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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 3권, 현종 1년 5월 3일 정사 3번째기사 1660년 청 순치(順治) 17년

원임 영의정 연양 부원군 이시백의 졸기

원임(原任) 영의정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졸하였다.

시백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장자이다. 광해군이 모후(母后)를 폐하자 이귀시백(時白) 및 막내 아들 시방(時昉)과 함께 은밀히 광복(匡復)시킬 것을 모의하였다. 그리하여 반정(反正)하고 나서 시백이 정사 공신(靖社功臣) 이등(二等)에 참여되었다. 병자년037) 에는 수어사(守禦使)로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서성(西城)을 지키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적의 잠사(潛師)가 공격하여 왔다. 이때 시백은 갑옷도 입지 않은 채 몸소 사졸들에 앞장서서 활을 쏘았는데 두 번이나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으나 숨기고 말하지 않았으며 싸움에서 이긴 뒤에야 비로소 화살을 뽑으니 피가 흘러 등에 흥건하였다. 동성(東城)·남성(南城)·북성(北城)의 사졸들은 체부(體府)의 미지(微旨)를 받고서는 일제히 외치며 궐(闕)을 핍박하면서 화의(和議)를 배척하는 신하들을 결박하여 보낼 것을 청하였으나 유독 시백이 거느리고 있는 서성의 군대만은 끝내 동요가 없었다.

오랫동안 서전(西銓)을 맡았으며 총재(冢宰)038) 를 거쳐 정승으로 들어갔다. 타고난 천성이 충효스럽고 인애스러웠으며, 젊어서 정승 이항복(李恒福)의 문하에 나아가 공부하면서 조익(趙翼)·장유(張維)·최명길(崔鳴吉) 등과 친구가 되었다. 비록 질박하였으나 일찍이 《소학(小學)》을 수천 번을 읽었는데 집에 있을 적에는 항상 이것으로 자신을 통제하였다. 38년 동안 조정에서 벼슬하면서 청렴하고 삼가고 공손하고 검소한 것이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인조가 일찍이 박승종(朴承宗)의 옛집을 이귀(李貴)에게 하사하였으므로 시백이 거기에서 살았다. 거기에는 금사낙양홍(金絲洛陽紅)이라 이름하는 한 떨기 꽃이 있었는데 세상에서는 중국에서 전래된 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어느날 액정(掖庭)의 사람이 와서 상의 명이라고 하면서 옮겨가려 하자 시백이 몸소 꽃나무에 가서 뿌리째 뽑아 던지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오늘날 국세(國勢)가 조석(朝夕)을 보장할 수 없는 상황인데 주상께서 어진이를 구하지 않고 이 꽃나무를 구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나는 차마 이 꽃나무로 임금에게 아첨하면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볼 수 없다."

하고, 드디어 이런 내용으로 계달(啓達)하였다. 뒤에 상이 더욱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이는 그의 진규(進規)를 아름답게 여겨 받아들이는 뜻에서였다. 기축년039) 3월 상이 세자와 함께 어수당(魚水堂)에 임어하여 시백 등 몇 사람을 입시(入侍)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상이 직접 술잔을 잡고 마시기를 권하면서 세자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이 사람은 내가 팔다리처럼 여기고 있으니 너도 뒷날 나처럼 대우해야 한다."

하니, 시백이 눈물을 흘리면서 물러나왔다.

효묘(孝廟) 초년에 자점(自點)의 역옥(逆獄)이 일어났는데, 시백자점과 인척(姻戚)이었던 탓으로 외손 세창(世昌)이 복주(伏誅)되자, 시백이 궐문 밖에 나아가 명을 기다렸다. 그러나 상은 시백을 불러 국문(鞫問)에 참여하게 하였는데 뒤에 반목하는 사람이 있자 상이 그를 귀양보내고 시백을 위유(慰諭)하기를,

"청백(靑白)한 지조와 충적(忠赤)한 마음을 어찌 국인들만 알고 있겠는가. 실로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이 성유(聖諭)는 실로 시백의 정성을 잘 표현한 것이었다.

이때에 이르러 병세가 위독하여졌는데 자상하게 하는 말이 모두 나라를 걱정하는 말이었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그가 하고 싶어하는 말을 물어보게 하려 했으나 연제(練祭)가 임박한 탓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리하여 급히 사관(史官)을 보내어 물어보게 하였다. 시백이 유소(遺疏)를 입으로 불러 말하기를,

"신이 두 조정의 지우(知遇)를 받았으니 은혜가 분수에 넘쳤습니다. 그런데도 티끌만큼의 보답이 없었으므로 단지 근력이 미치는 한 노력하면서 죽은 뒤에야 그만두려 하였습니다. 다행히 성명을 만났는데 운명(殞命)이 이미 박두하여 대궐을 우러러 바라보니 천안(天顔)을 뵈올 길이 영원히 막혔습니다. 신의 구구한 생각은 단지 성상의 덕업(德業)이 진수(進修)되는 데 있습니다. 형정(刑政)을 삼가서 큰 죄인을 잡았다고 하더라도 통쾌하게 여기지 마시고 반드시 어렵게 여기고 신중히 여기는 마음을 지니소서." 하였는데, 소고(疏藁)가 반에도 이르지 못한 상태에서 기운이 끊겨 버렸다. 사관이 도착하니 막 속광(屬纊)040)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반쯤된 소고를 올리니, 상이 이르기를,

"이 유차(遺箚)를 살펴보니 애통스러운 마음 매우 간절하다. 이것이 완성되지 못한 글이기는 하지만 그 간절한 충정과 연연한 성심을 띠에 써 두고 가슴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특별히 관재(棺材)와 어의(御衣)·비단 이불을 하사하여 염습(殮襲)에 쓰게 하였으며 대내(大內)에서 특별히 전수(專需)를 준비하여 중사(中使)를 보내어 제사지내게 하였는데, 모두 특이한 은수(恩數)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66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왕실-사급(賜給)

  • [註 037]
    병자년 : 1636 인조 14년.
  • [註 038]
    총재(冢宰) : 이조 판서.
  • [註 039]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 [註 040]
    속광(屬纊) : 코에 솜을 대어 죽음을 확인하는 것.

○原任領議政延陽府院君 李時白卒。 時白 延平府院君 之長子, 光海廢母后, 時白及季子時昉, 密謀匡復, 旣反正, 時白參靖社勳二等。 丙子以守禦使, 守南漢西城。 一夜賊潛師來犯, 時白不披甲, 身先士卒, 以射賊。 再中流失, 而匿不言, 戰勝後始拔矢, 流血滿背。 東、南、北三城士卒, 承體府微旨, 一時齊呼逼闕, 請縳送斥和臣, 而獨時白所領西城軍, 終不動。 久秉西銓, 由冡宰入相。 天性忠孝仁愛。 少遊恒福之門, 與趙翼張維崔鳴吉等爲執友。 雖質朴少文, 然嘗讀《小學》累千遍, 居家, 常以是自律, 立朝三十八年, 淸愼恭儉如一日。 仁祖嘗以朴承宗舊第賜, 時白居之。 有一朶花, 名金絲洛陽紅, 世傳來自中華。 一日掖庭人以上命欲移去, 時白自往花間, 取其根挼碎之, 垂淚而言曰: "今日國勢, 莫保朝暮, 主上之不求賢而求此花, 何也? 吾不忍以花媚君, 而見國之亡。 須以此意啓達也。" 後上待之益厚, 蓋嘉納其進規之意也。 己丑三月, 上與世子, 出御魚水堂, 命時白等數人入侍。 上親執爵以勸飮, 顧謂世子曰: "此人我視如股肱, 汝於他日, 待之如我。" 時白涕泣退出。 當孝廟初, 自點逆獄起, 時白自點連姻, 外孫世昌伏誅, 時白待命闕門外, 上召使參鞫。 後有傾軋者, 上竄逐其人, 慰諭時白曰: "淸白其操, 忠赤其心, 何啻國人之所知? 實唯神明之可質。" 聖諭實表出時白之悃愊矣。 至是病革, 諄諄皆是憂國之語。 上欲遣承旨, 問其所欲言, 而以練祭臨迫未果, 急令史官, 往問。 時白口號遺疏曰: "臣受知兩朝, 恩踰涯分, 效蔑涓〔埃〕 。 只期筋力所及, 死而後〔已〕 , 幸遭聖明, 而大命已迫, 瞻望魏闕, 永隔天顔。 區區之懷, 只在於聖上之進德修業, 愼厥刑政, 雖得大辟, 勿以爲快, 必加難愼。" 藁未半而氣已絶。 史官至, 纔屬纊矣。 其子等, 以半稿投疏以進, 上答曰: "省此遺箚, 痛悼深切。 雖是未畢之書, 其懇懇之忠, 戀戀之誠, 可不書紳而服膺焉?" 特賜棺材及御衣、錦繡衾, 資以斂之, 自內別備奠需, 遣中使行祭, 皆異數也。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2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66면
  • 【분류】
    인물(人物) / 인사-관리(管理) / 변란-정변(政變)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