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가뭄에 대해 거론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한재(旱災)가 이렇게 참혹한 것은 하늘이 나를 경계시키는 것인데 내가 부덕한 탓으로 죄없는 백성들이 모두 구렁에 나뒹굴게 되었으니, 진실로 딱한 노릇이다."
하니, 영상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위에서 스스로를 자책하시는 하교가 계셨으니 충분히 하늘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오늘의 재앙은 꼭 무슨 일에 대한 응보라고 지적할 수는 없습니다만 근래 전하의 노여움이 누차 발하여 그 사기(辭氣)가 중도를 벗어났습니다. 그리하여 신하들이 규간(規諫)을 많이 진달했고 성상께서도 이미 뉘우치시었는데, 본심을 잡아 간직하는 공력이 전일만 못해서 그런 것인가 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알고 있다. 내가 어떻게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유심(柳淰)이 아뢰기를,
"본도(本島)의 연해변에 있는 일곱 개의 진보(鎭堡)는 당초 설치할 때 뜻이 있어서 한 것이었는데 소속된 군병(軍兵)이 없어서 급한 일이 발생했을 적에 힘을 얻을 수가 없으니, 본부(本府)의 속오(束伍)를 덜어내어 매 보(堡)에 각각 1초(哨)씩 주고 부근의 사람들로 대오(隊伍)를 만들어 평상시에는 본부에서 연습하게 하고 급한 일이 생기면 각보에 옮겨다 쓰게 하여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대간을 자주 체직시켜 한 사람도 그 직임에 오래 있는 사람이 없으니 어떻게 실효를 거두기를 책임지울 수 있겠는가. 그리고 헌부는 제사(諸司)를 규검(糾檢)하는 것으로 임무를 삼고 있으니 진실로 자주자주 개좌(開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근래 한 달 안에 개좌한 것이 두어 번에 불과하다고 하니, 이렇게 하고도 실효가 있을 수 있겠는가."
하니, 교리 이민서(李敏叙)가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진실로 지당하십니다. 고례(古例)에 대관(臺官)이 추고를 받으면서 행공(行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선정신(先正臣) 조광조(趙光祖)는 우물쭈물하여 구차스럽게 용납되는 것은 그 자취가 험사(憸邪)와 같다고 한 등등의 말 때문에 추고를 받았었습니다만 이 때문에 체직시키지는 않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의 대관들은 조금만 미편한 일이 있으면 번번이 인혐하여 기필코 체직된 뒤에야 그만두고 있습니다. 이 뒤로는 변통시키는 거조가 있어야 될 것 같습니다."
하고, 태화는 아뢰기를,
"민서의 말이 옳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대관들이 어찌 추고받으면서 근무하려 하겠습니까. 이는 경솔히 의논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위에다 책난(責難)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신(誠信)을 가지고 말들을 하는데 스스로 하는 일을 살펴보면 반드시 말한 것과 같지는 않다. 정병(呈病)하는 내용으로 살펴보더라도 그 증세가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이 쓰고 있지만 그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이것이 어찌 성신으로 대하는 도리이겠는가. 이른바 명사(名士)라고 우쭐거리면서 스스로 고아(高雅)한 체하는 자들도 처사는 반드시 그렇지가 못하여 갱참(坑塹)에 떨어져 있는 자와 다를 것이 없다."
하니, 민서가 아뢰기를,
"위에서 한재를 걱정하며 허물을 자처한 하교에 대해 누군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입시한 신료들은 직접 성상의 분부를 들었습니다만 먼 외방의 백성들은 성상의 근심과 수고로움이 이러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한 전하께서 즉위한 이래 인심을 크게 위로하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모든 일은 반드시 발단된 곳이 있는 것이니 의당 이를 인하여 경계하고 두려워할 것은 물론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려 여러 가지 계책을 모으고 크게 진작시켜 천재(天災)에 응하소서."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의당 비망기(備忘記)를 내릴 것이니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의 초안을 작성하라."
하였다. 민서가 또 국가의 저축이 이미 고갈되었다고 하여 호위 군관(扈衛軍官)을 파할 것을 청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신의 의견도 민서와 같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의논한 지 오래다. 일찍이 연양(延陽)070) 의 차자 내용을 인하여 혁파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였다. 민서가 구규(舊規)에 의거하여 경연을 정지하는 날에는 고사(故事)를 서진(書進)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른바 고사(故事)라고 한 것은 옥당의 관원이 서책(書冊)을 고열(考閱)하여 고사 가운데 군덕(君德)과 치도(治道)에 절실한 것을 취하여 정강(停講)하는 날 써서 진달하게 한 것을 말하는데 간혹 이를 인하여 부론(附論)하여 풍유(諷諭)하는 것이 있었다. 뒤에 오시수(吳始壽)의 진달에 의거하여 정폐(停廢)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8면
- 【분류】과학-천기(天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중앙군(中央軍)
- [註 070]연양(延陽) : 이시백(李時白)의 봉호(封號).
○上御興政堂, 引見大臣及備局諸臣。 上曰: "旱災之慘, 天所以警予而以予否德之故, 無辜之民, 擧將塡壑, 誠可哀也。" 領相鄭太和曰: 自上責己之敎, 足以動天矣。 今日之災, 雖不可指爲某事之應, 而近來天怒累發, 辭氣過中。 諸臣多進規諫, 聖明亦旣悔悟, 而操存之功, 恐或不如前日而然也。" 上曰: "子亦知之。 予何以自謂無失。" 江華留守柳淰曰: "本島沿邊七堡, 當初設置, 其意有在, 而無所屬軍兵, 緩急之際, 難以得力, 請除出本府束伍, 每堡各給一哨, 附近作隊, 常時則鍊習於本府, 臨急則移用於各堡。" 上從之。 上曰: "臺官數遞, 無一人久居其任者, 何以責其成效也? 且如憲府, 以糾檢諸司爲任, 固宜頻頻開坐。 而近聞一朔之內, 開坐不過數度云, 若此而能有實效耶?" 校理李敏叙曰: "聖敎誠爲至當矣。 古例臺官亦有被推而行公者。 先正臣趙光祖, 以依違苟容跡同憸邪等語被推, 而猶不能以此得遞。 今之臺官, 少有非便之事, 輒引嫌必遞而後已。 今後則似當有變通之擧矣。" 太和曰: "敏叙之言是矣。 然今之臺諫, 豈肯帶推而行公乎? 此則似不可輕議也。" 上曰: "今之責上者, 必以誠信爲說, 而觀其所自爲之事, 則未必如其所言。 試以呈病之辭觀之, 症勢若不保朝夕, 而乃其實狀則不然。 此豈誠信之道耶? 所謂名士, 昻昻自高, 而處事則未必能然, 與落在坑塹者無異矣。" 敏叙曰: "自上軫災引咎之敎, 孰不感動? 但入侍臣僚, 親聽聖敎, 而遐外之民, 不知聖上憂勞如此。 且殿下卽位以來, 未有大慰人心之擧。 凡事必有發端處, 宜因此警懼, 下敎求言, 收群策大振作, 以應天災。" 上曰: "當下備忘承旨代予草敎。" 敏叙又以國儲已竭, 請罷扈衛軍官。 太和曰: "臣意亦與敏叙同矣。" 上曰: "此事議之久矣。 曾因延陽箚辭, 不爲革罷進。" 敏叙請依舊規, 停筵之日, 書進故事, 上從之。 【所謂故事者, 玉堂之官, 考閱書冊, 取故事之切於君德治道者, 書進于停講之日, 或因此附論, 有所諷諭。 後因 吳始壽進達停處。】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8면
- 【분류】과학-천기(天氣)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정론(政論) / 군사-군정(軍政) / 군사-관방(關防) / 군사-중앙군(中央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