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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9권, 현종 5년 10월 13일 신미 1번째기사 1664년 청 강희(康熙) 3년

양심합에서 삼공 등과 성변을 경계하며 시폐 등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서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삼공(三公)이 별의 변괴로 인해 차례로 인책하며 사직하는 글을 올리니, 상이 따뜻한 말로 답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하늘에게 실천으로 답해야지 형식으로 답해서는 안됩니다. 성상께서 마음 가짐을 항상 비망기의 말과 같이 하신다면 이는 실로 재변을 막는 제일의 방책인 것입니다."

하고, 홍명하는 아뢰기를,

"선왕조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모두 선치를 바랐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으므로 신이 항상 개탄합니다. 아뢴 공사를 늘 지체하므로 모든 일이 지체되어 점점 해이해지고 있습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임금은 반드시 인명무(仁明武) 이 세가지를 갖추어야만 비로소 선치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전하를 보건대 인(仁)은 넉넉하나 명무(明武)가 부족하니, 분발 진작하여 선치를 도모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명하는 아뢰기를,

"성상께서 자주 별군직(別軍職)으로 하여금 후원(後苑)에서 활쏘기를 연습하게 하는데, 이는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지나친 총애를 주어 모만을 부르지 말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총애를 주어 모만을 부르는 길입니다. 비록 사대부라 하더라도 총애를 믿고 태만할 때가 있는데 더구나 이러한 사람들이겠습니까."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오늘날의 큰 폐단은 사치인데 사치는 나라를 망치는 일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위에서 행하는 것은 아래에서 반드시 본받는 법인데, 사치의 풍습은 궁중에서 검소하지 못한 데에서 유래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하였다. 명하가 다시 아뢰기를,

"일전 신풍 부원군(新豊府院君)의 묘소를 이장할 때 궐내에서 보낸 제수가 지나치게 풍성하였습니다. 궁중의 사치가 이와 같은데 어찌 풍습을 이루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허적이 비망기 중의 권선 징악(勸善懲惡)의 하교를 들어 아뢰기를,

"성상께서 즉위하신 이래 권선이나 징악의 방법이 모두 온당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김원량(金元亮)의 일로 말하면, 원량은 정사 공신(靖社功臣)으로서 역적 이괄(李适)의 옥사에서 죽었는데, 그의 처의 상언(上言)으로 인하여 신축년046) 에 신원되었습니다."

하고, 이어 원량의 의심스런 일을 하나하나 들어 아뢰기를,

"신은 원량의 일에 대해 들어서 알 뿐 아니라 문자로도 보았습니다. 인조(仁祖)께서 환도한 후 제신에게 하문하고 처음에 함부로 참하여 억울하게 죽은 사람을 신원하도록 하였는데, 원량은 그 중에 들지 않았으니 공론의 소재를 여기에서 또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의 처의 호소로 인하여 신원을 추가로 허락한다면 징악의 방법에 어긋남이 있는가 싶습니다."

하니, 명하가 아뢰기를,

"원량의 일을 신이 실로 모릅니다만 일찍이 원두표(元斗杓)이후원(李厚源)의 말을 들으니 모두 원통하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사헌 정지화는 아뢰기를,

"사실이 의심되면 신원을 허락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고, 허적은 아뢰기를,

"일이 중대하니 다시 원임(原任)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였다. 태화는 아뢰기를,

"신은 일찍이 원량을 보았습니다. 반정한 후 훈신(勳臣)이 원량을 박대하였기 때문에 원량이 훈신을 헐뜯었는데 이로 인해 훈신에게 죄를 얻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논의가 한 군데로 모아지면 다시 물을 일이 없다."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거행할 조항을 내어 원임에게 물어 결단하기 바랍니다."

하니, 상이 원임에게 수의할 것을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권선의 방법 또한 타당함을 잃은 것이 있습니다. 성천 부사(成川府使) 김언(金琂)신축년 간에 그 아들의 상언(上言)으로 인해 정려의 은전을 입었는데 신은 그 일이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김언이 병자년 난리 때 성천 임소를 떠나 양덕(陽德)에서 피난하다가 적을 만나 피살되었습니다. 서토(西土) 사람들이 혹은 ‘김언이 재물이 많았기 때문에 본국의 도둑에게 피살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혹은 ‘노적(虜賊)을 만나 죽었다.’고 하기도 하는데, 비록 상세히는 알 수 없으나 충신이라고 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심지어는 적을 꾸짖으며 굽히지 않다가 죽었으므로 이 정려의 일이 있었다고 말하는데 이는 크게 그 실상을 잃은 것이며, 그 당시 예관 또한 몹시 흐릿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나라를 위해 죽을 마음이 있었다면 어찌 양덕 땅으로 갔겠는가."

하였다. 태화가 아뢰기를,

"그때 설령 순절한 일이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도신(道臣)이 계문한 후에 정문을 세워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 그 아들의 상언으로 정문을 세워준다는 것은 불가합니다. 호조 판서 홍중보(洪重普)는 그 당시 감사 홍명구(洪命耉)의 아들인데, 그 또한 김언이 순절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 정문을 도로 거둘 것을 명하였다.

지화(知和)가, 대신이 차자를 올려 입을 다물고 있음을 공척하였다는 것과 또 황해 감사 오정원(吳挺垣)을 논하지 않은 것이 잘못이라고 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여론을 기다렸다. 허적이 아뢰기를,

"함릉군(咸綾君) 이해(李澥)의 치사(致仕) 간청을 성상께서 끝내 허락하지 않으시니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아랫사람을 통솔하는 방법은 마땅히 염치로 권장해야 합니다. 치사자는 반드시 묘소의 비석에 이 일을 써서 영광으로 삼으니, 성상께서 특별히 그 미덕을 이루어 주시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성상께서는 필시 이 길을 한번 열어 놓으면 사퇴를 구하는 자가 많을 것을 염려하시나, 만약에 혹시라도 조정에 관계되는 자라면 허락하지 않으면 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명하송시열송준길을 부를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하유하는 것이야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이, 대사간 이진이 소패(召牌)를 받고도 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는다며 체직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3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과학-천기(天氣) / 풍속-예속(禮俗) / 사법-행형(行刑)

○辛未/上引見大臣、備局諸臣於養心閤。 三公皆以星變, 以次引咎控辭, 上溫言以答之。 鄭太和曰: "應天以實不以文。 自上操心, 常如備忘中語, 則此實弭災之第一策也。" 洪命夏曰: "先王朝, 群情皆望其有爲矣, 今則不然, 臣常慨然。 入啓公事, 每致稽綏, 故凡事解弛, 漸歸於委靡矣。" 許積曰: "人主必須仁、明、武三者俱備, 然後方可有爲。 而臣竊覵殿下, 仁有餘, 而明、武不足, 宜有以奮發振作以圖治也。" 命夏曰: "自上數使別軍職, 試射於後苑, 殊未妥當。" 太和曰: "《書》曰無啓寵納侮, 此啓寵納侮之道也。 雖士大夫, 亦有恃寵懈惰之時, 況此等人乎?" 命夏曰: "卽今大弊, 乃奢侈也, 奢侈亡國之事也。" 曰: "上之所行, 下必效之, 奢侈之風, 恐由於宮中之不能節儉也。" 命夏曰: "日者新豐府院君遷葬時, 內送祭需, 極其奢侈。 宮中侈習如此, 安得不成風乎?" 引備忘中勸善(徵)〔懲〕 惡之敎曰: "自上卽位以來, 勸善懲惡之方, 俱有所未當者。 試以金元亮之事言之, 元亮以靖社功臣, 死於逆之獄, 而因其妻上言, 伸冤於辛丑年矣。" 因歷擧元亮可疑之事曰: "臣於此事, 不但有所聞, 亦於文字上見之矣。 仁祖還都之後, 下詢諸臣, 當初亂斬枉死之人, 許令伸冤, 而元亮, 則不在其中, 公議所在, 此亦可見。 今因其妻訴冤, 而追許伸雪, 恐有乖於懲惡之道也。" 命夏曰: "元亮事, 臣實不知, 而曾聞元斗杓李厚源之言, 則皆以爲冤矣。" 大司憲鄭知和曰: "事涉可疑, 則勿許伸冤可也。" 曰: "事涉重大, 更問于原任可矣。" 太和曰: "臣則曾見元亮矣。 擧義之後, 勳臣待元亮薄, 故元亮毁斥勳臣, 而得罪於勳臣矣。" 上曰: "今日議論歸一, 則更無可問之事矣。" 太和曰: "請出諸擧行條, 問于原任而斷之。" 上命收議于原任。 曰: "勸善之道, 亦有所失宜者。 故成川府使金琂在辛丑年間, 因其子上言, 亦蒙旌表之典, 臣竊以爲過矣。 在丙子之亂, 離成川任所, 避亂於陽德, 而遇賊被殺。 西土之人, 或曰, 琂多財貨, 故見殺於本國之盜。 或曰: ‘遇虜賊而死, 雖未可詳, 而謂之忠臣, 則不可也。’ 至謂罵賊不屈而死, 有此旌表之事, 此則大失其實狀, 而其時禮官, 亦甚矇矓矣。" 上曰: "苟有死國之心, 則豈往陽德地乎。" 太和曰: "其時設有死節之事, 必有道臣啓聞而後, 可行旌表。 至於二十年後, 因其子上言, 而爲之, 不可也。 戶曹判書洪重普, 其時監司命耉之子也, 亦以爲之死節, 曾未聞之。" 上命還收其旌表。 知和以大臣, 箚斥含默, 又以不論黃海監司吳挺垣爲非, 引避退待。 曰: "咸陵君 李澥致仕之請, 自上終不許之, 未知聖意之所在也。 御下之道, 當以廉隅勵之。 致仕者, 必書之墓道以爲光, 自上特成其美, 豈非好事乎? 聖上必以此路一開, 求退者衆爲慮, 而如或關係於朝家者, 則但當勿許而已。" 上不答。 命夏請召宋時烈宋浚吉, 上曰, "下諭則尋常矣。" 李慶億啓: "大司諫李𥘼召牌之下, 稱病不進, 請遞之。"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9책 9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432면
  •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과학-천기(天氣) / 풍속-예속(禮俗)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