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정당에서 교리 이익이 《통감》을 진강하다
상이 흥정당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교리 이익(李翊)이 《통감》을 진강하였는데, 내용이 진(陳)나라 후주(後主)의 사적에 이르렀을 때, 장령 허목(許穆)이 아뢰기를,
"《서경》에 ‘높다란 집에 벽까지 장식하고 감미로운 술에 묘한 음악을 즐긴 경우치고 망하지 않은 때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하였는데, 예로부터 임금이 나라를 망친 경우를 보건대 일찍이 여기에 연유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하고, 좌참찬 송준길이 아뢰기를,
"나라가 망하려 할 때는 마치 사람이 죽을 때처럼 병세와 증상이 각각 다릅니다. 진나라 후주처럼 황음(荒淫)하여 망하는 경우가 있고, 권신(權臣)이 권세를 전횡하여 망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몇몇 증세는 없는데, 점점 활기 없이 쇠해지면서 날마다 멸망의 길로 나아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치 사람이 병도 없이 점점 죽어 가는 것과 같이 활기가 없어지는 걱정이야말로 오늘날 관심을 갖고 생각해 보아야 할 점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광해(光海) 말년은 정녕 진나라 후주 때와 같았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시경》에 ‘은(殷)나라가 거울 삼아야 할 것은 멀리 있지 않다. 바로 하후(夏后)의 시대를 보면 된다.’ 하였는데, 광해의 시대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성명께서 이를 거울 삼아 경계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수(隋)나라 때에는 사창(社倉)이라 하고, 당(唐)나라 때에는 의창(義倉)이라 했지만 그 제도는 동일했습니다. 주자(朱子)도 일찍이 조정에서 사창의 제도를 진달하여 천하에 반포해 시행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대체로 오늘날의 형편과 걸맞지 않아 지금 시행할 수 없는 옛날의 법제도 있습니다만, 사창의 제도만큼은 오늘날 행할 수 있는 것임은 물론 그렇게 하여 기민(飢民)을 구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상께서 건강이 회복되셨으니 고묘(告廟)하고 진하(陳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예관(禮官) 및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을 앓다가 조금 회복되는 것이야 본래 보통 있는 일인데 어찌 꼭 진하까지 해야 하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시임(時任) 삼공(三公)이 밀부(密符)를 휴대하는 규정이 옛날에는 없었다가 기축년부터 처음으로 명소(命召)에 따른 패(牌)를 두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신의 조부 정창연(鄭昌衍)의 말을 듣건대, 캄캄한 밤중에 명소할 때에는 으레 부험(符驗)하는 규정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두영(金斗榮)이 고변(告變)했을 때 명소(命召)했는데도 부험한 일이 없었으니, 이는 자못 고사(古事)가 아니라 하겠습니다. 지금 이후로 어두워진 뒤에 소명(召命)이 있을 때는 반드시 선전관으로 하여금 밀부를 가지고 맞춰 보도록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이에 의거해서 거행토록 하였다. 태화가 또 아뢰기를,
"임금이 세상을 권장시키는 도구는 작상(爵賞)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근래 원두추(元斗樞)와 민승(閔昇)의 가자(加資)를 개정토록 한 대론(臺論)이야말로 일리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황해 감사의 군관이 철을 주조한 공로로 가자되기까지 하였는데, 이런 백도(白徒)들까지 요행히 가자됨으로 말미암아 혹시라도 일을 꾸며 실직(實職)을 얻음으로써 명기(名器)가 점점 가벼워지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을 것이니, 이 점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간원이 내노비(內奴婢) 공포(貢布)에 관한 일로 논계했다가, 내가 금년은 완전히 감해 주도록 했었다고 답했더니, 즉시 정계(停啓)했었다. 그런데 뒤에 내사(內司) 하인의 말을 듣건대, 간원이 하인을 불러 과연 완전히 감했는지의 진위(眞僞)를 캐물었다고 한다. 내 말이 이렇듯 아랫사람들에게 신임을 받지 못하고 있는데, 한바탕 소란이 또 일어날까 염려해서 가만히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말하는 것이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어찌 감히 믿지 못해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대신(臺臣)이 당초 완전히 감해 주었다는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하리(下吏)를 불러서 물어 보기까지 한 것이니, 이는 단지 그에 대한 전후의 곡절을 상세히 알아보려고 한 것일 뿐입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어찌 하리의 말 때문에 무턱대고 대간을 의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들은 것이 그와 같았기 때문에 말한 것일 뿐이다."
하였다. 처음에 간원이 내노비 공포에 관한 일을 논하려고 하면서 내사 하인을 불러 그 일의 상황을 물어보니, 대답하기를
"공포의 원수(元數)는 얼마인데 금년은 반절로 감해 주었다."
고 하였다. 그러다가 상이
"본래 그동안 변통해 주었다."
고 비답을 내리고, 또 연계(連啓)한 뒤에
"금년은 벌써 전액을 면제해 주었다."
고 비답을 내리자, 간원이 다시 전액 면제해 준 것이 논계한 뒤에 나왔으리라고 여긴 나머지 자세한 사정을 알고 싶어 재차 내사의 하인을 불러다 물어본 것이었다. 그런데 그 때에서야 비로소 올해 정월에 비국의 공사로 인하여 각사(各司) 노비의 공포와 함께 똑같이 전액 감면해 주었다는 사실과 지난번에 반절로 감해 주었다고 한 하인의 대답은 멋대로 지껄인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인데, 그래서 이 때에 이르러 상이 이렇게 이른 것이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38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44면
- 【분류】왕실-경연(經筵) / 왕실-의식(儀式) / 출판-서책(書冊) / 출판-인쇄(印刷) / 재정-역(役) / 사법-치안(治安) / 인사-관리(管理) / 신분-천인(賤人) / 재정-창고(倉庫) / 구휼(救恤)
○戊辰/上御興政堂, 召對。 校理李翊, 進講《通鑑》, 至陳後主事, 掌令許穆曰: "《書》曰: ‘峻宇雕墻, 甘酒嗜音, 未或不亡。’ 自古人君之亡國, 未嘗不由於此也。" 左參贊宋浚吉曰: "國之將亡, 如人將死, 病情各異。 有荒淫如陳後主而亡者, 有權臣專權而亡者, 亦有無是數者, 而委靡不振, 日就亂亡者, 如人無痛處, 而自爾就盡。 委靡之患, 誠今日之所當惕念處也。" 領議政鄭太和曰: "光海末年, 正猶陳後主時也。" 浚吉曰: "《詩》曰: ‘殷鑑不遠, 在夏 后之世。’ 光海之世不遠。 聖明之所當鑑戒也。 又曰: "隋曰社倉, 唐曰義倉, 其制同矣。 朱子亦嘗以社倉之制, 陳達於朝廷, 布行於天下。 凡法制或有古今異宜, 而不可行者, 惟社倉之制, 則可行於今, 而亦可以救飢民也。" 太和曰: "上候平復, 不可不告廟陳賀。 請問于禮官及諸大臣擧行。" 上曰: "疾病差復, 自是尋常事, 何必陳賀乎?" 太和曰: "時任三公之佩密符, 古無是規, 己丑年始有命召之牌。 臣曾聞臣祖父昌衍之言, 凡昏夜命召之時, 有符驗之規。 頃日金斗榮告變時, 有命召而無密符, 殊非古事。 自今夜黑後, 如有召命, 則必使宣傳官, 持密符以驗之當矣。" 上令政院, 依此擧行。 太和又曰: "人君礪世之具, 只在爵賞。 近來元斗樞、閔昇之加資改正, 臺論實有意見矣。 今者黃海監司軍官, 至以鑄鐵之勞加資, 如此白徒, 倖而加資, 因或圖得實職, 以致名器漸輕, 此不可不慮也。" 上曰: "頃日諫院, 以內奴婢貢布事爲啓, 予以今年全減爲答, 則卽停啓矣。 後聞內司下人之言, 則諫院招下人, 問全減虛實云。 予言不見信於群下, 如此。 而慮有一場鬧端, 今始言之耳。" 太和曰: "豈敢不信而然也? 臺臣初不知其全減, 至於招問下吏, 只欲詳其前後曲折而已。" 浚吉曰: "豈可以下吏之言, 遽疑臺諫也。" 上曰: "所聞如此, 故言之耳。" 初, 諫院將論內奴婢貢布事, 招內司下人, 問其事狀, 則對以貢布元數幾許, 而今年則半減云。 及上以自有流來變通爲批, 而連啓之後, 又有今年旣已全減之批。 諫院又意, 全減出於論啓之後, 欲知其詳, 更招問內司下人。 始知今年正月, 因備局公事, 與各司奴婢之貢, 一體全咸, 而前日半減之對爲妄。 至是, 上有是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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