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참에서 종실, 훈국, 삼학사, 구일·박경지·김익훈 등의 일을 논하다
조참(朝叅)를 행하였다. 상이 익선관·곤룡복 차림으로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가마를 타고 인화문(仁和門)을 지나 인정문(仁政門)에 나아갔다. 승지와 사관이 동서로 나누어 들어가서 제자리로 간 다음 백관이 사배례(四拜禮)를 행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이 반열에서 나와 아뢰기를,
"옛말에 ‘선비는 백성의 말을 전한다.’고 하였습니다. 유생(儒生)과 하찮은 백성도 소회가 있으면 아뢰는 법인데 더구나 이 많은 관료 가운데서는 소회를 진달하고자 하는 자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 나와서 아뢰게 하소서."
하니, 상이 옳게 여기고 주서(注書)로 하여금 알리도록 명하고 좌의정을 불러오게 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관들에게 나와 소회를 아뢰게 명하심은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만 사안이 갑자기 나왔기 때문에 신하들이 아뢸 바를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후일 조참 때 소회를 진달하도록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시열이 아뢰기를,
"임금이 종족을 후대함은 또한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만, 접견에는 때가 있고 하사에는 제한이 없는 것이 옛 도리입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선조(先祖)에서는 책을 강하는 데 친히 임하시어 종실들을 시험한 다음 이같은 일들로 자급을 올려 주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선조의 고사가 있음을 알고 있다. 전례에 의거하여 행하겠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훈국의 군대가 교만하고 사나움이 날로 심해지니, 장차 어디에 쓰겠습니까. 마땅히 변통해야 합니다."
하자, 허적이 이목이 많음을 걱정하여 눈짓을 하며 아뢰기를,
"이 일은 후일 등대할 때 조용히 의논해 정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또 아뢰기를,
"한(漢)나라가 절의를 붙들어 세웠기 때문에 한대에는 절의를 세운 사람이 많았습니다. 우리 조정으로 말하자면, 오달제·윤집·홍익한020) 같은 사람도 아직 포상의 은전을 입지 못했으니 개탄스럽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수년전에 이미 증직은 하였지만, 정표(旌表)는 소문이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하지 못하였다."
하였다. 시열이 또 양 서도(西道)에서 제 궁가가 떼어받은 전토를 파하도록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국가에서 일체 금단한다면 누가 감히 다시 떼어받으려 하겠는가."
하였다. 사간 박세견이 구일(具鎰)에게 내린 영장(營將)의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단지 인재가 어떠하냐에 달렸을 뿐이지, 어찌 규례가 있겠는가."
하고 따르지 않았다. 지평 최후상이 박경지(朴敬祉)에게 내린 우윤(右尹)의 명을 환수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허적이 구일이 승직 발탁된 것은 시열의 뜻에서 나왔다고 말하자, 시열이 아뢰기를,
"신은 구일이 재주가 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마는, 나라를 위하는 데는 성의가 있습니다. 신의 의견으로는 재주의 유무를 막론하고 성의가 있는 사람을 쓰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김익훈(金益勳)은 비록 제몸을 단속하지 못한 허물이 있습니다만, 대간의 계사에 있어서는 사실과 다릅니다. 그 사람도 재주가 있으니 만약 거두어 서용한다면 어찌 쓸 만한 곳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거두어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허적은 대신의 신분이므로 말을 하면 반드시 쓰이게 되어 있었다. 그런데 작은 선인 하나도 추천하지 못하고서, 탐학하고 추악한 일개 음관(蔭官)을 서용하라 청하니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어떤 사람이 허적에게 묻기를 "공은 어째서 김익훈(金益勳)을 서용하라 청하여 여론을 놀라게 하였습니까?" 하니, 허적이 말하기를 "내가 어찌 그가 재주가 있음을 알겠는가? 우암(尤菴)이 【시열의 별호이다.】 권하기에 부득불 그렇게 하였다." 하여 듣는 이들이 웃었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0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관리(管理)
- [註 020]오달제·윤집·홍익한 : 청나라에 대항한 삼학사.
○乙卯/行朝參。 上以翼善冠袞龍服, 出御宣政殿, 乘輿出仁和門, 御仁政門。 承旨史官分東西入就位, 百官行四拜禮。 判府事宋時烈出班奏曰: "古語云士傳民語。 儒生細民, 苟有所懷, 則尙且仰達, 況此百僚之中, 必有欲達所懷者。 請使之前奏。" 上可之, 命注書宣諭, 上命召左議政來。 許積進曰: "命百官前奏所懷, 意甚盛也, 但事出急遽, 故諸臣未及思所以仰對者。 請以後日朝參時, 陳達所懷分付。" 上從之。 時烈曰: "人君厚待宗族, 亦所不可已者, 接見則有時, 賜與則無節, 古之道也。" 積曰: "先朝有親臨講書而試之, 宗室等以此等事加資矣。" 上曰: "予亦知有先朝故事。 當依例爲之。" 時烈又曰: "訓局之軍, 驕悍日甚, 將何用哉。 所當變通也。" 積恐耳目煩多, 目攝之曰: "此事宜於他日登對時, 從容議定也。" 時烈又曰: "漢室扶植節義, 故漢代多節義之人。 以我朝言之, 如吳達濟、尹集、洪翼漢, 尙未蒙褒賞之典, 此可慨也。" 上曰: "數年前已贈職, 而旌表則有煩, 故不能矣。" 時烈又請罷兩西諸宮家折受田土, 上曰: "國家一切禁斷, 則誰敢更爲折受乎。" 司諫朴世堅請還收具鎰營將之命, 上曰: "只在人才之如何, 豈有一定之規乎。" 不從。 持平崔後尙請還收朴敬祉右尹之命, 上不從。 積以具鎰之陞擢, 出於時烈之意爲言, 時烈曰: "臣未知鎰之才否, 而爲國有誠。 臣意則無論才之有無, 用有誠之人可也。" 積曰: "金益勳雖有不檢身之過, 至於臺啓則失實。 其人且有才, 若收敍則豈無可用處乎。" 上命收敍。
【史臣曰: "積身爲大臣, 言必見用。 而不能進一小善, 請敍貪醜一蔭官, 識者鄙之。 或問于積曰: ‘公何爲請敍益勳, 以駭聽聞?’ 積曰: ‘吾何知其有才, 尤菴 【時烈別號。】 勸之, 故不得不爾’, 聞者笑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09면
-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군사-중앙군(中央軍) / 인사-관리(管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