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길이 《어록해》의 발문 작성을 사양하고, 부제학의 형관 겸임 금지 등을 청하다
상이 사관을 보내어 좌참찬 송준길에게 면유할 뜻을 전하였다. 양심합에 나아가 송준길을 인견하기를,
"경이 비록 소를 올리고 물러가기를 청하나 비단 나의 마음만 허전한 것이 아니고, 세자의 보익을 오로지 경에게 위임하였으므로 지금 면유하려고 한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나이가 이미 70세에 가깝고 이처럼 질병이 있으니, 여기에 머문들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이미 오래 머물 뜻이 없으니, 내 어찌 억지를 부리겠는가. 다만 지금 사세가 이러하니 우선 머물러 환도(還都)하기를 기다렸다가 갈지 머물지를 천천히 논의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송준길이 《어록해(語錄解)》의 발문(跋文)을 지어 올리는 일을 사양하기를,
"비록 상의 하교가 있었으나 신이 문자에 있어서 날마다 매우 거칠어져 결코 명을 받들기 어렵습니다. 남이성(南二星)에게 지어 올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사양말고 지어 올려서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옛 규정에 부제학으로 금부 당상을 겸임하게 되면 반드시 그 겸임의 체차를 허락하여 준다고 하였으니, 대체로 경연의 관원은 형관(刑官)을 겸임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인조 때 고 판서 정경세(鄭經世)가 여러 차례 부제학에 제수되었는데, 혹 금오 당상을 겸하게 되면 고례(古例)에 근거하여 체직을 허락하였습니다. 이번에 빈객 조복양이 형조 판서에 제수되었는데, 빈객은 평상시와 다르고 형조 판서는 지의금(知義禁)과 비교가 안 되니, 신의 뜻으로는 조복양을 형조 판서에서 체직시키는 것이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신은 여생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지난번 영릉(寧陵) 제관에 차출되었을 때 질병을 무릅쓰고 다녀왔습니다. 제관은 봉심하는 규정이 없으나 신은 제사를 지낸 뒤에 능을 봉심하였는데 석물(石物)들이 매우 염려되었습니다. 신이 보기로는 개수하지 않을 수 없으나 일이 매우 중대하니 마땅히 대신에게 문의하여 처리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신이 풍수 지리에 대해서 아지 못하나 산등성이에 올라 살펴보니, 광명 쇄락(光明灑落)한 곳일 뿐만 아니라 선릉(先陵)과 함께 한 곳에 있으니, 그 정리에 있어서도 역시 편안해 보였습니다. 혹 어떤 지관(地官)의 무리가 능소를 옮기자고 청하는 말이 있으면 이것은 실로 망령된 말이니 일체 받아드리지 않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또 《산릉제사초략(山陵祭祀草略)》을 진달하면서 아뢰기를,
"이것이 바로 세종(世宗) 때의 상신 황희(黃喜)가 백관을 거느리고 3개월을 정청(廷請)한 것입니다. 옛 사람의 멀리 내다봄으로도 제사 의식이 융성하지 못함이 이러하며 그중에도 가장 온당치 못한 것으로는 6개의 촛불입니다. 그 만드는 방법을 보면 노위(蘆葦) 몇 개를 종이로 싸서 우지(牛脂)와 법유(法油)를 발랐는데 태우면 밝지도 않고 꺼지면 악취가 납니다. 사대부 집의 제사 때에도 촛불을 사용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유독 국가의 제사에 어찌 이렇게 할 수 있습니까. 제물은 비록 창졸간에 변경할 수 없더라도 제사 촛불은 변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해조에 명하여 처음 사용한 것이 어느 때부터 시작하였는지 조사해 내라고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 해 온양 행차 때 충청도 내의 절행(節行)이 있는 사람들로서 전후 도신이 계문한 자를 속히 감정하여 포상할 것을 특별히 전교하였는데, 지금까지도 거행하지 않고 있으니, 일의 체모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명하기를,
"충청도의 절행이 있는 사람들이 기록된 문서를 가지고 대신과 논의하여 행차가 있기 전에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또 아뢰기를,
"지난 임진난 때에 장성(長城) 무인 조영규(趙英圭)가 양산 군수(梁山郡守)로 있으면서 일 때문에 동래(東萊)에 갔었는데 마침 왜구가 상륙하였습니다. 부사 송상현(宋象賢)에게 묻기를 ‘공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니, 송상현이 답하기를 ‘한번 죽는 것 밖에 무슨 다른 계책이 있겠는가.’ 하고 되묻기를 ‘그대는 앞으로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조영규가 ‘내 이미 여기까지 왔으니, 마땅히 공을 따라 죽어야 한다. 다만 노모(老母)가 임소(任所)에 있으니, 잠시 돌아가 영결(永訣)하고 피난할 곳을 지시해 드리고 오겠다.’ 하자, 송상현은 작별을 핑계대고 살 길을 찾아 도망치는 것이라고 의심하였는데, 기약한 날짜에 과연 찾아와서 함께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조정로(趙廷老)는 부친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다고 하여 깊이 흙집에 거처하며 하늘의 해를 보지 않았는데, 지난번 어사가 조정로의 효성을 계문하여 정려를 내렸습니다. 그러나 조영규는 오래된 일이라고 하여 포상의 은전을 받지 못하니 장성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조영규 역시 효행으로 소문이 났는데, 오랫동안 그 어버이와 떨어져 있을 때에 집에 편지를 보내지 못하여, 기르고 있던 개를 손으로 어루만지며 육기(陸機)의 개 ‘누렁귀[黃耳]’가 서신을 전한 일을 혼자 말로 중얼대며 탄식하니, 개가 마치 그 뜻을 이해하는 모습을 하므로 인하여 가서(家書)를 매달아 보냈더니 며칠 안 되어 본가에 갔다와 사람들이 효행에 감동된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조영규는 평소의 효행이 이미 이러하고 난리에 임하여 절의를 수립한 바가 또 저와 같습니다. 이 사실은 상신 유성룡(柳成龍)의 문집 속에 있는데 이처럼 드러난 것을 어찌 인멸되게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예조에 명하여 그 사적을 조사해 내게 하였다. 송준길이 또 고 참의 홍명형(洪命亨)이 강도(江都)에서 사절하였는데 유독 정포(旌褒)를 입지 못하였다는 것으로 언급하니, 상이 조영규(趙英圭)의 일과 일체로 품지(稟旨)하게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20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인사-관리(管理) / 인사-임면(任免) / 역사-전사(前史) / 윤리-강상(綱常)
○甲辰/上遣史官, 諭左參贊宋浚吉以面諭之意。 御養心閤, 引見浚吉曰: "卿雖陳疏請退, 而不但予心缺然, 輔翼世子, 專委於卿, 故今欲面諭。" 浚吉曰: "臣犬馬之齒, 已近七十, 疾病如此, 留此何益。" 上曰: "卿旣無久留意, 予豈强迫乎。 第今事勢如此, 姑留以待還都, 徐議去留可也。" 浚吉辭《語錄解跋文》製進曰: "雖有上敎, 臣於文字間, 日甚荒疎, 決難承命。 請令南二星製進。" 上曰: "毋辭製進, 以副予意。" 浚吉曰: "臣聞古規, 行副提學兼帶禁府堂上, 則必許遞兼任, 蓋以經筵之官, 不可兼帶刑官故也。 曾於仁祖朝, 故判書鄭經世, 屢拜副提學, 或兼金吾堂上, 則引古例許遞矣。 卽者賓客趙復陽, 除拜刑曹判書, 賓客異於常時, 刑判非知義禁之比, 臣意則復陽刑判遞改爲宜。" 上命遞之。 浚吉又曰: "臣餘生無幾。 故向日差祭寧陵, 力疾往來。 祭官無奉審之規, 而臣行祭後, 奉審陵上, 石物之事, 極爲可慮。 以臣所見, 不可不改, 而事極重大, 當問于大臣處之。" 又曰: "臣未知堪輿家術, 而登穴見之, 則不但爲光明灑落之地, 與先陵同在一處, 其於情理, 亦安矣。 或有地官輩, 請遷陵所之說, 而此實妄言, 一切不納可也。" 浚吉又以《山陵祭祀草略》陳達曰: "此乃世宗朝相臣黃喜, 率百官三月廷請之事。 古人慮遠, 而祀典之不殷如此, 其中最未安者六燭。 見其制度, 用蘆葦數箇, 以紙裹之, 塗以牛脂法油, 燃而不明, 滅之臭惡。 士夫家祭時, 無不用燭, 而獨於國祭, 何可如是。 祭物雖不可猝變, 祭燭不可不變通也。" 上命該曹, 考出創用, 始於何時以啓。 浚吉又曰: "上年溫陽行幸時, 忠淸道內節行人等, 前後道臣所啓聞者, 斯速勘定褒賞事, 特爲傳敎, 而至今尙不擧行, 事體未安矣。" 上命: "忠淸道節行人等, 所付文書, 持議于大臣, 使趁行幸前擧行。" 浚吉又曰: "往在壬辰之亂時, 長城武人趙英圭, 爲梁山郡守, 因事往東萊, 適當倭寇下陸。 問于府使宋象賢曰: ‘公將何以’, 象賢曰: ‘一死之外, 有何他計’, 問曰: ‘汝將何爲’, 英圭曰: ‘吾旣到此, 當從公死, 而但老母在任所, 吾將暫還永訣, 且指示避亂之所而來也。’ 象賢疑其托辭逃生, 至期果來同死。 其子廷老, 以未報父讎, 深處土室, 不見天日, 向者御史啓聞廷老之孝, 旌其閭。 而英圭則以事在久遠, 未蒙褒賞之典, 長城人至今稱冤矣。 英圭亦以孝行著聞, 嘗久離其親, 未得家信, 手撫所畜犬, 以陸機黃耳傳書事, 自言而歎, 犬若有會意狀, 因繫送家書, 不數日往來厥家, 人以爲孝行所感。 英圭平居孝行旣如此, 臨亂所樹立又如彼。 事在故相臣《柳成龍文集》中, 如此表著者, 豈可使泯沒。" 上命禮曹, 考出其事績。 浚吉又以故參議洪命亨死於江都, 獨未蒙旌褒爲言, 上命與英圭事, 一體稟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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