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종 대왕 행장(行狀)
국왕의 성은 이씨(李氏)이고 휘(諱)는 원(棩)이며 자(字)는 경직(景直)이니, 효종 대왕의 아들이고 인조 대왕의 손자이다. 어머니 인선 왕후(仁宣王后) 장씨(張氏)는 의정부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이다. 효종이 대군(大君)으로 있을 때에 심양(瀋陽)에 볼모로 들어갔는데, 신사년001) 2월 4일에 심양 관소(舘所)에서 대왕을 낳았다. 왕은 어려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어 두세 살 적부터 행동거지가 범상하지 않았는데, 4세에 본국으로 먼저 돌아왔다. 인조 대왕이 무엇을 물을 때마다 어른처럼 대답하였으므로 인조 대왕이 매우 기특하게 여겨 사랑하였다. 여러 왕자·왕손과 함께 궁중에서 자랐는데, 인조 대왕이 항상 말하기를,
"이 아이는 보통 아이보다 특별히 다르니 내 뒷날의 근심이 없겠다."
하였으니, 대개 기대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이때 효종이 미처 귀국하지 못하였는데 왕이 부모를 사모한 나머지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볼 적마다 축원하기를,
"부모가 어서 돌아오게 하여 내가 뵐 수 있도록 해 주소서."
하였다. 새로 맛있는 음식을 대할 적마다, 그 지방002) 에서 생산되지 않는 것이면 바로 보내게 하고 나서야 맛을 보았다. 왕이 5세에 궁중 안의 시아(侍兒)가 쑥대 화살[蓬矢]로 그의 동기를 쏘아 눈을 다치게 했다는 말을 듣고 골육을 해친 것을 미워하여 마침내 그를 멀리 내쫓아 버렸다.
인조가 한번은 증선지(曾先之)003) 의 《사략(史略)》을 펴놓고 제왕들의 어질고 어질지 못함에 대해 죽 들어 물었는데, 요(堯) 순(舜)에 이르러서는 지극히 어질다고 대답하고, 걸·주에 이르러서는 매우 나쁘다고 대답하였다. 인조가 묻기를,
"요 순은 어째서 어질고 걸·주는 어째서 나쁜가?"
하자, 왕이 대답하기를,
"요임금은 흙으로 계단 세 층을 만들었고, 금옥(金玉)을 멀리하고 군자를 가까이 하였으며, 그의 인자함은 하늘과 같고 그의 지혜로움은 신과 같았으니, 어찌 어질지 않습니까. 걸·주는 백성의 재물을 긁어모아 창고에 채워 놓는가 하면 궁전과 누대를 화려하게 지었으며 충성으로 간하는 자를 비방한다고 하고 의견을 올리는 자를 요망한 말이라고 하였으니, 어찌 나쁘지 않습니까."
하니, 인조가 더욱 기특하게 여겼다.
한번은 인조가 방물(方物)을 받다가 표피(豹皮)의 품질이 나빠서 되돌려 보내려고 하였다. 왕의 나이 이때 7세였는데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표범 한 마리를 잡으려면 아마도 사람이 많이 다칠 듯합니다."
하니, 인조가 그 뜻을 가상히 여겨 돌려 보내지 말라고 명하였다.
부모가 쓰는 의복이나 거마(車馬), 그리고 기용(器用)에 있어서는 비록 하찮은 물건이라도 반드시 공경을 다해 다루고, 감히 다른 데로 옮기지 않았다. 부모의 경계를 들으면 기뻐하였다. 때로 여염집에 나가 임시 거처하면서 부모가 원하지 않는 바는 감히 행하지 않았는데 곁에 있는 것처럼 하였다. 가까운 이웃 중에 목소리가 큰 사람이 있어 시자(侍者)가 꾸짖어 금하자, 왕이 말리기를,
"사람이 자기 집에 있으면서 어찌 소리를 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땅히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어야지 괴롭게 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번은 궁중에서 나오다가 떨어진 옷을 입고 얼굴색이 검은, 합문(閤門) 밖을 지키는 군졸을 보고 묻기를,
"어찌하여 이와 같은가?"
하니, 시자(侍者)가 대답하기를,
"얼고 굶주려서 그렇습니다."
하였다. 왕이 탄식하다가 옷을 주도록 명하고 또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남은 밥을 계속 주되 그가 천경(踐更)004) 을 마칠 때까지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곤궁하여 굶주린 사람을 볼 적마다 불쌍히 여기고 반드시 구휼해 주었다. 어렸을 적에 나타난 그의 효성과 우애 그리고 자애와 밝은 덕이 이와 같았다.
기축년005) 2월에 인조가 인정전(仁政殿)에 친히 납시어 왕세손(王世孫)으로 책봉(冊封)하였는데, 자태가 우뚝하고 의도(儀度)가 한아(閑雅)하였으므로 백관이 서로 하례하였다. 강서원(講書院)을 설치하고 강관(講官)을 두었는데 학문에 더욱 부지런하였다. 먼저 《소학(小學)》을 읽었는데, 주(註)까지 정밀하게 잘 외웠으므로 강관이 탄복하였다. 이해 5월에 인조 대왕이 승하하고 효종 대왕이 왕위를 잇자, 왕이 세자의 자리에 올랐다. 이에 보도(輔導)가 더욱 갖추어지니 슬기로운 덕이 날로 진취하였다. 효종이 또 왕에게 농사의 어려움을 알게 하려고 일찍이 농부로 하여금 후원(後苑)에 들어와 밭을 갈게 하고는 왕으로 하여금 보도록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소가 사람에게 공이 있습니다. 사람이 노력해야 먹을 것을 얻는다는 게 이와 같은가 봅니다."
하고, 자주 일컬었다. 왕은 기억력이 매우 뛰어나, 무릇 한번 보고 들은 것마다 잊지 않았다. 일찍이 《맹자(孟子)》를 다 읽고 나자, 효종이 시험해 보려고 일시에 모두 외우게 하였는데, 7편을 다 외우는 동안 조금도 틀리지 않았으므로 효종이 매우 놀라고 기뻐하였다. 어려서부터 장성할 때까지 독서하는 일이 아니면 부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부모의 몸이 편치 못하면 밤낮으로 부축하고 시중을 들며, 비록 물러가 쉬라고 명하여도 물러가지 않았다.
신묘년006) 에 가례(嘉禮)007) 를 행하였는데, 왕비 김씨(金氏)는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의 딸이다.
임진년008) 에 입학(入學)하는 예를 행하고 선성(先聖)009) 에게 전을 드리며 배알하였다. 이어서 박사(博士)에게 나아가 학업을 청하였다. 예의에 맞는 거동이 장엄하고 중후하며 강하는 음성이 크고 맑으니, 뜰 주위에서 듣는 선비들이 너나없이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기해년010) 5월 4일에 효종이 승하하자, 왕이 상막(喪幕)에서 상(喪)을 주관하면서 상례를 옛날 예법대로 하며 슬퍼하고 야위움이 《예경(禮經)》보다 과도하게 하였다. 5일이 지난 9일에 왕이 인정전(仁政殿)에서 왕위에 올랐다. 왕이 안색에 슬픔을 띠고 곡하는 소리가 애처로우니 뭇 관료가 차마 쳐다보지 못하였다. 이때 이조 판서 송시열(宋時烈), 좌참찬 송준길(宋浚吉) 등이 실로 상례를 주관하였는데, 대왕 대비(大王大妃)011) 에게 대행 대왕(大行大王)012) 을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게 하였다. 이는 대개 《의례(儀禮)》 주소(注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더라도 삼년복(三年服)을 입어주지 못하는 경우가 네 가지가 있다.[雖承重不得爲三年者有四種]’는 설을 채용한 것이다. 성복(成服)013) 하기 전에 송시열이 이에 대해 포의(布衣)인 윤휴에게 물으니, 윤휴가 말하기를,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014) ’는 문구가 있으며, 또 제왕가(帝王家)는 종통을 중시하고 있으니, 네 가지 설[四種說]015) 은 아마도 쓸 수가 없을 듯하다."
라고 하였으나,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삼년의 설을 옳게 여겨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에게 보고하고 그 설을 따르려 하였으나, 송시열이 이미 네 가지 설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말하기를,
"국제(國制)에는 부모가 자식을 위하여 장자나 서자(庶子)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기년복을 입게 되어 있다."
라고 하였다. 조정에서 그 의논을 대신에게 내려 의논하게 하였는데, 대신의 의논도 모두 송시열의 뜻과 같으므로 마침내 기년의 복제가 행해졌다.
왕이 평소에 유술(儒術)을 중히 여겼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선왕조(先王朝)016) 때부터 선비라는 이름이 있어 크게 일시의 추앙을 받았고 선왕도 그들을 매우 신임하였다. 왕에 이르러서도 그들을 중시하고 예로 받들었으므로 대체로 조정의 큰 의논은 대부분 송시열 등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나 송시열은 실로 성질이 집요하고 편당짓기를 좋아하였으며 학식이 없었다. 그가 의논드린 국제(國制)란 것도 실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대상(大喪)의 제도가 아니었으므로, 그 논의를 들은 사람은 근심하고 탄식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효종 대왕의 행장을 지어 올리자, 왕이 서찰을 내려 이르기를,
"요(堯) 순(舜)의 도는 효도와 공순일 따름이다. 요순의 치세(治世)를 이루려면 요순의 도를 다해야 한다. 선왕은 이것으로써 몸을 닦고 교화(敎化)를 이루는 근본으로 삼으셨다. 또 세상의 일을 몹시 개탄하신 나머지 어진 사람과 출중한 사람들을 예로 초빙하여 심복으로 삼고 도의(道義)를 서로 닦아, 이 세상을 삼대(三代)의 시대로 만회하고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017) , 이는 실로 선왕의 뜻으로서 평일 수립한 커다란 규범이다. 그런데 지금 이 행장 중에는 그다지 거론하지 않았다. 이 한 조항을 명백하게 써서 후세에 전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서찰이 나오자, 이를 본 신하들은 선왕을 천양(闡揚)하려는 생각과 계술(繼述)하려는 뜻에 너나없이 감복하였다.
이때가 한창 무더운 여름철인데다가 상막도 좁고 누추하였으므로 측근의 신하가 서늘한 가을이 될 때까지 다른 곳으로 옮기자고 청하자, 왕이 이르기를,
"지금이 어느 때인데 거처를 가린단 말인가. 좋은 곳을 가려 지내면 몸은 편안하겠지만 마음은 편치 않을 것이다."
하였다. 10월 27일에 효종 대왕을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초하루와 보름날의 제전(祭奠)마다 심한 병을 앓지 않을 경우에는 대행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가서 능침(陵寢)을 참배할 적에 슬피 곡해 마지않으니 근시(近侍)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으며 심지어는 자신도 모르게 울움을 터뜨린 자도 있었다.
이 해에 노인을 우대하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운 사람을 구휼하는 은전(恩典)을 거행하였으며, 충효(忠孝)와 절의가 있는 사람, 청백한 관리, 전쟁터에 나가 죽은 사람의 자손에게도 세시(歲時)마다 음식물을 지급하였다. 형벌을 남용한 관리는 종신토록 금고(禁錮)시키고 서명(叙命)018) 의 문부에 써넣지 말라고 명하였다. 이때 내수사(內需司)의 무명 1천 필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징수하는 면포에 보태 쓰게 하여, 어린아이 9천 명에게 징수하는 군포(軍布)를 견감하였으며, 징수한 군포 중 외방에서 쓰는 것은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 저축된 것을 쓰도록 명하였으며, 서울에 납입하는 수량은 상평창(常平倉)의 백금(白金) 5천 냥으로 대체해 주었다. 또 명하여 제도(諸道)에서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비어 있는 군인의 액수를 충정(充定)하는 조처를 느슨히 하였으며, 각도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하고 산릉(山陵)에 진상하는 물선(物膳)을 줄였다.
해서(海西)에 수재가 들었다 하여, 특별히 재해입은 전세(田稅)를 면제하고 신역(身役)을 견감하였다. 호남·경기·호서에서 수납하는 세미(稅米)를 차등있게 감해주고, 흉년이 특히 심한 곳은 더 감해 주었으며, 다른 도에도 그렇게 하였다. 북도에 흉년이 들었다하여, 공물과 부역을 임시로 감해 주고 정배(定配)된 사람을 남방으로 옮기었다. 그리고 관서 지방의 걸식하는 유민(流民)들에게는 관향(管餉)의 미곡으로 사람의 수효를 계산하여 무상으로 주게 하였다. 왕이 즉위하여 정사를 환히 습득하고 백성의 고통을 보살폈으므로 거행한 바가 모두 용도를 절약하고 백성을 사랑하여 그 고통을 제거해 주는 일이었다.
즉위 1년인 경자년019) 정월에 단천(端川)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공은(貢銀) 4천 냥을 감해 주었다. 사관(史官)을 좌참찬 송시열(宋時烈)에게 보내어 도타이 타일러서 올라오게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병을 이유로 면직을 청하자, 왕이 도타이 타일러서 출사(出仕)하게 하였다. 영동·영서의 대동미를 견감하여 그 도의 진휼에 보태 쓰게 하였다. 어사를 보내어 영동·영서·관서에 떠돌아다니는 북도의 백성들을 위문하고 구휼하여 안주케 하였다. 강원도의 삼세(三稅)020) 중에서 수미(收米)021) 와 노비의 공포(貢布)를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재령(載寧)에 사는 김두영(金斗榮)이란 자가 고변하였는데 70여 인을 불러 심문하였으나 그런 사실이 없었다. 김두영에게는 무고율(誣告律)을 받게 하고 무고당한 모든 사람에게는 모두 양식을 주어 방면하였으며, 금부의 이졸(吏卒)에게 재물을 빼앗긴 자에게는 모두 찾아서 되돌려 주게 하여 너그럽게 보살펴 주는 뜻을 보였다.
2월에 호구(戶口)의 법을 더욱더 엄밀하게 하였는데 우윤(右尹) 권시(權諰)의 말을 따른 것이다.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인견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지난번 흉년이 들었을 적에 백관의 녹봉을 ‘모두 감해야 한다.’고 여러 신하들이 말하였으나, 선부왕(先父王)께서 특별히 어공(御供)을 재량해서 감하고 백관의 녹봉은 그대로 두게 하셨다. 지금도 비록 궁핍하지만 녹봉을 먼저 감할 수는 없으니 어공 중에 감할 수 있는 것을 또 뽑아 아뢰어야 할 것이다."
하였다.
3월에 비변사에서 남은 정포(丁布)를 강원 감사(江原監司)에게 내려 재해를 당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게 하고 또 서울과 지방의 노인에게 음식물과 쌀·포목을 나누어 주었다. 전라도의 여러 고을에서 지급한 물건이 너무나 보잘것없다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조정에서 베풀려고 하는 은덕의 뜻을 어찌 이같이 소홀히 할 수 있단 말인가. 그 고을의 수령들에 대해 벌을 논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90세나 1백 세 된 노인에게는 특별히 명주와 솜을 더 주도록 명하고 또 문·무과의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빈궁하여 양식을 싸 가지고 올라오지 못하는 자는 연도의 각 고을로 하여금 양식을 공급하게 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하였다.
전 장령 허목(許穆)이 상소하여, 대왕 대비(大王大妃)가 효종 대왕에게 기년복(朞年服)을 입어 주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논하고, 《의례(儀禮)》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웠을 경우에도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取嫡妻所生第二長者立之亦名長子]’는 말을 인용하여 말하고 또 아뢰기를,
"소현(昭顯)이 이미 세상을 일찍 떠났고, 효종께서 인조 대왕의 둘째 아들로 종묘를 이었으니 대비(大妃)께서 효종을 위해 자최 삼년(齊衰三年)을 입어야 함은 예(禮)로 볼 때에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혈통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므로 삼년복을 입을 수 없다.[體而不正不得爲三年]’는 것으로 비교하였으니, 신은 그것이 어디에 근거를 두고 한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난점을 제기하면서 어물어물 결정하지 못하고, 정희 왕후(貞熹王后)022) 가 예종(睿宗)을 위해 입은 복제(服制)를 《실록(實錄)》에서 고증하기를 청하고, 또 아뢰기를,
"가령 어떤 집안에 10여 명의 아들이 있는데 전중(傳重)한 다음 잇따라 죽을 경우 모두 참최복을 입어 주어야 합니까? 주소(註疏)에 이미 둘째 아들부터는 서자(庶子)가 된다는 의의를 분명히 말하였는데, 허목은 꼭 첩의 아들이라고 하니, 예의 뜻이 과연 이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의 의논은 이르기를 ‘제왕가(帝王家)는 왕통(王統)을 잇는 것을 소중히 여기므로 태상황(太上皇)023) 이 사군(嗣君)024) 을 위해서는 비록 지자(支子)로서 입승(入承)하였다 하더라도 마땅히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라고 하는데, 이는 정체(正體)이든 정체(正體)가 아니든 모두 삼년복을 입어 주어야 한단 말입니까?"
하였다. 우찬성 송시열(宋時烈)은 기년 복제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극력 말하고 또 《예경(禮經)》의 장자(長子)·서자(庶子)의 설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서자(庶子)라는 칭호는 물론 첩의 아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같은 어머니에게서 난 임금의 아우[母弟]도 또한 서자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효종 대왕이 인조 대왕의 서자라고 해도 지장이 없습니다. 옛날에도 물론 적자(嫡子)를 버리고 서자를 세운 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이 예를 제정할 때에는 반드시 장자와 서자(庶子)의 구별에 마음을 다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차자가 장자가 된다.’는 설은 물론 가공언(賈公彦)의 소(疏)에 있고, 황면재(黃勉齋)025) 의 《통해속(通解續)》에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자(程子)와 주자(朱子)의 감정(勘定)을 거치지 않았으니 그 설이 과연 허목이 말한 바와 같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병 때문에 의논을 개진하지 못하였다. 사관이 강화(江華)의 《실록(實錄)》을 고증하여 아뢰기를,
"예종 대왕이 승하하였을 때에 정희 왕후가 어떤 복을 입었는지 고증할 수 없고, 기년(期年)도 못 되어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복을 벗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4월에 부호군(副護軍)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여 복제를 논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성인이 상례(喪禮)를 오복(五服)으로 제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습니까. 친소(親疎)와 후박(厚薄)을 이것이 아니면 구별할 수 없으며, 경중(輕重)과 대소(大小)를 이것이 아니면 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 이를 사용하면 부자의 윤기가 밝아지고, 국가에서 이를 사용하면 군신이 분의(分義)가 엄해지며, 하늘과 땅의 높고 낮음과 종묘와 사직의 보존과 망함이 모두 여기에 매여 있으니, 이게 바로 막중 막대해서 터럭만큼도 참람하거나 어긋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적통(嫡統)을 계승한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됩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적자(嫡子)에게 반드시 참최 삼년(斬衰三年)을 입도록 복제를 만든 것은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곧 조종(祖宗)의 적통을 계승하였기 때문입니다. 사가(私家)에서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의 태평한 세상에서도 이렇게 하였는데 하물며 위태롭고 어지러운 말세의 때이겠습니까. 신민의 마음을 정하고 불만을 품은 자들이 넘보는 것을 끊는 것이 이 상례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국가를 소유한 자가 이 예에 삼가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신은 듣건대, 효종 대왕(孝宗大王)의 상에 대왕 대비전의 복제는 《예경(禮經)》을 고증해 보면 자최 삼년(齊衰三年)으로 정해야 함은 의심할 것이 없는데, 당초 예관(禮官)의 의주(儀註)에 기년복으로 정하였으므로 조야(朝野)의 신민 중에 유식한 이는 모두 놀라고 탄식하며 그 의도가 어디에 있는지 이해가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이게 어찌 대통(大統)을 밝히어 백성의 뜻을 정하고 종사를 튼튼히 하는 예라고 하겠습니까. 이야말로 곧바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연기(練期)026) 가 임박하였으나 적적하게도 국가를 위해 이 말을 올리는 사람이 하나도 없으니 신이 평소 깊이 생각해 볼 때 종사에 대한 근심을 금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전 장령 허목이 《예경(禮經)》을 상고하여 소 한 장을 올렸다는 말을 듣고 신은 자신도 모르게 나라에 사람이 있구나 하고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의 말은 예를 의논하는 대경(大經)일 뿐만 아니라 실로 국가를 경영하는 지극한 계책이니, 말을 듣지 않으실 경우 후회해 보았자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결단을 내리시어 곧바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거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할 터인데 송시열에게 다시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송시열은,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027) ‘만일 기명언(奇明彦)이 아니었다면 천고의 죄인이 됨을 면하지 못할 뻔하였다…….’라고 한 것 처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도리어 나쁜 줄을 알면서도 그대로 행하고 허물을 어름어름 숨기려는 심산으로, 《예경》의 글귀를 주워모아 자기의 의견에다 뜯어 맞추었으므로 그 사설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번다하였습니다. 그러나 《예경(禮經)》에 아버지가 아들에게 참최복을 입어 주는 것은 오직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 데 있고 성인이 이 예를 엄하게 하는 것은 다만 종묘의 계통을 잇는 데에 있다는 큰 뜻에 대해, 종시 견해가 미치지 않았고 언급되지도 않았습니다. 신은 실로 그 말에 복종하지 못하겠고 그 의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 선조(先朝) 때부터 신임하여 위임한 이로는 송시열·송준길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이 일생 동안 강구(講究)한 바는 예학이었고 자기들도 이를 맡을 만하다고 자부하였을 것입니다만, 국가의 대례(大禮)에 대해 이처럼 소견이 빗나갔는데, 더구나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리와 나라를 튼튼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펼치는 계책을 같이 의논할 수 있겠습니까.
이번 대왕 대비의 복제는 마땅히 삼년으로 의주(儀註)를 고친 다음 팔방에 알려, 대소의 신민으로 하여금 조정의 의논이 이의(異意)가 없음을 환하게 알도록 함으로써 명분을 바르게 하고 국시를 정하여 나라의 형세를 태산처럼 안전한 터전 위에 올려 놓아야 하며, 기년(朞年)만에 복을 벗는 일은 결코 해서는 아니되고, 삼년상으로 정하는 것은 결코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승지 김수항(金壽恒) 등이, 그의 마음씀이 음흉하고 속임수로 허풍을 쳐서 현란하게 한다고 지레 헤아려 아뢰니, 왕이 명하여 그의 소를 돌려주고 그의 관작을 삭탈하여 향리로 돌아가게 하였다. 김수항이 입대(入對)하여 아뢰기를,
"그의 죄상을 따져보면 비록 국문을 하더라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를 향리로 내쫓는 조치만으로는 그의 죄악을 징계할 수 없습니다."
하고, 부제학 유계(兪棨), 부교리 안후열(安後說), 수찬 심세정(沈世鼎) 등은 윤선도의 말이 흉악하고 참혹하므로 그의 소를 불태우고 먼 변방으로 내쫓자고 청하였다. 이에 윤선도가 삼수(三水)로 귀양가고 말았다. 관학 유생(館學儒生) 이혜(李嵇) 등은 소를 올려 국가의 형벌을 바르게 시행할 것을 청하고, 대사간 이경억(李慶億), 사간 박세모(朴世模), 정언 권격(權格), 장령 윤비경(尹飛卿), 지평 이무(李堥)·정수(鄭脩) 등은 엄히 국문하여 율(律)에 비추어 죄를 정하자고 누차 아뢰었으나, 왕이 따르지 않고 다만 안치(安置)하라고 명하였다.
우윤 권시가 상소하여, 윤선도를 율에 비추어 죄를 정한 것은 잘못되었다고 극구 말하고, 또 아뢰기를,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의 상에 삼년복을 입어야 함은 필연코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지금 비록 의리로 헤아려 제정한다 하더라도 백세토록 질정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송시열이 이른바 ‘선왕028) 은 서자가 되어도 지장이 없다.’고 한 것은 매우 잘못된 것입니다. 온 세상이 모두 그 잘못된 점을 알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고 있는데, 윤선도는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는 바를 말하였으니 그 또한 과감히 말하는 선비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격렬해져서‘죄없는 선비를 죽인다.’029) 라고 한 말과 불행히도 비슷하게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비답을 내려 가상히 받아들였다. 그런데 김수항이 그 비답을 봉해 왕에게 도로 올리고 누차 반대의 의견을 아뢰자 마침내 비답을 고쳐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하나, 귀양보내자는 여러 사람의 심정은 결국 어길 수 없다.’는 것으로 분부하였다.
사간원의 이경억·박세모와 사헌부의 윤비경·이무 등이, 윤선도를 논하다가 권시에게 배척을 받았다 하여 그를 논계하고, 부제학 유계는 관료(館僚)인 교리 김만기(金萬基) 이시술(李時術), 부수찬 심세정 등을 거느리고 차자를 올려 권시의 죄를 논하고 또 윤선도의 소를 불태워버리기를 거듭 청하자, 윤비경·이경억·박세모 등이 또 소를 올려 그를 공격하였다. 정언 권격은, 권시가 흉인(凶人)030) 을 비호한다 하여 파직을 청하였다가 곧바로 중지하였다. 공조 좌랑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권시를 매우 강력히 공격하고, 부호군 이유태(李惟泰)도 입대(入對)하여 그를 극렬히 논하였는데, 심지어는 ‘제갈양이 마속을 죽인 일’031) 을 들어 말하였다. 그 뒤에 대사간 이정기가, 동료가 갑자기 계사를 중지하였다 하여 다시 그를 논하여 파직시켰다.
처음에 권시가 도성문 밖에 나가 대죄(待罪)할 적에 왕이 특별히 사관을 보내어 위로하고 타이르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승지 박세성(朴世城)이, 대론(臺論)이 바야흐로 격렬하다는 이유로 즉시 거행하지 않자, 왕이 진노하여 ‘대간이 있는 것만 알고 임금이 있는 것은 모른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잡아다 국문하고 장차 왕명을 거역한 것으로 죄주려 하였다. 승정원과 양사에서 그 명을 도로 거두도록 계청하였으나 왕이 모두 윤허하지 않다가 얼마 뒤에 대신의 말로 인하여 풀어주었다.
4월에 모든 궁가(宮家)의 원당(願堂)을 혁파하였다. 또 묘당(廟堂)에 명하여, 강원도에 있는 모든 궁가(宮家)와 각 아문이 떼어받은 시장(柴場)에 대해 의논하여 혁파하고 지금부터 더 설치하지 못하게 하였다. 상평청(常平廳)에 명하여 북도·영동·영서의 굶주린 백성 가운데 도성 안으로 흘러 들어온 자에 대해 각부(各部)로 하여금 보고하게 하여 쌀과 소금을 지급하게 하고, 도성 백성 중에 특히 끼니를 잇지 못한 사람에게도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가흥창(可興倉)에 바쳐야 할 영(嶺) 밑 11개 읍의 전세(田稅)를 가을을 기다렸다가 거두어 들이라고 명하였다.
7월에 크게 가물자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라고 명하였다. 나라의 제도에 가을 이후에는 기우제를 지내지 않게 되어 있는데, 이때 와서 특별히 거행하였다.
8월에 각 아문에서 매매한 이식(利息)을 이웃과 일가붙이에게 나누어 징수하는 폐단을 금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흉년에 이미 어공(御供)을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도 감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어공을 줄였다고는 하나 감하지 않은 물품이 아직도 많은데 하필이면 관원들의 녹봉을 먼저 감한단 말인가."
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8월 26일에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는데, 시위하는 장사들에게 당부하여 도로가의 벼와 곡식을 손상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9월에 흉년이 들자 승지에게 교서(敎書)를 초하게 한 다음 팔방에 두루 유시하여 안주하게 하고, 어공(御供) 중의 정미(精米)·중미(中米)와 주방(酒房)의 향온미(香溫米)를 감하게 하였다.
10월에 우레가 치는 재변이 있자 정원과 옥당이 더욱 수성(修省)하시기를 청하니, 왕이 가상히 받아들였다. 이때에 관서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는 이변이 있었는데,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직언(直言)을 두루 구하였다.
11월에 팔도에 명하여 각각 인재를 천거하도록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아뢰기를,
"사위스러운 질병이 있으니 계복(啓覆)032) 을 정지하소서."
하니, 왕이 이르기를,
"아, 천성은 사람마다 지니고 있건만, 어리석은 백성이 법령을 준수하지 않고 타고난 천성을 회복하지 않아 악한 일을 하기에 이르렀다. 복심(覆審)해야 하는 죄인을 즉시 처리하지 않고 또 그를 엄하게 가두어 두면, 아무리 죄는 비록 사형에 해당되지만 그 정상은 슬픈 일인데, 심지어 죄없이 감옥 속에서 죽는 것이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참담해진다. 금년에 이것 때문에 복심을 거행하지 않고 명년에 또 이것 때문에 복심을 행하지 않는다면 저 죄인들은 모두 감옥 속의 귀신이 되고 말 터이니, 이는 국가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다.
신축 2년 정월에 도성 안에 있는 두 이원(尼院)을 철거하였다. 전에 왕이 승니(僧尼)들이 교화를 어지럽히는 것을 미워하여 ‘승니들을 모두 환속(還俗)하게 하라.’고 하교하였다. 그런데 대신과 옥당이 갑자기 거행하기 어렵다고 아뢰자 왕이 명을 내려 도성 안의 자수원(慈壽院)과 인수원(仁壽院) 두 곳을 철거하게 하여, 나이 젊은 자는 속인으로 돌아가게 하고 늙은 자는 성 밖으로 내쫓았다. 그리고 헐어버린 불사(佛寺)의 재목으로 학궁(學宮) 및 무관(武館)을 수리하게 하였다. 대체로 불교는 신라 때에 비롯되어 고려 때에 성하였고, 우리 조선조에 와서도 다 제거하지 못하였는데, 이때 와서 시원하게 물리쳤으니, 수천 년 동안 없었던 쾌거였다. 명을 내려 중외(中外)의 음사(淫祀)033) 를 금하고 내탕고의 면포를 내려 서울의 수용(需用)을 보충하였다.
4월에 가뭄이 들자 승지를 보내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는데, 상규(常規)에 구애되지 말고 속히 너그럽게 방면하여 정체된 죄수가 없게 하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의 유배지를 북청(北靑)으로 옮기도록 하였는데, 집의 곽지흠(郭之欽), 헌납 오두인(吳斗寅), 교리 김만균(金萬均) 등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다. 고 상신 이시백(李時白)이 청백하고 충성스런 지조가 있다 하여 3년 동안 녹봉을 그대로 주도록 하였다. 어사 6인을 삼남(三南) 지방에 나누어 보내 백성들의 고통을 살피게 하였다. 가뭄이 들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꾸짖고 어선(御膳)을 감하고 술을 금하였다. 그리고 뭇 관원들을 신칙(申勅)하여 공경하고 부지런히 하며 단결하고 화합하도록 하였다. 친히 기우제를 지내려 하자, 경연의 신하들이 성상의 건강이 편치 못한 것을 들어 말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어찌 내 한 몸을 아껴 백성들의 목숨을 돌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부사직(副司直) 조경(趙絅)이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였는데, 대략 아뢰기를,
"가뭄을 고민하는 일로는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는 것을 첫째가는 의의로 삼습니다. 일국의 갖가지 죄수들에 대해 어느 누가 거론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윤선도만 홀로 심리 대상에 들어가지 않았으니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윤선도의 죄가 무슨 죄인지 모르겠습니다. 윤선도의 죄는 오직 종통(宗統)·적통(嫡統)으로 효종을 위하여 편든 데에 있을 뿐입니다. 위로는 선왕(先王)께 충성을 다하고 아래로는 전하에게 효도하는 도리를 권면한 것이니, 그 성의가 뚜렷하여 가릴 수가 없습니다. 윤선도가 소를 올릴 때에 누가 전하를 위하여 소를 태워버리라는 계책을 올렸습니까? 신이 삼가 전대의 사서(史書)를 보니,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웠고,034) 광해주(光海主)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습니다.035) 공민왕과 광해주는 난망(亂亡)을 초래한 임금이 아닙니까. 오늘날의 조정 신하가 요(堯) 순(舜)의 도리로써 전하를 인도하지 않고 도리어 전하에게 난망의 전철(前轍)로 인도하며 직접 멍에를 메고 따르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신은, 후세에 오늘날의 일을 보는 것이 오늘날에 옛일을 보는 것과 같을까 염려됩니다.
윤선도가 죽고 사는 것은 신이 논할 필요가 없고 신이 애석히 여길 것이 없습니다만, 그가 말씀드린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단연코 버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전하께서 만일 크게 깨달아 종통의 귀결을 명확이 분변하여 선왕의 실록(實錄)에 밝게 실어서 후세에 예를 논하는 자로 하여금 감히 다른 말이 없게 한다면 신도(神道)에서 찾아보더라도 어찌 인정과 멀겠습니까. 좌우에 오르내리시는 우리 조종(祖宗)의 영혼이 이치상 저승에서 기뻐하여, 견책을 거두어 상서가 되고 한재를 바꾸어 장맛비가 되게 하여 전하로 하여금 우리 자손과 백성을 장구히 보전하게 할 것이니, 그 덕이 뭇 산천(山川)에 가서 제사를 지내어 보답을 비는 것보다 더 크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소가 주달되자, 승지 남용익(南龍翼) 등이 ‘악인과 편당을 지어 터무니없는 말로 허풍을 친다.’고 아뢰니, 그 소를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집의 곽지흠(郭之欽), 장령 박증휘(朴增輝) 등은 벼슬을 삭제하여 쫓아내자고 청하고, 대사간 이은상(李殷相), 정언 권격(權格) 등은 먼 곳으로 귀양보내자고 청하는 등 달이 넘도록 논쟁하였다. 그리고 부제학 유계(兪棨), 교리 이민적(李敏迪) 등은 양사(兩司)의 청을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따르지 않았다.
6월에 장차 태묘(太廟)에 부제(附祭)하는 예를 행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진하(陳賀)·반교(頒敎)·음복연(飮福宴)을 정지하고, 환궁(還宮)할 때에도 나례(儺禮)와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 결채(結綵)하는 등의 일을 모두 정지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 윤선도를 위리 안치(圍籬安置)하게 하였는데, 대사간 이은상이 탑전(榻前)에서 아뢰었기 때문이다.
7월에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을 옮겨 삼남(三南)을 진휼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이 술 담그는 쌀을 감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성의 목숨이 죽어가고 있으니, 진실로 우리 백성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힘을 다해야 할 것이다."
하고, 삼남(三南)의 감사에게 별도로 유시를 내려 각각 굶주린 백성을 구제해 살릴 수 있는 계책을 생각하도록 하였다. 7월 7일에 왕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효종 대왕의 부묘례(附廟禮)를 행하고 인종(仁宗)·명종(明宗)의 신주를 영녕전(永寧殿)에 조천(祧遷)하였다. 대개 국조의 묘사(廟祀)는 태조의 세실(世室)036) 이외에 사친(四親)037) 을 제사지내는데, 형제는 같은 소목(昭穆)의 제도를 쓰게 되었으므로 인종과 명종 두 위는 이때에 5대가 되어 조천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에 앞서 왕이, 양묘(兩廟)038) 를 같이 조천하는 것은 중대한 일이라고 하여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물었다.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묘제(廟制)의 세대 수를 태조로부터 사친(四親)까지 5세로 잡는다면, 인종과 명종 두 위는 모두 대수 이외에 해당됩니다. 오늘날 아울러 옮기는 것이 의심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다만 일설이 있습니다. 제왕가(帝王家)에서는 대통의 계승을 중히 여기므로 형이 아우의 뒤를 계승하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계승하더라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여기어 각각 소목(昭穆)이 됩니다. 그러므로 《춘추(春秋)》에서는 역사(逆祀)039) 하는 것을 비평하였고, 주자(朱子)는 ‘송(宋)나라 태조·태종과, 철종(哲宗)·휘종(徽宗)이 모두 형제이긴 하지만 한 세대로 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인종과 명종은 비록 형제간이지만 의리는 아버지와 아들의 사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두 위를 합하여 한 세대로 치는 것이 비록 과거에 사례가 있기는 하나,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말씀으로 헤아려 보면, 인조 대왕을 태묘(太廟)에 합부(合附)할 때에 먼저 인묘(仁廟)를 조천하고 오늘 또 명묘(明廟)를 조천하는 것이 올바른 예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미 지나간 일이므로 말할 것이 없습니다만, 앞으로 영녕전(永寧殿)에 옮겨 모실 적에 소목(昭穆)을 둘로 만들어서 과거의 온당치 못한 일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또 생각건대,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태조 및 사친(四親)의 신주가 모두 태묘(太廟)에 있으나,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의 조천한 신주는 모두 영녕전(永寧殿)에 모셔져 있습니다. 태묘는 정묘(正廟)이고 영녕전은 별묘(別廟)인데 높으신 목조께서 별묘(別廟)에 모셔져 있으니, 의리나 예로 헤아려보면 편안한 바가 아닙니다. 송나라 조정에서 의논하는 이가 희조(僖祖)를 별묘에 옮기려 하자, 주자(朱子)가 그 잘못된 점을 극력 말하였습니다. 지금 우리 나라의 태묘를 송나라 종묘 제도에 비교하고 주자의 설로 증거해 보면, 우리 목조는 곧 송나라의 희조와 같고 주(周)나라의 후직(后稷)에 비교되며, 태조와 태종은 송나라의 태조와 태종 같고 주나라의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에 비교됩니다. 그런데 목조께서 태묘의 윗자리에 계시지 못하고 태조가 태묘의 제1실에 계시니, 이른바 ‘희조(僖祖)는 공업(功業)이 없고 천하를 얻은 것을 자기가 이룩한 것으로 여겨 강약(强弱)을 다투어 비교해 겸손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아마도 그 당시 태조께서 효도로 봉양하던 마음이 아닐 듯한데, 어질고 효성스런 군자가 아니라도 그 불가함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의견으로는, 우리 선왕을 옮겨 합부하는 때를 인하여 서둘러서 예관(禮官)과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서로 더불어 강구하게 한 다음 목조를 태묘의 제1실로 옮겨 모시어 시조로 삼고 태종·태조 이하의 세실(世室)의 예를 일체 주나라의 옛 제도처럼 하며, 또 태묘에 동서의 협실(夾室)을 만들어 익조 이하 조천한 신주를 모시면 명분이 바르고 이치가 맞게 되며 의리가 밝아지고 일이 온당하여 백 세 이후에 성인이 나오더라도 의혹되지 아니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였다.
왕이 그 소를 해조(該曺)에 내리니, 예관이 아뢰기를,
"조묘하는 일은, 인종과 명종 두 위를 아울러 옮기는 데 대해 대신과 유신이 이의가 없었습니다만 그 밖에 진달한 바는 국가의 막중하고도 막대한 예에 관계되므로 해조가 감히 의논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왕이 윤허하였다. 원임 대신 이경석(李景奭), 영의정 정태화(鄭太和), 좌의정 심지원(沈之源) 등은 여론의 비난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고, 원임 대신 정유성(鄭維城)은 ‘대신과 유신이 한곳에 모여 의논하여 그 가부를 정밀히 강구하자.’고 청하였다. 그 뒤에 정태화. 심지원 등이 탑전에서 그 불가함을 아뢰니, 왕이 마침내 회의를 중지시키고 그의 소에도 답하지 않았다. 대체로 종묘의 제도는, 천자는 시조를 체례(禘禮)로 받들어 하늘과 배향(配享)해서 칠묘(七廟)를 세우고, 제후는 맨 처음에 나라를 봉해 받은 임금을 조(祖)로 받들어 태조로 삼아 사친(四親)까지 아울러 5묘(廟)를 세우니, 이것이 예이다.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는 실로 옛날 제도를 따른 것이고, 영녕전의 제도도 제법(祭法)의 ‘단선(壇蟬)의 제도’040) 를 가감하여 조절한 것이니, 곧 선유(先儒)가 이른바 ‘2백 세(世)에 귀(鬼)가 된다.’는 것이다. 송시열의 의견은 선현(先賢)을 모방하되 비의하여 의논한 것이 두서가 없었다. 갑자기 큰 일에 간여하여 옛 헌장(憲章)을 어지럽히려 하였다. 소가 올라가자, 듣는 이가 놀라고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이 이미 복제(服制)의 일로 조정을 그르쳤는가 하면 대통(大統)을 깎아내려 서인(庶人)의 위치와 똑같이 만들었고 또 이로써 오묘(五廟)를 뜯어고치려고 하였으니 천험(天險)041) 을 범하고 조종에 죄를 얻게 되었다."
하였다. 왕이 그 의논을 중지시키고 시행하지 않으므로써 종묘의 조주(祧主)가 움직이지 않고 신과 사람이 제자리에서 편안히 있게 되자, 유식한 장로(長老)들이 왕의 깊고 아름다운 식견에 감복하였다.
형과 아우를 한 세대로 치는 설에 있어서는, 우리 나라의 종묘 제도가 비록 동당(同堂)에 모시는 전대의 제도를 따르고는 있으나, 대(代)마다 한 실(室)을 만들어 각기 그 존엄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송나라 시대에 형제의 신위(神位)를 나란히 모시는 제도와는 같지 않다. 이는 형제를 1세(世)로 잡아 같이 조천하는 것으로서 소목(昭穆)을 달리하여 차례로 옮기는 것과는 본디 다르기는 하지만 이 두 예는 《예경(禮經)》에 증거가 없고 선유(先儒)들의 논의가 달라 역대마다 각각 한 왕조의 제도가 되었으니, 갑자기 이것이 옳으니 저것이 그르니 할 수 없는 바가 있으며, 영녕전에 조천하는 것도 소목을 달리할 수 없다. 그런데 송시열은 대개 그것을 구명하지 못하고 말하였던 것이고 왕은 또 그 설을 버리고 묻지 않은 채 구례대로 조묘(祧廟)에 모셨다.
하교하여, 양전(兩殿)에 바치는 경상도삭선(朔膳)042) 을 명년 가을까지 감하도록 하고, 전라도·공충도(公忠道)의 삭선도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8월 23일에 왕이 영릉(寧陵)을 참배하였다.
9월 24일에 태학(太學)에 거둥하여 선성(先聖)에게 석채례(釋菜禮)를 행하고 이어서 선비를 시취(試取)하였다. 좌의정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어공(御供)을 이미 감하였으니, 관원들의 녹봉 또한 전대로 두는 것은 부당합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조정의 관원들이 의뢰하는 것은 녹봉인데, 점차로 박해지고 있으니 어떻게 염치를 지키라고 책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11월에 시녀(侍女)를 선발하는 일을 파하도록 명하였는데 사헌부의 청을 따른 것이다.
12월에 명하여 삼남·경기·해서에서 재해를 입은 고을의 조적을 일체 면제해 주고 또 봄에 징수하는 미곡을 감해 주게 하였다. 태복시(太僕寺)의 말 먹이는 곡식 1천여 석을 방출하여 굶주린 백성을 먹이게 하였다. 임인 3년 정월에, 기근이 들었다 하여 금주령을 내리고 모든 관부 및 어공(御供)의 술에 소요되는 것을 모두 파하였으며 조참(朝參)의 거동에 추수 때까지 음악을 쓰지 말라고 명하였다.
2월에 양남(兩南)에 진휼 어사(賑恤御史)를 보내어 편의에 따라 일하라고 하였다.
3월에 한재로 중외에 명하여 억울한 죄수를 심리하게 하였다. 그리고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거하고 직언을 널리 구하였다. 또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재이를 중지시키고 구제하는 계책을 강구하였으며, 윤선도의 위리(圍籬)를 철거하라고 명하였다.
4월에 우참찬 민응형(閔應亨)이 뵙기를 청하고 인하여 윤선도를 용서해 줄 것을 청하자 왕이 대신에게 물었는데, 정태화도 민응형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옥당의 김만기(金萬基)는 대간(臺諫)이 윤선도의 위리 철거에 대해 쟁집(爭執)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지평 이동명(李東溟)·여성제(呂聖齊), 장령 이정(李程) 등이 드디어 위리를 철거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관원을 보내어, 의주·강화·금화(金化)·광주(廣州)·안주(安州)·토산(兎山)·안변(安邊) 등의 병자 호란(丙子胡亂) 전쟁터와 호남(湖南)의 수상 조련 때에 큰 바람으로 인하여 사람이 빠져 죽은 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돌림병이 매우 성하자 중외(中外)에 약물과 양곡을 주라고 하였다.
6월에 관원을 보내어 노산군(魯山君)의 묘소에 제사를 드리게 하였다. 노산군이 영월(寧越)로 물러가 있다가 죽으니 온 나라 사람들이 가련하게 여겼다. 중종·선조·효종조에 모두 관원을 보내어 제사를 드렸는데, 이때 와서 다시 행한 것이다. 절행(節行)이 바른 영남의 사람 하홍도(河弘度)·조임도(趙任道)에게 미곡을 차등있게 하사하였다. 영남 진휼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하여 굶주린 백성이 대여받은 곡식을 일체 탕감해 주었다. 제도(諸道)에 홍수가 져서 백성이 많이 떠내려가 죽었다. 제도에 명하여 해당 고을에서 매장하라고 명하였다. 명하여 각 아문(衙門)에서 소유하고 있는 배[船]의 숫자를 정하게 하고, 내수사(內需司)·명례궁(明禮宮)·용동궁(龍洞宮)·수진궁(壽進宮)·어의궁(於義宮) 등의 배는 현존하는 숫자 이외에 더 늘리지 못하게 하였다.
7월에 서북 감사(監司)에게 인재를 찾아내 아뢰라고 명하였다.
8월에 경기에 경기 균전사(京畿均田使) 민정중(民鼎重)·김시진(金始振) 등을 보내어 전지를 측량하게 하고, 호남의 대동 전결(大同田結)의 미곡과 포목의 수량을 정하였다.
9월 9일에 왕이 건원릉(健元陵)을 참배하였다. 이 해에 고려조의 여러 왕릉(王陵)에 화재와 벌채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그리고 남해(南海) 노량(露梁)에 있는 고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의 사당 편액을 하사하였다. 이순신은 선조조에 왜구를 누차 격파하여 충의와 용맹이 가장 드러났고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이다.
계묘 4년 3월에 영녕전을 다시 지었는데, 옛 규모를 넓히고 익실(翼室)을 고쳤다.
4월에 여러 궁가(宮家)의 전결(田結)을 정하였는데, 대군·공주·왕자·옹주가 차등이 있었다. 수찬 홍우원(洪宇遠)이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보건대 전 참의 윤선도는 일찍이 우찬성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의논하였다고 소를 올려 송시열을 공박 배척하였는데, 조정의 논의가 크게 일어났기 때문에 윤선도가 먼 변방에 위리 안치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에 심리로 인하여 북청(北靑)으로 옮기었다가 대간(臺諫)의 소장이 또 제기되어 다시 옛날의 유배지(流配地)로 돌아갔습니다. 신이 일찍이 윤선도의 소를 얻어 보았는데, 그 의미와 말투가 대부분 분노에 격동된 데서 나왔고 지나치게 문구를 따졌으니 윤선도의 일은 참으로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의 종통과 적통에 관한 말은 실로 명백하고 정확하여 바꿀 수 없는 논의였습니다. 송시열이 비록 산림(山林)의 유아(儒雅)로 큰 명망을 짊어지고 있으나 그가 예를 잘못 의논한 잘못은 참으로 가릴 수 없습니다. 지금 송시열을 옹호하는 사람은 완전히 그 과실을 덮어 주고 심지어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의논하지 못하게 하려 하며, 윤선도를 배척하는 사람은 윤선도가 사림(士林)의 화를 빚으려 한다고 지척하여 곧바로 흉적(凶賊)으로 지목하고 있습니다. 윤선도가 말한 것이 사리에 지나친 점은 물론 있습니다만 그렇다고 어찌 사림의 화를 빚으려는 의사야 있었겠습니까. 사람마다 각각 소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같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공론이 있는데 어찌 속일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지금은 그 견해가 나와 같지 않은 것이 싫어서 억지로 같게 만들고자 하고 사대부의 사이에 조금만 의논을 달리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떼를 지어 일어나 공격합니다. 허목이 재차 예를 논하는 소를 올리게 되어서는 먼 지방의 군(郡)으로 내쫓고, 파면되어 돌아온 뒤에는 수용(收用)하지 않았으며, 권시가 이의를 제기하자마자 곧 중한 탄핵을 입었으며, 조경이 윤선도를 구원하는 말을 한마디 하자 간사한 사람으로 지적됨과 아울러 그의 아들까지 연좌의 율(律)을 입었습니다. 조경은 여러 조정을 거친 노성한 신하입니다. 그의 평생 충직하였던 오롯한 지조는 신명(神明)에게 질정할 수 있는데 지금 갑자기 변하여 간사한 사람이 되었으니 어찌 옛 사람이 말하는 ‘사람은 진실로 쉽게 알 수 없지만 사람을 알아보기란 또한 쉽지 않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는 실로 신이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신은 윤선도와 본디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므로 감히 그를 위해 변호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생각건대, 윤선도는 본디 기절(氣節)이 있고 과감히 말하는 사람입니다. 일찍이 소를 올려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고,043) 선조(先朝) 때에는 사부(師傅)의 옛 은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을 잘못한 과실로 풍상(風霜)이 험난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유배되어 백수의 쇠잔한 나이에 죽을 날이 얼마 남아있지 않으니 참으로 하루아침에 갑자기 죽어 성조(聖朝)에서 선비를 죽였다는 이름을 끼칠까 염려됩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깊이 불쌍히 여기시고 어서 방면하여, 전리에 돌아와 죽게 하소서. 이것 또한 인자한 성주(聖主)께서 사람에게 막하지 못하는 하나의 어진 정사입니다."
하니, 왕이 너그럽게 비답하였다.
사간원의 김만균(金萬均)·송시철(宋時喆)·원만리(元萬里)와 사헌부의 정계주(鄭繼胄)·김익렴(金益廉) 등이, 홍우원을 삭탈 관작하여 쫓아내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적(李敏迪)·이익(李翊)·정석(鄭晳) 등도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7월에 한재로 인해 분부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중외의 대소 신료에게, 서로 공경하고 협조하여 직무에 힘써 하늘의 견책에 답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대신과 비국의 당상을 불러 흉년 구제의 계책에 대해 강구하였다.
9월에 사도시의 어공에 소요되는 정미(精米)를 감하게 하므로 대신이 그대로 두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백관의 봉록을 이미 줄였는데, 어찌 어공(御供)만 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12월에 명하여 여러 궁가(宮家)의 시장(柴場)을 각자 한 곳에 망정(望定)하여 그 크고 작은 것을 헤아려 남겨 두게 하였고, 어장(漁場)과 망장(網場)은 선조조(宣祖朝)에서 하사한 것 이외에는 일체 허락하지 못하게 하고 비록 하사한 곳이라 하더라도 하사받은 자에게만 한정하도록 하였다.
갑진 5년 5월에, 무술년044) 이후 내수사(內需司) 노비의 신공(身貢)을 이미 죽은 자의 일가붙이에게 추징(追徵)하는 것을 탕감하고 남한 산성(南漢山城)의 쌀 5천여 석을 경기 지역 고을에 나누어 주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게 하되, 추수를 기다려 이자 없이 도로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7월에 우참찬 김수항(金壽恒)을 함경 북도에 보내어 변방의 폐단을 조사하게 하였다. 문·무과의 시험을 시행하여 선비를 뽑았다. 해조(該曺)로 하여금 양남(兩南)의 방백에게 분부하여 《소학(小學)》을 인출해 중외에 반포하고 강독을 권하도록 거듭 명하였다.
9월 15일에 왕이 광릉(光陵)을 참배하였다. 호조 판서 허적(許積)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11월 2일에 혜성(彗星)이 진성(軫星)에서 나오자, 하교하여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대소의 신료에게 명하여 자기의 직분을 삼가고 부지런히 하며, 정사의 득실(得失)에 대해 자세히 진달하게 하였다. 그리고 해조로 하여금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하는 등의 일을 거행하게 하였다. 바람과 천둥의 변고로 인해 내사옥(內司獄)045) 의 죄수를 방면하고 상의원(尙衣院)의 비단 짜는 일을 정지하게 하였다.
을사 6년 1월 1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에 혜성(彗星)이 다시 나타나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원옥(冤獄)을 심리하게 하였다. 유생 성대경(成大經)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석방해 과감히 간언하는 길을 열어놓으라.’고 청하였다.
3월에 윤선도의 유배지를 광양(光陽)으로 옮겼다. 장령 이동명(李東溟)이 그 명을 거둬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징수할 곳이 없는 제도(諸道)의 갑진년046) 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신역(身役) 및 각종 조적곡을 깨끗이 면제해 주었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 거둥하였다. 때마침 농사철이었기 때문에 호위하는 본도의 군병을 파해 보냈다. 왕이 질병이 있어 오래도록 낫지 않자 중외(中外)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였는데, 의원이 온천의 물로 목욕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온천 행차는 국조의 고사이다. 왕이 가서 수개월 동안 목욕하니 몸이 쾌히 나았다. 드디어 그 도에 명하여 노인들을 예우하고 효제(孝悌)의 행실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충신과 열녀에게 제사지내고 전조(田租)를 감하고 과거를 보였다. 대궐로 돌아온 후 다시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恩典)을 거쳐온 도에 베풀었다. 그 뒤에 여러 차례 거둥하였는데 그 예(禮)는 모두 같았다. 왕이 온양 행궁(溫陽行宮)에 있을 적에 도내의 노인 중 나이 80 이상인 자는 관직이 있건 없건 양인이나 천민을 막론하고 모두 노직(老職)의 통정첩(通政帖)을 주었다. 고 참판 김장생(金長生), 동래 부사(東萊府使) 송상현(宋象賢), 제독관(提督官) 조헌(趙憲),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의 무덤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사관(史官)을 보내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에게 도타이 타이르고, 또 온양 경내에 행적이 드러난 사람을 찾아 아뢰게 하여 정표(旌表)하였다. 8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加資)하고 90세 이상인 노인에게는 가자하고 또 음식물을 주었다. 경기도로 하여금 대가(大駕)가 경유하는 일로에 일체로 시행하게 하였다.
좌찬성 송시열, 대사헌 송준길, 부호군 이유태 등이 행궁에 와서 뵈었다. 왕이 그들과 함께 서울에 오려 하였는데, 이유태는 어머니가 늙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 송시열은 유언 비어가 있다는 이유로 사양하고는 직산(稷山)에 이르러 돌아갔다. 송준길은 뒤따라 도성에 들어오니 해조(該曺)에 명하여 식량을 계속 공급하게 하였다.
10월 1일 밤에 비바람이 크게 휘몰아치면서 천둥과 번개가 치니, 왕이 놀라고 두려워하였다. 그리고 초야에 있는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실봉(實封)047) 을 갖추어서 아뢰게 하였다. 풍정연(豊呈宴)048) 을 내년 봄으로 물려 행하게 하고, 중외의 관리에게 거듭 당부하여 혹형을 금지하게 하고, 민결(民結)이 궁가(宮家)의 면세 전결(免稅田結)에 몰래 등록된 것은 일체 파하였다. 여러 궁가와 각 아문에서 점유하고 있는 묵혀진 전토를 개간한 백성에게 돌려주게 하였다. 중외에 절의와 효행이 있는 사람을 정표(旌表)하게 하였다. 각도의 감사와 병사에게 명하여 관하의 아병(牙兵)049) 에게 거두는 포목을 면제하고 오로지 훈련에만 힘쓰게 하였으며, 관서와 경기의 세두(稅豆)를 감하고 그 나머지 도들도 차등있게 감해 주었으며, 포보(砲保)가 바치는 포목을 감하고 병조에 저축해 둔 것으로 충당하여 지급하게 하였다.
병오 7년 1월 17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자, 왕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다. 하늘의 노여움이 매우 심하고 재이가 겹쳐 발생한다는 이유로 진연(進宴)을 뒤로 물려 가을을 기다려 거행하게 하였다. 2월에 사간원의 이은상(李殷相)·최관(崔寬)·이익(李翊)·이혜(李嵇) 등이 계사를 올려, 공조 정랑 김수홍(金壽弘)을 사판(仕版)에서 삭제하였다. 기해년050) 에 기년복의 제도를 이미 시행하였는데, 김수홍이 송시열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복의 제도를 논하면서, 송시열이 기년의 복제를 주장한 잘못을 책하였다. 이때에 와서 김수홍이 사설(邪說)을 제창하여 조정의 대례(大禮)를 망령되이 의논하였다고 논죄하여 삭직(削職)하였다.
3월에 영남 유생 유세철(柳世哲) 등 천여 인이 상소하여,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051) 의 기년복이 잘못된 복제임을 극렬히 논하고,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천자와 제후의 상에는 모두 참최복을 입고 기년복은 없다.’는 설을 인용하였으며, 또 《상복고증(喪服考證)》 1책을 올렸다. 소가 정원에 당도하자, 승지 김수흥(金壽興) 등이 ‘주상의 마음을 놀라게 하고 동요시키어 선한 사류를 일망타진하려 한다.’고 아뢰니, 왕이 ‘소의 뜻이 온당하지 못하니 물러가 업을 닦으라.’고 비답하고, 이어서 뭇 신하들을 모아 이를 의논하게 하였다.
좌의정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당초 복제에 대해 의논할 때, 윤휴는 ‘참최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고, 송시열(宋時烈)은 ‘참최는 신하가 임금의 복(服)을 입는 것이므로 참최를 입을 수 없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윤휴는 이기고자 기필하여 긴 편지를 왕복하며 쟁변(爭辯)하였습니다. 허목의 논의는 윤휴의 논의를 본받아 기술한 것에 불과합니다. 이번 영남 유생의 소는 오로지 그들의 끄트머리를 주워모아 엮은 것으로 정해진 주된 뜻이 없으나, 그 뜻은 실로 유신(儒臣)을 얽어 모함하려는 데에 있습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김만기(金萬基)는 ‘밝게 분변하여 통렬히 배척하시라.’고 청하고, 우의정 허적은,
"삼년(三年)의 설은 유세철(柳世哲)만 주장한 것이 아니니, 유세철을 죄줄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내 의견으로는 반드시 통렬히 분변하는 것을 급한 일로 삼을 필요가 없고 후일 상의해 법을 만들어서 후일의 근심을 막는 것이 옳다고 여긴다."
하였다. 사헌부의 조복양(趙復陽)·정계주(鄭繼胄)·맹주서(孟胄瑞)·어진익(魚震翼)·소두산(蘇斗山), 사간원의 이정(李程)·최일(崔逸)·이동직(李東稷)·정재희(鄭載僖) 등은 율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기를 청하고, 옥당의 이민서(李敏敍)·오두인(吳斗寅)·이단하(李端夏)·박세당(朴世堂) 등은 또 차자를 올려 그를 논하고, 관학 유생(館學儒生) 홍득우(洪得禹) 등도 상소하여, 기년의 복제를 주장하면서 그를 논척(論斥)하고 그 죄를 다스리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교리 최유지(崔攸之)가 소를 올려 ‘장자(長子)는 기년복을 입는다는 것을 중외에 포고하고 또 국기(國忌)를 판자에 새기어 달아 놓은 예에 따라 각 아문의 청사 벽에 그것을 새기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왕이 그 소를 궁중에 놔두고 내려보내지 않았다. 얼마 뒤에,
"국가의 위아래 복제(服制)를 일체 《오례의(五禮儀)》에 따라 행해야 하고 장자(長子)나 중자(衆子)를 논할 것 없이 모두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한다. 만일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시끄러운 단서를 야기하는 자는 마땅히 형벌을 시행하겠다."
는 뜻으로 중외에 포고하였는데, 홍명하가 청한 것이었다.
왕이 다시 온양(溫陽)에 거둥하면서 왕대비(王大妃)를 모시고 떠났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溫泉行宮)에서 호서(湖西)의 도내에 효행이 드러난 사람을 노인의 예에 의해 음식물을 지급하여 특별히 대우한다는 뜻을 보이게 하라고 명하였다. 온양 및 본도의 각 고을과 경유하는 경기의 일로에 역(役)을 감면해 주되, 지난해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청나라 사신이 와서 금령을 범하고 물건을 사고 판 사람 및 도망해 돌아온 사람을 받아들였다는 등의 일을 조사하고 변신(邊臣)을 참형의 죄로 논단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이것은 나의 잘못인데, 어떻게 신하들에게 떠넘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청나라 사신이 또 대신을 사형의 율로 논단하니, 왕이 또 이르기를,
"나의 잘못이므로 내 마땅히 스스로 죄주기를 청해야 하겠다."
하자, 청나라 사신이 그 다음 율로 처결하였다. 좌의정 허적을 북경에 사신으로 보내어 대신은 죄를 면하고 벌금을 물게 되었다.
8월에 일식을 하고 흉년이 들었다 하여,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였다.
9월에 영남의 곡식을 영동과 영서로 옮기고, 해서의 곡식을 북도로 옮겨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명을 내려, 포보(砲保)의 가포(價布)를 감하였는데, 영동·영서·경기·양남(兩南)이 각각 차등이 있었고, 그 부족한 수량은 훈련 도감과 호조에 저축된 것을 가져다 쓰게 하였다. 목화가 귀하였으므로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차등있게 감하고 혹은 미곡으로 대신 납부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영동·영서의 노비 신공과 병조에서 거두는 군포(軍布)도 그와 같이 하였다.
11월에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을 전부 면제해 주고 을사년052) 이후 신공의 반을 미곡으로 바꾸어 납부하게 한 것도 면제해 주었다. 명을 내려 세초(歲抄)를 정지하게 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와 죽은 자에게 군포(軍布)를 징수하는 것을 다 조사해 내서 견감하게 하였다. 어린아이는 실지의 나이 10세를 한계로 하고 10세가 되지 아니한 자는 그 신역(身役)을 일체 감면해 주었다. 그리고 각도에 명을 내려 어린아이에게 신역을 함부로 정하지 못하도록 하는 금령을 되풀이하여 일렀다.
제도(諸道)에 명을 내려, 감영·병영·수영의 영장(營將) 집에 있는 군관을 조사해 내서 조정의 조처를 기다리게 하였다. 만일 사실대로 아뢰지 않을 경우 군사의 실정을 속여 보고한 죄로 벌을 시행하게 하였다.
함경도에서 상납하는 공물 중에 우황(牛黃)·표피(豹皮) 등의 물품을 감하였다. 어사가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별도의 보고서에 의하여 북도의 안변(安邊)·덕원(德源)·홍원(洪原)·문천(文川)·고원(高原)·경성(鏡城)·경흥(慶興)·이성(利城)·부령(富寧) 등 9 개 고을의 전세(田稅)를 감하였다.
정미 8년 1월 22일에 왕세자의 책봉례를 거행하였다. 양사(兩司)가 임금이 벌금을 물게 되었다고, 청나라로 사신 갔던 사람과 청나라 사신이 관(館)에 있으면서 조사할 때의 상신에게 죄주기를 청하며 합계(合啓)하여 논하니, 왕이 ‘사정을 알지 못하고 대신을 망령되이 논한다.’고 하면서 엄한 분부를 내려 배척하였다. 집의 이숙(李䎘), 장령 박증휘(朴增輝)·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이하(李夏), 헌납 김징(金澄), 정언 조성보(趙聖輔) 등을 모두 먼 곳으로 귀양보냈다. 4월에 다시 왕대비를 모시고 온양으로 거둥하였다. 농사철이라고 하여 경기·충청도에 영호 군병(迎護軍兵)053) 을 동원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연로의 노인들에게 지난해의 예에 따라 음식물을 지급하고 도로에 떠돌아다니는 빌어먹는 사람에게는 상평창(常平倉)의 미곡을 내어 주어 구제하고 또한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명하였다. 관에 명하여 본군의 향교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행궁(行宮) 부근에 있는 고을의 인재를 수용(收用)하도록 하고, 행궁의 역사에 나온 사람에게는 별도로 우대하여 구휼하게 하였다.
윤사월(閏四月)에 백세 된 노인에게 음식물을 더 내려주게 하였다. 한재로 인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여러 신하들에게 마음을 합하여 조심하고 부지런히 일하도록 권면하였다.
6월에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을 반으로 감하고, 저화가(楮貨價)도 특별히 감하였다. 국전(國典)에 노비의 신공 이외에 또 저화가 있었다. 그 뒤에 저화를 폐지하고 대신 면포를 거두었다. 이때에 와서 저화가를 특별히 감하고 영구히 정식(定式)으로 삼았다.
7월에 한재로 인해 사직단(社稷壇)에 친히 제사를 지냈다. 또 옥의 죄수를 다시 심리하게 하였다. 한재가 혹심하다 하여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신하들에게 편당짓는 것을 경계하고 서로 닦는 도를 다하게 하였다. 또 도움되는 말을 널리 구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감하고 술을 금하였다.
8월에 윤선도를 방면하여 전리로 돌아가게 하라고 명하였다. 특별히 경기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면제하게 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관원들의 녹봉을 감하자고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관원들의 녹봉은 원래 박하니 지금 줄인다 하더라도 얼마나 줄일 수 있겠으며, 구제하는 데 도움되는 바 또한 얼마나 되겠는가. 나는 줄이고 싶지 않다."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상공(上供)하는 물품과 아랫사람의 요포(料布)도 모두 줄였는데, 어찌하여 관원들의 녹봉만 줄이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4품까지만 각각 1석씩 감해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왕이 명을 내려, 비국에 써야 할 각종 경비의 수량을 별도의 단자에 일일이 기록하게 하였다. 사포서(司圃署)·사복시(司僕寺)·군기시(軍器寺)·조지서(造紙署)·의정부·종친부·상의원의 경비에 소요되는 물품들을 모두 반으로 줄이도록 하고, 강계(江界) 등 6개 고을의 공물로 바치는 표피(豹皮)를 파하여 반으로 줄였다. 단천(端川) 등 4개 고을의 노비가 신공(身貢)으로 바치는 세포(細布)와 내궁방(內弓房)의 별조(別造)054) 를 내년 가을까지 중지하도록 하였다. 호조의 소관인 서산(瑞山)과 태인(泰仁)의 염세(塩稅)를 감하였다. 양서(兩西)에 흉년이 들었다하여 징수하는 미곡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10월에 북도의 포흠된 조적곡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심양(瀋陽)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 정뇌경(鄭雷卿)의 어머니가 죽었는데, 특별히 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물품과 조묘군(造墓軍)을 지급하라고 명하였다. 혼조(昏朝) 때에 절의를 세운 사람 부제학 정홍익(鄭弘翼)의 아내가 죽었는데, 또한 장사에 드는 물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명을 내려 경기 경내에서 번을 드는 기병(騎兵) 및 각 진영(鎭營)의 수군에게 매월 입번(立番) 조로 납입하는 군포(軍布)를 반으로 줄였다. 12월에 각도 노비의 공포(貢布)로 을미년055) 추쇄(推刷) 이전에 징수하지 못한 것을 완전히 면제해 주었다.
무신 9년 1월 9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다.
2월 4일에 치우기(蚩尤旗)가 서방에 나타나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고, 신하들에게 서로 공경하고 화합하며 직무에 신중히 하고 힘쓰도록 경계하였다. 그리고 인재를 선발하고 옥사를 관대히 처결하였다. 강도의 미곡 1만 석과 남한 산성의 미곡 5천 석을 경기로 옮겨다가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였다. 영의정 허적을 면직하고 우찬성 송시열을 우의정으로 삼았다. 3월에 예조에서, 혜성(彗星)의 재변이 이미 사라졌다 하여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수라 가짓수를 줄이고 음악을 철거한 일을 정지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반찬 가짓수를 감한 것이 비록 사소한 일이지만, 굶어죽은 자가 길에 널려 있다는 말을 들을 적마다 마음이 항상 측은하여 음식물이 목에 넘어가지 않는다. 무슨 마음으로 반찬 가짓수를 회복한단 말인가. 아직은 거행하지 말고 가을을 기다려 봐야 할 것이다."
하였다. 군자감(軍資監)에 저축된 곡식 7천여 석을 풀어서 도성과 경기에 대여받기를 원하는 자에게 나누어 주고, 호서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산간 고을의 용도와 바꾸어 진휼하였다. 관원을 보내어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 등 병자 호란에 임금을 위해 힘쓴 군사들이 전사한 곳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4월에 호남 사람 사서(司書) 김인후(金麟厚)는 경학(經學)과 행의(行誼)가 있었고, 의병장 김덕령(金德齡)은 의병을 일으켰다가 원통하게 죽었다 하여 시호를 내리고 관작을 추증하라고 명하였다.
7월에 한재로 인해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망하면서 정전을 피해 거처하고 음악 연주를 중지하였다.
8월에 온양에 거둥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이 와서 뵙자 불러 보았다. 그가 체직된 뒤에 어가를 수행하겠다고 청하므로 왕이 허락하였다.
9월에 왕이 온천 행궁을 떠났다. 이조 판서 송준길은 어가를 전송하고 뒤처졌고, 우의정 송시열은 중도에 이르러 소를 올리고 오지 않으면서 비방하는 말이 있어서라고 핑계댔다. 그가 이른바 ‘비방하는 말’이란 대개 허목이 정미년056) 에 일찍 세자를 책봉하기를 청한 소를 가리킨 것인데, 그것은 상복 제도의 일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심하여 발론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던 것이다. 왕이 그들 모두에게 승지를 보내어 간절히 타이른 뒤에야 도성에 들어왔는데 얼마 뒤에 모두 물러갔다.
이 해에 유생 황연(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 등이 서로 잇따라 소를 올려 시사를 극렬히 말하고 권력을 장악한 자를 지척하여 구언(求言)하는 왕의 뜻에 응하였다. 삼사(三司)가 그들을 귀양보내 국문하기를 청한 지 한 달이 넘었으나, 왕이 끝내 윤허하지 않았다.
기유 10년 1월에 영남에 흉년이 들었다 하여 각사 노비 중에 을사년 이후 신공(身貢)을 징수할 곳이 없는 것들을 수령에게 엄히 신칙하여, 분명히 조사해서 보고하게 한 다음 감면하였다. 충청 감사의 장계로 인해 공주방(公主房)에서 떼어받은 것 가운데 주인이 있는 백성의 전지와, 궁가(宮家)에서 떼어받기 전에 백성들이 일구어 경작한 곳을 그들에게 다 내주었다. 그리고 지나치게 점유한 자는 그 죄를 다스렸다. 원양 감사(原襄監司)의 장계에 의해 흉년이 든 영동(嶺東) 7개 고을에 ‘서북 지방 백성을 쇄환(刷還)하라.’는 명령을 정지하였다. 조참(朝參) 때에 백관에게 명하여 소회를 진달하게 하였다.
2월에 송시열이, 설날에 솔잎을 진배(進排)하는 일을 파하기를 청하니, 왕이 이르기를,
"이와 같은 일들은 혁파하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는가. 솔잎·도장(桃杖)·도지(桃枝)·인승(人勝)·세화(歲畵)를 모두 혁파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4월에 왕이 온천 행궁에 있으면서 본읍의 무신년057) 전세(田稅)와 기유년058) 세폐(歲幣)를 감면해 주고, 본도의 죄인 및 본도 사람으로 다른 도에 정배(定配)된 자를 관대하게 처결하였다.
10월 1일에 처음으로 신덕 왕후(神德王后)059) 의 신주를 태조실(太祖室)에 합부(合附)하고 휘호(徽號)를 올렸는데 순원 현경(順元顯敬)이었다. 정릉(貞陵)을 회복한 다음 수호관(守護官)을 두고 의절대로 석물 등을 설치하였다. 신덕 왕후는 태조 대왕의 두 번째 아내이다. 태조가 즉위한 뒤로부터 이미 중전(中殿)의 자리에 앉아 고명(誥命)과 면복(冕服)의 하사를 받았다. 그런데 태조가 승하하여 부묘(附廟)할 때에 신하들이 예를 잘못 의논하여 아울러 부묘하지 않았으므로 사람과 신이 오래도록 억울하게 여겼다. 이점에 대해 조정 의논이 간간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역대의 왕들도 미처 이 일을 거행하지 못하였었다. 이때 와서 태학생이 상소하여 말하고 삼사(三司)가 차자로 아뢰니, 왕이 처음에는 윤허하지 않다가 뭇 신하들이 대궐 뜰에 나와 청하자 윤허하였는데, 이는 대개 신중히 여겨서 그런 것이다. 능을 봉하고 제사를 지내던 날에 소낙비가 내려 정릉(貞陵) 한 골짜기가 가득히 찼는데 백성들이 ‘원한을 씻어주는 비이다.’고 하였다.
11월에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명을 내려, 중외의 감옥에 있는 죄수들을 관대히 처결하게 하였다. 그리고 재해를 입은 삼남(三南)의 목화밭을 돌보아주어 선혜청(宣惠廳)의 대동미(大同米)를 감해주었다.
12월에 우의정 송시열이 면직되었다.
경술 11년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다. 5월에 서리가 연달아 내리고 7월에 바람이 불고 서리가 내렸다.
8월에 흉년으로 인해 각전(各殿)의 향온미를 헤아려 감하게 하였다. 강도(江都)의 쌀 3만 석을 운반하여 이를 서울에 팔게 하였다. 전라도 감사의 장계에 따라 호조에 안부(案付)된 염분포(鹽盆布)060) 24동(同)과 나주(羅州)·영광(靈光)의 염철포(鹽鐵布) 7십여 동을 전라도에 나누어 주어 진구하는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팔도의 어영군(御營軍)에 입번(立番)하는 것을 정지하고 금년 10월부터 이듬해까지 그 보미(保米)를 본도에 남겨두었다가 어영군을 진구하게 하였다.
9월에 제주(濟州)에 흉년이 들어 굶어죽은 백성이 많았으므로 호남의 곡식 2천 석을 운반하여 지급하고 또 통영(統營)의 조곡(租穀)을 더 주어 구제하였으며, 본주(本州) 노비의 신공(身貢)을 모두 탕감해 주었다.
9월에 미친 사람 이세직(李世直)이란 자가 거리의 종을 치고 고변하여 외방에 있는 재신 등을 무고하였는데, 조사해 본 결과 그런 사실이 없었으므로 그를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10월에 호조·진휼청·한성부(漢城府)에 명하여 추위에 떨고 굶주리는 사람에게 미곡과 동옷 등을 차등있게 지급하였다.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은 고을의 공포(貢布)를 감하여 주고 경기·함경·원양(原襄) 등의 도에서 진상하는 호피를 감면해 주었다.
12월에 혹독한 한파로 인해 각도에 하유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이외에 특별히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여 정체된 옥사가 없게 하였다.
신해 12년 1월에 명을 내려 서울 및 지방에 나이 80세가 된 사람은 사대부나 상민을 물론하고 특별히 자급을 올려주어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보이도록 하였다. 뭇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예전에 없었던 큰 흉년을 당하여, 각도의 전세(田稅)를 수송할 적에 백성에게 끼치는 폐해가 적지 않다. 삼남·원양(原襄)·황해·경기 등 6도의 전세는 모두 본도에 놓아두었다가 오는 봄에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게 하라.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各司) 노비의 신공(身貢)으로 경술년061) 조에 들어 있는 것은 모두 탕감하게 하라."
하였다. 이 해에 보리 농사가 크게 흉작이 되어 굶어죽은 자가 길에 즐비하였고, 돌림병이 또 치성하여 걸리지 않은 백성이 없었으므로 제도(諸道)에 진휼청을 설치하였다. 서울에는 진휼청을 세 곳에 설치하여 죽을 쑤어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고 사대부는 마른 양식을 주었다.
3월에 명하여 진휼청의 적곡(糴穀)을 발매하게 하고 굶주린 백성이 버린 자녀를 거두어 기르는 자는 본주가 추쇄(推刷)하지 못하게 하였다.
6월에 주방(酒房)의 일차(日次)에 공상(供上)하는 것을 정지하고 각도의 진상(進上)에 있어서는 양대비전(兩大妃殿) 이외에는 상납을 허락하지 않았다.
9월에 명하여 경기의 대동 전세(大同田稅)를 기한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게 하고 납입한 조적곡도 이자를 면제하게 하였다. 제주(濟州)에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보내어 세 고을의 노인과 군민(軍民)을 위로하고 또 면포 4천 필을 가지고 가서 곤궁한 백성에게 나누어 주고 보리씨 2천 석을 더 보내어 파종을 도와주게 하였다. 무릇 상공(上供)하는 토산물과 각사의 상공(常貢)에 관계되는 것은 다 재량하여 감하게 하고, 내사(內司) 및 각사 노비의 신공(身貢)은 아울러 전부 감해 주게 하였다. 이어서 명하여, 백성의 질병과 고통을 묻고 사상자(死喪者)를 도와주게 하였다. 또 효우(孝友)와 절행(節行)이 특별히 드러난 사람을 찾아 발탁하는 소지로 삼게 하였다. 또 호남의 감영(監營)·병영(兵營) 및 호조에 저축된 포목 수천 필을 더 주어 진휼하게 명하였다. 이때 제주에 크게 비바람이 휘몰아쳤는데 빗물의 맛이 모두 짜서 들판에 곡식이라곤 아무 것도 없는 까닭이었다. 한라산(漢拏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는데 한라산은 제주 섬 전체의 진산(鎭山)이다. 또 문·무의 시험을 실시하여 그 백성들을 위로하였다. 경기의 승군(僧軍)을 동원하여 안팎의 굶주린 백성과 병사한 자를 묻어 주었다. 10월에, 서울과 지방에 마른 양식을 받아먹은 사람 중에 본인이 죽은 데다가 전지도 없는 경우에는 일체 탕감해 주고 이웃이나 일가붙이에게 징수하는 일이 없게 하도록 명하였다. 광주(廣州)의 조적을 절반만 거두어 들이고, 중외의 기유년062) 을 포함한 이전 신역포(身役布)를 모두 기일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게 하였다. 징수할 곳이 없는 각사 노비의 신역포도 전부 감해주었다.
천둥의 재변으로 인하여 대신·비국(備局)·삼사(三司)를 인견하고 재변을 그치게 할 수 있는 계책을 들었다. 죄수를 관대히 처결하고 동교(東郊)와 서교(西郊)에 여단(厲壇)을 설치한 다음 관원을 보내어 여역으로 죽은 사람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정월 초하루에 진상하는 방물을 명년063) 부터 계축년064) 까지 감하게 하였다. 평안도 강변 6개 고을의 전세(田稅) 중 3분의 2를 감하였다. 제주에 선혜청(宣惠廳)의 쌀 2천 석을 더 보냈다. 이 해에 팔도가 큰 풍년이 들어 김매지 않고도 수확한 자도 있었다.
12월에 명하여 윤선도(尹善道)의 직첩을 도로 주게 하였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소를 올려, 영의정 허적(許積)을 공격하되 ‘영합하여 총애를 굳히려 한다.’고 말하니, 왕이 엄한 분부를 내려 책하고 특별히 의령 현감(宜寧縣監)에 보임하였다. 대간(臺諫)이 그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임자 13년 1월에, 봄철에 징수하는 삼남(三南)의 대동미를 감하도록 명하였다. 우의정 송시열의 소에 따라 각읍에 도적을 다스리는 대책에 대해 신칙하였다. 또 대동미를 징수할 적에 기유년065) 의 전결(田結)을 적용하지 말고, 지난해066) 의 전결(田結)을 적용하여 백성의 재력이 펴이게 하도록 명하였다. 각도의 감사·수령에게 명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휼하는 계책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어 채택에 대비하게 하였다.
인견할 때에 대신이 청하기를 ‘진휼할 때에 반드시 죽을 쑤어 먹일 것 없이 건량(乾糧)을 나누어 주자.’고 하자, 왕이 이르기를,
"만일 장기간 백성을 편안히 하는 도리를 논한다면 물론 건량을 나누어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떠돌아 다니며 빌어먹는 저 백성을 어떻게 보고만 있으면서 구제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2월에 전 정(正) 조사기(趙嗣基)가 폐단을 진달하는 소를 올리면서 기년복의 제도를 사용하여 지체를 깎아내린 데 대한 잘못을 논하였는데, 그 내용 중에,
"전하께서 대통(大統)을 이으셨으니 오직 어버이를 높이는 도리를 극진히 해야 합니다. 그런데 적통과 서자(庶子)의 일설은 지체를 내리깎아 상복의 기한을 단축하게 하였으니, 후세에서 마침내 반드시 논의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추후에라도 뉘우쳐 하늘에 계신 효고(孝考)067) 의 영혼을 위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라는 말이 있었다. 도승지 장선징 등이 아뢰기를,
"소의 사연이 괴상하기 이를 데 없어 금령을 범하였으니, 유사에게 회부하여 성상의 뜻을 여쭈어서 죄를 결정하게 하소서."
하였다. 조사기가 의금부에 나아가 심리를 받고 편배(編配)068) 되었다. 사간원 이합(李柙)·윤심(尹深), 민종도(閔宗道) 등이 먼 곳에다 유배하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얼마 안 되어 특별히 서용하라 명하였다.
3월에 이조 참의 이단하(李端夏)의 상소로 인해 중종의 폐비(廢妃) 신씨(愼氏)의 신주(神主)를 신씨의 집안 직손 집에 옮겨 모시게 한 다음 관에서 제수(祭需)를 지급하고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3호(戶)를 두었다. 신씨는 중종이 대군으로 있을 때의 정비(正妃)이다. 호남의 곡식 1천 석과 해서의 곡식 2천 석을 제주에 들여 보내 종자로 주었다. 또 베 50동(同)을 주어 옷감으로 쓰게 하였다. 각도에 명하여 신해년069) 을 포함한 이전의 모든 신역(身役) 중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것은, 받을 곳이 없는 자이건 기한을 뒤로 물려 아직 거두어 들이지 못한 자이건 간에 모두 탕감하게 하였다.
명을 내려 2품 이상으로 동반(東班)의 실직을 지낸 자와 육조의 참의, 삼사(三司), 수령으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그리고 죄수를 관대히 석방하게 하였는데 서울과 지방에 사죄(死罪) 이하로서 일시에 사면을 받은 자가 모두 8백여 인이었다. 명을 내려 병오년 이전까지 포흠된 조적곡의 실제 수량을 조사해 내어 일체 탕감하게 하였다.
조군(漕軍)도 수군(水軍)의 예에 의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허락하였다. 국가의 제도에, 조군(漕軍)·수군(水軍)의 군역(軍役)이 가장 고통스러우며 과거 응시를 자손 대대로 금지하였기 때문이다. 교서를 내려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포흠된 무세(巫稅)·장세(匠稅)·관향세(管餉稅)와 각 아문의 파괴된 염분(鹽盆), 어선세(漁船稅)의 미수된 것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4월에 행 호군(行護軍) 송준길(宋浚吉)이 소를 올려 허적(許積)을 논하면서 노기(盧杞)070) 에다 비하고, 또 윤경교(尹敬敎)를 구원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회보하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정승의 자리를 떠나니, 왕이 누차 승지를 보내어 도타이 타일렀다. 판부사(判府事) 송시열도 소를 올려 허적을 매우 심하게 공격하였는데, 이는 대개 허적의 소 안에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평 오정창(吳挺昌)이 소를 올려 ‘송시열·송준길 등이 허적을 견지하면서 비교해 의논한 것은 걸맞지 않다.’고 논하자, 양사(兩司)가 논핵하여 그의 관직을 삭탈하고 도성 밖으로 내쫓자고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5월에 전 집의 이상(李翔)이 소를 올려 논핵하기를
"허적이 사리 사욕을 추구하고 당류를 심는가 하면 위아래에 아첨하여 헛된 명예가 융성해져서 허충신(許忠臣)이란 말이 안팎에 가득합니다. 왕이 아첨하는 신하에게 빠진 바가 되었습니다."
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이상이 산림(山林)에 머물면서도 세상에 나가 벼슬하는 일에 바쁜데, 그의 마음가짐과 일처리하는 것은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이다."
하고, 그를 배척하고 그의 관작을 삭탈하였다. 대간이 그 명을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12월에 헌부의 계사(啓辭)에 따라 대내의 전각(殿閣)을 수선하는 역사를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명을 내려, 대전(大殿)에 진상하는 세 명일의 방물(方物) 물선(物膳)을 감하게 하고, 제주에서 월령(月令)에 진상하는 물품을 감하였다. 그리고 어린아이에게 군역(軍役)을 정하지 말라는 영을 거듭 밝혔다.
계축 14년 정월에 경기 지방이 재해를 입었다 하여,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大同米)를 차등있게 감하라고 명하였다.
2월에 명을 내려 경술년과 신해년 두 해에 거두어 들이지 못한 조적의 수를 뽑아내어 탕감해 주도록 하였다. 팔도의 감사와 강화부(江華府)와 개성부 등의 유수(留守)에게 유시하기를,
"내 생각건대 나라는 백성에게 의지하고 백성은 먹는 것에 의지한다.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도리는 진실로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중히 여기는 데에 있을 따름이다. 그러므로 옛날 제왕들은 백성들이 무엇을 의지하는가를 알고 농사짓는 것을 우선으로 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시경(詩經)》의 빈풍(豳風)과 《서경(書經)》의 무일(無逸)이 어찌 후세의 귀감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 조종(祖宗)에서는 백성을 잘살게 하는 방법을 깊이 생각하여 먼저 전제(田制)를 바르게 하였다. 또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에 어둡지나 않을까 염려하여 농서(農書)를 번역하고 풀이하여 가르치고, 토지를 이미 시험해 본 방법으로 《농사직설(農事直說)》을 지어서 어리석은 백성으로 하여금 환히 알게 하였으며, 또 농사를 권장하는 글을 반포하는 등 무릇 농사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여러모로 심력을 기울였었다. 그러므로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071) 과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072) 도 그다지 훌륭하게 여길 것이 못 되었다.
그런데 과인에 이르러 하늘이 도와주지 않아 수재와 한재가 없는 해가 없었고, 기근의 참혹함이 지난해에 와서 극도에 달하였다. 그리하여 노약자들은 구렁텅이에 죽어 뒹굴고 백골이 서로 잇따르고 있으나 이주시킬 만한 곳이 없고 구제할 만한 곡식도 없다. 내 이 때문에 잠자리가 편치 아니하고 음식이 목구멍에 넘어가지 않으므로 먹는 것을 넉넉하게 하는 계책을 얻어 위급한 지경에 이른 백성을 구제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결국 그들이 죽는 것을 서서 보고만 있게 되어 조종(祖宗)께서 3백 년 동안 길러온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씻은 듯이 없어지고, 뽕나무와 삼이 있던 곳이 쑥대밭으로 변해 버렸으니, 아, 이를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그 연유를 구명해 보면 비록 연운(年運)이 좋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나 실로 사람이 한 일이 미진하여 그런 것이다. 만일 옛날처럼 3년을 농사지어 1년 먹을 것이 축적되고 9년을 농사지어 3년 먹을 것이 축적되었다면 떠돌거나 죽는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는가.
대체로 농사에서 힘써야 할 일은 때에 맞추어 하는 것과 힘을 써서 하는 것 이 두 가지에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날은 이미 제때에 씨를 뿌리지 못하였고 김매는 일에도 힘을 쓰지 않는가 하면, 제방을 쌓아 관개(灌漑)하는 이로움을 폐지한 채 수거(修擧)하지 않고, 거름을 주고 김매는 일도 대부분 소홀히 하여 힘쓰지 않고 있다.
아, 사농공상 가운데 오직 농민이 가장 괴로움을 겪고 있다. 추울 때에 밭갈이 하고 더울 때에 김매는 등 해가 다 가도록 부지런히 일하여도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지 못하는데, 고을의 관리가 조세(租稅)의 상납을 독촉하는 정치가 소요를 일으키고, 장사꾼과 놀고 먹는 무리가 또 뒤따라 좀먹고 있으니, 어떻게 백성이 곤궁하지 않겠는가.
지금 봄날이 따뜻해져 토맥(土脈)이 처음으로 열리었으니, 보습을 손질하는 정월은 이미 멀어지고, 밭갈이하는 2월이 문득 박두하였으므로 농사를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느슨히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한번 우역(牛疫)이 치성해지면서부터 백성들은 어깨가 붉게 문들어진다고 탄식하고 있다. 날카로운 보습을 제대로 쓸 수가 없으므로 흙을 일구는 밭갈이를 장차 폐지하게 되었다. 옛날 왕공(王公)이 경작하는 예를 몸소 행하여 천하의 백성을 거느렸다. 내가 경사 대부(卿士大夫)와 함께 옛날의 제도를 본받아서 사방의 주창이 되려 하였으나, 이 일을 할 겨를이 없었으므로 실로 불만스럽게 여긴다. 아, 큰 흉년을 치른 전지가 황폐하여, 간신히 살아남은 백성이 살아갈 대책이 막연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무마하는 도리는 급히 해야지 느슨히 해서는 안 되며 권장하는 방법은 서서히 해야지 급박하게 해서는 안 된다. 나와 함께 다스리는 자는 오직 방악(方岳)073) 뿐이며, 백성과 가까운 직책은 수령만한 사람이 없다. 경들은 나의 명농(明農)074) 의 뜻을 체득하여 수령들에게 포고하여, 밭두둑을 출입하되 여리(閭里)를 소요스럽게 하지 말도록 하고, 전야(田野)를 살펴 보되 백성의 농사일에 방해되지 않도록 하라. 저수지 중에 관개(灌漑)할 만한 것은 수리하고, 도랑 중에 소통할 만한 것은 소통시키도록 하라. 백성의 힘이 넉넉하지 못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고 종자와 식량이 부족한 바가 있으면 도와줄 것을 생각하여, 갈고 씨앗 뿌리는 시기를 놓치지 않게 하고 김매고 북돋우는 시기를 어기지 않도록 하라. 그리하여 곡식을 생산할 수 있는 토지가 모두 일구어지도록 힘쓰고 놀고 먹는 백성이 다 농사에 돌아가도록 하라.
그렇게 하면 백성이 본업을 즐거워하여 태만하지 않고 힘을 다해서 위로는 경상(經常)의 부세(賦稅)를 바치고 아래로는 부모를 섬기고 자식을 기르는 소원을 이룩하게 될 것이다. 백성의 생업은 농사에서 안정되고 나라의 근본은 반석처럼 튼튼해질 것이다. 경들은 형식적인 것으로 여기지 말고 깊이 유념하여 거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작고한 참찬 송준길(宋浚吉)에게 의정(議政)의 직을 추증하라 명하고 문·무관 당상(堂上) 이상의 부모 중에 나이 70세 이상인 자에게 음식물을 지급하도록 하고, 경평군(慶平君)·정명 공주(貞明公主) 및 종실 중에서 부모의 나이가 70세 이상인 자에게도 그와 같이 하라고 명하였다. 고려 공양왕의 능을 수호하도록 명하고 대신의 아내 및 친공신(親功臣)의 아내 중에 생존하고 있으나 살림이 궁핍한 자에게 음식을 지급하게 하였다.
3월에 춘당대(春塘臺)에 나아가 정시(庭試)를 실시하여 문·무 인사를 뽑았다.
4월에 가뭄이 갈수록 혹심하다 하여 교서를 내려 원통한 옥사를 심리하게 하였다.
5월에 또 교서를 내려 자신을 책하고 정전을 피해 거처하며 수라 가짓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였다. 정원에서 단오첩(端午帖)을 제진(製進)할 것에 대해 계사를 올리자, 왕이 이르기를,
"한재가 이처럼 혹심하니, 이런 형식적인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신해년075) 이전의 군병과 노비(奴婢) 중에 도망했거나 죽은 사람 및 임자년076) 에 상납하지 아니한 신역(身役)과 계축년에 납입해야 할 군포(軍布)를 탕감해 주도록 명하고 신해년 기병(騎兵)과 보병 중에 도망한 사람은 연한에 구애하지 말고 그 대역(代役)할 사람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8월에 효종의 능을 옮기는 일로, 경유하는 양주(楊州)·광주(廣州)·여주(驪州)·이천(利川)·양근(楊根) 등 5개 고을의 대동미 징수와, 경기 고을의 봄에 징수해야 하는 대동미를 차등있게 감해 주도록 명하였다. 경기·황해·전라·원양(原襄) 등 4도의 경술년077) 조 전세(田稅) 중 미수된 것을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9월 29일에 계구릉 망곡례(啓舊陵望哭禮)를 거행하였다. 면례(緬禮)에는, 삼년복을 입지 않는 사람일 경우 시복(緦服)을 입는 예문(禮文)이 없는데, 왕이 예관(禮官)에게 특별히 명하기를,
"기해년078) 대상(大喪) 때에 대왕 대비(大王大妃)께서 기년(朞年)을 지난 뒤에 천담복(淺潭服) 차림으로 삼 년을 마쳤으니, 지금도 이 예에 의해 천담복 차림으로 3개월을 마치게 하라."
하였다. 이는 대개 기해년 대상(大喪) 때에 궁중에서 실지로 삼년상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구영릉(舊寧陵)을 처음 모실 적에 능의 자리를 어디에다 잡을 것인지에 대한 의논이 빨리 정해지지 않아 기일이 촉박하였고 일을 감독하는 자가 다급하여 신중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봉축(封築)이 무너져서 빗물이 스며들었는데 누차 보수하였으나 완벽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봉심(奉審)한 신하들이 감히 사실대로 아뢰지 못하고 다만 그때마다 석회로 틈을 막았을 뿐이었다. 3월에 종실 영림령(靈林令) 이익수(李翼秀)란 이가 상소하여 그 사실을 말하니, 왕이 놀라고 슬퍼하면서 곧바로 익수를 불러 그 상황을 물어보았다. 익수가 능 위의 흙과 돌이 무너진 까닭을 낱낱이 말하고 또 아뢰기를,
"옛날 주 성왕(周成王)이 주공(周公)의 충성과 성스러움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하늘이 바람과 천둥의 재이(災異)로 보여 주었습니다. 지금 전하께서 선릉(先陵)에 변고가 있음을 모르고 계셨으니, 근년에 일어난 재이가 반드시 이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못할 것입니다."
하니, 왕이 익수에게 이르기를,
"네가 남들이 감히 말하지 못한 바를 말하였으므로 내 아름답게 여긴다. 또 그릇된 임금의 마음을 바로잡으니, 매우 감격하였다."
하고, 드디어 옮겨 모시기로 뜻을 결정하였다. 대신·육경(六卿)·양사(兩司)에 명하여 능의 자리를 살펴보게 하고 또 익수로 하여금 대신을 따라가 같이 살펴보게 하였다. 좌의정 김수항(金壽恒), 선공감 제조(繕工監提調) 민유중(閔維重) 등이 익수와 말다툼을 하여 함께 복명하지 않았다. 익수가 소를 올려 주달하고 또 아뢰기를,
"구릉(舊陵)의 연월과 길흉(吉凶)에 구애받지 말고 속히 옮겨 모셔야 합니다."
하니, 왕이 아름답게 받아들였다. 부수찬 조위봉(趙威鳳)이 상소하기를,
"신이 듣건대, 영릉(寧陵)을 봉심한 공경·대시(臺侍)가 돌아와서, 익수의 소가 헛말이 아니라고 아뢰고 주상은 ‘능 위 사면 팔방이 하나도 완전한 곳이 없다.’는 분부가 계셨다 합니다. 영릉을 봉안한 지 지금 15년이 되었는데도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면 만세토록 전하는 교산(喬山)의 염려079) 가 그지없습니다. 옛날 송 인종(宋仁宗)을 영소릉(永昭陵)에 장사지낼 때에 황당(皇堂)의 기둥이 손상되었습니다. 여러 사자(使者)들이 그냥 덮어버리려 하자, 한기(韓琦)가 정색을 하며, ‘손상되었으면 바꾸어야 한다. 만일 장사의 날짜를 어겨 비용이 많이 날 경우 그래도 이 책임은 담당할 수 있지만 만일 구차히 이를 덮어버렸다가 뒤에 무너져서 임금의 의심을 초래할 경우 신하가 어떻게 그 책임을 담당하겠는가.’ 하였습니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그때 감독한 신하들이 무너지는 후환은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일을 마치기에만 힘썼으니, 한기의 말과 비교해 볼 때 어떠합니까? 역사(役事)를 감독한 관원도 물론 죄가 있습니다만, 흙을 덮은 데와 배치한 석물에 이상이 생겼다고 보고한 뒤로부터 전후로 봉심한 신하가 다만 회로 틈을 바르기만 하고 사방·팔면이 우려된 형세에 대해선 왕에게 아뢰지 않았습니다. 살펴보고도 몰랐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만일 알고도 아뢰지 않았다면 그 죄가 실로 감독한 관원보다 더 큽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것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눈치만 살피고 사실대로 아뢰지 않는단 말입니까. 이러한 습관이 그치지 않고 커진다면 비록 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080) 전하께서 듣지 못하게 될까 신은 염려됩니다. 전하의 효성을 몸받지 아니하고 감히 기망을 자행함이 또 이보다 더 큰 것이 있겠습니까. 능의 일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사실이 나타난 지가 이미 오래 되었건만, 양사(兩司)에서는 침묵만 지킨 채 전후로 봉심을 성실하게 하지 않은 잘못을 거론조차 하지 않았으니 이게 무슨 의도란 말입니까. 어리석은 신은 근심과 개탄을 금치 못한 나머지 감히 어리석은 소견을 말씀드립니다."
하였다. 조위봉은 조경(趙絅)의 아들이다.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를 보니 개연(慨然)한 뜻과 충애(忠愛)의 정성이 말에 넘쳐흐르고 있으므로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감탄하였다. 지금 만세토록 계실 선왕 능침의 의물(儀物)에 완전한 곳이 없으므로 장차 부득이 옮겨 모셔야 하니, 내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전후 봉심한 신하가 만일 있는 것을 없다고 하였거나 큰 것을 작다고 하였다면 그 죄는 참으로 면하기 어렵다. 내가 실상을 조사해 내어 처리해야겠다. 근일 대각(臺閣)의 신하 중에 눈치를 슬슬 보는 자가 많은데, 누가 국가를 위해 분연히 이러한 말을 하는 자가 있겠는가. 참으로 개탄할 일이다."
하였다. 대간이 모두 침묵만 지키고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옥당이 출사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나 특별히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왕이 하교하기를,
"전후 봉심하고 올린 문서를 상고해 보면 영릉의 석물에 틈이 생긴 뒤로 대신 이하가 봉심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정미년081) 봄과 가을 두 번 봉심할 때에는 해조(該曺)가 별도의 의견을 내어, 다른 능의 예를 인용하여 본조의 당상이 나가 봉심하였을 뿐이었다. 이는 대신이 나가는 것은 중대한 일로 여기고 능의 사체는 도리어 가볍게 여긴 것이다. 또 영릉을 봉심하는 일이 어찌 다른 능과 비등할 수 있겠는가. 다른 능은 이와 같은 변고가 아직 없었다. 참으로 매우 놀랍다. 그때의 당상과 낭청(郞廳)을 아울러 잡아다가 엄히 국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이에 전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참의 이준구(李俊耉), 정랑 이유원(李惟源), 좌랑 오시복(吳始復) 등이 모두 옥에 갇히었다. 또 하교하기를,
"신해년082) 에 봉심하고 올린 서계는 더욱 형편이 없다. 그때 봉심한 신하들을 아울러 잡아다 심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라."
하였다. 그때의 대신 판부사 정치화(鄭致和), 선공감 제조 좌의정 김수항은 먼저 직을 파면한 다음 죄명을 기다리게 하고, 전 관상감 제조 남용익(南龍翼), 예조 좌랑 안한규(安漢珪) 등은 모두 옥에 가두고 관직을 삭탈하였다. 얼마 뒤에 한재로 인하여 심리를 청해 모두 석방되었다. 이에 전 참의 장응일(張應一)이 상소하기를,
"영릉 석물(石物)에 틈이 생긴 일은 국가의 큰 변고 중 이보다 더 큰 변고는 없습니다. 보충해 덮은 흙이 단단하지 않았거나 사람의 계획이 잘못되어 그러한 것입니까? 택조(宅兆)가 이롭지 못하고 신도(神道)가 편치 못해서 그러한 것입니까?
우러러 생각하건대 성상께서는 놀라고 두려워하셨을텐데 어떻게 마음을 안정하셨습니까? 처분이 어떻게 내릴지 귀를 기울이느라 밤낮으로 우울해 하던 중 전후 비망기(備忘記)를 보고서야 비로소 능의 일을 감독하였던 신하들과 봉심한 대신이 모두 죄를 받았으며 성상께서 능을 옮겨야겠다고 결심하시어 분부를 내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불행 중 다행한 일로서 국가의 복입니다. 그런데 하늘이 오랫동안 비를 내리지 않자, 심리하라는 명이 계시고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까지 모두 사면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전하께서 대신을 극진히 대우한다고 할 만합니다만, 선왕을 섬기는 도리로 볼 때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른바 심리한다는 것은, 죄가 크더라도 정상에 용서할 만한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만, 이번 봉심한 대신의 불경하고 불충한 죄에 대해 전하께서는 혹 용서할 만한 정상이 있다고 여기십니까? 불경·불충은 신하의 큰 죄로서 왕법(王法)에 있어서 용서하지 못할 바인데도 전하께서 이처럼 법을 굽혀 죄를 사면해 주시니, 신은 아마도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켜 비를 내리게 할 수 없다고 여깁니다.
능침(陵寢)을 봉심하는 일은 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 한두 대신이 성상의 뜻을 체득하지 아니하고 다만 인정에 얽매이어, 명을 받들어 봉심하고는 사실대로 아뢰지 않아 전하로 하여금 지금에 와서야 변고를 아시게 하였습니다. 이는 성상의 마음에 있어서 참으로 원수로 여기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완전히 석방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차라리 신하에게 제재를 받는다는 말을 듣고 말지 감히 대신을 상하지 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비록 이러한 생각이 계신다 하더라도 신릉(新陵)의 역사를 끝마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곡진히 그들의 입장을 돌봐주셔도 늦지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심리를 거행해서 마치 조위봉(趙威鳳)의 말에 색책(塞責)한 것처럼 하신단 말입니까.
아, 도로에서 전해 들은 바로는 탑전에서 다시 봉축(封築)하자는 말씀을 드린 자가 있다 하는데, 마음을 흉참(兇慘)하게 쓴 죄는 봉심한 신하보다 더 심합니다. 전하의 좌우에 모시는 대소의 신료가 이처럼 믿을 수 없으니 어찌 뒷날 능을 옮길 적에 영릉의 전일 근심이 없다고 보장하겠습니까. 재궁(梓宮)을 옮겨 모시는 일은 더욱 대신에게 맡겨서는 안 됩니다. 전하께서는 신구(新舊)의 두 능에 직접 가시어 반드시 정성스럽게 하고 반드시 신실하게 하는 효도를 다하소서."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왕이 비답하기를,
"네 소의 사연을 보니 나의 성효(誠孝)가 형편없는 것이 한스럽기만 하다. 오장이 찢어지는 듯하여 나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 눈물을 흘렸다. 능의 일을 감독한 사람의 죄는 더없이 중대하다. 상소의 뜻도 또한 옳으나 그 밖의 일은 곡절이 각각 다르니, 뜬 소문은 사실과 틀리다."
라고 하였다. 장령 성호징(成虎徵)이 아뢰기를,
"의도가 음험하고 말에 조리가 없으며 위아래를 이간하고 있으니 관작을 삭탈하고 내쫓으소서."
하고, 대사간 신정은 소를 올려 ‘장응일이 선왕의 능침에 일이 생긴 것을 빙자하여 간사한 계책을 부리려 한다.’고 배척하였다. 응교 이선(李選)이 또 소를 올려 논핵하였는데 그 내용에,
"종통(宗統)·적통(嫡統)의 설은 당초에 화를 전가시키는 수단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윤선도(尹善道)가 앞장서서 주동하고 조경이 뒤에서 응하였는데 능침의 일에는 또 얼굴을 바꾸어 나왔습니다. 그들이 밤낮으로 바라는 바는 오로지 능의 구덩이에 물이 고이고 재궁(梓宮)에 틈이 생기는 것입니다. 만일 털끝만큼이라도 의심쩍은 점이 있으면 반드시 서로 이끌고 일어나서 조정을 어지럽히고야 말려고 할 것입니다. 조위봉의 소가 익수의 뒤에 잇따라 나왔는데, 기회를 타서 교묘하게 중상하는 말이 도리어 칭찬의 비답을 받았습니다. 이번 장응일의 소가 또 천리에서 이르렀는데 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083) 같은 바가 있습니다. 장응일의 죄를 어서 다스리어 간흉한 무리를 단속하소서."
하고, 장령 김수오(金粹五), 헌납 김석주(金錫胄)는 장응일을 먼 곳으로 귀양 보내자고 청하였다. 왕이 경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선(李選)의 소는 말 뜻이 조리가 없다. 그가 장응일이 한 일에 노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능침에 저촉된 말을 하였다. 당초에는 처벌하려 하였으나, 사람들이 반드시 ‘장응일은 죄주지 않고 이선을 죄준다.’고 말할 것이므로 잠시 참고 있었다. 장응일이 올린 소의 사연도 올바르지 않으니 멀리 귀양보내고 이선은 관작을 삭탈하라."
하였다.
9월에 구릉(舊陵)을 열어보니, 아무 탈이 없었다.
10월 7일에 여주(驪州) 홍제동(弘濟洞)에 옮겨 모셨는데, 관과 구덩이에 부수되는 물품에서부터 의위(儀衛)와 상설(象設)에 이르기까지 신중히 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거기에 드는 비용은 모두 내탕(內帑)084) 에서 가져다 마련하였고 백성에게 징수하지 않았다.
능을 파려 할 적에 왕이 친히 구덩이를 보려고 하자, 김수흥·장선징 등이 힘껏 말렸다. 처음 능을 팔 적에 봉축(封築)이 견고하지 않은 것을 보았기 때문에 이미 옮겨 모신 뒤에 왕이 또 중신·근신·내신(內臣) 등을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는데, 구릉(舊陵)의 구덩이에 물이 스며들고 벌레와 뱀의 자취가 있었으며, 또 더러 나무와 돌을 뒤섞어 쌓은 것도 있었다. 왕이 뭇 신하들이 큰 일을 신중히 하지 않은 데에 노하여 하교하기를,
"구릉(舊陵)의 능 위의 석물을 이미 철거하여 헐어버렸으나 그때 간심(看審)한 도감의 당상과 낭청 등의 죄에 대해 형률을 상고하여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모두 잡아다가 가두게 하였다. 도감 당상 정치화(鄭致和)는 신해년085) 에 봉심한 대신으로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다 하여 관작을 삭탈당했다. 왕이 또 명하여 잡아다가 신문한 다음 사형을 감면하고 유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낭관 신명규(申命圭)·이정기(李鼎基) 등은 일죄(一罪)086) 로 논하게 하자, 대간이 이를 여러 달 동안 논쟁하였으나 왕이 듣지 않았다. 뒤에 대신의 말에 의해 사형을 감면하고 멀리 귀양보냈다.
당초 구영릉의 자리를 잡을 적에 우의정 송시열이 실로 주장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소하여 ‘개축(改築)해야지 옮겨 모시는 것은 부당하다.’고 말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르기를,
"구릉의 신혈(神穴)은 매우 편안합니다. 당초 땅을 한 자쯤 파본 뒤에 이미 구덩이에 탈이 없다는 것을 알았으나, 일을 맡은 신하들이 망극(罔極)한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하여, 그대로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감히 꺼내지 못하였습니다. 신릉(新陵)이 길지임은 비록 옛날부터 일컬어오던 바입니다만, 어찌 지극히 편안한 땅에 그대로 봉안하는 것보다 낫겠습니까. 또 표석(表石)에 관한 일은 전하께서 이미 사간원의 비답에서 ‘이와 같은 것을 말하지 않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고, 국구(國舅)의 말은 곧 신을 지척(指斥)한 말이었는데 정지하라는 명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것은 전하의 마음에 실로 이것을 그르게 여기고도 강행을 하신 것이니 아마도 성신(誠信)으로 하여 뉘우침이 없게 하는 도리가 아닌 듯합니다. 성명(聖明)께서는 다시 조정의 신하에게 물으시어 옳고 그름을 자세히 살핀 다음에 시행할 것인지 그만둘 것인지 결정한 뒤에야 사리를 얻게 되고 명분이 바르게 될 것입니다. 바라건대, 다시 어물어물 구차히 하여 사람들의 말을 듣지 마소서.
신이 또 듣건대, 성명께서 김만중(金萬重)이 상신을 공박 배척한 것은 무슨 기대가 있어 한 것이라 하셨다는데 외간에 떠들썩하게 전파되어 ‘김만중이 기대한 바는 곧 송시열이다’고 합니다.
아, 김만중이 비록 지극히 어리석다 하더라도 어찌 신의 오늘날 처지가 스스로를 구제하기에도 겨를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신에게 기대하였겠습니까. 성명께서는 신의 실정을 양찰하지 못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김만중의 위인도 살피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전하께서 매양 ‘임금과 신하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이 소중하다.’라고 하교하셨는데, 어찌 오늘날 이처럼 성명의 알아줌을 받지 못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니, 왕이 비답하기를,
"경의 소를 보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놀라고 의아해 하였다. 경이 선조(先朝)에 은혜를 받은 것이 특별하였으므로 내 생각으로는, 선릉(先陵)의 일을 위해 경이 반드시 물불을 피하지 않을 것으로 여겼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일은 경에게 바라던 바에 크게 어긋났을 뿐만 아니다. 능 안에 빗물이 스며들어 고여있는 상황과 석물이 탈난 일은 경이 익히 보고 들었으며, 현궁(玄宮)에 흠이 없음은 외면으로 알 수 있는 바가 아닌데 어찌 개봉(改封)하자는 의논을 한단 말인가. 이게 내가 의혹하는 바로서 경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금일 능을 옮기는 일은 풍수(風水)의 설에 미혹된 것이 아닌데, 경의 소에는 마치 이로 말미암아 그렇게 한 것처럼 말하고 있으니, 더욱 놀랍고 의혹되어 경의 뜻을 알지 못하겠다. 간원에 내린 비답에 있어서는, 최후상(崔後尙)을 체례(體例) 사이의 일로 책망한 데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경을 논하지 않은 것을 그르게 여기는 뜻이 조금이라도 있었겠는가. 하물며 김만중의 말은 매우 터무니없어서 내가 놀라고 분하게 여겼다. 그런데 지금까지 생각해봐도 ‘경을 기대하였다.’는 말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경에게 전파한 것이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닌가. 경의 사양하는 소는 불평스런 말이 아닌 것이 없는데, 도리어 내 말을 이처럼 극심하게 의심하니 실로 나의 성의가 서로 믿게 하지 못한 소치이므로 부끄럽고 한스러울 뿐이다. 다시 무슨 말을 많이 하겠는가."
하였다.
송시열이 재차 소를 올려 그전의 설을 거듭 아뢰었으나, 회보하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송시열이 선왕의 능에 표석(表石)을 세우자고 청하였는데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불가하다고 말하자, 사간 최후상(崔後尙)이 김우명을 탄핵하였다. 왕이 비답하기를,
"비록 대신이 건의하였다 하더라도 이미 성명(成命)이 있었다. 만일 이를 핑계로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한다면 국가의 복이 아니다."
하였다. 또 교리 김만중이, 뵙기를 청하여 영의정 허적(許積)은 백관의 윗자리 【정승.】 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지척하니, 왕이 ‘대신을 망령되이 논하여 국가의 체통을 떨어뜨렸다.’ 하여 잡아다가 국문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처럼 말한 것이다.
이 해 9월에 청풍 부원군 김우명이 인대(引對)를 통하여 아뢰기를,
"전 교관(敎官) 민업(閔嶪)의 손자인 민신(閔愼)의 할아버지가 죽었는데 그 아버지가 몹쓸 병이 들었기 때문에 그가 대신 복을 입었습니다. 이것은 민업과 민세익(閔世翼)이 모두 자식이 없는 셈이고 민세익 및 민세익의 아들도 모두 아버지가 없는 셈입니다. 성명의 세상에 이런 사람을 도성 안에 살게 할 수 없습니다."
하니, 왕이 하교하기를,
"부자 사이의 큰 윤기가 한 번 어긋나면 사람이 어찌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비록 위문하러 온 손님의 지시에 부딛껴서 그렇게 했다 하더라도 민신이 어떻게 그 죄를 면할 수 있겠는가."
하고, 조사 신문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대개 민신의 일은 전 진선(進善) 박세채(朴世采)가 시킨 것이었는데, 박세채는 송시열의 논의를 따른 것이다. 논평하는 사람들은 ‘송시열의 이 논의는 윤리에 어긋나고 교화를 손상하는 것으로서 아버지를 무시한 데에 가깝다.’ 하였고, 왕도 그를 그르게 여겼다. 송시열이 상소하여 ‘민씨(閔氏)의 집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본디 선유(先儒)인 주자(朱子)의 설이다.’라고 하면서 논변해 마지않았다. 또 소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매양 고려의 일을 생각할 적마다 한심함을 금하지 못하였습니다. 고려 때에 임금은 약하고 신하는 강하여 심지어는 연산(燕山)087) 에 참소하고 권세를 부린 자도 있었습니다. 비록 당시 임금이 앞에서 참소하여도 알지 못하고 뒤에 적이 있어도 보지 못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만, 그때 신하의 죄야말로 머리털을 뽑아가며 책망한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다 셀 수 있겠습니까. 근래에 ‘신하가 강하다.’는 설이 갑자기 만 리의 밖에서 나오고, ‘권세가 위에 있지 않다.’는 말이 상신의 소에서 잇따라 나오니, 대소 신료가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지금 신이 탄핵받은 말은 실로 저 정승과 같습니다. 비록 그 이름을 조금 바꾸었으나, 신이 전일에 남을 위해 위태롭게 여겼던 것이 신이 당할 줄을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하고, 또 아뢰기를,
"삼가 듣건대, 경연의 신하가 탑전(榻前)에서 ‘민씨의 집 일은 조정에서 조사해 처리할 필요가 없다.’고 하자, 성명께서 ‘인륜에 관계된 일이므로 그냥 둘 수 없다.’ 하셨다 합니다. 이는 경연의 신하가 마치 신을 위해 그 일을 저지시켜 신의 죄를 덮어주려는 것처럼 하였고 전하 역시 신을 죄에서 벗어나게 하였는데 신은 의리로 보나 법으로 보나 두려워서 감히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대개 이때에 연경(燕京)에서 ‘신하가 강하다’는 설로 질문한 적이 있었는데 사신이 돌아와서 주달하였고, 또 김우명이 뵙기를 청할 때에 송시열을 가리켜 논하면서 ‘사람들이 감히 그의 그름을 바로잡지 못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송시열이 이것을 스스로 혐의스럽게 여겨 이 말을 한 것이다. 그가 말하는 경연의 신하란 김만중이다. 왕은 그 말에 답하지 않고 ‘내 뜻은 전에 올린 소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다.’라고 비답하였는데, 대개 불쾌하게 여긴 것이다. 당시 논평하는 자가 말하기를,
"송시열이 주장한 기해년088) 상복 제도는 사인(士人)과 서인(庶人)의 예로써 제왕가(帝王家)에 썼고, 민신(閔愼)이 아비를 대신해 복을 입은 것은 제왕가의 예로써 사인·서인에게 행한 것이다. 그 논설을 미루어 나가면 장차 임금도 없고 아버지도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인데 송시열이 뉘우칠 줄을 모른다. 또 ‘서(庶)’란 글자는 이미 종묘 사직을 주관한 이에게 쓸 수가 없다는 것을 몰랐다."
하였다.
갑인 15년 2월에 왕대비가 승하하였다.
6월 4일에 인선 왕후(仁宣王后)089) 를 영릉(寧陵)에 장사지냈다.
이해 여름에 가뭄이 들자, 옥당(玉堂)이 차자를 올렸는데 비답하기를,
"아, 부덕한 내가 왕위에 있었기에 신명(神明)에게 죄를 얻어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거르는 해가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들로 하여금 이처럼 망극한 재앙을 당하게 하였으니, 항상 이를 생각하면 먹는 것과 쉬는 것이 편치 않다. 금년 여름에 이르러 한발의 혹심함은 근고(近古)에도 드문 일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한밤중에도 놀라 일어나 하늘이 과인에게 재앙을 내리지 않고 창생으로 하여금 그 재앙을 대신 받게 함을 몹시 슬퍼하고 있다. 차라리 속히 죽어 민생의 곤궁함에 조금이라도 답하는 것이 더 낫겠다."
하였다.
7월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이 상소하여,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복제(服制)에 대해 논하기를,
"대왕 대비(大王大妃)090) 께서 마땅히 맏며느리를 위하여 기년복(朞年服)을 입어야 하는데, 오늘날의 국가의 복제는 도리어 중서부(衆庶婦)091) 의 복을 대공복(大功服)으로 정하였으니, 나라의 법을 어지럽히고 사람의 윤기를 전도시킴이 이보다 더 심한 것이 없습니다."
하였다. 소가 정원에 이르자, 정원이 여러 차례 기각하였는데 오래 있다가 들어가게 되었다. 그 뒤에 수일만에 왕이 대신을 불러 보고 하교하기를,
"기해년092) 의 복제는 대개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하였다. 지금 9개월의 복제[大功服]가 기해년의 복제와 같은지의 여부를 아울러 상고해 내되 ‘원임 대신, 육경(六卿), 정부의 동·서벽(東西壁),093) 판윤(判尹), 삼사의 장관이 모여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드디어 빈청(賓廳)에서 회의하여, 기해년에 수렴한 의논을 상고해 내어 들였다. 왕이 이르기를,
"만일 등록(謄錄)만 상고해 내고 말려고 하였다면 하필 대신·육조·삼사의 장관에게 회의하도록 하였겠는가. 다시 의논하여 아뢰어라."
하였다. 행 판중추부사(行判中樞府事) 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金壽興), 호조 판서 민유중(閔維重),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 이조 판서 홍처량(洪處亮),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형조 판서 이은상(李殷相), 한성 판윤 김우형(金宇亨), 예조 참판 이준구(李俊耉), 예조 참의 이규령(李奎齡), 부응교 최후상(崔後尙), 헌납 홍만종(洪萬宗)이 같은 사연으로 대답하기를,
"옛날 기해년에 신하들이 이미 시왕(時王)의 제도를 사용해 기년복으로 정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전(大典)》의 복제를 다시 상고해 보니, 다만 ‘아들을 위하여 기년복을 입는다.’라고 말하였을 뿐이고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구별이 없었습니다. 지금 복제를 의논해 정하는 날에 해조에서 바로 부표(付標)하기를 청한 것은 또한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였다. 왕이 다시 하교하기를,
"계사(啓辭)가 분명하지 못하다. 대왕 대비께서 오늘날 기년복과 9월복에 어느 복을 입어야 하는지 왜 귀결처가 없단 말인가?"
하자, 영의정 김수흥이 대답하기를,
"오늘은 다만 기해년의 복제를 의논하였을 뿐이고, 대왕 대비께서 대비에게 어떤 복을 입어야 될지에 대해서는 감히 가벼이 먼저 의논해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왕이 또 탑전에 불러들여, 물음에 대답하지 않은 의도를 힐문하니, 김수흥이 황공하여 사죄하고 글로 써서 아뢰겠다고 청하였다. 드디어 나가 빈청(賓廳)의 신하들과 재차 계사를 올리기를,
"《대전(大典)》에서 복제를 상고해 보니. 장자(長子)의 아내에게 기년복을 입어주고 중자(衆子)의 아내에게는 대공복을 입어준다고 하였을 뿐 승중(承重)의 여부에 대해서는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대왕 대비의 복제는 대공으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사체가 중대하므로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094) ,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095) 반드시 이미 행한 제도가 있을 것이니, 춘추관(春秋館)으로 하여금 《실록(實錄)》에서 상고해 내게 하소서."
하였다. 왕이 《실록》이 강도(江都)에 있어 상고해 내기 쉽지 않다 하여 다시 모여 의논을 드린 뒤에 《실록》을 상고해 내게 하였다. 김수항·김수흥 등이 또 ‘《대전(大典)》에 장자(長子)와 중자(衆子)의 복은 모두 기년으로 되어 있다.’라고 대답하면서 아뢰기를,
"만일 차례로 논한다면 저절로 장자·중자의 구별이 있습니다만, 중자가 왕통을 계승할 경우 장자가 될 수 있다는 조문은 국가의 법전에 뚜렷이 나타난 곳이 없습니다. 오늘날의 복제는 국가의 법전 이외에는 억견(臆見)으로 가벼이 의논하기 어렵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기해년 복제를 의논해 정할 때에 장자·중자에 대한 말이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는데, 이제 와서는 감히 대공의 설을 말한단 말인가? 《대전》의 오복조(五服條)에 왕통 계승에 관한 조항이 없는 것은, 비록 시왕(時王)이 제정한 예라 할지라도 이게 곧 미비한 점이다. 시왕이 제정한 예라고 핑계대고 《예경(禮經)》을 참고하지 않으니 오늘 회의하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하였다. 빈청(賓廳)에서 재차 계사를 올려, 《의례(儀禮)》 주소(註疏)의 4종 중에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니면 삼년복을 입지 않는다.[體而不正不爲三年]’는 말을 인용하여, ‘국가의 법전이 《예경(禮經)》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대답하였다. 왕이 승지 김석주(金錫胄)에게 명하여 《의례(儀禮)》 경전(經傳)의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입는다.[父爲長子]’는 조목의 주소(注疏)를 문단마다 해석하여 들이게 하였다. 이튿날 재차 올린 계사에 답하기를,
"계사가 터무니없어 나도 모르게 놀랐다. 경들은 모두 선왕의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와서 감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설로 오늘날의 예율을 삼고 있다. 《예경(禮經)》 주석 중의 ‘서자(庶子)라고 한 것은 장자와 엄격히 구별한 것이다.’는 설은, ‘4 종(種)은 삼년복이 될 수가 없다.’는 문귀와 관통되지 않는다. 가공언(賈公彦)의 소에 이미 ‘첫째 아들이 죽으면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우는데 이 역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 하였으니, ‘체이기는 하나 정통이 아니다.[體而不正]’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경들이 이처럼 이치에 가깝지 않은 어긋난 말을 예율로 정하여 선왕을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라는 것으로 지목하였으니 임금을 박하게 대우하였다고 하겠는데, 누구에게 후하게 하려고 한 것인가? 막중한 예를 의탁한 논의를 가지고 정제(定制)라고 결단할 수 없으니 당초에 마련한 국가의 제도에 따라 정하여 거행하라."
하였다. 또 정원에 전교하여, 기년으로 고쳐 표지를 붙이게 하고, 예관을 잡아다가 신문하여 죄를 정하게 하였다. 예조 판서 조형(趙珩), 예조 참판 김익경(金益炅), 예조 참의 홍주국(洪柱國) 등을 모두 하옥하고 대공(大功)의 복제를 고쳐 기년으로 정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대신의 직책은 문서를 봉행하는 데에만 있는 게 아니라, 큰 일에 임하여 지조를 변하지 않아야만 곧 임금을 보좌하여 나랏일을 해 나갈 수 있다. 영의정 김수흥이 오늘날 복제에 관해 회의할 때 감히 수많은 어지러운 논설로 아뢰었으나 끝내 귀결처가 없었다. 혹은 인용해서는 안 될 고례(古例)를 인용하기도 하고, 혹은 국가의 법전 몇 마디 말로 책임이나 때웠는가 하면 마침내 두서도 없고 이치에 가깝지도 않은 말로 ‘체이기는 하나 정이 아니다.[體而不正]’라는 말을 주창하였으니, 선왕을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의 논의에 빌붙은 그의 죄를 결코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
하였다. 승지 이단석(李端錫), 사헌부의 이광적(李光迪)·유지발(柳之發)·송창(宋昌)·정창도(丁昌道)·김빈(金), 사간원의 이혜(李嵇)·송창(宋昌), 옥당의 조근(趙根)·권유(權愈) 등이, 예관을 나국하라는 것과 김수흥(金壽興)을 부처(付處)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어 들이기를 청하였다. 왕이 승정원에게는 ‘번독(煩瀆)하게 한다.’고 꾸짖고, 대관(臺官)에게는 ‘규핵(糾劾)하지 못하고 직무를 거행하지 못한 데다 사정을 따르고 공론을 멸시한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옥당에게는 ‘터무니없다.’는 것으로 지척하고, 이광적·유지발 등은 관작을 삭탈하여 내쫓았다.
정원과 삼사가 또 그를 구원하였으나 왕은 모두 듣지 않았다. 좌참찬 이상진(李尙眞)이 또 소를 올려 구원하니, 왕이 ‘임금을 섬기는 데 의리가 없다.’고 지척하였다. 좌의정 정지화(鄭知和)가 또 차자를 올려 논하니, 왕은 ‘임금을 성실하게 섬기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비답하였다. 대사간 남이성(南二星)이 또 소를 올려 논변하니, 전교하기를,
"남이성이 감히 이의를 제기하여 앞장서서 분노를 부리고 대신에게 아부하면서 감히 ‘반드시 오늘 빈청에서 의논해 올린 계사와 같이 해야만 국가의 전례(典禮)가 털끝만큼도 미진하다는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말하고 또 ‘각각 소견을 지키고 각각 그 논설을 펼 뿐이니, 여러 사람의 말이 어지러우므로 성인에게서 절충돼야 한다.’ 하였다. 어지러운 말이 성인에게서 절충되지 않았을 때에는, 그의 임금을 위해 후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옳은가, 반드시 4종의 조목 중 한 조항에 의거해 박한 논의를 따르는 것이 신하로서 바꿀 수 없는 의리인가? 또 감히 박한 쪽을 따라 도리에 어긋나는 논의를 따라야만 ‘털끝만큼도 미진한 비평이 없을 것이다.’고 하는 것은 또한 무슨 의도인가? 이것은 임금을 무시하는 자의 말이다. 전후로 아부한 말과 임금을 잊어버리고 나라를 저버린 그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멀리 외딴 섬에다 귀양보내라."
하였다. 승지 이합, 장령 안후태, 부교리 조근 등이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고, 조근을 강서 현령(江西縣令)으로 특별히 보임하였다.
8월에 왕이 병이 들자, 승지를 급히 보내어 충주에 있는 영의정 허적(許積)을 불렀다. 왕의 병이 매우 위독하자, 허적을 침소로 불러들여 떠나갈 만한 의리가 없다고 하고, 또 이르기를, "경의 마음을 내가 아는 바이고, 나의 뜻을 경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기(氣)가 부족하여 국가의 일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을 다하지 못한다."
하였다. 또 좌의정 김수항을 불러 앞으로 가까이 오게 하고는 애써 유시하였다. 이날 저녁에 승하하니 18일 기유(己酉)였다. 대개 인조 대왕이 즉위하여 소현(昭顯)을 세자로 책봉하였으므로 효종 대왕은 차적(次嫡)이 되었다. 소현 세자가 죽자 세자빈(世子嬪) 강씨(姜氏)가 죄를 지어 폐위되고 그의 아들도 불초하였다. 인조가 이르기를,
"소현의 자식은 결코 왕업(王業)을 짊어질 사람이 못 된다. 나라에 장성한 대군이 있으니 사직의 복이다."
하고, 효종을 대신 세자로 책봉하였다. 효종이 승하하자, 송시열·송준길·유계 등이 복제를 의논해 정하면서 ‘대왕 대비가 효종을 위해 입는 복은 서자(庶子)를 위해 입는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 하니, 외부의 의논이 자못 시끄러웠는데 그 의논에,
"대왕 대비가 대행 대왕(大行大王)096) 에게는 왕통을 계승한 지존(至尊)의 복을 입어 주어야지 최복(衰服)으로만 제정할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의논을 수렴하게 되자, 송시열이 또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국제(國制)의 설을 빌어다가 논설을 세웠으므로 기년의 복제가 드디어 행해졌다. 그러나 ‘장자에게 기년복을 입는다.’는 제도는 《대명률(大明律)》과 국조의 《대전(大典)》에 실려 있는 실로 사서인에 대한 제도의 법이고 왕조에 대한 전례(典禮)가 아니었다. 이 때문에 뭇 의논이 더욱 불평하였다.
효종 상이 기년이 되자, 전 장령 허목(許穆)이 소를 올려 ‘기년복은 옳은 복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가공언(賈公彦)의 주소(注疏) 중 ‘둘째 아들을 장자로 세운 경우 삼년복을 입는다.’는 조문을 인용하여 송시열의 설을 깨뜨렸다. 이때 조정에서 허목의 말을 옳게 여긴 이가 많이 있었다.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차자를 올려, 당초 기년의 복제를 따른 것이 잘못되었음을 스스로 나열하고, 대신·유신(儒臣)에게 다시 의논하게 하자고 청하였다. 마침 전 참의 윤선도(尹善道)가 기년복제의 잘못에 대해 소를 올려 논하면서 심지어 ‘종사를 편히 하고 백성의 뜻을 안정하라.’고 말하고 또 송시열이 어질지 않다고 지척하였다. 이에 조정 의논이 발칵 뒤집혀 서로 편당을 지어 배척하였다.
이때 승지 이유태(李惟泰)가 마침 부름을 받고 도성에 들어와서 ‘윤선도가 예를 논한다고 빙자하여 사림(士林)에게 화를 전가하려 한다.’고 말하고, 송시열도 의논 수렴에서 허목의 설이 옳지 아니함을 크게 지척하고, 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097)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098) 는 말을 인용하여 그 뜻을 거듭 밝혔다. 이에 허목의 설이 드디어 행해지지 못하고 윤선도는 귀양갔다. 우윤(右尹) 권시 또한 소를 올려 윤선도를 구원하다가 죄를 얻었다.
얼마 뒤에 원두표가 또 차자를 올려 ‘제후(諸侯)가 종통을 빼앗는 의리’에 대해 진달하고 또 다시 복제에 대해 이유태·윤선거(尹宣擧)·심광수(沈光洙)·허후(許厚)·윤휴(尹鑴) 등에게 물어보자고 청하였다. 윤선거는 외방에 있었고, 허후의 의논은 가부가 없었고, 이유태는 기년복제의 의논을 따랐고, 심광수는 종통의 의논을 따랐으며, 윤휴는 ‘오직 그 인심에 의거하면 대강(大綱)에 관계되고 선왕(先王)에게 어그러짐이 없다.’는 뜻으로 말하였으며, 영의정 심지원(沈之源), 영돈녕부사 이경석(李景奭)은 국가의 전례로 말하였다. 왕이 다수의 의논에 따라 시행하게 하니 기년의 복제가 마침내 변하지 않았다. 그런데 판부사 조경, 수찬 홍우원(洪宇遠), 전 참판 조수익(趙壽益)이 모두 소를 올려 윤선도와 권시를 구원하고 또 복제가 잘못되었음을 논하니, 대간의 논의가 크게 일어나, 혹은 귀양보내기를 청하고 혹은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뒤에 무릇 삼년복을 입어야 한다는 설에 참여한 사람에 대해서는 모두 ‘간사한 사람과 편당을 짓고 바른 사람을 미워하였다.’고 지목하였으므로 벼슬에 제수되지 않은 지가 거의 10여 년이나 되었다.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을 당하게 되자, 예관이 처음에는 기년으로 대왕 대비(大王大妃)의 복제를 정하였는데, 이는 대개 당(唐)·송(宋) 때 적부(嫡婦)에게 입어주는 상복의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외부의 의논은 ‘효종 대왕이 이미 서자(庶子)가 되었으니 인선 왕후가 적부(嫡婦)가 될 수가 없다." 하면서 비평하는 사람이 많이 있었다. 송시열에게 편당하는 자가 또 앞뒤099) 의 복제가 다르다 하여, 예관 조형(趙珩) 등에게 부탁하여 대공(大功)으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였는데, 대개 서부(庶婦)에게 입어주는 상복 제도를 사용한 것이다. 왕이 앞뒤가 전도되었다 하여 예관을 가두고 치죄하였다. 그러나 대공의 복제가 또한 시행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빈청(賓廳)에서 모여 의논하는 일이 있었는데, 7월 13일이었다. 왕이 깨닫고 뜻이 불끈 솟구쳐 친히 《예경(禮經)》을 고증하여, 《예경(禮經)》 주소(注疏)의 ‘적처(嫡妻)에게서 난 둘째 아들을 세워도 또한 장자(長子)라고 부른다.’는 문구로 주장을 삼아, 대왕 대비의 복제를 대공에서 기년으로 고쳐 입게 하였다. 이에 적통(嫡統)이 밝아지고 나라의 예가 엄해지는 동시에 인심도 흡족히 여기었다. 왕의 뜻을 여쭈어 보지 않고 마음대로 복제를 고쳤다 하여 예관을 죄주고, 《예경(禮經)》을 따르지 않고 다른 논의에 의탁하였다 하여 수상을 죄주었는데, 빌붙은 여러 사람은 모두 차례로 벌을 받았다. 또 장차 내치고 들어쓰는 일을 크게 밝혀 국시(國是)를 바르게 하고 종묘를 존중되게 하려 하였는데, 왕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8월 7일에 다시 재신(宰臣)을 불러 빈청에 모이게 하고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 하였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실행하지 못하였다. 12일이 지나 창덕궁(昌德宮)의 재려(齎廬)100) 에서 승하하니 춘추 겨우 34세였고 왕위에 있은 지 15년이었다. 아, 슬프도다!
왕이 어려서부터 숙성함을 타고나 어려서도 장난을 좋아하지 않았다. 춘궁(春宮)에 있을 적에 효도를 다하여 증자(曾子)·민자(閔子)의 덕행이 있었고 왕위에 오르게 되자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에 힘쓰고 조상의 사업과 뜻을 잇는 일에 마음을 두었다. 대비 및 대왕 대비에게 효성을 다해 섬겨 비평하는 말이 없었고, 기쁘고 화락한 얼굴빛과 아침 저녁으로 문안하는 예를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으니 양전(兩殿)이 기뻐하고 궁중에 화기가 넘쳐 흘렀다.
대왕 대비가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과도하게 슬퍼하다가 병이 위급하자, 왕이 뜨락의 한데에 앉아서 의원을 불러 약을 묻고, 손수 약물을 가지고 들어가서 올리니, 이 말을 듣는 이들이 감동하였다.
왕대비가 처음 통명전(通明殿)에서 거처하였는데, 왕의 거처와 조금 사이가 떨어졌었다. 왕이 왕대비를 위해 집상전(集祥殿)을 지어 옮겨 모시려 하였다. 집상전이 완성되기 전에 대조전(大造殿)으로 옮겨 거처하기를 청하고 자신은 부근의 별실(別室)에 거처하여 봉양하는 데 편리하게 하였다. 대비가 묵은 병이 있었는데 왕이 밤낮으로 정성을 다해 그 마음을 위로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말하기를,
"왕이 매양 곁에 있으니 병이 몸에서 떠나가는 것 같다."
하였다.
일찍이 대왕 대비를 모시고 남군(南郡)101) 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여 효과를 보았는데, 왕이 도내에 노인을 우대하는 은전을 크게 베풀었다. 환궁하여 또 조정과 종친에게 은전을 베풀고 제도(諸道)에까지 일체로 행하였다. 이는 대개 내 노인을 노인으로 존경하는 마음을 미루어 남의 노인을 존경하는 은혜[老老之恩]를 미루어 시행한 것이다.
세시(歲時)에 항상 부로(父老)들을 위문하고 혹은 달마다 늠료(廩料)를 주기도 하였으며 재신에게는 달마다 쌀과 고기를 계속 보내 주었다.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어머니에게 효도하였는데 그가 먼저 죽자, 왕이 특별히 명하여 그의 어머니에게 종신토록 늠료를 주게 하였다.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 중에 어머니가 늙었다 하여 돌아가 봉양하기를 청하면 왕은 윤허하지 않고 쌀·고기·옷감들을 넉넉하게 주라고 명하였다. 부모의 봉양을 위해 주군(州郡)의 수령을 원하는 자가 있으면 곧 허락해 주고, 혹 그 사람이 지방관으로 나가는 것이 아까우면 특별히 쌀과 베를 주었는데, 그 효도로 다스림이 이와 같았다.
왕에게 다섯 자매가 있었는데, 매우 사랑하였고 똑같이 대우해 주었다. 좋은 음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나누어 먹고, 병이 났다는 말을 들으면 놀라고 근심하여 문병으로 보내는 사람과 약을 가지고 가게 한 사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었을 경우에는 비통해 마지않았다. 신하들의 상소에 죄없이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의 형제를 모함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몹시 미워하고 통렬히 배척하였다.
소현 세자의 딸이 황창 부위(黃昌副尉) 변광보(邊光輔)에게 출가하였는데, 그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면서 말하기를,
"선조(先朝)의 사랑이 여러 부마(駙馬)보다 못하지 않았다. 이런 일들을 생각해 볼 때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특별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보살펴 주게 하여 선왕께서 시종 한결같이 하신 뜻을 보존하도록 하라."
하였다. 친족과 매우 화목하여 곡진한 은혜의 뜻이 있었고, 친분을 헤아려 돌보아 주어 끊임이 없었다. 왕이 귀척(貴戚)에게 대우를 융숭히 하였으나 사정에 흔들려 공사를 해친 적이 없었다. 여러 궁가(宮家)의 하인들이 한 번이라도 법을 범하여 방종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유사(有司)에게 회부하여 법으로 통렬히 다스렸다.
학문에 마음을 두어 의리를 강구하고, 질병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경연에 나갔다. 또 전대의 역사를 강구하기를 좋아하여, 그 임금의 수덕(修德) 여부와 정치의 득실, 민생의 고락에 대해 부지런히 토론하여 거울로 삼았다. 견해가 고명하여 항상 강관(講官)의 견해보다 뛰어났다.
동궁(東宮)에 있을 적에 이미 심리학에 뜻을 두어 선유(先儒)의 인심 도심설(人心道心說)을 써서 들이게 하여 살피고 음미하는 자료에 대비하였다. 일찍이 《대학(大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몸을 닦는 데서부터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 이르기까지 경(敬) 자의 공부가 아닌 것이 없다."
하고, 《중용(中庸)》을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사람이 도(道)를 멀리 있다고 여기는 것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이어서 묻기를,
"어떤 것이 비근(卑近)한 것이고 어떤 것이 고원(高遠)한 것인가?"
하니, 강관이 아뢰기를,
"사람의 일이 비근한 것이고 불씨(佛氏)와 노자(老子)의 교리(校理)가 곧 고원한 것입니다."
하자, 왕이 이르기를,
"반드시 불씨와 노자(老子)뿐만 아니라, 자기에게 절실하지 않은 것이 곧 고원한 것이다."
하였다. 《대학연의(大學衍義)》를 강할 적에 왕이 이르기를,
"격물·치지(格物致知)하는 방법이 이 책에 모두 구비되어 있다. 비록 격물·치지를 한다고 하더라도 성의(誠意)를 하지 않는다면 어디에다 공력을 쓸 수 있겠는가. 또 반드시 성의의 공부가 있어야만 격물·치지한 바가 배치되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서경(書經)》을 강할 적에 익직편(益稷篇)의 ‘제(帝)여, 제위(帝位)에 계심을 삼가소서.’라는 대목에 이르자, 왕이 이르기를,
"임금이 임금의 자리에 있는 도리는 삼간다는 신(愼)의 한 글자보다 더 큰 것이 없다. ‘기미를 생각하여 편안함을 생각한다.[惟幾惟康]’는 것은 대개 공부하는 데 매우 요긴한 곳을 말한 것이다. 기미[幾]란 생각하는 시초이고 편안함[康]이란 안락한 즈음이니, 더욱 삼가해야 한다."
하였다. 역대의 일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한 문제(漢文帝)는 자질이 높지 아니한 것은 아니나, 배운 바가 다만 황제(黃帝)·노자(老子)의 도(道)였으므로 몸소 현묵(玄默)을 행하느라 옛날 성왕(聖王)의 정치를 회복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102) 하였는데, ‘겨를이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103) 을 살펴보면 규모가 매우 컸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고, 무력을 함부로 남용하였으나 마침내 패망하지 않은 것은 윤대(輪對)의 뉘우침104) 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무력을 함부로 남용한 것은 다른 게 아니라 한 고제(漢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남겼기 때문이라고 말하였다. 그러나 자질이 이와 같았으므로 말년에 그것이 잘못된 일이었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윤대를 버리는 조칙(詔勅)을 내리고 또한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105) 이다."
하였다. 당 태종(唐太宗)이 군사를 일으킬 때의 일에 이르러서 장관으로 하여금 범엽(范曄)이 논단한 사평(史評)을 읽게 하였다. 왕이 이르기를,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106) 는 설은 더욱 준절(峻截)하다."
하였다. 건성(建成)의 일107) 을 논하기를,
"명나라 태종조(太宗朝)에 한왕(漢王) 고후(高煦)는 사람됨이 선량하지 못하였으나, 인종(仁宗)이 태자가 되어 은혜와 사랑으로 대우하니, 인종의 세대가 끝날 때까지 감히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였다. 가령, 건성이 태종을 이와 같이 대우하였더라면 어찌 피를 흘리는 변고가 있었겠는가."
하였다.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108) 을 강할 적에 강관이 아뢰기를,
"이것은 권모 술수에 가깝습니다."
하니, 왕이 이르기를,
"무슨 지장이 있겠는가. 이것은 인심을 열복(悅服)시킨 것이다."
하였다.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109) 에 이르러 이르기를,
"스스로를 속이는 것도 안 될 일인데, 하늘에 계신 조종(祖宗)의 영혼을 속일 수 있겠는가. 진종의 초기 정사는 또한 볼 만하였는데, 간사한 소인에게 그르친 바가 되어 그 마지막을 잘 끝내지 못하였으니 심히 경계할 만하다."
하였다. 왕이 경연에 임하여 강논한 말씀 중에 아름다운 말이 매우 많았으나 다 기록하지 못하였다.
강을 정지하던 날에는 또 유신(儒臣)으로 하여금 사기를 고열(考閱)하여 정치하는 데에 절실한 고사(故事)를 써서 올리게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써서 올린 바의 고사가 볼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풍자하고 깨우치는 뜻이 많으니 내 유념하겠다."
하였다. 밤에 측근의 신하를 불러 보고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강마하고 백성의 일에까지 물으니, 정의가 서로 부합되어 마치 가정의 부자 사이와도 같았다. 왕이 눈병이 있었으나 촛불에 책을 보았다. 신료들이 더 덧칠까 두려워하자, 왕이 이르기를,
"겨울밤이 매우 길고 또 내가 잠이 없어 삼경 전에는 잠자리에 들지 못하니 책을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뒤에 눈병이 심해지자, 옥당으로 하여금 사서(四書)와 오경(五經)을 써서 올리게 하되 그 글자를 크게 써서 열람하는 데 편리하도록 하였다. 비록 병환 중에 있었으나 학문에 항상 이와 같이 힘썼다.
대신을 예우하여, 말을 하면 의견을 굽혀 따르지 않은 적이 없었다. 병이 들면 의원과 약을 보내 문병하고 죽었을 경우에는 상(喪)이 끝날 때까지 녹봉을 그대로 주고 혹은 제수(祭需)까지 주었으며, 혹은 안석[几]과 지팡이를 특별히 하사한 적도 있었다. 유학(儒學)을 중시하는 선왕의 뜻을 왕이 이어받아 송시열·송준길 등을 대접함에 있어 은우(恩遇)가 매우 융숭하였으며, 이유태·이상(李翔) 등 여러 사람도 초빙하여 아울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다. 그리하여 송시열은 마침내 의정(議政)에 제수되고, 송준길은 지위가 삼재(三宰)110) 에 이르렀다. 송시열·송준길 등이 예를 그르친 일이 발각되게 되자, 사당(私黨)을 지어 자기와 다른 사람을 배척하는 마음을 갖고서 효종의 능을 옮긴 뒤에 소를 올려 뒤늦게 지난 일을 탓하니, 왕이 그의 편벽됨을 미워하여 대우가 약해졌다.
처음 왕이 송시열 등을 대우할 적에 정성과 예의가 아주 지극하여 전고보다 특출하자 조정과 재야에서 그들의 풍채를 사모하고 기대하였다. 그러나 송시열 등이 잘 받들지 못하고 도와주는 바가 없어 실패를 가져오게 되었으며, 좌우의 두세 명 신하에 이르러서도 그들이 이끄는 대로 행동만 한 채 국사를 담당하고 보필하여 공적을 이룬 게 없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임금은 있으나 신하는 없다.’고 탄식하였다.
왕은 여러 신하를 매우 너그럽고 후하게 대우하였는데, 항상 말하기를,
"임금 노릇하는 도리는 아랫사람에게 시기와 의심으로 대하면 아랫사람이 반드시 불안한 마음을 갖게 되므로 오직 성의를 미루어 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였다.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써 비록 남을 공격하고 남의 비밀을 들추어내는 정직한 체하는 자일지라도 반드시 받아들여 너그러이 용납하고 혹은 포상하여 장려하기도 하였다. 비록 초야의 미천한 사람의 말이라도 반드시 채택하여 기록하게 하고 혹은 벼슬을 제수하기도 하고 혹은 상을 내리기도 하였다. 화재로 집을 잃은 측근의 신하가 있었는데 특별히 호조에 명하여 구제하게 하였다. 그들이 죽었을 때 노고한 행의(行誼)가 있거나 혹은 청렴 근신(謹愼)으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관례로 보내는 부의(賻儀) 이외에 별도로 관재(棺材)를 하사하고 혹은 상수(喪需)·제수(祭需) 및 일꾼을 보내 도와주고 아울러 그들의 아내와 자식의 굶주림과 추위를 구제해 주었으며, 작고한 훈신(勳臣)의 아내와 자식에게도 그와 같이 하였다.
임인년111) 에 청나라에서 사사(査使)112) 를 보내어, 의주 부윤(義州府尹) 이시술(李時術)이 본부의 사람이 강을 건너가 나무를 베게 허락하였다 하여 사형으로 단안을 내렸다. 왕이 반복하여 굳이 변론했으나 해결되지 않자, 특별히 이시술에게 금 5백 근을 주어 그들에게 뇌물을 써서 화를 해결하는 자본으로 삼게 하였다. 그리고 사관(査官)을 특별하게 접대하고 이어서 사신을 보내어 구하였는데, 이시술이 이에 힘입어 완전히 모면하였다. 신하를 자신의 몸처럼 보살핌이 이와 같았다.
조정이 화목하지 못한 것을 고민하여 매양 서로 삼가고 협력하는 도리로 책려(策勵)하고, 방백과 수령이 조정을 하직하고 임지로 떠날 적에는 병이 있지 아니하면 곧 불러보고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물어본 다음 백성을 어루만지고 사랑하는 방도를 거듭 일러주었다. 또 전임(前任) 때의 폐막을 묻고는 아뢴 바에 따라 곧 변통하게 하였다.
인재를 수용(收用)하되 먼 지방의 사람도 빼놓지 않았다. 서북(西北) 양도(兩道) 지방은 길이 멀고 제주(濟州)는 바다 속에 있다 하여 특별히 중신과 근신(近臣)을 보내어 과거를 보여 인재를 뽑게 하고 백성을 구제하게 하니, 먼 지방 사람이 모두 고무되었다. 향천(鄕薦)113) 의 법을 거듭 밝히고 또 재신(宰臣)과 삼사(三司)로 하여금 인재를 별도로 천거하게 한 다음 재능이 특이한 자가 있으면 평상의 격례에 구애하지 않고 발탁해 썼다.
또 항상 이조에 신칙하여 전사한 사람 및 청백리의 자손을 녹용(錄用)하게 하고, 혼조(昏朝) 때 원통하게 죽은 사람에 있어서도 증직하라고 하였다. 그 뒤에 충신·현사(賢士) 중에 특출한 자는 모두 기록하여 혹은 사당을 세우거나 관작을 추증하기도 하고 혹은 비를 세우거나 무덤을 표지(表識)하기도 하고 그 후예에게 벼슬을 주기도 하고 혹은 그 호역(戶役)을 면제해 주기도 하는 등 표창하는 은전이 거의 빠뜨림이 없었다. 효자나 열녀 중에 행실이 드러난 자에게는 곧바로 정문을 세워서 표창하였는데, 서민과 노비에게도 두루 미치었다. 한번은 경연의 신하와 세조 때 성삼문(成三問)의 일에 대해 의논하게 되었는데, 왕이 이르기를,
"성삼문 등은명나라 방효유(方孝孺)114) 등과 같은 사람이다."
하였으니, 충의(忠義)를 포상하고 높이는 뜻이 이와 같았다.
백성의 일은 지성으로 근심하고 노고하였다. 만일 상위(象緯)115) 의 변고나 수재·한재를 만나면 곧바로 정전(正殿)을 피해 거처하고, 수라의 가짓수를 줄이고, 자기 자신에게 죄를 돌리고, 도움되는 말을 구하였는데, 전후로 내린 애통한 교서가 신민으로서 차마 듣지 못할 정도였다. 비가 내리기를 빌 적마다 친히 제사지내지 않더라도 반드시 궁중에서 재계한 다음 밤새도록 한데 서서 묵묵히 기도하고 기우제를 파할 때가 되어서야 편히 쉬었다.
만일 재난과 흉년을 만나면 신료들을 불러들여 재변을 사라지게 하는 계책을 강구하고 진구하는 정사를 크게 거행하였다. 그리하여 조세와 공물을 면제하고 포흠진 것을 감면하며 혹은 곡식을 옮겨다가 구제하기도 하고 혹은 죽을 쑤어 그들을 먹였다. 돌림병이 나돌면 양의(良醫)를 나누어 파견하여 약을 가지고 가서 구제하게 하였다. 또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여제(厲祭)를 지내고 국상(國殤)에게 제사지냈다. 그리고 조석으로 공급하는 어주(御廚)의 물품을 절약하고 초하루와 명절에 올리는 외방의 공물 헌납을 정지하고, 주방(酒房)을 파하고, 어구(御廐)의 말을 방출하였으며, 공상(供上)하는 일용의 물품에 이르기까지 또한 모두 재량하여 줄였다. 또 내장(內藏)116) 과 각 아문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진휼에 돕게 하였는데, 곤궁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푼 정사가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나, 오래 갈수록 더욱 독실하였다. 항상 말하기를,
"백성이 굶주리는 것을 생각할 때마다 먹는 것이 목에 넘어가지 않고 잠자리가 편치 않았다. 만일 한 가지라도 백성을 살릴 수 있는 일이 있으면 아까운 물건이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진휼을 파한 뒤에 또 어사를 보내어 제도(諸道)의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잘 거행했는지의 여부를 염탐하게 한 다음 승진시키거나 벌을 주었다. 경술·신해 두 해에 이르러서는 팔도가 크게 기근이 들고 이어서 큰 돌림병이 떠돌았다. 왕이 밤낮으로 애태우며 성의를 다해 구제하되 더욱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임자년117) 봄에 국내에 선유(宣諭)하여 여러 해 동안 포탈된 부세(賦稅)를 모두 탕감하게 하고 이어서 죄수 및 폐고(廢錮)된 사람을 모두 처결하여 방면하고 서용(叙用)하게 하니, 백성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 때문에 크게 흉년이 들어 길에 굶어 죽은 사람이 즐비하였으나 포악한 백성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근본이 흔들리지 않았다. 중외(中外)에서 물에 빠져 죽거나 불에 타서 죽거나 맹수에 해독을 입은 자가 있다고 아뢰면 또한 반드시 돌보아주게 하였다. 겨울철에 호위하는 병사가 추위에 고생하는 것을 염려하여 특별히 동옷을 하사하라고 명하였다.
한번은 능침(陵寢)을 참배하는데 벼를 수확하기 전의 절기였다. 왕이 영을 내려 이르기를,
"나를 수행하는 신하들과 상장(廂將)118) 이 경유하는 곳에 만일 풀 한 포기라도 손상하였을 경우 금령을 범한 견책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고, 행차가 지날 적에 또 점검해 보게 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에 왕이 이르기를,
"도로를 정비하되 가마가 겨우 지나갈 정도로 정비하고 혹시라도 도로를 넓게 확장하여 백성의 전지에 손해를 끼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온천 근처의 백성이 집을 비워 수행한 관원을 거처하게 하고 스스로는 한데에 거처한 것을 보고는 매우 불쌍히 여겨, 쌀과 콩을 주어 호구(糊口)의 밑천으로 삼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왔을 때 온천에서 돌아오는 측근의 신하가 있었다. 왕이 그에게 벼가 손상된 곳이 있던가라고 묻자, 그가 대답하기를,
"의장(儀仗)을 설치하였던 근처에 약간의 손상이 있었습니다."
하자, 왕이 댓가를 넉넉하게 보상하라고 명하였다. 그 불쌍하게 여기고 근심하고 사랑함이 이와 같았다.
일찍이 팔도의 군안(軍案)을 조사하여 어린아이 및 죽은 사람 2만 명이 납부해야 할 군포(軍布)를 면제해 주었다. 그리고 특별히 내수사(內需司)의 베를 내리고, 또 상평창(常平倉)의 은·베와 감영·병영에 저축된 것을 풀어서 내외(內外)의 비용에 보충하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 나라에는 본디 호구의 부세(賦稅)가 없고 다만 군졸이 납부한 베로 경상의 비용으로 써 왔는데 백성들이 오랫동안 이를 근심거리로 여겼다. 왕은 폐단의 원인이 어디에 있는 줄을 알고 갑인년119) 에 대간의 말을 채용하여 바야흐로 크게 변통해 영원한 제도로 만들려고 하였으나 미처 이 일을 시행하지 못하였다.
각사(各司) 노비들의 공포(貢布)가 다른데 비해 너무나 많아 오랫동안 고질적인 병폐가 되어 왔다. 왕이 특별히 내수사의 공부(貢賦)를 감하되 아울러 고루 감해주게 하였다. 내수사의 재물 용도가 이로 인하여 더욱 궁핍하게 되었으나 왕은 상관하지 않았다.
선조(先朝)에서 호남·호서에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하여 부세를 고르게 함으로써 백성들을 편리하게 하였으나, 호남의 산간 고을에서는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왕은 그 공적의 뒤를 이어서 더욱 구별 획정(劃定)하여 두루 시행하게 하니, 백성이 매우 편리하게 여겼다.
왕가(王家)의 법도가 매우 엄하여 궁중이 엄숙하였고 안팎의 구분이 엄격하였다. 재신(宰臣)과 간신(諫臣)이 일찍이 왕가의 일가붙이와 궁중의 일을 말하였는데, 사실과 틀린 것이 있었다. 왕이 이르기를,
"내가 진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사사로운 뜻이 없다면 사람들의 말이 반드시 이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그런 일이 없으면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비록 한 말이 사실과 틀렸다 하더라도 들은 바를 다 아뢰었을 뿐이니, 혐의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였다. 한번은 장번 내관(長番內官)120) 이 말미를 받아 고향에 내려갈 때에 외방에 폐해를 끼쳤는데, 내관을 꾸짖어 파면하고, 이를 알고서 아뢰지 않았다 하여 특별히 그 도의 감사를 추고하였다.
왕의 성품이 독실함을 좋아하고 명예에 가까운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궁중에서 좋은 일을 행하였을 때 혹 사람들에게 알리려고 하면 마음에 매우 싫어하므로 시종의 신하가 그 뜻을 알고 감히 외부에 퍼뜨리지 않았다. 검소하기를 더욱 좋아하여 겉옷을 제외하고는 비단옷을 입지 않았다. 한번은 병이 들어 신료를 대내(大內)에서 접견하였는데 방안에 깔아놓은 자리가 매우 낡았으나 바꾸지 않았다. 신료들이 물러나와서 감탄하였다.
왕이 정대한 학문에 마음을 두고 이단(異端)을 매우 미워하였다. 이미 두 이원(尼院)121) 을 철거하고 사찰에 있는 모든 선왕의 어판(御板)도 달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일찍이 이르기를,
"음사(淫祀)122) 가 도움은 없고 해만 있다는 것은 알기 어렵지 않다. 어리석은 여염의 지아비와 아낙네는 본디 책망할 것조차 없지만 사대부의 집안도 이러한 일이 있으니 내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어판(御板)이란 승가(僧家)에서 부처에게 물건·음식 등을 공양할 때에 어좌(御坐)를 죽 써 놓은 것인데 이것은 부처를 모시고 같이 먹는다는 것으로서 전대부터 전해 내려온 것이었다.
왕은 학교를 독실히 숭상하였다. 일찍이 태학(太學)에 나아가 친히 석전제(釋奠祭)를 지내고, 경서(經書)를 찍어 중외에 반포하였으며, 또 성균관(成均館)에 교정청(校正廳)을 설치하고 경서의 잘못된 자획(字劃)과 음의(音義)를 일체 모두 바로잡아 사방의 학자에게 혜택을 주었다.
뜻하지 않은 일에 경계심을 가져 군정(軍政)을 닦게 하고 장신(將臣)을 접견하여 이야기할 적에 피곤함을 잊었다. 혹은 원유(苑囿)에 나아가 군대를 사열하기도 하고, 혹은 거둥을 인하여 군사를 사열하기도 하였는데, 행진(行陣)하는 법과 병갑(兵甲)의 제도를 강구하지 않은 바가 없었다.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중국의 《기효신서(紀效新書)》 및 《연병실기(練兵實紀)》 등의 서적을 올리자. 왕은 즉시 반포하여 연습하게 하였다.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새로 설치하고 또 정초군(精抄軍)을 설치하여 병조 판서가 대장의 일을 겸임하게 하였다. 이것은 대개 정예롭고 용맹한 군사를 양성하고 양식과 기계를 비축하여 위급할 때에 대비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또 어사를 파견하여 호남·호서·영남 3도 및 제주를 순무(巡撫)하고, 해안의 방비를 자세히 살피고 수군(水軍)을 정돈하려 하였으나 미처 시행하지 못하였다. 평상시에 군사(軍事)를 수치(修治)하는 데에 뜻을 두고 무비(武備)를 잊지 않았는데 이는 숙위(宿衛)를 엄히 하고 변경을 튼튼히 하려 한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장차 신기(神機)123) 를 묵묵히 운용하여 천하의 변천을 조용히 살펴보면서 선왕의 뜻을 소술(紹述)하려는 것124) 이었다.
대신(臺臣)이 일찍이 필요치 않은 군사를 혁파하지 않는다고 간하자, 왕이 이르기를,
"내가 군사를 좋아하여 그런 것이 아니다. 만일 깊이 생각해 본다면, 내 뜻이 국가를 위망(危亡)의 형세에 두고 다만 군사를 일삼는 데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또 일찍이 측근의 신하들과 같이 큰 나라를 섬기고 이웃 나라를 사귀는 일에 대해 논한 적이 있었는데, 주상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하는 자가 있었다. 왕이 탄식하며 이르기를,
"이웃 나라와 사귀고 큰 나라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는 사세가 같지 않은 것이 있는 것이다. 내가 나이 어리고 덕은 없지만 조종(祖宗)과 부형의 백대 원수를 어찌 감히 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북쪽 변방의 수령들은 무관이었으므로 탐욕하고 방종하였다. 다시 병마 평사(兵馬評事)의 제도를 설치하고 반드시 이조의 낭관(郞官)과 옥당의 관원을 임명해 보내어 그들을 견제하게 하였다.
작고한평사(評事) 정문부(鄭文孚)가 임진란을 당하여 북방에서 공로가 있었는데, 도신(道臣)의 청으로 인하여 특별히 품계를 올려 좌찬성을 추증하게 하고 같은 시대 남·북도(南北道)의 의사(義士) 20명에게 모두 포상하라고 명하니, 함경도 한 지방이 격려되었다.
왜국 사신이 올 적에도 반드시 측근의 신하를 엄선하여 국경에서 맞아 위로하게 하되 그들의 환심을 잃지 않게 하였다. 왜국 사신이 웅천(熊川)에다 왜관(倭館)을 옮기겠다고 굳이 청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는 대개 내지(內地)에 옮김으로써 후일의 근심을 끼칠까 염려한 것이었다.
왕은 옥사를 더욱 자세히 살피고 신중히 처결하였다. 매양 큰 추위와 심한 더위에는 곧 승지로 하여금 전옥서(典獄署)에 달려가서 죄질이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일찍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해조(該曹)로 하여금 긴급한 죄수를 곧바로 처결하게 하되, 비록 하루에 재차 복심(覆審)하게 되더라도 상규(常規)에 구애하지 말도록 하라."
하고, 또 일찍이 이르기를,
"사형수를 세 차례 복심하게 하는 뜻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마땅히 죽어야 할 죄를 지은 자는 반드시 죽이려 하고 마땅히 죽지 않아야 할 자는 반드시 죽이지 않으려 하는 것이 곧 그 본의이다."
하였다. 또 추운 철에 오래 갇혀 있는 것을 염려하여 양식과 동옷을 주라고 명하였다.
왕이 평소 병환이 있었으나 정사의 처리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병이 조금 나으면 항상 승지로 하여금 문서를 가지고 입시(入侍)하도록 하였다. 내직과 외직에 결원이 생기면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곧바로 차임하여 충원하게 하고 며칠을 지체한 적이 없었는데, 대개 직무가 폐지되어 백성에게 폐단이 미칠까 염려한 것이다.
갑인년125) 에 대비(大妃)126) 가 승하하였다. 왕이 항상 부왕(父王)을 일찍 여읜 것을 슬퍼하다가 또 모비(母妃)를 오래 봉양하지 못한 것을 지극한 한으로 여겨 거친 밥을 들고 맹물을 마시며 슬퍼함이 예절에 지나쳤다. 신하들의 굳이 간하며 권도를 따르시라는 청을 억지로 부응하기는 하였으나, 음식을 대할 적마다 울먹이며 스스로 감내하지 못하였다. 무릇 장사나 제사에 드는 물품과 예로 섬기는 절차를 반드시 정성스럽고 경건하게 하였다. 대비가 일찍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었는데, 이때 와서 창경궁(昌慶宮)에 반우(返虞)127) 하고 왕도 옛 거처로 돌아갔다. 사물이 눈에 부딪힐 적마다 감회가 복받쳐 슬픔이 더욱 간절해 종일토록 묵묵히 앉아 있으면서 잠시도 슬픔을 잊지 못하였다. 옆에 모시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감동되어 슬퍼하였다.
혼전(魂殿)을 받들어 모시기를 일체 평소처럼 하였고 철따라 나는 음식물을 올리는 것이 산릉(山陵)에 잇따랐는데, 전(奠)을 드릴 적에는 반드시 친히 점검하고 감독하여 올렸다. 기일 하루 전에 친히 살펴보지 못하였을 경우에는 그 정결 여부에 대해 물어보고 이틀날 아침에 또 연달아 물어 보았다. 왕의 병이 위독할 적에 창 밖의 바람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것은 곡식을 해치는 바람이 아닌가. 내가 어찌 또 이 소리를 듣는단 말인가."
하였다.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백성을 근심하는 마음이 임종 전까지 이처럼 열렬하였다. 염습(斂襲)에 필요한 유갑(襦匣)·의복 등을 모두 궁내에서 준비하고 호조로 하여금 시장 백성에게 한 자, 한 치도 거두지 못하게 하였는데, 이는 대개 우리 중궁(中宮)128) 및 사왕(嗣王)129) 이, 평일 백성을 걱정하고 검소를 숭상하는 왕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행한 것이었다.
중궁(中宮)은 김씨(金氏)로 본관은 청풍(淸風)이다. 영의정 김육(金堉)의 손녀이고 중종조의 현신(賢臣) 대사성(大司成) 김식(金湜)의 6대손이다. 1남 3녀를 낳으셨는데, 아들은 우리 사왕(嗣王)130) 전하이다. 큰 따님은 명선 공주(明善公主)이고, 다음 따님은 명혜 공주(明惠公主)인데, 모두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고, 막내 따님은 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출가하지 않았다.
사왕(嗣王)의 비(妃)는 김씨(金氏)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광성 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의 딸이다. 신해년131) 봄에 책봉을 받아 빈(嬪)이 되었고, 지금 중궁의 자리에 올랐다.
변변치 못한 신이 지식이 없는데, 이미 사왕(嗣王)의 명을 받아 왕의 말씀과 행적에 대한 기년(紀年)을 위와 같이 대략 차례대로 서술한 다음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왕은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굳세고 침착한 자질을 가진데다가 너그럽고 따스한 덕이 있고 넓고 큰 도량이 있었다. 효도와 우애는 천성으로 타고났고 자애로운 심성은 아래 백성들에게 믿음을 받았다. 재위한 지 16년 동안에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의 일에 애쓴 마음은 신명(神明)에게 질정(質正)할 수 있다. 몸을 검속(檢束)하되 부족한 것처럼 하고 선(善)을 구하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으며, 하루 이틀 사이 번거로운 정무에 경계를 다하고 조심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언제나 가졌다.
비록 좋지 못한 운과 어려운 때를 만나, 수재·한재·풍재(風災)·상재(霜災)가 없는 해가 없었으며 백성들이 병들고 외세가 핍박하였으나, 왕은 근심하고 노고하며 가다듬음으로써 하늘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걱정하고 충애(忠愛)함으로써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였다. 안으로는 음악이나 여색(女色)의 즐거움을 누리지 않았고 밖으로는 놀이나 사냥의 즐거움을 추구함이 없었다. 그리하여 무릇 전대 제왕이 욕심껏 방종하고 사정(私情)을 행하며, 법도를 패하고 덕을 어지럽게 했던 일들이 마음이나 행동에 파고들지 못하였다.
진하(陳夏)를 아울러 썼으나 경력(慶曆)의 치세(治世)에 해가 되지 않았고132) , 왕려(王呂)가 권세를 부렸으나 실로 중조(中朝)의 탄식이 나오게 하여 원우(元祐)의 태평을 이루었다.133) 전례(典禮)가 밝혀지자 인륜이 펴고 사설(邪說)이 사라짐에 인심이 바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입으로 외우고 마음 속으로 말할 적마다 ‘우리 왕의 덕은 한 문제(漢文帝)와 송 인종(宋仁宗)도 앞서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임금도 무시하고 아버지도 무시하는[無君無父] 논설을 물리쳐서134) 온 세상에 군신의 의리와 부자의 윤기가 나타나도록 함에 이르러서는 또 사도(斯道)135) 에 큰 공로가 있었다. 비록 신민들이 복이 없어 하늘이 장수를 주지는 않았으나, 그 자애로운 마음과 자애롭다는 소문이 사람에게 깊이 감명되어 실로 영구히 잊지 못하고 생각하게 되었으니, 우뚝이 동방에 성덕(盛德)의 임금이 되었다. 아, 아름답도다.
옛날 주(周)나라의 왕계(王季)는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사랑을 쌓아 문왕(文王)의 빛난 덕과 무왕(武王)의 큰 공렬(功烈)을 이룩하게 해 주었고136) , 한(漢)나라의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는 몸소 공손과 검소를 행하여 건원(建元)의 성대한 정벌의 공을 이루도록 터전을 만들어 주었으며137) , 송(宋)나라 인종(仁宗)은 지극한 정성과 깊은 자애로 한결같은 덕을 지녔는데 군자(君子)가 말하기를, ‘사직(社稷)이 오래 지속되어 마침내 반드시 힘입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리 현종 대왕(顯宗大王)으로 말하면, 잔포(殘暴)한 자를 교화시키고 사형을 없앨 수 있는 덕138) 과 백성을 화하게 하고 빨리 덕을 공경하는[諴小民疾敬德] 도139) 는 진실로 옛날 명철하고 올바른 임금과 비해 볼 때 손색이 없다. 내가 적은 기년(紀年)의 글을 한번 보았으면 한다. 첫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고, 둘째도 우리 백성이다.’ 하여 하나의 생각도 백성에게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정이 깊어서 교화가 믿음을 받게 되고, 백성이 감화됨에 하늘이 감응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이 장차 우리 문자 문손(文子文孫)이신 유자왕(孺子王)140) 을 크게 인도해 주어 옛 나라를 새롭게 하고 국운을 길이 누리게 하며,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척하는 《춘추(春秋)》의 의리를 이어 우리 국가의 억만년토록 끝없는 아름다움을 누리게 할 것이다.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자헌 대부(資憲大夫) 이조 판서(吏曹判書) 겸 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事) 성균관 좨주(成均館祭酒) 오위 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신(臣) 윤휴(尹鑴)는 지어 올림.
- 【태백산사고본】 23책 1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81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역사-편사(編史)
- [註 001]신사년 : 1641 인조 19년.
- [註 002]
그 지방 : 심양.- [註 003]
증선지(曾先之) : 원(元)나라 여릉(廬陵) 사람인데, 자(字)는 종야(從野)이다. 《십팔사략(十八史略)》을 지었다.- [註 004]
천경(踐更) : 징발된 수졸의 복무 기간.- [註 005]
기축년 : 1649 인조 27년.- [註 006]
신묘년 : 1651 효종 2년.- [註 007]
가례(嘉禮) : 국조 《오례의(五禮儀)》에 규정한 오례(五禮) 중의 한 가지로 경사스러운 의례(儀禮)라는 뜻. 임금의 성혼(成婚)·즉위(卽位) 또는 왕세자·왕세손의 책봉·성혼 등의 예식. 여기서는 성혼(成婚)을 말함.- [註 008]
임진년 : 1652 효종 3년.- [註 009]
선성(先聖) : 공자를 말함.- [註 01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11]
대왕 대비(大王大妃) : 현종의 조비(祖妃)로 곧 인조의 계비(繼妃) 자의 장열 왕후(慈懿莊烈王后) 조씨(趙氏).- [註 012]
대행 대왕(大行大王) : 임금이 죽은 뒤에 아직 시호를 올리기 전의 칭호, 여기서는 효종을 가리킴.- [註 013]
성복(成服) : 초상이 나서 사흘이나 닷새 뒤에 처음으로 상복(喪服)을 입는 일.- [註 014]
예(禮)에 ‘임금을 위해 참최(斬衰)를 입고 내종(內宗)·외종(外宗)이 모두 참최(斬衰)를 입는다.[爲君斬內外宗皆斬] : 《예기(禮記)》 잡기 하(雜記下)에 "외종(外宗)이 군부인(君夫人)을 위해 입는 복제(服制)도 내종(內宗)과 같다.’ 하였는데, 그 소(疏)에 ‘임금의 내종(內宗)이 임금을 위해 다 참최(斬衰)를 입고 부인을 위해 자최(齊衰)를 입으니 임금의 외종(外宗)의 딸도 임금 및 임금 부인을 위해 입는 복제가 내종과 같다.’라고 하였다. 내종은 임금의 동성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외종은 임금의 고모·누이의 딸로 관작이 있는 사람. 《주례(周禮)》 춘관(春官) 서관(序官).- [註 015]
네 가지 설[四種說] : 《의례(儀禮)》 부위장자(父爲長子) 조의 소(疏)에 ‘비록 승중(承重)하였다 하더라도 삼년복을 입지 못하는 것이 네 가지가 있다. 첫째는, 정체(正體)나 전중(傳重)하지 못한 것이니 적자(嫡子)가 폐질(廢疾)이 있어 종묘의 주사(主祀)를 감당하지 못함을 말함이고, 둘째는 전중(傳重)하였으나 정체(正體)가 아닌 것이니, 서손(庶孫)이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세째는 체(體)이기는 하나 정(正)이 아닌 것이니,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가 된 것이 그것이고, 네째는 정통이기는 하나 체(體)가 아닌 것이니 적손(適孫)을 세워 후사로 삼은 것이 그것이다.’ 하였다.- [註 016]
선왕조(先王朝) : 효종.- [註 017]
대의를 천하에 펴려고 하였으니 : 효종이 북벌(北伐)하여 병자 호란의 수치를 씻고자 한 것을 말한다.- [註 018]
서명(叙命) : 서용하라는 왕의 명.- [註 019]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 [註 020]
삼세(三稅) : 전세(田稅)·공포(貢布)·군포(軍布).- [註 021]
수미(收米) : 세수 미곡.- [註 022]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 비(妃) 윤씨(尹氏).- [註 023]
태상황(太上皇) : 자리를 내주고 생존한 황제를 높여 부르는 말.- [註 024]
사군(嗣君) : 왕통을 이은 임금.- [註 025]
황면재(黃勉齋) : 황간(黃幹).- [註 026]
연기(練期) : 소상(小祥)을 말함.- [註 027]
문순공(文純公)이황(李滉)이 기대승(奇大升)의 논평을 듣고 깜짝 놀라 옛날의 견해를 바꾸면서 : 선조 즉위년, 즉 1567 명종(明宗)의 상에, 공의전(恭懿殿:인종 비(仁宗妃) 박씨(朴氏)를 말함)이 명종에게 수숙(嫂叔)이 되어 복(服)이 없어야 한다고 의논이 정해졌는데, 이황도 그 설을 인정하였다. 기대승은, "형제가 전국(傳國)하여 차례를 이었으니 나름대로 군신·부자의 의리가 있는데 어찌 복이 없을 리가 있겠는가. 기복(朞服)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니, 퇴계가 크게 깨닫고, 조정에 글을 보내어 말하기를 "군자가 있지 않았으면 어떻게 국가가 제 구실을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당시 사람들이 기대승의 변례(變禮)에 통달한 것을 훌륭하게 여기고 퇴계가 선한 말을 선뜻 따르는 것을 칭찬하였다.《고봉집(高峰集)》 속집(續集). 기명언(奇明彦)의 명언은 기대승의 자(字).- [註 028]
선왕 : 효종을 말함.- [註 029]
‘죄없는 선비를 죽인다.’ : 《맹자(孟子)》 이루(離婁)에 나오는 말로, 맹자(孟子)가 말하기를 "죄없는 선비를 죽이면 대부(大夫)가 그 나라를 떠나가야 한다." 하였다.- [註 030]
흉인(凶人) : 윤선도를 가리킴.- [註 031]
‘제갈양이 마속을 죽인 일’ : 삼국(三國) 촉(蜀)의 제갈양(諸葛亮)이, 자식처럼 사랑하는 장수 마속(馬謖)이 가정(街亭)의 싸움에서 제갈양의 명령을 어기고 대패하자, 눈물을 흘리며 그를 목베어 죄를 다스리고 사기를 고무시킨 일.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마속전(馬謖傳).- [註 032]
계복(啓覆) : 임금에게 아뢰어 사형수를 다시 심리하는 일.- [註 033]
음사(淫祀) : 내력이 바르지 못한 귀신에게 지내는 제사.- [註 034]
공민왕은 이존오(李存吾)의 소를 불태웠고, : 공민왕 15년(1366)에 이존오(李存吾)가 우정언(右正言)으로 있을 적에 신돈의 전횡에 분격하여 소를 올려 탄핵하자, 왕이 크게 노하여 그 소를 불태우게 하였다. 뒤에 신돈이 모반하자 신돈을 주벌하고, 이존오의 충성을 사모하여 증직하고 10세 된 이존오의 아들에게 장사직장(掌事直長)을 제수하였다. 《석탄집(石灘集)》 하(下).- [註 035]
광해주(光海主)는 정온(鄭蘊)의 소를 불태웠습니다. : 광해군 6년(1614) 정온(鄭蘊)이 부사직(副司直)으로 소를 올려 영창 대군(永昌大君)의 처형이 인륜에 어긋남을 지적하고 그 가해자인 강화 부사(江華府使) 정항(鄭沆)을 참수하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광해가 크게 노하여 승정원을 몹시 꾸짖고 그 소를 불태우게 하였다. 《동계집(桐溪集)》.- [註 036]
세실(世室) : 오랜 세대를 두고 제사지내는 위패(位牌)를 모시는 종묘의 신실(神室).- [註 037]
사친(四親) : 고조·증조·할아버지·아버지를 말함.- [註 038]
양묘(兩廟) : 인종·명종.- [註 039]
역사(逆祀) : 낮은 분을 위에, 높은 분을 아래에 제사지내는 것. 《좌전(左傳)》 문공(文公)의 2년조에 ‘8월 정묘일(丁卯日)에 태묘(太廟)에 제사가 있어 희공(僖公)의 신주를 위에 올려 모셨으니, 역사(逆祀)이다.’ 하였다. 그 주석에 ‘희공(僖公)이 민공(閔公)의 형이고 민공과 부자 사이가 되지는 않으며, 일찍이 신하였으므로 위치가 아래에 있어야 하는데, 민공의 윗자리에 있게 하였으므로 역사(逆祀)라 한다.’ 하였다.- [註 040]
‘단선(壇蟬)의 제도’ : 단과 선은 제사지내는 장소. 흙을 모은 것을 단, 땅을 깎은 것을 선이라 한다.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천자는 7묘(七廟)와, 단(壇) 하나, 선 하나를 세운다……. 먼 조상을 위해 조묘 둘을 만들어 제사지낸다. 조묘에서 제사받을 수 없는 조상은 단에서 제사지내고, 단에서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선에서 제사지낸다. 단과 선에서 제사지내는 조상은 기도할 일이 있어야 제사지내고, 기도할 일이 없으면 제사도 지내지 않는다. 선에서도 제사를 받을 수 없는 조상은 이를 귀(鬼)라고 부르는데, 이는 기도할 일이 있어도 제사지내지 않는다." 하였다.- [註 041]
천험(天險) : 천연의 험요(險要). 곧 오르거나 넘볼 수 없는 것을 비유함.- [註 042]
삭선(朔膳) : 매월 초하룻날에 각도에 나는 물건으로 임금이나 왕비에게 올리는 음식상.- [註 043]
혼조(昏朝)에서 절개를 세웠고, : 윤선도가 광해 8년(1616)에 성균관 유생으로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 일당의 횡포를 들어 상소했다가 경원(慶源)에 유배되었다.- [註 044]
무술년 : 1658 효종 9년.- [註 045]
내사옥(內司獄) : 내수사 안에 있는 감옥.- [註 046]
갑진년 : 1664 현종 5년.- [註 047]
실봉(實封) : 어전에서 개봉하게끔 견고하게 봉한 편지.- [註 048]
풍정연(豊呈宴) : 임금 내외의 경사를 경하하기 위해 무엇을 바치는 잔치 자리.- [註 049]
아병(牙兵) : 대장 휘하에 있는 병정.- [註 050]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51]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52]
을사년 : 1665 현종 6년.- [註 053]
영호 군병(迎護軍兵) : 맞이하여 호위하는 군병.- [註 054]
별조(別造) : 특별 제조.- [註 055]
을미년 : 1655 효종 6년.- [註 056]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057]
무신년 : 1668 현종 9년.- [註 058]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59]
신덕 왕후(神德王后) : 태조의 계비(繼妃) 강씨(康氏).- [註 060]
염분포(鹽盆布) : 소금 굽는 가마에 대해 물리는 세포(稅布)임.- [註 061]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062]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63]
명년 : 1672 현종 13년.- [註 064]
계축년 : 1673 현종 14년.- [註 065]
기유년 : 1669 현종 10년.- [註 066]
지난해 : 1671 현종 12년.- [註 067]
효고(孝考) : 효종.- [註 068]
편배(編配) : 유배 죄인을 배치하는 것.- [註 069]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70]
노기(盧杞) : 당 덕종(唐德宗) 때의 간신. 덕종 때 동중서 문하 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발탁되었다. 천성이 음험하여 정치를 크게 어지럽혔다. 《당서(唐書)》 권223 하.- [註 071]
한(漢)나라 때에 쌀이 붉게 썩고 돈꿰미가 썩어 셀 수 없는 것 : 한 문제(文帝)·경제(景帝) 때에 공순하고 검소를 숭상하며 중농 정책을 써서 창고에 곡식이 가득 차고 곳간에 재화(財貨)가 남아 돌아, 서울의 돈이 수만 금으로 돈꿰미가 썩어서 셀 수 없고, 태창(太倉)의 곡식이 너무 묵어 창고에 넘쳐서 밖에 노적하였는데, 쌀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을 정도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8 효경 황제(孝景皇帝).- [註 072]
당(唐)나라 때에 쌀 한 말 값이 3전이었던 것 : 당 태종(唐太宗) 정관(貞觀) 원년에 관중(關中) 지방에 흉년이 들어 쌀 한 말 값이 비단 한 필이었는데, 3년에 풍년이 들어 흩어졌던 자가 고향에 돌아오고 쌀 한 말 값이 3, 4전에 불과하고 1년에 사형을 결단한 것이 겨우 29인이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6 당기(唐記) 태종 황제(太宗皇帝) 상(上).- [註 073]
방악(方岳) : 감사를 말함.- [註 074]
명농(明農) : 농인(農人)을 밝게 가르침.- [註 075]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76]
임자년 : 1672 현종 13년.- [註 077]
경술년 : 1670 현종 11년.- [註 078]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79]
교산(喬山)의 염려 : 산릉(山陵)이 무너지는 염려. 교산(喬山)은 황제(皇帝)를 장사지낸 산. 황제를 교산에 장사지내니, 산릉(山陵)이 홀연히 무너져서 무덤은 비어 있고 시체가 없어졌으며 다만 칼과 신발만이 있을 뿐이었다 한다. 《포박자(抱朴子)》 극언(極言).- [註 080]
장릉(長陵)의 흙을 한 줌 가져가는 자가 있더라도 : 장릉(長陵)은 한 고조(漢高祖)의 능. 곧 한 고조의 능을 파헤침을 말한다. 한 문제(漢文帝) 때에 도적이 한 고조의 사당에 있는 옥 가락지를 훔쳐 갔는데, 정위(廷尉) 장석지(張釋之)가 기시형(棄市刑)에 처하자, 한 문제는 멸족(滅族) 명을 적용하지 않았다 하여 대노하였다. 장석지는 "지금 종묘의 기구를 훔쳤는데 멸족한다면, 가령 어리석은 백성이 장릉(長陵)을 파헤친다면 폐하께서 무슨 법으로 치죄하겠습니까." 하였다. 《한서(漢書)》 장석지전(張釋之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7, 《한서(漢書)》 태종(太宗) 효문 황제(孝文皇帝) 상(上).- [註 081]
정미년 : 1667 현종 8년.- [註 082]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83]
10일 안에 이른 연왕(燕王)의 글과 : 한 소제(漢昭帝) 때에 상관걸(上官桀)이 대장군 곽광(霍光)을 제거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연왕 단(燕王旦)의 상서(上書)를 가짜로 만들어 곽광의 죄를 고발하게 하였다. 이 말을 듣고 곽광이 갓을 벗고 소제에게 사죄하니 소제는 "짐은 이 상서가 거짓임을 알았다. 장군은 죄가 없다. 장군이 교위(校尉)를 조용(調用)한 것이 10일이 못 되었는데 연왕이 그 일을 어떻게 알겠는가?" 하였다. 이때 소제의 나이는 14세였는데 상서한 자는 과연 도망하였다. 연왕은 소제의 형으로 제위에 오르지 못한 것을 원망하다가 이를 이용하여 곽광을 모반자로 몰아 내치려 한 것이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효소 황제(孝昭皇帝).- [註 084]
내탕(內帑) : 임금의 사적 재물을 넣는 곳간.- [註 085]
신해년 : 1671 현종 12년.- [註 086]
일죄(一罪) : 십악(十惡)에 해당하는 중죄. 사형.- [註 087]
연산(燕山) : 중국 하북성(河北省) 계현(薊縣) 동남에 있는데, 뒤에 이곳에 연산부(燕山府)·연경로(燕京路) 등을 두었다. 원나라 때에는 연경(燕京)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곧 원의 수도였던 연경(燕京)을 말한다. 고려는 충렬왕(忠烈王) 이후 원의 부마국(駙馬國)이 되어 원의 간섭을 받았으며 왕실의 호칭도 격하되었다.- [註 088]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89]
인선 왕후(仁宣王后) : 효종비 장씨(張氏).- [註 090]
대왕 대비(大王大妃) : 인조 계비(仁祖繼妃) 조씨(趙氏).- [註 091]
중서부(衆庶婦) : 여러 며느리.- [註 092]
기해년 : 1659 효종 10년.- [註 093]
정부의 동·서벽(東西壁), : 의정부의 좌참찬(左參贊)과 우참찬. 관리가 출근하여 모여 앉을 때 좌석의 동쪽에 앉는 벼슬을 동벽(東壁), 서쪽에 앉는 벼슬을 서벽(西壁)이라 한다. 의정부의 좌참찬, 홍문관의 응교(應敎) 등이 동벽에 해당되고, 의정부의 우참찬·홍문관의 교리·수찬 등이 서벽에 해당한다.- [註 094]
정희 왕후(貞熹王后)가 장순 왕후(章順王后)의 상에서와 : 정희 왕후는 세조비(世祖妃) 윤씨(尹氏)이고, 장순 왕후(章順王后)는 예종비(睿宗妃) 한씨(韓氏)이다. 장순 왕후가 정희 왕후의 며느리가 되며, 세조 7년(1461)에 정희 왕후보다 먼저 승하하였다.- [註 095]
소혜 왕후(昭惠王后)가 공혜 왕후(恭惠王后)의 상에서 : 소혜 왕후(昭惠王后)는 덕종비(德宗妃) 한씨(韓氏)이고, 공혜 왕후(恭惠王后)는 성종비(成宗妃) 한씨(韓氏)이다. 공혜 왕후는 소혜 왕후의 며느리가 되는데 성종 5년(1474)에 소혜 왕후보다 먼저 승하하였다.- [註 096]
대행 대왕(大行大王) : 죽어서 시호를 올리기 전의 임금. 여기서는 효종.- [註 097]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입고 : 공의 중자(公儀仲子)의 상(喪:중자〈仲子〉의 아들 상임)에 단궁(檀弓)이 문복(免服)을 하였다. 문복은 5세친(世親) 즉 10촌에게 입거나, 붕우로서 다른 나라에서 죽어 주인이 없는 자에게 입는 복인데, 중자(仲子)가 단궁에게 5세친이 아니고 또 상이 다른 나라에서 죽은 자가 아닌데, 단궁이 문복을 입었다. 이것은 중자(仲子)가 적손(嫡孫)을 버리고 그의 서자(庶子)를 세웠으므로 단궁이 입어서는 안 될 복(服)을 입음으로써 중자(仲子)가 세워서는 안 될 서자(庶子)를 세운 그것을 기롱한 것이다. 단궁은 예를 아는 사람으로 이것이 예에 합당하지 않음을 중자의 형인 자복 백자(子服伯子)에게 물었고, 자유(子游)도 공자(孔子)에게 물었는데, 공자는 "손자를 세워야 한다."고 하였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098]
자유(子游)가 최복(衰服)을 입었다 : 사구(司寇) 혜자(惠子)의 상(喪)에 자유(子游)가 마최(麻衰)를 입고 숫삼의 요질(腰絰)을 띠고 조문했다. 혜자의 형인 문자(文子)가 이를 사양하였다. 원래 친구의 상에는 조복(朝服)을 입고 고운삼의 요질을 두르는 것이 예이다. 그러나 자유는 혜자가 적자(嫡子) 호(虎)를 폐하고 서자를 세웠으므로 짐짓 예가 아닌 옷차림으로 조문했던 것이다. 혜자의 형 문자가 깨닫지 못하자, 자유가 자기가 서야 할 손의 자리에 서지 않고 신하의 위치에 서니, 문자는 자유의 행동이 기롱의 뜻임을 깨치고 혜자의 적자(嫡子)인 호(虎)를 붙들고 들어와 남향하여 서게 하였다 한다. 《예기(禮記)》 단궁(檀弓) 상.- [註 099]
앞뒤 : 앞은 효종 대왕의 상, 뒤는 비인 인선 왕후의 상임.- [註 100]
재려(齎廬) : 인선 왕후의 승하로 현종이 재계하는 상려(喪廬).- [註 101]
남군(南郡) : 남쪽에 있는 온양(溫陽)을 말함.- [註 102]
옛 사람이 말하기를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 : 맹자(孟子)가 성간(成覵)이 제 경공(齊景公)에게 이른 말을 인용하여, 등문공(滕文公)에게 성선(性善)을 말하고 선정(善政)을 행할 것을 권면한 것이다. ‘순(舜)은 어떠한 사람이며 나는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말은 안연(顔淵)의 말이고, ‘문왕(文王)은 내 스승이다.’는 말은 주공(周公)의 말을 공명의(公明儀)가 인용하여 한 말이다. 《맹자(孟子)》 등문공(滕文公) 상.- [註 103]
한 무제가 제 양공(齊襄公)이 복수한 말을 인용한 것 : 한 무제는 태초(太初) 33년(102)에 완(宛)을 정벌하고 난 그 위세로 호(胡)를 곤궁하게 하려 할 의향을 두어 조령(詔令)을 내려 말하였다. "고제(高帝)가 평성(平城)의 근심을 끼쳐두셨고, 고후(高后:한 고조의 황후인 여후) 때에 선우(單于)의 서간(書簡)이 아주 패역(悖逆)하였다. 옛날 제 양공(齊襄公)이 9세(世)의 원수를 갚으니, 《춘추(春秋)》에서 위대하게 여겼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세종 효무 황제(世宗孝武皇帝) 하.- [註 104]
윤대(輪對)의 뉘우침 : 윤대는 서역(西域)에 있던 지명으로 한 무제(漢武帝) 때에 공물을 바쳤고, 한(漢)에서 전졸(田卒) 수백 인과 관리를 두어 통제하였는데 한 무제 말년에 윤대를 포기하고 애통(哀痛)의 조서를 내려 기왕의 정벌로 국력을 소모하고 백성을 고통스럽게 한 것을 뉘우쳤다. 《한서(漢書)》 서역전(西域傳),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무제(武帝) 하.- [註 105]
신선 구하는 일을 파할 수 있었던 것 : 한 무제(漢武帝)가 즉위한 이래 신선술을 좋아하여 승로반(承露盤)을 만들고, 방사(方士)를 보내어 신선을 구하는 등 매우 미혹되었는데, 말년에 신선을 기다리는 방사(方士)를 다 파하고 신하들을 대하여 스스로 탄식하기를 "내가 전에 어리석어서 방사(方士)에게 속임을 당하였는데, 천하에 어찌 선인(仙人)이 있겠는가. 다 요망한 것일 뿐이다. 음식물을 조절해 먹고 약을 먹으면 병이 조금 적을 수 있을 뿐이다."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11 한기(漢紀) 무제기(武帝紀) 하.- [註 106]
아버지를 협제(脅制)하고, 오랑캐를 신하로 삼았다 : ‘아버지를 협제(脅制)하였다.’는 것은, 수 공제(隋恭帝) 때에 천하가 어지러우므로 이세민(李世民:당 태종의 성명)이 천하를 평정하려는 뜻을 품고 아버지 당공(唐公) 이연(李淵)에게 기병(起兵)할 것을 권하자, 듣지 않으므로 진양궁인(晋陽宮人) 배적(裵寂)을 시켜 이연을 모시고 술을 먹으면서 강요하게 하여 소청을 얻었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4 수기(隋紀) 공제(恭帝).- [註 107]
건성(建成)의 일 : 건성(建成)은 당 고조(唐高祖)의 태자(太子)이며 당 태종(唐太宗)의 형. 당 태종이 진왕(秦王)으로 있을 적에 공이 많고 명망이 높자, 건성이 원길(元吉)과 공모하여 당 태종을 참소하여 죽이려 하였다. 당 태종이 건성(建成)을 사살하고 심복인 울지경덕(尉遲敬德)이 제왕(齊王) 원길(元吉)을 사살하였다. 《통감절요(通鑑節要)》 권36 당기(唐紀) 태종(太宗) 상.- [註 108]
송 태조(宋太祖)가 한잔 술로 병권을 해제한 일 : 송 태조가 무장으로 즉위한 건륭(建隆:960∼962) 이래로 번진(藩鎭)의 병권을 해제하고 장리(贓吏)는 중법으로 다스렸다. 오월(吳越) 전숙(錢俶)이 내조(來朝)하자 재상들은 전숙을 억류하고 그 영지를 취하자고 청하였으나, 송 태조는 듣지 않고 귀국시켰다. 또 남한(南漢)의 유장(劉鋹)이 그 나라에 있을 적에 짐독(酖毒)을 술에 타서 신하를 즐겨 죽였다. 유장이 내조(來朝)하자 송 태조가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니, 유장은 독약이 들어있는 것으로 의심하고 술잔을 받들어 올리고 울며 아뢰기를 "신의 죄가 용서받지 못하겠으나 폐하께서 이미 죽이지 않으셨으니 대량(大梁)의 포의(布衣)가 되어 태평 성세를 보기를 원하오며 감히 이 술은 마시지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송 태조는 웃으며 "짐은 성심을 미루어 남에게 대하는데 어찌 그처럼 하겠는가." 하고 유장의 술잔을 가져다 자신이 마시고 별도로 술을 따라 유장에게 주었다. 《송사(宋史)》 권1 권3 송태조 본기(宋太祖本紀).- [註 109]
송 진종(宋眞宗)이 천서(天書)로써 태묘(太廟)에 고한 것 : 천서(天書)는 송 진종(宋眞宗) 때에 하늘로부터 내려온 글. 송 진종이 글안(契丹)과 전연(澶淵)의 맹약 맺은 것을 수치로 여겨 천서(天瑞)에 의해 봉선(封禪)하여 사해(四海)를 진정할 양으로 꿈에 신인이 천서(天書)를 내렸다고 거짓말을 하고 그것을 승천문(承天門)과 태산(泰山)에서 얻어서 신하들과 함께 광적으로 기뻐하였으며 대중상부(大中祥符) 6년(1013) 12월에 천서(天書)를 조원전(朝元殿)에 바치고 마침내 옥청궁(玉淸宮)과 태묘(太廟)에 고하였다. 《송사(宋史)》 권6 권7 진종 본기(眞宗本紀).- [註 110]
삼재(三宰) : 좌참찬을 가르킴.- [註 111]
임인년 : 1662 현종 3년.- [註 112]
사사(査使) : 어떤 일의 조사를 위해 온 사신.- [註 113]
향천(鄕薦) : 시골 주군에서 인재를 천거하는 것.- [註 114]
방효유(方孝孺) : 명(明)나라 태조(太祖), 혜제(惠帝) 때의 명신. 자(字)는 희직(希直). 혜제(惠帝) 건문(建文) 때에 시강 학사(侍講學士)가 되었다. 연왕(燕王:뒤에 성조〈成祖〉임)의 군사가 들어와서 그를 불러 조서(詔書)를 초하게 하자, 방효유는 최질(衰絰)로 이르러 호곡(號哭) 소리가 전폐(殿陛)에 사무쳤다. 성조(成祖)가 의자에서 내려와서 위로하고 좌우 신하들을 돌아보고 붓과 종이를 주게 하며 말하기를, "조서를 선생이 아니면 초를 할 수 없다." 하였다. 방효유는 붓을 땅에 던지며, "죽이면 곧 죽을 뿐이지 조서는 초할 수 없다." 하였다. 마침내 시장에서 사지가 찢어지는 형을 당하고 종족과 친우로서 연좌되어 죽은 사람이 수백 인이었다. 성조(成祖)는 태조의 네째 아들로 처음에 연왕(燕王)에 봉해졌는데, 태조가 승하하자, 군사를 일으켜 건문제(建文帝)를 축출하고 정난병(靖難兵)이라 일컫고 서울을 함락하여 제위(帝位)에 올라 방효유(方孝孺) 등 건문제(建文帝)를 추종하는 사람들을 죽이고 연경(燕京)에 천도(遷都)하였다. 《명사(明史)》 방효유전(方孝孺傳).- [註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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