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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개수실록1권, 현종 즉위년 7월 29일 무자 2번째기사 1659년 청 순치(順治) 16년

지평 심유가 조부의 억울함을 상소하다

지평 심유(沈攸)가 상소하여 조부의 억울함을 진달해 호소하고, 인하여 체직을 빌었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신의 조부 신 심집(沈諿)이 일찍이 병자년 난리 때 대가(大駕)가 남한 산성으로 들어간 이튿날, 형조 판서로 능봉군(綾峯君) 이칭(李偁)과 함께 가대신(假大臣) 직함을 띠고 적진에 사신으로 갔었습니다. 오랑캐 장수가 말하기를 ‘이 분은 왕자인가, 왕의 동생인가?’ 하자, 신의 조부가 답하기를 ‘왕자는 나이가 어린 데다가 바야흐로 국모(國母)의 상(喪)을 입고 계신다. 어찌 상중에 있으면서 다른 나라의 인질(人質)이 되겠는가. 왕의 동생도 인정과 의리의 중함이 왕자에 비해 차이가 없다. 이제 강화하면서 어찌 왕자와 왕의 동생을 따지는가?’ 하니, 오랑캐 장수가 십왕(十王)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십왕이 말하기를 ‘만일 이번 큰일을 이루고자 하거든 왕세자(王世子)가 마땅히 나와야 한다.’라고 하자, 신의 조부가 답하기를 ‘세자는 나라의 이군(貳君)이니, 더욱 인질로 나올 수가 없다.’ 하면서 힘껏 다투다 시간이 흐르자 바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저들이 고립된 군사로 깊이 들어왔기 때문에 겉으로는 강화하겠다는 말을 했지만, 이는 다만 우리를 느슨하게 하며 그들의 대군을 기다린 것으로 그 뜻이 본래 강화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신의 조부가 적진 앞에서 응답한 것에 잘못이 없었는데 단지 그 때에 잘못 전해진 말이 떠돌아 다녔기 때문에 대답을 잘못했다는 비방이 있게 된 것입니다. 인조 대왕께서 그날 중사(中使)를 내보내면서 별감(別監)과 함께 수행하셨으니, 피차의 문답을 모두 들었습니다. 정축년 겨울에 헌장(憲長) 유백증(兪伯曾)이 떠도는 비방에 현혹되어 신의 조부를 귀양보내라고 논핵하자, 인조께서 답하기를 ‘만약 그 사정을 따지지 않고 자취에 의거해 죄를 논한다면 죽어서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성상의 비답이 분명하게 정원의 일기(日記) 가운데 실려 있으니, 속일 수가 없습니다. 다만 백증이 논계를 고집하며 오래 끌었기 때문에 잠시 문외 출송(門外黜送)하였는데, 그날에 대각의 논계가 바로 정지되었습니다. 이듬해 신의 조부가 사면을 입어 예조 판서에 제수되었습니다.

임진년 가을에 대사헌 홍무적(洪茂績) 및 한두 연신(筵臣)이 등대하던 날 마침 상이 신의 아비 동귀(東龜)를 거두어 쓸 뜻을 언급했을 적에, 연신과 원두표(元斗杓)는 신의 조부가 산성에서 봉사(奉使)했을 때의 와언을 잘못 진달하여 관작을 추탈하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신이 이런 때에 외람되이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니, 어찌 감히 반열에 무릅쓰고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상소의 내용을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처리하도록 하겠으니,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비국이 복계하기를,

"심집의 죄는 단지 일종의 전파된 말에서 나왔지 원래 드러난 실상이 없었으므로 관작을 추탈당한 것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합니다. 조만간 의논하여 처리해야 되겠습니다만, 지금 경솔하게 논의하는 것은 역시 때가 아닙니다. 천천히 후일을 기다려 품처(稟處)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갑자기 신원하라는 말을 내다니, 매우 외람되다. 시행하지 말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정원일기》

"심집이 오랑캐의 진영에 이르자 강화하는 일을 가지고 마부대(馬夫大)가 묻기를 ‘너희 나라가 저번에도 가짜 왕자(王子)로 우리를 속였는데, 이번에 온 왕자는 진짜 왕자(王子)인가?’ 하니, 심집이 두려워 어쩔 줄 모르다가 답하기를 ‘이번 역시 가짜 왕자이다.’ 했다. 오랑캐가 크게 화를 내고 즉시 돌려 보내면서 말하기를 ‘세자(世子)가 나온 연후에야 강화를 허락할 수 있다.’고 하였다."

했고, 정축년008) 겨울 헌부의 계사에 이르기를

"심집이 감히 왕의 가짜 동생이니 임시 대신이니 하는 말을 청인(淸人)에게 하여 박난영(朴蘭英)이 진짜 왕의 동생이고 진짜 대신이라고 답한 말과 크게 어긋나게 되었는데, 이 때문에 그들을 화나게 만들어 난영이 해를 입기까지 했습니다. 그가 사행(使行)을 면하고자 하며 나라를 팔아먹고 화를 일으킨 정상이 지극히 형편없는데, 단지 관직만 삭탈하는 것은 아이들 장난과 같습니다. 먼 변방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심집이 죄가 비록 무거우나 사실상 다른 마음이 없었으니, 번거롭게 논하지 말라."

하였다. 무인년009) 2월에 이르러 헌관이 탑전에서 연달아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심집의 일에 대한 논계는 지나친 듯하다. 나라를 팔아먹으려 한 것도 아니고 또 사행(使行)을 면하고자 한 것도 아니다. 그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 갑자기 논죄한다면 죽어도 지하에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또 그 사람을 보건대 간사한 마음이 없는 자이다. 지금에 이르러 논집하는 것은 부당하다."

했다. 그 후 대각의 논계에 또

"설사 두려워서 말을 잘못한 것이라 하더라도, 일을 그르치고 나라를 욕되게 한 죄는 역시 큽니다."

하니, 이튿날 상이 비로소 문외 출송(門外黜送)을 명하였고, 오래지 않아 종백(宗伯)010) 으로 삼았다.

이상 대각의 계사 및 성상의 비답을 보면 심집의 일에 대해서 당시의 실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그의 아들 동귀(東龜)가 효행(孝行)이 있었는데, 아비가 관직을 추탈당한 것을 억울하게 여겨서 등에 종기가 나기까지 하였다. 죽음에 임해 그 아들에게

"나는 죽어도 반드시 눈을 감지 못할 것이다."

했는데, 죽자 과연 그랬다. 그 아들이 감겨 주려고 했으나 감겨지지 않았는데, 듣는 자들이 슬퍼하였다. 송시열(宋時烈)이 이 일을 경연에서 아뢰었으나 신원되지 못했고, 오랜 뒤에 좌의정 민정중(閔鼎重)이 그 억울한 상황을 진달하니, 특별히 그의 관직을 회복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歷史)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

  • [註 008]
    정축년 : 1637 인조 15년.
  • [註 009]
    무인년 : 1638 인조 16년.
  • [註 010]
    종백(宗伯) : 예조 판서(禮曹判書).

○持平沈攸上疏, 陳暴祖冤, 仍乞遞職。 略曰:

臣祖父臣諿, 曾於丙子之亂, 大駕入南漢之翌日, 以刑曹判書, 偕綾峰君 , 假大臣銜, 奉使敵陣。 虜將曰: "此是王子耶? 王弟耶?" 臣祖答以王子年弱, 方遭國母喪, 豈可在疚而見質於他國乎? 王弟情義之重, 比王子無間。 今此成和, 何論王子與王弟也? 虜將報于十王, 十王曰: "如欲成此大事, 王世子當出云。" 臣祖答以世子, 國之貳君, 尤無出質之理。 力爭移時, 便卽回來。 彼以孤軍深入, 外爲講和之言, 特以緩我, 待渠大軍, 其意本不在和。 臣祖陣前應答, 無所失誤。 只緣其時訛說傳行, 猶有失對之謗, 仁祖大王於其日出送, 中使與別監, 隨行, 彼此問答, 皆入睿聽。 丁丑冬, 憲長兪伯曾, 惑於浮謗, 論竄臣祖, 仁祖答以若不原其情, 據迹論罪, 則死不瞑目於地下。 聖批昭在於《政院日記》中, 非可誣也。 第以伯曾論執持久之故, 纔從門黜之日, 臺論卽停, 翌年臣祖蒙恩敍, 拜禮曹判書。 至壬辰秋, 大司憲洪茂績及一二筵臣登對日, 適及臣父臣東龜收用之意, 筵臣元斗杓, 以臣祖山城奉使時, 訛言誤達, 有追奪官爵之 命。 臣於此時, 猥蒙新渥, 何敢自同平人, 叨冒臺侍之列乎?

上答曰: "疏辭當令廟堂處之。 爾其勿辭。" 備局覆啓: "沈諿之罪, 只出於一種傳播之說, 原無見著實狀。 追奪官爵, 人多稱冤, 合有早晩〔議〕 處之擧, 而今日輕論, 亦涉非時。 請徐待後日稟處。" 上曰: "到今遽出伸冤之說, 極爲猥濫, 勿施。" 謹按《政院日記》, 曰: "沈諿至虜營, 將講和事,馬夫大問曰: ‘爾國前者, 亦以假王子欺我, 此來王子, 眞王子乎?’ 諿惶怯失措, 答曰: ‘今亦假王子。’ 胡人大怒卽還送, 以爲: ‘世子出來然後, 可以許和云。’ 至丁丑冬, 憲府啓辭曰: ‘沈諿敢以假王弟、假大臣之說, 言於淸人, 與朴蘭英所答眞王弟、眞大臣之說, 大相左。 因此激怒, 蘭英至被害。 其欲免使行, 賣國挑禍之狀, 極爲無理, 只奪其官, 有同兒戲。 請極邊定配。’ 上答曰: ‘沈諿厥罪雖重, 情無他腸, 勿爲煩論。’ 至戊寅二月, 憲官榻前連啓, 上答曰: ‘沈諿事所論似過, 非是賣國, 又非欲免使行。 不原其情, 據迹論罪, 則死不瞑目於地下矣。 且觀其人, 非有奸邪之心者, 至今論執, 不當矣。’ 其後臺啓, 又曰: ‘設使出於恇怯失言, 其誤事辱國之罪, 亦大。’ 翌日上始命門外黜送, 未久敍爲宗伯。" 觀此臺啓及聖批, 沈諿事, 當時實狀, 可推知也。 其子東龜有孝行, 以其父追奪官爵爲冤, 至疽發於背。 臨死謂其子曰: "我死必不瞑目。" 及歿果然, 其子欲掩之而不掩。 聞者傷之。 宋時烈以此, 陳達於筵中, 未蒙伸雪。 其後久之, 左議政閔鼎重, 陳其冤狀, 特令復其官爵。


  •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43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8면
  •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사법-행형(行刑) / 역사(歷史) / 군사-전쟁(戰爭)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