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허적 등을 인견하여 사은사와 허홍 정세렴의 딸 및 이명달의 일에 대해 의논하다
영상 허적(許積), 좌상 정치화(鄭致和), 호판 김수흥(金壽興), 병판 민정중(閔鼎重)이 청대하니,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인견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일 사은사(謝恩使)가 들어갔을 때에 청나라 황제가 운운한 일에 【곧 임금이 약하고 신하가 강하다고 한 말이다.】 대해 바깥 의논은 혹 ‘억울한 사정을 밝히는 일이 있어야 하겠다.’고 합니다마는, 신의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내가 운운한 바가 있는데도 왜 가타부타 대답이 없는가.’라는 말로 트집을 잡는다면 필시 해가 있을 것이니, 사은사를 차출하여 보내는 것이 마땅하겠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마땅합니다. 사은사로 정하여 보낸다면, 동지 상사(冬至上使)는 다시 차출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사신은 어떤 사람으로 차출하여 보낼 것인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여느 때의 일과 다르니, 대신을 차출하여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곡물을 청하는 일은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전일 서필원(徐必遠)이 아뢸 때에 신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하고, 김수흥·민정중은 곡물을 청하는 것은 형세가 불편하고 사리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민정중이 또 아뢰기를,
"국가가 남에게 부림받는 것은 면하지 못하더라도, 어찌 양식을 청하여 살기를 바랄 수야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곳의 사세가 이 지경이 되지 않았다면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곡물을 빌린다 하더라도 6월 이전에 도착할지 알 수 없으니, 마침내 도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폐(歲幣)를 줄여 달라고 청하는 일에 대해 저들이 사체에 있어서 부당하다고 우리를 꾸짖으면 실패할 것이다."
하니, 정치화가 아뢰기를,
"참으로 성상께서 분부하신 바와 같습니다. 공물을 바치는 나라가 곧바로 감면해 달라고 청하는 것이 부당하거니와, 혹 조금 줄여 주더라도 사은사를 보내야 할 것이니 거기에 드는 비용이 줄여준 것보다 많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은 다른 인원이 없으므로 한 사람이 사신으로 가면 국가가 매우 외로워질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올 봄에는 신 한 사람만 있었는데도 지탱할 수 있었습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허적은 수상이니, 어찌 나라를 나갈 수 있겠습니까. 신이 사명을 받들고 가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승지에게 이르기를,
"제주 백성의 굶주림은 예전에 없던 것이므로 특별히 선유 어사(宣諭御史)를 보내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니, 이조에 말하여 극진히 가려서 차출하여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초(歲抄)는 이미 멈추었더라도, 속오군(束伍軍)과 각사(各司)의 제원(諸員)과 제색(諸色) 장인(匠人)·악공(樂工)·봉족(奉足)은 세초하는 가운데에 들어 있지 않으므로 각 아문이 혹 독촉하여 대신 정하게 한다면, 백성이 지탱하기 어려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치화가 아뢰기를,
"세초를 이미 멈추었으면 제원·제색도 대신 정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마는, 속오군을 얻는 대로 채워 정하지 않아서 빈 인원이 매우 많아지면 풍년이 되더라도 한꺼번에 채워 정하기 어려울 것이니, 얻는 대로 대신 정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군사 가운데에서 죽었거나 늙어서 제외되어 절로 한정(閑丁)을 얻은 것은 전례대로 대신 정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윤허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길주(吉州)의 죄인 허홍(許泓) 등이 범한 것은 무지하여 경망하게 행동한 데에서 나온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정상을 살펴서 죄를 정하고 주모자와 따르는 자를 구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는 처음부터 사실을 조사해 보지도 않고 곧바로 처형하기를 청하였고, 형조 판서 이정영(李正英)은 다시 상세히 살피지 않고 강도에게 적용하는 법으로 판결하여 심지어 즉시 처형해야 한다든가 처자를 종으로 만들고 가산을 몰수해야 한다고 모호하게 복계하였으니, 모두 매우 놀랍습니다. 홍처후·이정영을 모두 무겁게 추고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런 일은 매우 중대하므로 정원이 상세히 살펴서 복역(覆逆)해야 할 바이고 위에서도 신중히 하셔야 할 곳입니다. 이단하(李端夏) 등의 상소가 아니면 허홍 등은 처형된 지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허홍 등이 관청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 무리 1백 50인을 거느리고 창고에 난입하여 각종 곡물 35석을 꺼내어 사람마다 3두씩 나누어 주고 또 성명을 죽 써서 뒷날 도로 바칠 근거로 삼았는데, 대개 감관(監官)이 열쇠를 받아 마음대로 여닫으며 즉시 분조(分糶)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함경 감사 홍처후가 크게 놀라 처형하기를 아뢰어 청하니 형조가 회계하여 강도를 처벌하는 법에 따라 앞장선 5인을 효시(梟示)하기를 청하자 상이 이미 윤허하였다. 그런데 좌부승지 이단하, 우부승지 이숙(李䎘) 등이 상소하여 용서할 만한 정상을 갖추 아뢰고 다시 묘당에 하문하기를 청하니 상이 비국에 내렸다. 허적이 이때에 이르러 감사와 형관(刑官)을 처벌해야 한다고 힘써 말하면서 청하니, 상이 본도에 명하여 실상을 명백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이단하가 아뢰기를,
"직산(稷山) 사람 정세렴(鄭世廉)의 딸은 나이가 열넷인데 아비가 병을 앓을 때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흘려넣으니 다시 살아났다가 이틀 만에 죽었고, 그 뒤에 어미가 목구멍에 병이 나 죽게 되어 조금도 물을 넘기지 못하자 그 딸이 밤낮으로 하늘에 빌고 자른 손가락을 태워서 재를 만들어 목구멍 안으로 불어 넣었더니 목구멍이 갑자기 트여서 소생하였습니다. 이것은 지극한 정성으로 말미암아 감응한 것입니다. 지난해에 온천에 거둥하셨을 때에 도신(道臣)이 이 일을 아뢰었으나 아직도 정문을 세워 표창하는 은전이 없습니다. 정문을 세워 표창하거나 먹을 것을 주어야 하겠습니다. 또 이런 계문(啓聞)을 해조가 모두 덮어 두고 있으니, 빨리 회계하라고 분부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해조를 시켜 빨리 회계하여 일체로 거행하게 하였다. 이단하가 또 아뢰기를,
"고 부사 이명달(李命達)은 광해 때 계축년015) 의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나자 양천(陽川)의 생원(生員)으로서 앞장서서 유생(儒生)들을 거느리고 상소하여 이위경(李偉卿)·정조(鄭造)·윤인(尹認) 등의 머리를 베자고 청하였는데 말뜻이 늠름하고 매서웠습니다. 당시 외방의 상소로는 이것이 맨 처음 나온 것이었습니다. 조직(趙溭)·조경기(趙慶起)·김효성(金孝誠)과 같은 여러 사람은 다 증직(贈職)을 받았으나 이명달은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조직의 예에 따라 증직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해조를 시켜 전례를 상고하여 품처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70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
- [註 015]계축년 : 1613 광해군 5년.
○領相許積、左相鄭致和、戶判金壽興、兵判閔鼎重請對, 上御集祥殿引見。 許積進曰: "以前日謝恩使入去時, 淸帝有所云云之事, 【卽主弱臣强之說也。】 外議或曰: ‘當有卞誣之擧,’ 而臣意則不然矣。" 上曰: "彼若曰: ‘俺有云云, 而何無黑白乎,’ 以此執言, 則必有害, 差送謝恩使爲當矣。" 積曰: "聖敎當矣。 以謝恩使定送, 則冬至上使, 當爲改差。" 上曰: "使臣以何人差送耶?" 積曰: "事異常時, 不可不以大臣差遣也。" 上曰: "請穀事, 何以爲之耶?" 積曰: "前日徐必遠陳達之時, 臣則以爲難矣。" 金壽興、閔鼎重以請穀, 形勢之不便, 事理之不當陳達。 鼎重又曰: "國家雖不免爲人役, 胡至於請糧求活乎?" 上曰: "此處事勢, 若不至此, 則何可爲也。" 鼎重曰: "設令借穀, 六月前來到, 未可知, 終爲無益矣。" 上曰: "歲幣請減事, 彼若以事體不當責我, 則見敗矣。" 致和曰: "誠如聖敎。 納貢之國, 直請蠲減不當, 雖或略減, 必有謝恩使, 所費多於所減矣。" 上曰: "大臣無他員, 一人奉使, 則國家甚爲孤單矣。" 積曰: "今春只有臣一人, 而猶得支撑矣。" 致和曰: "積爲首相, 何可出疆乎? 臣當奉使矣。" 上謂承旨曰: "濟州人民之飢餓, 前古所無, 不可不別遣宣諭御史, 言于吏曹, 極擇差送可也。" 許積曰: "歲抄雖已停止, 束伍軍及各司諸員諸色匠人樂工奉足, 則不在歲抄之中, 各衙門若或督令代定, 則民有難支之弊矣。" 致和曰: "歲抄旣停, 則諸員諸色, 亦當不爲代定, 而但束伍軍, 若不隨得充定, 以致闕額甚多, 則雖値豐年, 亦難一時充定, 使之隨得代定宜矣。" 鼎重曰: "軍兵中物故老除, 自得閑丁者, 依前代定可也。" 上竝許之。 積曰: "吉州罪人許泓等所犯, 不過出於無知妄作, 所當原情定罪, 區別首從。 而咸鏡監司洪處厚初不覈問, 直請顯戮, 刑曹判書李正英不復詳察, 乃以强盜律照斷, 至以不待時處斬, 妻子爲奴, 家産籍沒, 矇然覆啓, 俱極可駭。 洪處厚、李正英請竝從重推考。" 上從之。 致和曰: "此等事甚重, 政院所當詳審覆逆, 自上亦當惕念處也。 若非李端夏等陳疏, 則許泓等就戮久矣。" 時泓等不待官令, 率其徒百五十人, 亂入於倉, 取出各穀三十五石零, 人分三斗, 且列書姓名, 以爲日後還納之地, 蓋監官受鑰匙, 任自開閉, 不卽分糶故也。 咸鏡監司洪處厚大駭, 啓請顯戮, 刑曹回啓, 請依强盜律, 梟示首倡五人, 上旣允下。 左副承旨李端夏、右副承旨李䎘等上疏, 俱陳可原事狀, 請更詢廟堂, 上下備局。 積至是力言請罪監司及刑官, 上命本道, 明査實狀以啓。 李端夏曰: "稷山人鄭世廉女子, 年十四, 父病斷指, 進血更甦, 二日而死, 其後母病喉垂死, 勺水不入, 其女子, 日夜禱天, 取其所斷之指, 燒作灰, 吹入喉中, 喉忽開得甦, 此由至誠所感。 頃年溫幸時, 道臣以聞, 而尙無旌褒之典。 宜加旌表, 或給食物矣。 且此等啓聞, 該曹一倂掩置, 速爲回啓事, 分付何如?" 上令該曹, 趁速回啓, 一體擧行。 端夏又曰: "故府使李命達當光海朝癸丑, 大論初起, 以陽川生員, 倡率諸生上疏, 請斬李偉卿、鄭造、尹認等, 辭意澟烈。 當時方外之疏, 此爲首倡。 如趙溭、趙慶起、金孝誠諸人, 皆蒙贈職, 而李命達則未得恩典, 依趙溭例贈職, 似當矣。 上令該曹考例稟處。
-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3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703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외교-야(野) / 무역(貿易)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사법-탄핵(彈劾) / 군사-군역(軍役) / 윤리-강상(綱常)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