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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7권, 현종 4년 8월 5일 경자 3번째기사 1663년 청 강희(康熙) 2년

세자 책봉과 교육에 관한 전 부사 허목의 상소

전 부사 허목(許穆)이 상소하기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래로 후사가 없으시다가 황천(皇天)이 성상을 보우하시어 원자(元子)를 탄생시켰으니, 이는 하늘이 성자(聖子)를 내려 준 것이라 하겠습니다.

예(禮)를 보건대, 태자(太子)가 태어나면 성인례(成人禮)를 거행한 뒤에 3개월 만에 선비로 하여금 업게 하며 유사(有司)가 단면(端冕)118) 차림으로 남교(南郊)119) 에 가서 뵙게 한다 하였고, 제후의 세자(世子)는 천자에게 맹세를 드리고 그 이름을 오사(五祀)120) 와 산천(山川)에 두루 고한다 하였으니, 이는 통서(統緖)를 엄중히 하여 백성으로 하여금 다른 기대를 갖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성자(聖子)가 탄생한 지 벌써 3년이 되었는데도 성인례를 거행하지 않은 채 저위(儲位)를 오래도록 비워두고 있습니다. 어리석은 신이 모르겠습니다만, 전하께서 지금 춘추가 한창이시어 세자를 세우는 대계(大計)를 지금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생각해서 그러시는 것입니까, 아니면 성자가 아직 유아기로서 자라지 않았으니 몇 년 더 미룬 뒤 하려고 하시는 것입니까? 그러나 세자를 세우는 큰 일이야말로 예에 비추어 보아도 이렇듯 엄한 것으로서 하늘이 내려주시고 인심이 결부되어 있는 것이니, 나이가 어리다는 것에 구애를 받아서는 결코 안 될 것입니다.

보부편(保傅篇)에 이르기를 ‘성왕(成王)이 태자가 되자 강보(襁褓)에 쌓인 어린 아이였는데도 소공(召公)이 태보(太保)가 되고 주공(周公)이 태부(太傅)가 되고 태공(太公)이 태사(太師)가 되어 효(孝)·인(仁)·예(禮)·의(義)를 밝혀서 이끌며 습성이 되게 하였으니, 성왕은 적자(赤子) 때부터 이미 가르침이 행해졌었다.’고 하였습니다.

태자에 대한 예가 이와 같은만큼 고사(古事)에 비하면 이미 늦긴 하였습니다만, 그래도 모쪼록 뭔가 알아 볼 수 있는 어린 아이 때부터 사부(師傅)에 위임하여 교도(敎導)하고 보양(保養)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거처하고 출입하는 것과 언어와 동작 모두를 훈계하고 단속하여 귀와 눈에 익숙하게 하고 마음에 편안히 여겨지도록 해야 할 것인데, 이렇게 가르침이 이루어져 덕이 성취된 연후에야 일국의 신민이 기대하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있고 국가도 장구한 기간에 걸쳐 안정된 정치를 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가의(賈誼)도 ‘한 나라의 운명은 태자에게 매어 있고 태자가 훌륭하게 되는 것은 일찍 가르치고 좌우의 사람들을 잘 고르는 데 있다.’고 하였는데, 더구나 국본(國本)인 저사(儲嗣)를 정하는 것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습니까. 국본이 미처 정해지지 않은 것은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길이니,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일찍 저사를 정하여 천심(天心)에 순응하고 사부를 세워 교양시키는 일을 책임지움으로써 사방 신민들의 바람을 따르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소를 예조에 내렸다.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복계(覆啓)하기를,

"원자가 탄생한 것이야말로 종사(宗社)의 무궁한 복이니, 온 나라의 신민들로서 그 누가 기뻐하며 떠받들지 않겠습니까. 탄생한 초기에 간원이 고례(古禮)에 따라 행하기를 청했었는데,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니 조종조(祖宗朝)에서 일찍이 고례를 준행한 일은 없었고, 단지 원자가 태어난 지 6년 만에 책봉(冊封)하는 일이 있었을 따름이었습니다. 현재 고례에 따라 행하지 않았어도 인심이 매어 있어 국본(國本)은 자연히 정해진 셈인데, 아직 거행치 못한 것은 단지 봉전(封典)일 따름입니다.

지금 이 허목의 소를 살펴 보건대 고례에 따라 행하고 싶어하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만, 저위(儲位)가 오래도록 비어 있어 국본(國本)이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에 대해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대개 태자가 뭔가 느낄 수 있는 두세 살쯤에 삼공(三公)121)삼소(三少)122) 가 이끌어 습관이 되게 하는 것이 곧 성주(成周)예(禮)이니, 지금 원자의 나이가 어리다 하더라도 속히 봉전을 거행하여 시기에 맞게 보양(保養)하는 것이야말로 일찍 교화시킨다는 뜻에 합치된다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런 막중한 예를 해조에서 감히 단독으로 처리할 수 없으니, 대신에게 의논드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의논드리기를,

"원자가 탄생한 날이 바로 국본(國本)이 저절로 정해지는 날로서, 종묘(宗廟)에 고하고 백관이 진하(陳賀)하고 팔도가 함께 경축하고 과거를 설치하며 인재를 뽑았습니다. 그리고 온 나라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모두 기뻐하며 떠받들고 있고 보면, 허목이 소에서 이야기한 ‘국본이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설은 실로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가 인용한 바 ‘성왕은 적자(赤子) 때부터 가르침이 이미 행해졌었다.’고 한 말이야말로 지론(至論)이니 본래 이에 따라 시행해야 온당하겠습니다마는, 그래도 책봉하는 예는 조종조에서 행해온 것을 본받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영부사 이경석(李景奭), 좌의정 원두표(元斗杓), 우의정 정유성(鄭維城)태화와 동일하게 의논드리니, 상이 이르기를,

"책봉하는 예는 우선 서서히 하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

  • [註 118]
    단면(端冕) : 현단복(玄端服)과 면관(冕冠).
  • [註 119]
    남교(南郊) : 하늘에 제사 지내는 남쪽의 교외.
  • [註 120]
    오사(五祀) : 구망(句芒)·욕수(蓐收)·현명(玄冥)·축융(祝融)·후토(后土).
  • [註 121]
    삼공(三公) : 태사(太師)·태부(太傅)·태보(太保).
  • [註 122]
    삼소(三少) : 소사(少師)·소부(少傅)·소보(少保).

○前府使許穆上疏曰:

殿下卽祚以來, 未有冡嗣, 皇天陰佑聖躬, 誕生元子, 此天所以授聖子也。 禮, 太子生, 擧以成人禮, 三月使士負之, 有司端冕, 見之南郊, 諸侯之世子, 誓於天子, 以名徧告五祀山川, 所以嚴統重緖, 令民無異望者也。 方今聖子誕生, 已三年, 而未擧以成人禮, 而儲位久空。 臣愚不知殿下春秋鼎盛, 以建儲大計, 爲太早乎? 抑以幼穉未長, 將遲之數年乎? 建儲大事, 稽之於禮, 其嚴如此, 天之所與, 人心繫焉, 固不可以年穉拘之也。 《保傅篇》曰: ‘成王爲太子, 幼在襁褓, 召公爲太保, 周公爲太傅, 太公爲太師, 明孝仁禮義, 以導習之, 成王自爲赤子, 而敎已行矣。’ 太子之禮如此, 比之古事, 雖已遲矣, 須及孩提有識, 委任師傅, 以敎導保養。 其居處出入, 言(爲)〔語〕 動作, 皆有訓飭, 令習於耳目, 安於心術, 敎達而德成, 然後可以保一國臣民之屬望, 而國家長治久安也。 故賈誼曰, 一國之命, 繫於太子, 太子之善, 在於早敎與選左右是也。 況儲嗣國本。 國本未定, 危國之道也, 伏願殿下, 早定儲嗣, 以順天心, 立師傅, 責以敎養之事, 以從四方臣民之望。

上下其疏于禮曹。 判書洪命夏覆啓曰: "元子誕降, 實是宗社無疆之休, 擧國臣民, 孰不欣抃仰戴。 誕降之初, 諫院請行古禮, 而考出實錄, 則祖宗朝曾無古禮遵行之事, 只有元子生六歲冊封之擧。 雖不行古禮, 人心所係, 國本自定, 未及擧行者, 只是封典。 觀此許穆疏, 則欲行古禮之意, 而儲位久空, 國本未定之說, 意慮之所不到也。 大槪太子孩提有識, 三公三少, 以道習之, 仍成周之禮也, 卽今元子, 雖在孩提之年, 亟擧封典, 及時保養, 實合早敎之義, 而莫重之禮, 該曹不敢擅便, 請議大臣。" 上曰可。 領議政鄭太和議曰: "元子誕生, 便是國本自定之日, 告于宗廟, 百僚進賀, 八路同慶, 設科取士。 擧國人心, 莫不忻戴, 則許穆疏中國本未定之說, 實未曉也。 其所引成王自爲赤子, 敎已行之言, 誠是至論, 固宜依此施行, 而冊封之禮, 似當以祖宗之攸行爲法。" 領府事李景奭、左議政元斗杓、右議政鄭維城太和議同。 上曰: "冊封之禮, 姑徐可也。"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8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종친(宗親)