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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22권, 현종 15년 6월 4일 정유 1번째기사 1674년 청 강희(康熙) 13년

인선 왕후 지문

신시에 인선 왕후를 영릉(寧陵)에다 장사지냈다. 행 판중추부사 김수항이 지문(誌文)을 지어 올렸는데, 그 글은 다음과 같다.

"인선 왕후께서 승하하신 5월에 능을 다 다듬고 나자, 전하께서 서술하신 행록(行錄)을 내리면서 신 수항을 명하여 현궁(玄宮)의 지문을 지어 올리라고 하시었다. 신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받아 읽고는 말씀드리기를 ‘오, 지극합니다. 우리 성후(聖后)와 같은 덕을 성상께서 기록하시니 참으로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이미 사양하지 못했으니 감히 행록에 의거하여 차례로 엮어 서술해야겠습니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왕후의 성은 장씨(張氏)이고 선조는 장순용(張順龍)인데 본디 중국 사람이었다. 원나라 때에 선무 장군(宣武將軍) 진변 총관(鎭邊摠管)으로서 공주를 따라 동쪽으로 왔다가 고려에 벼슬하여 여러번 문하 찬성사를 지냈으며 덕수현을 채지(采地)로 받았는데 자손들이 그곳을 관향으로 삼았다. 우리 조정에 와서 장핵(張翮)이란 분이 한성부 판윤을 지냈고, 그뒤 4대에 이르러 장옥(張玉)이란 분이 문장에 능해 일찍이 장원으로 뽑혀 승문원 판교까지 지냈고 이조 참판의 증직을 받았는데, 이분이 왕후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임중(任重)이니 장례원 사의였고, 증조의 휘는 일(逸)이니 목천 현감이었고, 할아버지의 휘는 운익(雲翼)이니 형조 판서를 지냈으며 역시 장원을 하여 일찍부터 드러났는데 뒤에 보조 공신 영의정 덕수 부원군의 증직을 받았고, 아버지의 휘는 유(維)이니 우의정 신풍 부원군 문충공이다. 공은 인조의 인정을 받았고 정사훈에 녹훈되었으며 문장과 덕행이 세상에 크게 알려졌다. 그의 배필은 영가 부부인(永嘉府夫人) 김씨(金氏)안동의 명망 있는 집안인 충신 우의정 문충공 휘 김상용(金尙容)의 따님인데, 한때 문벌에 대해 말하는 자들이 첫째나 둘째로 손꼽았다. 만력(萬曆)006) 무오년007) 12월 경진에 왕후가 탄생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단정하고 얌전하여 함부로 장난치며 놀지 않았다. 여섯 살이 되자 할머니인 박씨 부인이 데려다 길렀는데, 일찍이 할머니를 따라 수원 부사로 있던 계부(季父)의 관아에 갔다가 가끔 남몰래 부모 생각이 나 눈물을 짓곤 했다. 할머니가 눈치를 채고 물으면 대뜸 눈물을 씻고 다른 일 때문이라고 대답하여 걱정을 끼치지 않게 하니 할머니가 기특히 여기고 더욱 사랑하였다. 왕후에게 언니가 있었는데 얼굴에 종기가 나 고생하고 있었다. 더러 어린 아이의 오줌이 가장 효험이 있다고 말하자 김부인이 일부러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왕후의 뜻을 떠보니 왕후가 즉시 손수 발라 주면서 싫어하는 기색이 없자, 문충공이 매우 기뻐하며 기특히 여기었는데, 대개 그의 지극한 정성이 어려서부터 그러하였다. 숭정(崇禎)008) 경오년009) 효종께서 봉림 대군(鳳林大君)으로 있었을 때, 인조께서 친히 그의 배필을 간택하시면서 법도있게 행동하고 대답하는 왕후를 보고 매우 어질게 여기셨으므로 드디어 왕후로 선발하였다. 신미년 가을에 가례(嘉禮)를 치르고 풍안 부부인(豊安府夫人)으로 봉하였다. 대궐로 들어온 후에는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조심하여 어김없이 효도와 공경을 하니 인열 왕후께서 가장 사랑하시었다. 4년이 지나자 대궐에서 나와 사저에서 살았는데 가정 일을 조리있게 잘 처리하면서도 집안 일이 크고 작든 간에 감히 마음대로 하지 않았다. 인열 왕후의 언니가 일찍 과부가 되어 곤궁하게 살고 있었는데, 왕후가 도와주어 곡진한 은혜가 있었다.

병자년 겨울에 난리로 인해 강도로 들어갔는데 그 이듬해 정월에 적병이 바다를 건너 온다고 하자, 궁중(宮中)이 발칵 뒤집혀 너나없이 울부짖으며 당황하였으나 왕후만은 차분한 모습으로 말이나 행동이 평상시와 조금도 틀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왕후의 지킴이 있는 데 대해 탄복하였다. 효종께서 소현 세자와 함께 볼모로 심양에 가게 되자 왕후도 따라갔다. 타향에서 험난한 생활을 9년 동안이나 하면서도 그의 처사가 평상시의 법도를 잃지 않았으며 두 궁(宮) 간에 틈이 난 말이 없었다. 을유년에 비로소 귀국하였는데 소현 세자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효종께서 인조의 명을 받아 세자의 자리로 오르고 왕후를 세자빈으로 삼았다. 왕후께서 더욱더 스스로를 낮추고 조심하며 예로 몸을 단속하고 정성으로 위를 섬겼으며 색다른 음식물이 생기면 반드시 먼저 인조께 드렸다. 기축년에 인조께서 승하하시자 효종께서 왕위에 올랐다. 왕후께서 중전이 되자 내교(內敎)가 더욱 드러났다. 내직(內職)을 처리하고 빈어(嬪御)들을 거느리되 따뜻이 하여 친목하게 하고 엄히 하면서도 은혜를 베풀었으므로 문왕 후비의 풍화에 가까웠다. 그러나 항상 공경하고 근신하면서 몸을 유순하게 가졌다. 항상 말씀하시기를 ‘부인이 스스로 잘난 체하면 가정이나 나라에 해를 끼치지 않는 경우가 드물었으니 「암탉이 새벽에 울어서는 아니된다.」는 경계를 신중히 지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기해년에 효종께서 병이 위중하시자 왕후가 하늘에 빌며 자신의 목숨으로 대신해 주라고 청하였으며, 승하하시자 예에 벗어날 정도로 곡하며 슬퍼하셨다. 그러나 마지막 보내는 일에 대해 시신을 씻기고 손톱과 발톱을 자르는 것부터 비록 하찮은 일이라 하더라도 반드시 몸소 하시면서 책임자에게 맡기지 않고 애써 정성을 다 들이셨다. 졸곡(卒哭) 전에는 미음만 드셨으므로 우리 전하께서 수라를 드시라고 눈물지으며 청하니 왕후께서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면 정말 지나친 짓이다만 그렇다고 억지로 밥을 먹으면서까지 살려고 하는 것은 내 차마 못하겠다.’고 하셨다. 우리 전하께서 즉위하시자 왕후를 왕대비로 높였으며, 신축년에는 효숙(孝肅)이란 휘호를 올렸다. 책보(冊寶)를 올릴 때에 왕후께서 안 나오려고 하시었는데 우리 전하께서 지성으로 굳이 청하시자 왕후께서도 평소 효종께서 분부하신 말씀을 몸받아 눈물지으면서 허락하시었다. 예를 치르는 날에 슬퍼하시어 주위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하례(賀禮)는 끝내 받지 않으셨다. 재이를 만날 때마다 근심과 두려운 빛을 띠시고 우리 전하에게 ‘내 마음에도 이러한데 네가 소홀히 해서야 되겠느냐.’며 일깨워 주셨으니, 그 경계와 가르침이야말로 매우 간절하였다. 왕후께서 기축년에 큰 슬픔을 당한 후로 지나치게 야위어 병이 났는데 드디어 고질이 되고 말았다. 일찍이 여러번 호서의 온양에 거둥하여 온천에 목욕하니 조금 효험이 있었다. 갑인년 2월에 병이 갑자기 심해져 24일 무오에 경덕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시니 춘추는 57세였다. 유사가 시호를 의논하였는데, 시호의 법에 사랑을 베풀고 의로운 일을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어진 소문이 두루 난 것을 선(宣)이라 하므로 드디어 인선이란 시호를 올려 높였으며, 또 그 위에 경렬 명헌(敬烈明獻)이란 휘호를 덧붙였다. 이에 앞서 효종의 능소에 사고가 있어서 계축년 겨울에 이르러 여주 홍제동(弘濟洞) 자좌오향(子坐午向)으로 된 자리에다 옮겼는데, 이때 이르러 왕후의 유언에 따라 6월 4일에 그 밑에다 장사지냈다. 같은 산 줄기인데다 가깝기 때문에 영릉이라고 불렀다. 왕후의 타고난 성품이 곧고 차분한데다 또 법도있는 가문의 교훈을 받았으므로 몸가짐이나 말씀하신 것이 모두 다 모범이 될 만하였다. 비록 병중이나 사적인 여느 때에도 반드시 예절을 스스로 지키고 자손들을 대해서도 나태한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으며, 사가의 친척에게 두루 두루 매우 화목하게 지냈으나 도리에 벗어난 요구는 절대로 들어주지 않았으므로 안팎의 한계가 분명하였다.

효종께서 인평 대군(麟坪大君)과 우애가 매우 돈독하였는데 왕후께서도 그의 부인을 한결같이 정성으로 대하였으며, 자의 대비를 수십 년 섬기는 동안 서로 사랑하고 효도하여 조금도 틈이 나지 않으니 궁중에 화기가 감돌았다. 왕후께서 병이 나시면서부터 때로 나아가 뵙지 못하게 되자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고 매양 탄식하셨다. 병이 위중하시던 저녁에 정신이 이미 혼미해졌는데도 대비께서 오신다는 말을 갑자기 듣고는 즉시 깨어나 서둘러 좌석에 나아가 앉아서 정성스럽게 마지막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부드러운 목소리와 화기 띤 안색이 평상시처럼 차분하였으나 오히려 단장을 못하고 뵈인 것을 한스러워하셨다. 능을 옮기는 날 상여 운반에 애로가 많아 여사군(轝士軍)이 넘어져 죽었다고 하자, 왕후께서는 들으시고 수심띤 얼굴로 ‘하늘에 계신 선왕의 영혼이 반드시 이를 불안해 하실 것이다.’고 하시더니 산릉에서 돌아온 여자 시종에게 사람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말을 듣고서야 비로소 기쁜 빛이 있었다. 이번에 육로를 버리고 배를 이용해 상여를 운반하게 된 것도 왕후의 뜻을 체득해 한 것이다고 한다. 효종이 승하셨을 때 비록 외딴 마을 사람들도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오래도록 잊지 않았는데, 왕후께서 승하하시자 백성들이 분주하며 울부짖고 사모하기를 그때처럼 하였다. 아, 어찌 이유없이 그러하였겠는가. 왕후께서 아들 한 분과 딸 다섯 분을 낳아 기르셨다. 우리 전하께서는 영돈녕부사 김우명의 따님을 후비로 맞아 들였고, 공주 다섯 분은 첫째가 숙안 공주(淑安公主)로 익평위(益平尉) 홍득기(洪得箕)에게, 다음은 숙명 공주(淑明公主)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에게, 다음은 숙휘 공주(淑徽公主)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에게, 다음은 숙정 공주(淑靜公主)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에게, 다음은 숙경 공주(淑敬公主)흥평위(興平尉) 원몽린(元夢鱗)에게 시집갔는데, 숙정 공주와 숙경 공주는 먼저 죽었다. 우리 전하께서는 아들 한 분과 딸 세 분을 낳아 기르셨다. 세자는 병조 판서 김만기의 딸을 빈으로 맞아들였고, 따님은 명선 공주(明善公主)·명혜 공주(明惠公主)·명안 공주(明安公主)인데, 명선 공주명혜 공주는 출가하기 전에 일찍 죽었다. 홍득기는 아들 한 명, 심익현은 아들 두 명, 정제현은 아들 한 명, 정재륜은 아들 한 명, 원몽린은 딸 한 명을 두었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효종 대왕께서는 훌륭한 덕행과 크나큰 규모가 뭇 왕들보다 뛰어나셨는데 그 가다듬고 분발하여 천하에 큰 의리를 밝히신 데에 있어서는 오직 왕후께서 내조하는 공에 힘입었으며, 우리 성상의 어진 마음과 어질다는 소문이 사람들의 살과 뼈속에 젖어들고 경내의 미물까지도 모두 비나 이슬과 같은 은택을 누릴 수 있게 한 것도 오직 왕후께서 자애로 감싸주신 덕화를 이어받은 것이다. 이러한 넓고 두터운 덕으로 곤원(坤元)010) 과 높이 짝지었으니 한없이 복을 받아 뫼뿌리와 같은 수를 길이 누릴 것으로 여겼는데 하늘이 보살펴 주지 않아 갑자기 빨리 돌아가시니 아, 매우 슬프다. 그렇지만 사람들의 귀와 눈에 선하게 남아있는 그 아름다운 말씀과 공렬을 옥돌에다 새겨 무덤 속에 간직해 두니 장차 훌륭한 도신(塗莘)과 함께 만년토록 전해질 것이다. 오오, 아름답도다."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 / 어문학(語文學) / 역사(歷史)

  • [註 006]
    만력(萬曆) : 명 신종의 연호.
  • [註 007]
    무오년 : 1618 광해 10년.
  • [註 008]
    숭정(崇禎) : 명 의종의 연호.
  • [註 009]
    경오년 : 1630 인조 8년.
  • [註 010]
    곤원(坤元) : 만물을 기르는 땅의 덕.

○丁酉/申時, 葬仁宣王后寧陵。 行判中樞府事金壽恒, 撰進誌文, 其文曰: "仁宣王后禮陟之五月, 治方中旣完, 我殿下乃降所述行錄, 命臣壽恒, 撰進玄宮之誌。 臣拜手稽首, 受而讀之曰: ‘於乎! 至哉。 我聖后之德, 而聖上之紀之也, 誠無間然矣。 旣不獲辭, 則敢就行錄, 纂次而敍之。’ 謹按王后, 姓張氏, 其先曰順龍, 本中國人。 當時, 以宣武將軍鎭邊摠管, 從公主東來, 仍仕高麗, 累官門下贊成事, 食采德水縣, 子孫仍籍焉。 入我朝, 有曰, 漢城府判尹, 四傳而至, 能文章, 早擢大魁, 承文院判校, 贈吏曹參判, 於后, 爲五代祖。 高祖諱任重, 掌隷院司議, 曾祖諱, 木川縣監, 祖諱雲翼, 刑曹判書, 亦以魁科早顯, 後贈補祚功臣領議政德水府院君, 考諱, 右議政新豐府院君, 諡文忠公。 受知仁祖, 策靖社勳, 文章、德行有大名于世。 配曰, 永嘉府夫人 金氏安東望族, 忠臣右議政文忠公尙容之女, 一時稱門第者, 推甲乙焉。 以萬曆戊午十二月庚辰, 誕后。 生而端淑, 不妄游戲。 六歲, 祖母朴夫人, 取而鞠之, 嘗隨往季父水原府衙, 時於暗中, 思父母啜泣。 祖母覺而問, 輒拭淚對以他辭, 不使貽其憂, 祖母奇愛之。 后有兄, 苦面瘡。 或言兒矢最効, 金夫人陽爲不欲汚手, 以試后意, 后卽手自傳之, 不見厭惡色, 文忠公大悅而異之, 蓋其至誠自幼然也。 崇禎庚午, 孝廟鳳林大君, 仁祖親簡其配, 見后周旋應對有則, 甚賢之, 后遂膺選。 辛未秋, 嘉禮成, 封豐安府夫人。 旣入闕, 夙夜夔慄, 孝敬無違, 最爲仁烈王后所眷愛。 過四年, 出閤居邸, 秉家綜理, 井井然, 梱內事無纖鉅, 不敢自專, 仁烈王后有姊, 嫠而窮居, 后賙捄, 曲有恩意。 丙子冬寇難入江都, 明年正月, 敵兵渡江, 宮中鼎沸無不號哭蒼黃, 后獨從容整暇, 言動不少爽, 人皆服其有守。 及孝廟昭顯世子, 質于瀋陽, 后亦隨行。 羈危險阻, 首尾九年, 其所處事, 不失常度, 兩宮之間, 無間言。 乙酉始返國, 昭顯世子卒, 孝廟仁祖命, 陟儲位, 冊后爲世子嬪。 后益自抑畏, 飭躬以禮, 事上以誠, 得一異味, 必先獻于仁祖。 己丑, 仁祖賓天, 孝廟踐祚。 后旣正位中壼, 陰敎益彰。 聽內職率嬪御, 和而穆, 嚴而惠, 庶幾樛木葛覃之化。 然小心翼翼, 持以柔巽。 常曰: ‘婦而自聖, 鮮不害于家國, 牝鷄之戒, 可不愼歟?’ 己亥, 孝廟疾惟幾, 后籲天請代, 逮至不諱, 哭擗踰禮。 然於送終之事, 自大〔渳〕 蚤湔以往, 雖微必親, 不委之暬御, 務盡誠信而後已。 未卒哭, 只歠糜粥, 我殿下泣請進食, 則曰: ‘自絶其命, 則誠過矣, 强飯以救活, 亦予所不忍也。’ 我殿下嗣位, 尊后爲王大妃, 辛丑, 進徽號曰孝肅。 當冊寶之上也, 后不欲親臨, 我殿下至誠固請, 〔后〕 亦體孝廟平昔之敎, 泣而許之。 行禮之日, 哀動左右, 至賀禮, 則竟不受焉。 每遇災異, 憂懼形于色, 諭我殿下曰: ‘予心猶然, 爾可忽諸。’ 所以誠誨者甚切至, 后自己丑, 大慼過毁致疾, 遂因以沈痼。 嘗屢幸湖西之溫陽, 試湯泉小效。 至甲寅二月, 疾忽亟, 以二十四日戊午, 薨于慶德宮 會祥殿, 春秋五十有七。 有司議諡, 諡法, 施仁服義曰仁, 聖善周聞曰宣, 遂上尊諡曰仁宣, 又加上徽號曰敬烈明獻。 先是, 孝廟山陵有故, 至癸丑冬, 遷于驪州弘濟洞子坐午向之岡, 至是, 遵后治命, 以六月初四日, 祔葬于其下。 以其同原而近也, 因稱以寧陵。 后資性貞靜, 又襲訓法門, 動容出辭, 擧可爲儀範。 雖疾病燕私之際, 必以禮自將, 對子姓亦未嘗有惰慢之色, 於私親, 雖甚周睦, 絶不許曲徑干恩, 內外截如也。 孝廟麟坪大君, 友愛篤至, 后亦待其夫人, 一出於誠, 事慈懿大妃數十年, 慈孝無間, 宮闈之內, 和氣融洽。 自后有疾, 不得以時進見, 每歎曰: ‘有生何爲。’ 大漸之夕, 神氣巳昏霧, 忽聞大妃來臨, 卽驚悟, 促進坐席, 諄諄告訣, 柔聲和色, 雍容若平日, 猶以不飾而見, 爲恨。 遷陵之日, 蜃車多憂, 轝士顚殞, 后聞之, 愀然曰: ‘先王在天之靈, 必不安於此矣。’ 及女侍自山陵還, 聞知傷人無多, 始有和豫色。 今玆〔六〕 引之舍堩而舟, 蓋亦體后之遺意云。 孝廟之昇遐也, 雖窮閻僻壤, 如喪考妣, 愈久而不忘, 及后之薨, 民之奔走號慕, 亦如之。 嗚呼! 豈無所由而然哉? 后誕育一男五女。 我殿下聘領敦寧府事金佑明女爲妃, 五公主, 長曰淑安公主, 下嫁益平尉 洪得箕, 次曰淑明公主, 下嫁靑平尉 沈益顯, 次曰淑徽公主, 下嫁寅平尉 鄭齊賢, 次曰淑靜公主, 下嫁東平尉 鄭載崙, 次曰淑敬公主, 下嫁興平尉 元夢鱗, 淑靜, 淑敬, 竝先卒。 我殿下誕生一男三女, 世子聘兵曹判書金萬基女爲嬪, 女曰明善公主明惠公主明安公主, 明善明惠皆未字而夭。 洪得箕一男, 沈益顯二男, 鄭齊賢一男, 鄭載崙一男, 元夢鱗一女。 洪惟我寧考, 盛德宏規, 駕軼百王, 其惕厲奮發, 以昭大義於天下者, 惟后內贊之功, 是資我聖上仁心仁聞, 浹人肌髓, 使域內肖翹之類, 咸宥於雨露之澤者, 亦惟后慈覆之化, 是承博厚之德。 尊配坤元, 是宜受祿無彊, 永享岡陵之壽, 而昊天不弔, 遐算遽促, 嗚呼痛哉! 惟其徽音懿烈之昭在耳目者, 託之琬琰, 藏于幽隧, 將與塗莘之盛, 竝垂於萬禩。 猗歟! 休哉。"


  • 【태백산사고본】 22책 22권 1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65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사(宗社)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인물(人物) / 어문학(語文學) / 역사(歷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