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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21권, 현종 14년 12월 30일 을축 6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함경 감사 남구만이 북도 관방의 변통에 대해 상소하다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북도(北道) 관방(關防)의 변통에 대한 일을 자세히 아뢰었는데 수천 마디나 되었다. 그 내용에,

"삼수(三水)갑산(甲山)은 첩첩 고개와 큰 산맥 밖에 있어 거리가 매우 멀고 잔로(棧路)가 험악하지만 길주(吉州)의 서북쪽 보(堡)에는 사냥꾼이 왕래하는 길이 있어 갑산(甲山)에 통할 수 있는데 근 2백여 리쯤 되고 도로가 매우 평이합니다. 삼수(三水)에서 압록강을 따라 서쪽으로 70리를 내려가면 후주(厚州)의 옛 땅이 있습니다. 어느 해에 설치되었다가 어느 해에 철폐되었는지 모르지만 그 땅은 강의 남쪽에 있어서 본디 우리 땅입니다. 들녘이 광활하고 토지가 비옥하여, 울퉁불퉁하며 척박한 삼수·갑산과는 크게 다르고 지세(地勢)가 점차 낮아져서 기온이 자못 따뜻하여 또한 삼수갑산의 모진 추위보다 나은데, 서리 내리는 것이 가장 늦어서 오곡이 모두 익으니 진실로 살 만한 지역입니다. 지금 만약 다시 후주(厚州)를 설치하면 삼수갑산에 대해서는 서로 의지하여 원조가 되고 함흥(咸興)에 대해서는 울타리를 굳게 하는 격이 되어, 밖으로는 밤에 적이 몰래 쳐들어 오는 근심이 없고 안으로는 떠돌아 다니다가 들어오기를 바라는 백성이 있을 것입니다. 아침에 영을 내리면 저녁에 고을을 이룰 수가 있는데 무엇을 꺼려하여 만들지 않는단 말입니까. 또 여연(閭延) 등 폐지된 사군(四郡)도 모두 넓은 들인데다가 비옥한 토지입니다. 지금까지 폐기되어 있으니 진실로 매우 애석합니다. 조정이 만약 일시에 여러 군을 모두 회복하기 어렵다고 여긴다면 우선 먼저 별해(別害) 【보(堡)의 이름이다.】 군(郡)을 설치하고 후주(厚州)에 진(鎭)을 두어 백성들이 점차 모이는 것을 기다려 차례로 다시 설치해도 혹 늦지는 않을 것입니다. 무릇 이 세 조목은 진실로 변방의 대단한 처치에 관계되니 신은 도본(圖本)을 만들어 올립니다. 무릇 도내 각 고을의 도리(道里)의 원근과 관방(關防)의 요해처를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만약 상께서 보신다면 무릇 그 편부(便否)와 이해(利害)를 반드시 분명하게 알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밝으신 성상께서 유념하여 살피소서."

하니, 상이 그 소와 도본을 탑전에서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에게 보였다. 우의정 김수흥이 아뢰기를,

"차유령(車踰嶺) 밖은 토지가 비옥한 것이 과연 사실입니다만, 옛적에는 호인(胡人)들이 들어와 살던 땅입니다. 군을 설치한 뒤로 만약 다시 침탈해 오면 일이 매우 난처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철거한 지 거의 5, 6십 년이 되었으니 지금 어찌 다시 침입할 리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은 본래 우리 땅이니 적이 오면 피하고, 적이 떠나면 거처함이 당연한 것이다. 저들이 이미 강을 한계로 하였으니 비록 장성(長城)055) 의 밖이라도 두만강(豆滿江) 안쪽은 저들 또한 자기 땅이 아닌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군을 설치하는 것은 우선 서서히 의논하고, 무산(茂山)·양영(梁永)의 만 호로 하여금 때때로 순시하도록 하고, 매년 봄·가을 삼(蔘)을 캐는 절기에는 삼을 캐는 것을 금지한다고 핑계대고 항상 강변(江邊)에 머물러 주둔하면서 저들의 뜻을 떠보고, 수 년 뒤에 이어서 그 땅에 진(鎭)을 설치하면, 저들의 의심도 일으키지 않고 군을 설치하는 일도 점차 이룰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길을 내는 조목은 마땅히 그 청을 허락해 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험한 땅에 길을 개척하는 것은 병가(兵家)에서 크게 꺼리는 것이다. 그러나 형세가 편리하고 마땅하다면 어찌 험하다고 해서 길을 트지 않겠는가. 저들은 모두 기병이고 보졸(步卒)이 없으니 개척하는 길은 마땅히 대략 베어내어 사람과 말만 겨우 다닐 수 있도록 하고 넓게 만들지 말라. 요해처에는 1, 2개의 진보(鎭堡)를 설치하여 지키고 조금 아래의 여러 진보 가운데에서 긴요하지 않은 것은 이곳으로 옮겨 설치하도록 하고 반드시 새 보(堡)를 별도로 설치할 필요는 없다."

하였다. 수흥이 아뢰기를,

"후주(厚州)를 설립하는 일은 청을 허락하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관서(關西)에 있을 때 듣기로는, 후주의 토지는 기름지고 비옥하여 백성들이 이사하고자 하는 자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온 가족을 데리고 들어가 사는 것을 허락한다면 아침에 영을 내려 저녁에 이룰 것입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삼남(三南)은 인물(人物)이 번성하니 토지가 좁은 것이 걱정입니다. 그러나 서북(西北)에 있어서는 넓게 개척할 필요가 없고 다만 형세가 편리하고 마땅하며 토지가 비옥하다면 또한 어찌 버려두겠습니까."

하고, 수흥이 아뢰기를,

"이것은 대단한 변통에 관계되니 경솔하게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

고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국이 상의 분부로써 복계(覆啓)하기로 회이(回移)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지학(地學)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註 055]
    장성(長城) : 세종 때 번호(藩胡)를 막기 위해 쌓은 성.

咸鏡監司南九萬上疏, 備陳北道關防變通事數千言。:

三水甲山, 在重嶺大脊之外, 道里絶遠, 棧路險惡, 吉州西北堡, 有獵獤往來之路, 可通於甲山, 近可二百餘里, 道路又頗平易。 自三水沿鴨綠, 西下七十里, 有厚州古地。 未知設於何年, 廢於何時, 而其地在江之南, 自是吾地。 郊野之廣闊, 田土之肥沃, 大異於之崎嶇瘠薄, 地勢漸下, 風氣頗溫, 又勝於之苦寒, 霜降最晩, 五穀皆熟, 誠是可居之地也。 今若更置厚州, 則在, 相依爲援, 在咸興, 固其藩籬, 外無暮夜竊發之憂, 內有流徙願入之民。 朝而下令, 夕而可成, 顧何憚而不爲哉? 且閭延等廢四郡, 亦皆廣野沃土。 至今廢棄, 實甚可惜。 而朝廷若以一時盡復諸郡爲難, 則姑先設郡於別害, 【堡名。】 置鎭於厚州, 以竢民人漸聚, 次第復設, 亦或未晩。 凡此三條, 實係塞上大段處置, 臣作爲圖本, 以上。 凡道內各邑, 道里遠近, 關防要害之處, 靡不畢載, 若上塵乙覽, 則凡其便否、利害, 必皆瞭然於天鑑之下。 伏乞聖明, 留神省察。

上以其疏及圖本, 示大臣及備局諸宰於榻前, 右議政金壽興曰: "車踰嶺外, 土地之肥饒, 果然矣。 而卽古胡人入居之地也。 設郡之後, 若復侵奪, 則事甚難處。 然彼之撤去, 幾五六十年, 今豈有還侵之理乎? 上曰: "此本我土地, 敵來則避, 敵去則居, 固也。 彼旣以江爲限, 雖長城之外, 而豆滿江內, 則彼亦知非其土也。 然設郡, 則姑可徐議, 宜令茂山梁永萬戶, 時時巡視, 每於春秋蔘節, 托以禁採, 常爲留屯於江邊, 以探彼意, 而數年之後, 仍設鎭於其地, 則不起彼人之疑, 而設郡之事, 亦可漸成矣。" 壽興曰: "開路一款, 似當準請矣。" 上曰: "開路於險地, 兵家之所大忌也。 然形勢便宜, 則何可以此而不開? 彼皆騎兵無步卒, 所開之路, 宜略爲芟伐, 僅通人馬, 勿爲平治。 要害處, 設置一二鎭堡, 以守之, 以斜下諸鎭堡中不緊者, 移設於此可矣, 不必別設新堡也。" 壽興曰: "厚州設立事, 似難准請矣。" 訓鍊大將柳赫然曰: "臣曾在關西, 聞之, 厚州土地膏沃, 民多願徙。 今許入去, 可以朝令而夕至矣。" 兵曹判書金萬基曰: "三南人物殷盛, 所患者土地之狹也。 至於西北, 則不必廣拓, 但其形勢便宜, 土地肥饒, 則亦豈可空棄乎?" 壽興曰: "此係大段變通, 不可輕議。" 上然之。 至是, 備局以上敎覆啓回移焉。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지학(地學) / 농업-특용작물(特用作物) / 군사-관방(關防) / 군사-군정(軍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