。" 兵曹判書洪命夏曰: "漕、水軍世傳其役, 軍役中最苦者也。 歲抄時丁壯之難得, 比他兵尤甚。 漕軍則有裝船、納糧之役, 水軍則有立番、水操之役, 一番應役, 已費半年之資, 壯者猶難支, 況兒弱乎? 樂歲尙不堪, 況凶年乎? 言誠是, 而第竝爲減除, 則經費難支矣。" 曰: "水軍則名雖立番, 而邊將捧其番布, 率多私用, 徒取軍民之怨, 而備禦則虧踈誠可寒心。 如此凶歲, 〔姑〕 罷立番, 亦或一道也。" 太和曰: "脫有緩急, 無軍之船, 將何用之? 且邊將放軍收布, 雖曰可惡, 居在山峽者, 不閑操舟, 雖使立番, 特是無用之軍。 而裹糧留滯, 不堪其苦, 故雇立鎭下之兵。 一以除遠來久留之弊, 一以爲土兵衣食之資, 其間雖不無邊將濫雜之事, 若罷番軍, 則遠近之人, 俱病矣。" 太和又曰: "玉堂箚中, 陳御營軍除番事。 故相臣李時白, 始爲此論, 今亦行之無難矣。" 又繼陳, 上從之。 太和又曰: "頃有僧尼還俗之敎, 此甚盛擧。 而有難猝行者, 玉堂箚亦言之矣。" 上曰: "子亦更思之, 沙汰固當, 而不無紛擾之患, 外方則姑徐, 城中兩尼院, 先爲革罷如何?" 太和曰: "此是歷代帝王所未有之盛節, 聖上若果斷然行之, 豈不爲美事? 而第聞後宮之年老無依者, 例居尼院云, 今若猝罷, 此屬恐無所歸矣。" 上曰: "宣廟朝承恩尙宮朴氏, 老而無依, 落髮爲尼, 出居慈壽院, 今已逝矣。" 曰: "尼院毁撤之敎, 實出(闢)〔辟〕 異端之至意。 況先朝後宮, 不宜出住尼院, 豈可以此有所拘礙乎?" 上曰: "城內兩尼院, 竝皆革罷, 尼年四十以下者, 竝令還俗許嫁, 老無所歸者, 盡黜城外尼院, 而年雖過限, 欲還俗者聽, 且慈壽院奉安列聖位板, 依頃年奉恩寺例, 令禮官埋安事, 速卽擧行, 兩院尼還俗者幾何, 放出城外者幾何? 竝一一啓知可也。" 太和又曰: "通津蟹梁事, 臺啓已久, 玉堂箚又如此, 宜寢, 更査亟治宮奴也。" 曰: "幺麽宮奴, 欺蔽天聰, 縱恣無忌之狀, 人皆駭憤。 殿下以臺啓與臣等之箚, 爲營救李䎘之地耶? 不然, 殿下何惜一宮奴, 而不從公論耶? 殿下若不治如許鼠輩, 則將何以懲奸細, 而立體統乎?" 左相沈之源曰: "事甚瑣細, 而自上久靳兪音, 下情深切疑惑矣。" 上曰: "此有難便之事, 已令更査, 觀其査啓而處之, 未晩也。" 太和又曰: "臺諫數遞之弊, 玉堂箚言之, 此宜變通, 而其間亦有未易者矣。" 上曰: "此弊已久, 何以則可祛耶?" 曰: "除關係廉隅事外, 切勿許遞, 乃是祛弊之道也。" 太和曰: "臺官體面, 異於庶僚, 帶推行公, 亦似不當。" 命夏曰: "厭避臺諫者, 或有不作月課, 不寫朔書, 或路逢宰相, 故犯不避, 引咎圖遞者, 誠可寒心矣。" 上曰: "朝臣陳戒於君, 則必曰正心, 而行己則如此, 其可謂正心乎? 士大夫讀古書, 立朝事君, 而有此欺君之事, 殊未可曉也。" 曰: "有關廉隅而引入, 則可恕, 厭避故犯之類, 誠可痛也。" 執義睦兼善曰: "蟹梁事逐日論啓, 而今日入侍大臣、儒臣之所達, 尤切於本府啓辭, 可見群情之愈鬱也。 請賜允兪。" 又啓船隻定數, 請罷內司官員。 上竝不從, 仍謂承旨李慶徽曰: "明禮壽進於義等宮及內需司船隻外, 其餘諸宮家船隻, 以外方二隻, 京江四隻定數, 其餘竝令收稅, 各衙門船隻, 則令該曹定數稟處。" 正言呂聖齊啓: "臺諫引嫌數遞, 誠爲痼弊。 頃日處置憲官也, 特命勿遞, 實是聖上矯弊之盛意, 而臺臣去就, 異於庶官, 未有定規之前, 斷無旣遞還仍之理, 故臣又請遞矣。 今聞玉堂箚中, 以因襲近規, 未克將順斥之。 再誤之失, 臣實當之。" 引避, 請遞, 上答以勿辭。 判尹李浣曰: "臣於先朝, 曾陳砲保充定之弊, 請以諸般冒屬之類, 査定餘丁, 以爲移充砲保之代, 則以畢査後更稟, 爲敎矣。 今已査得,則其數至於二千三百餘名, 未知何以爲之。" 上曰: "一千五百名, 移給都監, 可也。"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2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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