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관, 제언, 진휼, 절수, 전패 문제, 서북인 등용 등에 관해 논의하다
상이 대신 및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는데, 사간 민유중(閔維重)도 청대(請對)하여 입시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후 북행(北行)할 때 범금(犯禁)한 일들이 모두 역배(譯輩)로 말미암은 것이었는데 자세히는 알지 못했었습니다. 그런데 판부사의 말을 들어 보건대 이번 북행했을 때 일을 낸 것도 역배의 행동이었다고 합니다. 이형장(李馨長)이 복주(伏誅)된 뒤로 역배가 상당히 조심할 줄 알았었는데, 요즘 와서는 점차 풀어져 끝내 이와 같은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칙사의 행차가 지나간 뒤에 수역배(首譯輩)를 법에 따라 중하게 추궁하고, 이후 범금하는 자가 있을 경우에도 엄하게 다스려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지난번 대신(臺臣)이 제언(堤堰)을 쌓을 때 고척(古尺)으로 헤아려 기준을 삼는 폐단을 가지고 변통할 것을 계청(啓請)했었는데, 이 일은 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물을 채워놓으려면 민전(民田)이 그 속에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는데, 고척을 쓰지 않으면 백성이 모점(冒占)한 것까지 모조리 내주어야만 할테니, 또한 어떻게 물을 채워넣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옛날 제언을 쌓을 때, 어찌 금척(今尺)처럼 짧은 것이 있었겠습니까. 대계(臺啓)는 따를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도록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신축년 진휼할 때에 어사가 민간에 효유(曉喩)하여 부유한 백성들로 하여금 곡식을 바치게 했었는데, 그뒤로 조정에서 시상(施賞)한 일이 없어 장차 백성에게 믿음을 잃게 되었습니다. 곡식을 적게 바쳤던 자는 본 고을에서 연호 잡역(烟戶雜役)161) 을 감해 주고 많이 바쳤던 자는 해조에서 체문(帖文)162) 을 발급해 주도록 하는 것이 온당하겠습니다."
하고, 승지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연호 잡역을 감해주는 것도 한계를 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그 숫자를 서계(書啓)토록 하라."
하였다. 정중이 아뢰기를,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과 경상 감사 이상진(李尙眞) 모두 임기가 만료되는 시기가 되었는데 진휼하는 일이 끝날 때까지는 잉임(仍任)시켜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근일 정석(政席)이 엄숙하지 못해 청탁하는 행위가 상당히 행해지고 있습니다. 정석에 임하여 주의(注擬)할 즈음에 어떤 사람이 어떤 관직을 요구했다는 설이 정관(政官)의 입에서 나오는가 하면, 사찰(私札)이 정청(政廳)에 왕래하는 일까지 있으며, 음사(蔭仕)로 처음 들어오는 사람들도 대부분 정선(精選)된 자들이 아닙니다. 만약 이 고질적인 습성을 한번 씻어내어 격려시키는 일이 있지 않으면 퇴폐한 기강을 엄숙하게 진작시킬 수 없을 것이니, 이조의 삼당상(三堂上)을 모두 체차시키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이조의 삼당상이 모두 체차되었으니 앞으로의 정사(政事)가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조 당상이 없게 되었으니 장차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삼공(三公)이 한꺼번에 모두 없게 되는 경우에는 이조로 하여금 전에 복상(卜相)했던 것을 써서 들이도록 하는 것이 고규(古規)이다. 전에 듣건대 이판을 의망(擬望)할 때 낭관이 대신의 집에 가서 그의 천망(薦望)을 받았다고 하던데, 지금도 이에 따라 하는 것이 좋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그렇습니다. 신들이 빈청(賓廳)에 물러가서 천망해 들이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패초(牌招)하여 개정(開政)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유중이 또 생각하고 있는 바를 진달했는데 그가 간절하게 누누이 개진한 것은, 산과 바다를 절수(折受)받게 한 곳을 혁파하고 둔장(屯庄)에서 모집한 백성들을 군정(軍丁)으로 뽑게 함으로써 백성의 병폐를 제거하고 재이(災異)에 응하는 실상을 삼으라는 것이었으나, 끝내 천청(天聽)을 돌리지는 못하였다. 또 이정옥(李廷沃)을 나문(拿問)할 일을 아뢰니, 상이 따랐다.
유중이 아뢰기를,
"을미년에 추쇄(推刷)하던 당초부터 완전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혹 허록(虛錄)된 자도 있고 혹 의탁할 곳 없이 보수(保授)된 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허록된 자는 공포(貢布)를 징수하려 해도 징수할 곳이 없고 의탁할 곳이 없는 자는 흩어져 떠돌아다녀 찾을 길이 없었던 관계로 족린(族隣)에게까지 침해가 미쳤는데, 그 폐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우선 받아들이지 못한 것들을 탕척시켜주고 내년 가을을 기다려 허실을 바로잡는 것이 좋겠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탕척해주면 허위로 인한 폐단도 필시 많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유중이 아뢰기를,
"허위로 인한 폐단이 참으로 염려스럽기는 합니다. 그러나 공포를 징수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탕척해주지 않는다 하더라도 실효가 없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따라서 차라리 특명으로 탕척해주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우선 조사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전패(殿牌)를 분실한 고을에 대해서는 10년 기한으로 혁파시키고 있기 때문에 현재 혁파당한 군읍(郡邑)이 매우 많게 되어 백성들이 고통을 감내하지 못하고 있으며 황정(荒政)도 전일하게 되지 않고 있습니다. 간민(奸民)이 변을 일으키는 의도는 단지 수령을 쫓아내려는 데에 있는데, 뒤따라 혁파시킨다면 그의 의도를 바로 맞춰주는 셈이 되니, 대신에게 자문하여 변통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태화 및 정중·필원과 응교 남구만(南九萬)이 모두 혁파시키지 말도록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 이후로는 전패를 분실했다 하더라도 묻지 말라. 그리고 전에 혁파된 읍도 그 연수(年數)를 기록해서 써들이되 강상(綱常)과 관계되어 혁파된 읍은 써들이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유중이 아뢰기를,
"북로(北路)가 멀리 떨어져 있어 왕화(王化)를 듬뿍 받지 못한 관계로 온 도내에 고작 2∼3명의 무출신(武出身)이 있을 뿐이니 정말 애달픕니다. 신의 생각에는 특별히 근신(近臣)을 파견하여 과거를 실시해 사람을 뽑음으로써 인재를 거두어 모으고 민심을 위로해주는 것이 옳겠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케 하라."
하였다. 유중이 산과 바다를 양궁(兩宮)에 절수(折受)해 준 일에 대해 누누이 진달드렸는데도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피(引避)하기를,
"신은 듣건대 언책(言責)이 있는 자가 말씀을 드려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에는 물러난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점이 많으니, 체차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物論)을 기다렸다. 남용익과 유철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8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어문학-어학(語學) / 사법-치안(治安) / 농업-수리(水利) / 구휼(救恤) / 재정-상공(上供) / 재정-잡세(雜稅)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丁卯/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司諫閔維重亦請對入侍, 維重曰: "前後北行之犯禁, 皆由於譯輩, 而不得詳知。 聞判府事之言, 則今行生事, 亦譯輩之所爲云。 李馨長被誅之後, 譯輩頗知畏戢, 近來則漸弛, 終至如此, 過勑行後, 首譯輩宜依法重究, 而此後有犯禁者, 則亦宜嚴治也。" 上從之。 大司成閔鼎重曰: "頃者臺臣, 以堤堰古尺量爲准之弊, 啓請變通, 而此事甚難。 欲儲水, 則民田不得不入, 不用古尺, 則民之冒占, 當盡出給, 亦何以儲水乎?" 左議政元斗杓曰: "古者築堰時, 豈有今尺之短者耶? 臺啓不可從也。" 上曰可。 鼎重曰: "辛丑賑恤時, 御史曉喩民間, 使富民納粟, 而其後朝家無施賞之擧, 將失信於民矣。 納粟少者, 自本官減烟戶雜役, 多者自該曹成給帖文爲便。" 承旨徐必遠曰: "烟戶減役, 亦當定限矣。" 上從之曰: "書啓其數。" 鼎重曰: "忠淸監司李弘淵、慶尙監司李尙眞皆及(苽)〔瓜〕 , 宜限賑恤間仍任也。" 上從之。 大司諫南龍翼啓曰: "近日政席不嚴, 請托頗行。 臨政注擬之際, 某人求其官之說, 出於政官之口, 至有私札, 往來政廳, 蔭仕初入, 多未精選。 若不一洗痼習, 有所激厲, 則無以振肅頹綱, 請吏曹三堂上竝命遞差。" 上從之。 鄭太和曰: "吏曹三堂上皆遞, 前頭之政, 可慮也。" 上曰: "吏曹無堂上, 則將若之何? 三公一時竝無, 則使吏曹書入前卜相, 古規也。 前聞吏判擬望之時, 郞官往大臣家, 受其薦望云, 今亦依此爲之可乎?" 太和曰: "然。 臣等當退賓廳, 薦望以入。 今日牌招開政何如。" 上曰可。 維重又進所懷, 而其所縷縷陳懇者, 在於山海折受之革罷, 屯庄募民之抄丁, 以爲除瘼應災之實, 而終未回天聽。 又啓李廷沃拿問事, 上從之。 維重曰: "乙未推刷初未詳盡, 或有虛錄者, 或有無依而保授者。 其後虛錄者, 徵貢無處, 無依者, 流散莫尋, 侵及族隣之弊, 不可勝言。 臣以爲姑先蕩滌, 未捧之類, 待明秋釐正虛實可也。" 太和曰: "蕩滌則虛僞之弊, 亦必多矣。" 維重曰: "虛僞之弊, 誠可慮也。 然不得徵貢, 則雖不蕩滌, 無實一也。 寧不如特命蕩滌之爲愈也。" 上曰: "姑先査出。" 維重曰: "殿牌見失之邑, 限十年革罷, 故卽今郡邑之見革者甚多, 民不堪其苦, 荒政亦不專一。 奸民作變, 其心只在於逐其守令, 而從而革之, 正中其意, 宜詢于大臣變通。" 太和及鼎重、必遠、應敎南九萬皆請勿革, 上曰: "今後殿牌雖見失, 勿問曾前革罷之邑, 亦錄其年數書入, 而係干綱常, 革罷之邑, 勿令書入。" 維重曰: "北路遐遠, 不霑王化, 一道之內, 只有數三武出身, 誠可矜惻。 臣意則特遣近臣, 設科取人, 收拾人才, 慰悅民心宜矣。" 上曰: "令該曹稟處。" 維重以山海折受兩宮事, 縷縷陳白, 而不得請, 引避曰: "臣聞有言責者, 不得其言則去。 臣之失職多矣, 請遞。" 退待。 龍翼、兪㯙亦以此引避退待。 正言李光稷亦引避, 如維重退待。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3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86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어문학-어학(語學) / 사법-치안(治安) / 농업-수리(水利) / 구휼(救恤) / 재정-상공(上供) / 재정-잡세(雜稅) / 사법-탄핵(彈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