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세자 관례시 복장과 교서에 대한 《오례의》의 절차에 대해 논의하다
박장원(朴長遠)이, 왕세자가 관례에 처음 입고 나올 시복(時服)의 색에 대해 여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시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평소에 입는 옷이니, 흑단령(黑團領)은 알맞은 옷이 아닌 듯하다. 일찍이 신묘년005) 에 나는 아청직령(鴉靑直領)에다 조대(絛帶)를 띤 복장을 처음 입고 나오는 옷으로 삼았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신묘년과 같이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관례 때의 주인(主人)은 이조에서 계하할 것입니다마는, 빈찬관(賓贊官)은 아직 초기(草記)가 내리지 않아 미처 계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빈(賓)은 의당 영의정이 해야 할 것이니, 본조의 계사를 속히 판하(判下)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중에는 범연히 의정(議政)이라고 칭하였는데 하필 영의정으로 계하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각기병으로 걸음을 잘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허적을 빈으로 삼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 관례 때에 쓰일 교서(敎書)의 글은 《오례의》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는 빈이 세자에게 읽어 전하고, 또 사신(詞臣)을 시켜 별도로 교서를 짓게 하여 읽지 않고 바로 세자에게 준다고 하는데, 이는 두 개의 교서가 있는 것으로 예문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그러니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를 빈이 읽어 전한 뒤에 그대로 세자에게 주도록 해야 할 듯합니다. 《오례의》를 상고해 보면 절목(節目)이 매우 분명하니, 별도로 교서를 지어서 거듭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홍중보가 모두 《오례의》에 의거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의 내용 안에 말을 조금 더 첨가해 넣어 짓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세자 관례 때에 예석(醴席)은 본래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는 것이며 세자가 자리에 나아가서도 남쪽을 보고 앉는 것입니다. 내려와 절을 할 때에 있어서 《오례의》에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필시 남(南)자가 서(西)자로 잘못 된 것입니다. 《의례》에 ‘관자(冠者)는 자리 서편에서 절하고 술잔을 받으며, 빈(賓)은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註釋)에 ‘자리의 서쪽에서 남쪽을 향해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빈이 서쪽의 위치에 돌아와 절하고 동쪽을 향한다는 것은, 성인과 더불어 예를 하는 것이 주인에게 답배하는 것과 다름을 밝힌 것입니다. 예문의 본뜻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오례의》의 서(西)자를 따라 한다면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일찍이 인조(仁祖) 때에 유신 정경세(鄭經世)가 이에 의거해서 쟁론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는데, 그 뒤에 다시 《오례의》대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인조 때에 이미 행했던 대로 남쪽을 향해 절하는 예로 결정하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신들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오례의》 안에 ‘빈객의 자리는 관자의 자리 동편이다.’라고 하였는데, 잘못된 동(東)자를 정경세의 말에 따라 남(南)자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세자가 관례를 마친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과 《소대전칙(昭代典則)》 등의 책에는 모두 태자가 관례를 마친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예가 있는데, 《오례의》에는 빠졌습니다. 이는 불충분한 예전인 듯합니다."
"당연히 중국의 예에 의거해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중국의 예문을 갖다가 상고하니 태자의 관례 뒤에는 백관이 황제와 태자궁에 진하(陳賀)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례의》에는 이것도 빠졌으니 역시 불충분한 예전입니다."
"관례란 큰 일입니다. 예를 마친 뒤에 진하를 행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불충분한 예전이 됩니다. 당연히 중국의 예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5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
- [註 005]신묘년 : 1651 효종 2년.
○朴長遠以王世子冠禮初出時服色仰稟, 上曰: "所謂時服, 卽常時所着之服, 黑團領似非其服, 曾在辛卯年, 予以鴉靑直領條帶, 爲初出之服。" 領相鄭太和請依辛卯年爲之, 上曰可。 左相許積曰: "冠禮時主人, 自吏曹當啓下, 而賓贊官草記未下, 故未及啓下。 賓則領議政當爲之, 本曹啓辭, 斯速判下可也。" 太和曰: "《五禮儀》中泛稱議政, 何必以領議政啓下乎? 臣以脚病, 不能行步。" 上乃以積爲賓。 積曰: "世子冠禮時敎書之文, 載在《五禮儀》。 而今聞《五禮儀》所載之敎書, 則賓口傳於世子, 而又令詞臣, 別撰敎書, 不爲宣讀, 直授世子, 是則有二敎書也, 大違禮文。 似當以《五禮儀》所載敎書, 賓宣傳之後, 仍授於世子。 取考《五禮儀》, 則節目甚分明, 不宜別撰敎書, 而疊用也。" 領相鄭太和、右相洪重普皆請依《五禮儀》, 上從之。 後命於《五禮儀》所載敎書中, 添入措語撰出。 積又曰: "世子冠禮時, 醴席本南向而設, 世子就席, 亦南向坐。 而及其降拜之際, 《五禮儀》以爲: ‘西向拜’, 此必是南字, 誤作西字也。 《儀禮》曰: ‘冠者筵西拜受觶, 賓東向答拜’, 註曰: ‘筵西南面拜’ 也。 賓還拜於西序之位, 東面者, 明成人與爲禮, 異於答主人。 禮文本意, 若是明白, 而遵用《五禮儀》之西字, 其謬已甚。 曾於仁祖朝, 儒臣鄭經世據此爭之, 以正其誤, 而厥後還用《五禮儀》。 今亦依仁祖朝所已行, 定用南向拜之禮宜矣。" 太和、重普曰: "臣等之意, 亦如是矣。" 上曰: "依此擧行。" 積又言: "《五禮儀》中, 賓客席於冠席之東, 東字之誤, 請依鄭經世言, 改作南字, 付標以入。" 上從之。 積又曰: "世子旣冠之後, 不可無謁廟之禮。 《大明會典》、《昭代典則》等書, 皆有太子冠後謁廟之禮, 而《五禮儀》闕焉。 似是欠典也。" 太和、重普曰: "當依中朝禮行之矣。" 上從之。 積又曰: "取考中朝禮文, 則太子冠後, 百官陳賀於皇帝及太子宮之擧。 而《五禮儀》闕焉, 是亦欠典也。" 太和、重普曰: "冠禮, 大事也。 禮成之後, 不行陳賀, 果爲欠典。 當依中朝禮行之矣。" 上曰可。
-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59면
- 【분류】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