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릉 때의 복식과 국릉의 표석·조부의 상을 부친 대신 치른 민신에 대해 의논하다
영돈녕부사 김우명(金佑明)이 면대를 청하고 들어와 아뢰기를,
"천릉(遷陵) 때의 면복(冕服)과 옥규(玉圭)는 마땅히 상의원(尙衣院)에서 갖추어 올려야 합니다. 《오례의(五禮儀)》에는 청옥(靑玉)을 사용한다고 하였는데 기해년 국장 때에는 백규(白圭)를 사용하였습니다. 지금은 어떤 규(圭)를 사용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사용했던 백규가 훼손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되니 그대로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우명이 막 상방 제조(尙方提調)가 되었기 때문에 이런 계(啓)가 있게 된 것이다.】 우명이 이에 품고 있던 생각을 아뢰기를,
"판부사 송시열은 산림(山林)에서 중망(重望)을 지니고 있는 대신(大臣)인데 어찌 한 마디라도 잘못된 말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옛 사람이 이르기를 ‘요(堯) 순(舜)과 같은 사람이 아니면 어찌 매사에 진선(盡善)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아성(亞聖) 이하도 허물이 없을 수 없는데 시열이 한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감히 의론을 못하니, 경대부(卿大夫)가 말한 것에 대해 아랫사람이 감히 그 잘못을 바로잡지 못한다는 것과 같습니다.
국릉(國陵)에 표석(表石)을 세우는 것은 3백 년 동안 행하지 않던 일입니다. 시열의 소 가운데에 또한 ‘신릉(新陵)의 석물(石物)은 일체 영릉(英陵)을 보고 법으로 삼아야 한다.’고 해 놓고, 또 표석 세우기를 청하였는데 영릉에 없는 표석을 지금 어떻게 새로 만들어 세울 수 있단 말입니까. 국가의 능침(陵寢)에 비록 표석이 없다 하더라도 누구인들 그것이 왕릉인 줄 모르겠습니까. 그것이 왕릉인 줄을 알 수 없게 된 후세에는 비록 표석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무슨 보탬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시열이 강론하여 결정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감히 그 마땅한가의 여부를 의논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왕의 덕업(德業)이 후세에 빛나는 것은 진실로 표석의 유무와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지난 대명 태조 홍무 4년에 역대의 제왕 35위를 추후로 제사할 때에 위로는 복희(伏羲)까지 미쳤습니다.025) 복희로부터 홍무(洪武)까지 연대가 얼마인데 오히려 그 묘를 알고 있으니 제왕의 사업이 과연 비표(碑表)가 있어야만 전해진단 말입니까. 신은 이미 일을 맡은 사람이 아니지만 세 조정에서 받은 은혜를 한결같이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기에 품은 생각을 진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상(右相)이 돌아오는 것을 기다려 서로 의논하겠다."
하였다. 우명이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바야흐로 효(孝)로써 다스리고 있는데도 서울 안에 놀랄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을 누가 모르겠습니까마는 오직 전하께서만 듣지 못했습니다. 전 교관 민업(閔嶪)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민세익(閔世翼)이 미친 병이 있었기 때문에 세익의 아들이 아버지를 대신하여 할아버지의 복을 입었는데, 방제(旁題) 및 체천(遞遷)의 절차에 있어서도 일에 구애된 바가 있어 결단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세익이 비록 실성(失性)하였다고 하지만 아직도 배고프면 먹고 추우면 옷을 입으며 더더구나 인도(人道)가 있어 연이어 자녀를 낳고, 상을 당한 뒤에도 상복을 입고 목놓아 슬피 우는 때가 있었다고 하니 전혀 지각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예(禮)》에 ‘할아버지 상이 끝나기 전에 아버지가 죽었을 경우에는, 아들이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기 전이면 감히 그 할아버지의 상복을 대신 입지 못한다.’는 글이 있는데 그 아비가 아직 살아있는데도 손자가 참최복을 대신 입었으니 어찌 이같은 이치가 있겠습니까. 이는 업(嶪)과 세익이 모두 자식이 없는 것이요, 세익과 그의 아들이 모두 아비가 없는 것입니다. 제왕가(帝王家)는 종묘 사직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하루라도 임금이 없을 수 없으나, 사가(私家)는 이와 달라 부자(父子)가 있은 연후에 군신(君臣)이 있으니 부자(父子)의 큰 윤리를 어찌 뒤섞어 어지럽게 할 수 있겠습니까. 세익의 아들은 잔인하게도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치고 스스로 그 복을 대신 입었습니다. 성명(聖明)의 세상에 어찌 이같은 사람을 도성 안에서 살도록 용서하고 죄를 주지 않는단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삼강(三綱)은 부자(父子)가 으뜸이니 부자간의 윤리가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관계된 것이 적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심문하도록 해야 한다."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민업(閔嶪)이 죽었을 때에 송시열(宋時烈)·민정중(閔鼎重)·박세채(朴世采) 등은 업의 아들 세익이 미친 병이 있어 상례를 주관할 수 없다고 여겨 세익의 아들 민신(閔愼)으로 하여금 대신 참최복을 입도록 하여 마치 아버지가 죽어 할아버지를 승중(承重)하는 것처럼 하였다. 이를 들은 이들이 너나없이 몹시 놀라면서 ‘민신은 살아있는 아버지를 죽은 것으로 치고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삼았으니 바로 인륜의 막대한 변고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송시열을 두려워하여 감히 발설하지 못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김우명이 상께 말씀드리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규명하도록 하였다. 예관(禮官)이 해가 지나도록 덮어두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그 죄를 다스리도록 명을 내려 민신이 먼 곳으로 유배되었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예복(禮服) / 풍속-풍속(風俗) / 윤리-강상(綱常) / 가족(家族) / 사법-행형(行刑)
- [註 025]대명 태조 홍무 4년에 역대의 제왕 35위를 추후로 제사할 때에 위로는 복희(伏羲)까지 미쳤습니다. : 역대 제왕의 능에 묘비(墓碑)를 세우고 봄·가을로 사신을 보내 제사를 지내도록 한 일을 말한다. 위로 복희(伏羲)·신농(神農)부터 아래로 송(宋)나라 효종(孝宗)·이종(理宗) 등이 포함되었다. 《명사(明史)》 권50 예(禮)4 역대 제왕 능묘(歷代帝王陵廟).
○領敦寧府事金佑明, 請對入奏曰: "遷陵時冕服及玉圭, 當自尙方備進。 《五禮儀》用靑玉, 而己亥國葬時, 用白圭。 今則當用何圭耶?" 上曰: "前用白圭, 想不傷破, 仍用可也。" 【佑明方爲尙方提調, 故有此啓。】 佑明仍陳所懷曰: "判府事宋時烈, 乃山林負重望大臣也, 寧有一言之非乎? 然古人曰: ‘人非堯、舜, 安得每事盡善。’ 亞聖以下, 不能無過, 而其所發言, 人不敢議, 有同卿、大夫出言, 莫敢矯其非。 國陵表石, 乃三百年所未行也。 時烈疏中, 亦曰: ‘新陵石物, 一視英陵爲法云。’ 又請立表石, 英陵所無之表石, 今何可創立乎? 國家陵寢, 雖無表石, 人孰不知? 及其不可知之後, 則雖有表石, 亦何益哉? 此是時烈之所講定, 故人不敢議其當否也。 帝王德業之垂耀後世, 固無待表石之有無也。 昔大明 太祖 洪武四年, 追祭歷代三十五帝, 上及於伏羲, 伏羲之於洪武, 年代幾許, 而尙知其墓, 帝王事業, 果待碑表而傳之耶? 臣旣非任事之人, 而三朝受恩, 一心耿耿, 不得不仰陳所懷矣。" 上曰: "待右相還來, 相議耳。" 佑明又曰: "殿下方以孝爲理, 而輦轂之下, 事有可駭者, 人孰不知, 而獨殿下未之聞耳。 前敎官閔嶪死後, 其子世翼, 有狂易之証, 故世翼之子, 代服祖喪, 至於旁題及遞遷之節, 事有所礙, 而不得決云。 世翼雖曰失性, 尙能飢而食, 寒而衣, 至有人道, 連産子女, 遭喪之後, 亦或有衣布號哭之時云, 不可謂全無知識也。 《禮》有祖喪未終, 而父死者, 子於葬前, 不敢卽代其衰之文, 則其父尙在, 而以孫代斬, 寧有如此之理? 是嶪與世翼俱無子, 世翼及其子, 俱無父也。 帝王家則以宗社爲重, 不可一日無君, 而私家則異於此, 有父子然後, 有君臣, 父子大倫, 何可錯亂乎? 世翼之子, 忍死其生父, 而自代其服。 聖明之世, 豈可使如此之人, 假其容息於都下, 而不之罪乎?" 上曰: "三綱, 父子爲首, 父子之倫, 若少乖舛, 則所關非細, 令該曹査問可也。"
【謹按閔嶪之死, 宋時烈、閔鼎重、朴世采等, 以嶪之子世翼, 有狂易病, 不可以執喪, 以世翼之子愼, 代服斬衰, 若父死而承祖之重者然。 聞者莫不駭愕, 以爲: ‘愼死其生父, 而禰其祖, 乃人倫莫大之變也。’ 然畏時烈, 不敢發, 至是佑明言於上, 上令該曺査究。 禮官經歲掩置, 至是, 上乃命正其罪, 流愼於遠地。】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3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45면
- 【분류】왕실-종사(宗社) / 왕실-의식(儀式) / 역사-고사(故事) / 의생활-예복(禮服) / 풍속-풍속(風俗) / 윤리-강상(綱常) / 가족(家族)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