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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21권, 현종 14년 4월 27일 병인 1번째기사 1673년 청 강희(康熙) 12년

명혜 공주의 졸기

명혜 공주(明惠公主)015) 가 죽었다. 상이 정원에 하교하기를,

"지금 명혜 공주가 뜻밖에 죽으니, 애통한 나머지 다른 일은 생각할 겨를이 없다. 다만 부마(駙馬)에 대하여 생각하면 비록 위호(尉號)를 정했으나 아직 납채(納采)의 예를 행하지 않았으니 이미 정혼하여 길례(吉禮)를 행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다. 고사(故事)의 유무와 위호(尉號)를 그대로 두느냐의 여부를 즉시 예조에게 물어서 아뢰라."

하니, 예조가 회계(回啓)하기를,

"이는 국조(國朝)에 없었던 변례이고 또 상고할 만한 문적이 없습니다. 《예기(禮記)》 증자문(曾子問)에 ‘장가드는 데는 반드시 길일을 정하는데 여자가 죽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니, 공자가 말하기를 ‘사위가 자최복으로 조상을 하고 장사지내고는 벗는다.’고 하였습니다. ‘길일을 정한다.’고 한 것은 납채(納采)할 날을 정하는 것을 말하는데, 지금 명혜 공주는 납채한 일이 없었으니 길일을 정한 것과는 차이가 있어야 마땅할 듯합니다. 그러나 부마가 봉작(封爵)이 이미 정해진 뒤라서 여러 차례 금중(禁中)에 드나들었으니, 또한 고례(古禮)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처럼 더없이 중대한 변례를 신들이 감히 경솔하게 정할 수 없으니 유신(儒臣)을 시켜 전례(典禮)를 널리 상고하게 하여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즉시 전례를 상고하여 품의하라."

하였다. 홍문관이 아뢰기를,

"《예기》의 증자문 한 조목은 근거할 수 없는 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경(禮經)》을 두루 상고해 보아도 이번 경우와 근사한 것이 없었습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예관(禮官)을 시켜 품처(稟處)하게 하라."

하였다. 예조가 대신에게 의논하기를 청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좌상 이경억(李慶億)이 의논드리기를,

"제왕가의 혼례가 비록 사대부의 혼례와 다른 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합근(合巹)을 하고 방을 함께 쓴 다음에 비로소 부부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니 혼례를 행하지 않았으면 부부가 될 수 없는데, 이는 귀천에 따라 다른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번 공주의 죽음이 육례(六禮)를 행하기 전에 났으니, 부마의 봉작은 그대로 둘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사체가 중대하므로 병들고 정신이 혼미한 신의 견해로는 단정하지 못하겠으니 삼가 상의 재결을 바랍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위호를 정한 뒤라 은의(恩義)가 있었으므로 그 봉작을 환수하려 하니 참혹하고 애통함을 견디기 어렵다. 다만 생각건대 오륜(五倫) 속에 부부(夫婦)가 한 조목을 차지했다. 그러므로 자사(子思)가 말하기를 ‘군자의 도는 부부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였다. 지금 불행하게도 공주의 초상이 뜻밖에 났는데, 고기(告期) 등의 예를 미처 행하지 못했으니 예에 이른바 ‘아내가 되지 못했다.’는 것과 다름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부마에 대해서 그대로 위호를 두어 죽을 때까지 부부간의 즐거움을 갖지 못하게 하는 일은 인정으로 볼 때 더욱 차마 못할 일이다. 의논에 따라 시행하라."

하였다. 부마는 바로 동안위(東安尉) 신요경(申堯卿)인데 신정(申晸)의 아들이다.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7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

  • [註 015]
    명혜 공주(明惠公主) : 현종의 첫째 공주.

○丙寅/明惠公主卒。 上敎于政院曰: "今此明惠公主之喪, 出於不意, 哀慟之餘, 他不暇及。 而第念駙馬, 雖定尉號, 時未行納采之禮, 與已定婚吉禮者有異。 故事有無, 尉號仍否, 卽問禮曹以啓。" 禮曹回啓言: "此是國朝所未有之變禮, 又無文籍可考。 而《禮記》 《曾子問》, 有曰: ‘娶必有吉日而女死, 如之何?’ 孔子曰: ‘壻齊衰而弔, 旣葬而除之。’ 有吉日云者, 納采定日之謂也, 今此明惠公主, 旣無納采之事, 似當與有吉日云者, 有間。 而駙馬封爵, 旣定之後, 累度出入於禁中, 亦與古禮有異。 莫重莫大之變禮, 臣曹不敢率爾斷定, 令儒臣, 博考典禮, 稟定何如?" 上曰: "卽令考稟。" 弘文館啓曰: "《禮記》 《曾子問》一條, 不可謂無可據之禮。 而遍考禮經, 俱無近似於今日所遭者, 敢啓。" 上曰: "更令禮官稟處。" 禮曹請議大臣, 上許之。 左相李慶億獻議: "帝王家婚禮, 雖與士夫婚禮有異, 至於合巹共牢而後, 方成夫婦之義。 未行婚禮, 則不成爲夫婦, 此則無貴賤之殊。 況此公主之喪, 出於六禮未行之前, 則駙馬大封爵, 似不可仍存。 而事體重大, 病昏之見, 不可斷定, 伏惟上裁。" 上曰: "旣定尉號之後, 已有恩義, 故欲收其爵, 慘慟難堪。 而第念五倫之中, 夫婦居一。 故子思曰: ‘君子之道, 造端乎夫婦。’ 今也不幸, 公主之喪, 出於意外, 而告期等禮, 旣未及行, 則與禮所謂: ‘未成婦者無異。’ 仍存尉號, 終身使不得有室家之樂, 則揆以人情, 尤所不忍。 依議施行。" 駙馬卽東安尉 申堯卿, 之子也。


  • 【태백산사고본】 21책 21권 1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7면
  •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