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부제학 이민구의 졸기
전 부제학 이민구(李敏求)가 죽었다. 이민구의 자는 자시(子時)인데 이조 판서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이다. 젊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어 사마시와 문과에 모두 장원하였다. 병자 호란 때는 검찰 부사(檢察副使)로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는데,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평소부터 강화 유수 장신(張紳)과 잘 지내지 못한 데다가 수상의 세력을 믿고서 【김경징의 아비 김류(金璧)가 이 당시 수상이었다.】 자주 장신과 더불어 병권을 다툰 바람에 어긋난 일이 많았으므로 남한 산성에서 두 번이나 교지를 내려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강도에 들어갈 때도 빈궁과 원손이 미처 물을 건너지 못하였는데도 김경징은 먼저 그의 처자들을 건너게 하였다. 강도가 함몰된 뒤 조정이 앞뒤에 죄상을 성토하여 장신과 함께 사사(賜死)하였다. 검찰은 애당초 전쟁하는 장수가 아니었고 보면 이민구에게는 김경징과 같은 죄도 없었는데, 어찌 김경징과 같은 부류로 논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간의 논계가 여러 달 그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너무 각박하다고 하겠다. 인조(仁祖)는 끝내 윤허하지 않고 변방에 귀양보냈다가 정해년008) 에 방면하고 기축년에 직첩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는데, 대간에서 힘써 다투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뒤 양조(兩朝)009) 에서 서용하라는 은전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묻혀 지낸지 30년에 마침내 불행하게 죽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많이 그의 문장을 아깝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61면
- 【분류】인물(人物)
○前副提學李敏求卒。 敏求字子時, 吏曹判書睟光之子。 少有雋才, 司馬及第, 皆居魁。 丙子之亂, 以檢察副使, 先入江都, 檢察使金慶徵素與留守張紳, 不相能, 且恃上相之勢, 【慶徵父瑬, 時爲首相。】 多與紳爭主兵事, 事多掣肘, 自南漢再下旨止之。 且於入島時, 嬪宮元孫, 未及渡, 而慶徵先濟其妻孥。 及江都淪陷, 朝廷討其前後之罪, 與紳竝賜死。 檢察初非戰將, 則敏求無慶徵之罪, 論罪豈可同科。 而臺啓積累月不已, 其亦太刻矣。 仁祖終不允, 竄于邊邑, 丁亥蒙放, 己丑命還職牒, 臺諫力爭, 不聽。 其後兩朝, 皆有恩敍, 因臺啓輒還收。 沈淪三十餘年, 卒厄窮以死, 世多惜其文章。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61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