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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4권, 현종 1년 7월 3일 병진 4번째기사 1660년 청 순치(順治) 17년

유계가 오가작통·호패·향약 등의 일을 이경석에게 문의하다

비국 부제조 유계(兪棨)가 상의 명을 받들어 오가작통(五家作統)·호패(號牌)·향약(鄕約) 등 세 건의 일에 대한 편리 여부를 영돈녕 이경석(李景奭)에게 문의하였다. 경석이 차자를 올려 답하기를,

"옛날 태종조(太宗朝) 때 이미 호패를 만들었었는데 3년 만에 도로 중지했고 인조조(仁祖朝) 때 또 호패를 시행했었으나 정묘 호란 때문에 파기했습니다. 수년 동안의 주획(籌劃)을 허비하고 다소의 인명(人命)을 죽여가면서 완성시켜 놓은 다음 도로 파기했으므로 의논하는 사람들이 애석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가령 그때 파기하지 않았더라도 어떻게 장구히 갔을 것을 보장할 수 있겠습니까. 법령이 가혹하고 엄하기로는 난폭한 진(秦)나라보다 더한 예가 없었습니다만 창대를 잡고 한번 외치자 해내(海內)가 메아리처럼 호응하였습니다. 일을 옛법에 따르지 않으면 의지하기 어려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오가작통의 경우는 곧 삼대(三代)의 유제(遺制)로서 성조(聖祖)들께서 행하였었고 《대전(大典)》에 기재되어 있습니다. 단지 큰 난리를 겪은 뒤에 다시 수명(修明)하지 않은 것뿐입니다. 이유태(李惟泰)의 말은 경전(經傳)의 전거를 고증한 것이니 채택하여 행해도 안 될 것이 없겠습니다. 신은 기축년065) 에 외람되이 수상(首相)의 자리를 더럽혔었는데 오가작통은 시행할 만하다는 말을 가지고 비국에서 의논했었습니다만 당시의 의논 중 소요가 일 것을 우려하는 이도 있었기 때문에 신이 감히 강요하지 못했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오가작통이 호패만 못하다 하는데, 선왕(先王)의 정사를 닦지 않고 유자(儒者)의 말을 행하지 않으면서 위엄으로 제압하는 혹독한 법을 행한다면 깊고도 장구함을 생각하는 데 흠이 있지 않겠습니까.

향약 같은 경우는 본디 행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신이 상직(相職)에 있을 적에 이 법의 시행에 대해 의논했었는데, 한결같이 여씨(呂氏)의 향약을 따를 경우에는 혹 지금에 합당하지 않은 것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대강(大綱)만을 뽑아서 먼저 경계하여 고하기를 ‘부모에게 효도하지 않고 형에게 공경하지 않는 자와 젊은 사람이 어른을 무시하고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무시하는 자 및 효도하고 공경하는 행실이 있는 자는 경외(京外)로 하여금 규찰하고 천거하게 한다.’ 했습니다만, 비루한 습속에 젖은 무식한 무리들은 하찮게 여길 뿐만이 아니라 또 따라서 비웃기까지 했으므로 잘 봉행하는 사람이 극히 적었습니다. 그러나 조금이나마 법을 봉행할 줄 아는 사람은 무리(武吏)라고 하더라도 또한 힘써 행했습니다. 신이 서새(西塞)에 유배되어 있을 적에 들은 말에 의하면 정주(定州)에 불효한 자가 있었는데 법령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는 자기의 어미를 맞이하여 봉양하였으며, 변방 고을의 어린 아이들도 왕왕 효제(孝悌)의 도리를 깨우쳤다고 했습니다. 또한 서울 시전(市廛)에 화목하지 못한 형제가 있었는데 법령을 듣고서는 조심할 줄 알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종실(宗室) 공성령(恭城令)의 아들이 불효 막심했는데 그 동리의 사람들이 감히 밝혀 말하지 못하고 있던 중 규찰하는 법이 내려졌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고발하여 복법(伏法)되었다고 합니다. 장구하게 시행한다면 크게 일변시키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하더라도 가르치지 않아서 스스로 방자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신이 직위를 떠남에 이르러서 이 법이 드디어 해이하게 되었고 월삭(月朔)의 문부(文簿)도 헛된 겉치레가 되었을 뿐이니 진실로 통분스러운 일입니다. 지금 행하려고 한다면 단지 상께서 학문에 뜻을 두고 성심에 한결같이 하시기에 달려 있을 뿐인데, 이 마음으로 유사(有司)를 책려(策勵)한다면 풀 위에 바람이 부는 듯한 교화를 점차로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제릉(齊陵)·후릉(厚陵)의 제사를 송도 유수(松都留守)가 직접 행하지 않았고 또한 헌관(獻官)도 택차(擇差)하지 않고 외람되이 금옥(金玉)의 자급(資級)을 얻은 송도의 백도(白徒)를 차송(差送)하였습니다. 지방관으로서 자기가 가려 하지도 않고 교생(校生)에게 대행시켰으니, 외람되고 잡스러워 불경스러움이 큽니다."

하고, 이어 청하기를,

"제릉과 후릉은 유수가 직접 행하게 하되 유고(有故)하면 품계가 높은 수령을 택차하게 하며, 방악(方岳)·해독(海瀆)의 제사는 감사가 모관(某官) 모(某)를 헌관으로 삼아 제사를 지냈다는 것을 거행 즉시 계문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회계(回啓)하기를,

"뒷날 등대(登對)할 때 품정(稟定)하게 하고, 차자 말단의 일은 일체 차자의 내용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1면
  • 【분류】
    호구-호구(戶口) / 호구-호적(戶籍) / 역사-전사(前史)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

○備局副提調兪棨, 承上命, 以五家統、號牌、鄕約三件事便否, 問於領敦寧李景奭景奭陳箚以對曰:

昔在太宗朝, 旣作號牌, 三年而還寢, 仁祖朝又行號牌, 因丁卯之亂乃罷。 費數年之籌畫, 殺多少之人命, 旣成還罷, 議者惜之。 而就令不罷於伊時, 安能保其長久也? 法酷令嚴, 莫如暴, 而棘矜一呼, 海內響應。 事不循古, 則難恃如此。 至於五家統, 乃是三代遺制, 聖祖行之, 《大典》載之。 特以大難之後, 不復修明矣。 李惟泰之言, 考據經傳, 採而行之, 蔑不可矣。 臣於己丑, 忝叨首相, 以五家統可行之言, 議諸備局, 時議或慮騷屑, 臣不敢强也。 今聞五家統, 不若號牌, 先王之政不修, 儒者之言不行, 而行威制之酷法, 無乃有欠於深長思耶? 若乃鄕約, 本非不可行之事。 臣在相職, 議行此法, 而一依呂氏之約, 則或有不宜於今者。 撮其大綱, 先加警告, 曰不孝不悌, 曰少凌長下凌上, 及有孝悌之行者, 令京外糾察薦擧, 而鄙俗無識之輩, 不惟慢之, 又從而笑之, 能奉行者絶少。 然稍知奉法者, 雖武吏亦力之。 臣遷居西塞時, 聞定州有不孝者, 及聞令下, 能迎其母而養之, 邊邑童蒙, 往往開悟於孝悌之道。 京中市廛間, 有兄弟不和者, 聞令而知戢。 宗室恭城令之子不孝, 而洞人不敢明言, 聞糾察之法, 始乃發告而伏法云。 行之悠久, 則丕變雖未易, 不猶愈於不敎而自恣乎? 及臣去位, 此法遂弛, 月朔文簿, 徒爲虛具, 誠可痛也。 今若欲行, 只在自上典于學一於誠, 而以是心策勵有司, 則風動之化, 庶可馴致矣。 又言, 厚陵祭祀, 松都留守不親行, 亦不擇差獻官, 乃以松都白徒, 猥得金玉之資者。 差送地方官, 不肯自詣, 使校生代行, 其爲猥雜不敬大矣。 仍請厚陵, 則留守親行, 有故則擇差秩高守令, 方岳、海瀆之祀, 則監司以某官某爲獻官行祭, 隨卽啓聞。

箚下備局。 回啓請於後日登對時稟定, 箚末事, 一依箚辭, 施行之, 上可之。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181면
  • 【분류】
    호구-호구(戶口) / 호구-호적(戶籍) / 역사-전사(前史) / 향촌-지방자치(地方自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