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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7권, 현종 4년 8월 2일 정유 2번째기사 1663년 청 강희(康熙) 2년

성균관 진흥을 위한 대사성 민정중의 상소와 예판 홍명하의 변통책

대사성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대저 학교(學校)는 교화(敎化)의 근본이 되는 곳인데, 삼대(三代)의 성법(盛法)에 대해서는 우선 논하지 않고, 단지 선비를 기르는 문제와 관련하여 현재 급히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사학(四學)103)외교(外校)104) 에서 나눠 가르치고 그 중에서 선발하여 태학(太學)105) 에 올리는 것은 장차 국가에서 쓰기 위해서입니다. 훗날 등제(登第)하여 경상(卿相)이 되고 아래로 백집사(百執事)가 되는 자들이 모두 여기에서 배출되니, 이곳에서 가르침을 받고 길러지는 자들이 진정 어질고 재주가 있으면 국가의 발전을 점칠 수 있는 반면, 어질지 못하고 재주가 없을 경우에는 국가가 쇠퇴하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 조종조(祖宗朝)에서 혹 태학에 친림(親臨)하여 경(經)을 논하고 기예를 시험하기도 하고, 혹 제유(諸儒)를 소대(召對)하여 배운 것을 강문(講問)한 뒤 뛰어난 자를 발탁하고 재주를 장려함으로써 한 시대를 권장시키기도 하고, 혹 권학 절목(勸學節目)을 내리면서 다시 밝혀 거행케 하기도 하고, 혹 사유(師儒)에게 명하여 별도로 힘껏 타이르게 하기도 하고, 혹 중관(中官)을 보내 재유(齋儒)106) 가 얼마나 되는지 물어보게 하면서 제술(製述)하게 하기도 하였는데, 이렇듯 특이하게 대우했던 것은 참으로 근본을 다스리는 곳이 바로 여기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사(文詞)는 작은 기예일 뿐으로서 치도(治道)와는 큰 관련이 없는 것인데도 삼순(三旬)에 제술케 하는 제도를 설치한 뒤 우등자(優等者)를 취하여 상을 주기도 하고 점수를 주기도 하고 직부 전시(直赴殿試)하게도 하였었으니, 권장하려고 한 것이 또한 지극했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일이 어느 때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래도 상순(上旬)에 윤차(輪次)하는 것만은 남아 있는데, 하여튼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로 학교를 권장하는 제반 일이 거의 모두 폐지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옛 성인이 이르기를 ‘학교의 가르침은 인군(人君)이 궁행(躬行)하고 심득(心得)한 결과에 기초하여 나오는 것이다.’ 하였는데, 어쩌면 학문에 종사하는 전하의 정성에 미진한 점이 있는 나머지 학교에 시행하는 제반 일이 자연히 날이 갈수록 쇠퇴해지는 지경에 이른 것은 아니겠습니까. 신은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위에서 교도(敎導)하는 것이 너무 허술하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고 느끼는 효과가 없어진 탓으로 요즘 들어 사습(士習)이 투박해지고 사기(士氣)가 시들게 되었으니, 참으로 식자(識者)가 한심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심지어는 재임(齋任)107) 이 수직(守直)하려 하지 않는가 하면 유생들도 거재하기를 싫어하여 묘정(廟庭)이 휑뎅그렁하고 재사(齋舍) 역시 텅텅 비어 있는데 현재 반궁(泮宮)108) 에 머물러 있는 자는 고작 10여 인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 집에 있는 자들 역시 아무리 성묘(聖廟)에 일이 있을 때이거나 삭망(朔望)에 분향하고 춘추(春秋)로 석채(釋菜)109) 를 올리는 날이라 하더라도 와서 참여하는 자가 극히 적으며, 나아가 집사(執事)해야 할 인원마저도 일이 있을 때 부족한 형편이니, 정말 개탄스럽습니다.

아, 교양(敎養)을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실로 국가의 발전과 퇴보가 결정되는데, 오늘날의 규모와 기상이 이와 같고 보면 그 결과를 따라서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보고 느껴 교화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전하께서 직접 행하시는 데에 근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만, 절목(節目)에 관계되는 세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신이 시험삼아 본관(本館)의 학령(學令)을 가지고 대략 변통을 가해 볼까 하는데, 예조에 명하여 참작해서 정하도록 했으면 합니다.

신이 삼가 살피건대, 학령에 이르기를 ‘매일 학관(學官)이 제좌(齊坐)하여 제생(諸生)을 맞아들이고서 정읍례(庭揖禮)에서 1인씩 추첨해 뽑아 읽은 책을 강(講)하게 하는데, 통자(通者)110)세초(歲抄)111) 할 때에 획수(劃數)112) 를 계산하여 식년(式年)113) 강서(講書)시에 점수를 합산한다.’고 하였습니다. 신은 지금 이 규정이 어느 해에 폐지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삼가 헤아려 보건대 매일 강하는 자가 단지 두 사람뿐이고 보면 매일 학령처럼 한다 해도 착실하게 되지는 않을 듯싶고, 또 1년 동안 강서하여 얻은 획수를 식년 때의 그것과 합산할 경우 오늘의 사정에 비추어 볼 때 또한 반드시 구애되어 행하기 어려운 점이 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이렇게 했으면 합니다. 즉 조정에서 학관으로 하여금 매달 4차에 걸쳐 상·하재의 제생을 통틀어 강하게 하도록 허락해 주되, 강하는 서책은 삼경(三經)과 사서(四書)로 하여 돌아가며 익숙하게 암송토록 하고, 매번 암송하는 권(卷)을 바꾸도록 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통략(通略)을 나누는 것은 일체 학령(學令)에 따르게 하되 문의(文義)를 관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재생(齋生)이 많을 경우에는 혹 며칠 계속 회강(會講)해도 될 것입니다. 그러면 1년에 강서하는 횟수가 통틀어 48차가 되는데 식년(式年)에 이를 때쯤 되면 거의 3, 4차례씩 돌려가며 암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세초(歲抄)할 때마다 획수를 통틀어 조사한 뒤 20획 이상이 되는 자의 성명을 별도로 써서 입계(入啓)하도록 했으면 하는데, 상격(賞格)의 고하는 오직 상께서 결재하시기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그리고 저 제술(製述)에 관한 규정과 같은 경우 그것이 특명에서 나온 것이고 보면 원래 아래에서 감히 진달드려 청할 성격의 것이 아니긴 합니다. 그런데 가령 상순(上旬)에 윤차(輪次)하는 것은 원래 응당 행해야 될 일에 속하는 것인데, 늘 정부·육조·관각의 제 당상의 유고(有故)로 말미암아 해마다 폐지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신의 생각에 당초 이 규정을 설치한 것은 권장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본관에서 윤차할 때에도 병조의 도시(都試) 때 제관(諸官)을 참회(叅會)시키는 것과 조금도 다름이 없게 하였으니, 이는 대체로 문(文)이나 무(武)에서 인재를 뽑는 것이 똑같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도시는 해마다 거행하면서 윤차는 완전히 폐지하고 있으니, 어찌 문(文)을 파행적으로 한다는 비평이 없겠습니까. 《대전(大典)》을 상고해 보건대, 역시 ‘유고가 있을 때에는 그 다음날 행한다.’는 글이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유고가 있다 하더라도 반드시 본관으로 하여금 계품(啓稟)하여 무고(無故)한 날에 거행토록 하되 그 달을 넘지 않도록 하게 하소서. 그러면 어찌 폐지되었다는 탄식이 나오겠습니까.

중순(中旬)과 종순(終旬) 두 번에 걸쳐 행하는 윤차를 지금 다시 설치할 수는 없겠습니다만 본관으로 하여금 매달 두 차례씩 설장(設場)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소서. 그리고 출제(出題)는 학령의 규정에 따라 설장한 곳마다 의(義)·의(疑)·부(賦)·표(表)·송(頌)·명(銘)·잠(箴)·기(記) 중 두 문제를 내고 책문(策問)은 한 통을 써내도록 하되 반드시 당일에 석차를 매기고 등제(登第)케 하소서. 그러면 1년을 통틀어 24회를 제술하게 되는데, 세초(歲抄)할 때에 이르러 획수를 합산한 뒤 10획 이상인 자의 성명을 따로 써서 입계하도록 하되 상격(賞格)의 고하에 대해서는 오직 상의 결재를 기다리게 하소서. 그러면 이 두 가지 일에 대해서 만큼은 그런대로 격려하고 권장하는 도로 볼 때 조금 보탬을 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더라도 염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은 각자 닦는 업(業)이 다른데, 만약 때에 따라 직부 전시(直赴殿試)케 하는 은사를 내리지 않고 그저 획수(劃數)를 내려주기만 할 뿐이라면, 강경하는 유생의 입장에서야 물론 다행으로 여기겠지만 제술하는 유생의 입장에서는 일단 강업(講業)이 없는 상태에서 필시 낙담할테니 그들을 흥기시킬 가망성은 없어진다 할 것입니다. 의논하는 자들은 필시 ‘직부 전시케 하는 일을 섣불리 행할 수는 없다.’고 하겠지만, 신의 어리석은 생각은 다릅니다. 설사 해마다 직부 전시케 하는 명을 내린다 하더라도 대비(大比)114) 이전까지 그런 은사를 받는 자는 3인에 불과할 뿐입니다. 조종조에서 자주 제술을 명하여 특별히 직부 전시하게 한 자가 1년 안에 혹 2인에 이른 적도 있었고 보면, 지금 1년에 한 사람씩 허락해 준다 하더라도 어찌 외람스럽게 될 걱정이 있겠습니까. 더구나 신이 요청드리는 것이야 때에 따라 은사를 내려주시라고 하는 것인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리고 신이 듣건대, 학교에 책을 내려주는 것이야말로 전대(前代)에 으레 있어 온 은사라고 하는데, 현재 본관에 소장하고 있는 서적이 2백, 3백 권을 넘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사생(師生)이 열람할 것이 있을 때마다 번번이 모두 민간에서 빌려오는 형편이니, 여기에서도 조정이 학교를 숭상하지 않는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성상께서는 특별히 예조에 명하여 팔도에서 간행된 제본(諸本)을 인출(印出)해 본관에 주도록 함으로써 강독할 자료를 삼게 하는 한편, 교서관으로 하여금 서책을 찍어낼 때마다 1본(本)을 본관에 보내도록 하고 이를 영구한 법식으로 삼게 하소서. 이밖에 변통해야 할 자질구레한 것들은 모두 예조에 이야기하여 품처(稟處)할 수 있도록 하였으니, 감히 모두 번거롭게 아뢰지는 않겠습니다.

이와 함께 삼가 걱정되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어린 아이나 가르칠 정도의 후진(後進)으로서 외람스럽게 스승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유생들을 대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부끄러움을 느끼는데, 다시 어떻게 강론하며 절차 탁마시키는 도움을 줄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성명(聖明)께서는 전후에 걸친 신의 간절한 정성을 살피시어 속히 면직을 허락해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그대가 진달한 말은 실로 선비를 기르려는 지극한 뜻에서 나온 것이었다. 내가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해조로 하여금 품처(稟處)토록 하겠다. 그대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예조 판서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대사성 민정중이 사유(師儒)의 장(長)인 신분으로 문교(文敎)가 폐해진 것을 목도하고 선비를 기르는 방도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함으로써 옛 제도를 회복할 소지를 마련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로부터 국가 정치의 일로는 다사(多士)를 배양하는 것보다 앞설 것이 없었기 때문에, 조종조에서 유학을 숭상하고 선비를 기르는 일이라면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하지 않는 일이 없었습니다. 인재가 성대하게 일어나고 치도(治道)가 밝아지는 것은 실로 이에 말미암는 것인데, 그 근본은 직접 실천하여 교화시키는 데에 있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조가(朝家)에서 마땅히 준행(遵行)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선조(先朝) 때에 진작시키는 방법을 더욱 넓혀 윤강(輪講)하는 제도를 정파(停罷)하고 별도로 과제(課製)하는 제도를 설치한 뒤 혹 반궁(泮宮)에서 시험하기도 하고 혹 금정(禁庭)에서 시험하기도 하였으며, 또 좨주(祭酒)의 직임을 설치하여 제생(諸生)을 통독(通讀)시킴으로써 용동(聳動)시키는 일을 행하였는데, 그 결과 그런대로 성취되는 효과를 얻게 되었었습니다.

그런데 근년 이래로 마침 조가에 유고가 있게 된 관계로 으레 행해오던 과제(課製)도 거행치 못하고 있으므로 다사(多士)가 무척이나 낙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하여 심지어는 재임(齋任)이나 제생(諸生)이 거재(居齋)하려 하지 않는가 하면 삭망(朔望) 때의 분향(焚香)이나 춘추(春秋)로 지내는 석채(釋菜) 때에도 와서 참여하지 않고 있으니, 일이 한심하기 짝이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비록 사습(士習)이 불미스러운 탓이긴 하나 역시 바르게 되도록 제대로 기르지 못한 결과이니, 이에 대해서는 사장(師長)이 알아서 재벌(齋罰)을 시행함으로써 폐습을 바로잡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선비는 선(善)으로 이끌어야지 법을 가지고 제재를 가해서는 안 되는 것이니, 오직 어떻게 가르치고 이끄느냐에 달려 있다 하겠습니다.

본관(本館)의 학령(學令)은 곧 조종조에 이미 행해 오던 절목(節目)으로서 법전 안에도 기재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학관(學官)을 임시로 감축한 뒤에 매일 유생들을 고강(考講)케 하는 법도 따라서 폐지되었는데 지금 갑자기 옛 제도를 회복시키기는 어렵다 하겠습니다.

소(疏)에서 진달한 고강·제술 등 일의 절목을 보건대, 고사(古事)에 의거하여 약간씩 변통을 가한 것이 참으로 일리가 있으니 진정 이대로 시행해야 하긴 하겠습니다만, 일은 어디까지나 이루어지는 것이 귀중한 것으로서 제도가 간략해야만 행해질 수 있다 하겠습니다.

매월 4회씩 고강하고 2회씩 과제하자는 뜻이야 좋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그럴 경우 한 달 안에 허다한 관원이 빈번하게 제회(齊會)해야 할 뿐더러 1년 내내 꼭 참석한다는 것도 형세상 쉽지 않을 것입니다. 따라서 결국에는 유명무실한 결과를 면하기 어려울 것이니, 사세(事勢)를 참작하고 정식(定式)을 절충해서 반드시 행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매월 대사성이 본관의 관원과 상·하재(上下齋)의 제생(諸生)을 이끌고 두 차례 고강케 하되 집에 있는 제생도 강하기를 원하면 허락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강하는 서책은 사서와 삼경을 돌려가며 고강케 하되 문의(文義)를 관통하는 것을 위주로 하고, 통략(通略)과 그에 따른 분수(分數)115) 는 일체 학령(學令)에 따르도록 해야 할 것이며, 《주역(周易)》《춘추(春秋)》도 점수를 배로 주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면 1년 동안 강하는 것이 24회에 이를텐데, 매년 말에 획수(劃數)를 합산하여 20분(分) 이상이 되는 자를 뽑아 본조에 보고케 해야 하겠습니다.

이른바 중순(中旬) 윤차(輪次)라고 하는 것은 곧 사중월(四仲月)116) 에 제술하는 규정을 말하고, 이른바 종순(終旬)이라고 하는 것은 매월 20일 후에 윤차하는 것을 말하는데, 정파(停罷)된지 이미 오래 되었으니, 또한 다시 설치하기는 어렵습니다. 지금 이후로는 대사성 이하가 매월 1회씩 시제(試製)하되 일체 장옥(場屋)117) 처럼 엄격하게 하여 외부 사람과 서로 통하지 못하게 하고, 출제(出題)는 부(賦)·표(表)·논(論)·책(策) 가운데에서 시험 때마다 하나씩 출제하게 하되 반드시 당일 석차를 매겨 등제(登第)를 정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면 1년 동안 제술하는 것이 12회에 이를텐데 매년 말 획수를 합산하여 10분 이상 되는 자를 뽑아 본조에 보고케 함으로써 서계할 수 있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고강과 제술에 따른 상격(賞格)의 고하는 그 분획(分劃)의 다소에 따라 상의 결재를 기다려야 하겠습니다만, 유생이 고강하고 제술할 때 특명으로 나온 경우가 아니면 우등자에게는 직부 회시(直訃會試)케 하는 상격을 내리고 다음은 점수를 내려주고 또 그 다음은 지필묵을 내려주는 것이 예로부터 내려온 고례(古例)입니다. 그러나 제술하는 유생들은 일단 강업(講業)이 없으므로 분획만 받을 수밖에 없는데 그럴 경우 그들이 낙담하는 탄식이 있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직부 전시까지 허락하는 문제는 결코 섣불리 의논할 수 없습니다.

이른바 상순(上旬)에 윤차한다고 하는 것은 곧 1월 7일과 7월 7일에 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관각(館閣)과 본관(本館)의 당상이 나아와 참여하여 시취(試取)하는 것이고, 이른바 춘추(春秋)로 과시(課試)한다는 것은 곧 3월 3일과 9월 9일에 하는 것으로서 정부와 육조와 관각과 본관의 당상이 일제히 나아와 참여하는 것인데, 이는 병조의 도시(都試)의 규정과 조금도 차이가 없으니, 대체로 문(文)·무(武) 공히 인재를 선발해야 한다는 뜻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날 유고가 있으면 다음날 하도록 법전에도 실려 있는데, 지금 이후로는 거행해야 할 날에 사고가 발생했을 경우엔 본관이 계품하여 사고가 없는 날에 거행토록 하되 그 달을 벗어나지 않도록 해야 마땅할 듯하니, 본관으로 하여금 착실히 거행토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교서관으로 하여금 서책을 인출(印出)할 때마다 1본(本)을 본관에 보내주도록 하는 것을 항식(恒式)으로 정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103]
    사학(四學) : 서울의 중앙·동·서·남에 세운 학교.
  • [註 104]
    외교(外校) : 지방의 향교.
  • [註 105]
    태학(太學) : 성균관.
  • [註 106]
    재유(齋儒) : 거재 유생(居齋儒生)의 준말.
  • [註 107]
    재임(齋任) : 거재(居齋)하는 유생 임원.
  • [註 108]
    반궁(泮宮) : 성균관.
  • [註 109]
    석채(釋菜) : 석전(釋奠).
  • [註 110]
    통자(通者) : 통략조불(通略粗不) 즉 통·약통·조통·불통 등 4등급의 평가기준 중 통을 말함.
  • [註 111]
    세초(歲抄) : 표창할 만한 일을 6월과 12월에 보고하는 것.
  • [註 112]
    획수(劃數) : 점수.
  • [註 113]
    식년(式年) : 자(子)·오(午)·묘(卯)·유(酉)에 해당되는 해.
  • [註 114]
    대비(大比) : 삼년마다 등용하기 위해 뽑는 과거.
  • [註 115]
    분수(分數) : 점수.
  • [註 116]
    사중월(四仲月) : 음력 2·5·8·11월을 말함.
  • [註 117]
    장옥(場屋) : 과거 시험장.

○大司成閔鼎重上疏曰:

夫學校, 敎化之本也, 三代盛法, 姑舍勿論, 而只以當今養士之急務言之。 分敎於四學外校, 而選陞於太學者, 蓋將爲國家用也。 他日之登而爲卿相, 下而爲百執事者, 皆出於此, 其所敎而養者, 苟賢且才, 則國家之興, 可卜也, 非賢非才, 則國家之替, 可知也。 在昔祖宗朝, 或親臨太學, 論經試藝, 或召對諸儒, 講問所學, 拔尤奬才, 以勸一世, 或下勸學節目, 使之申明擧行, 或命師儒, 別爲勉諭, 或遣中官, 問齋儒多少, 而仍使製述, 其所待遇之特異者, 良以治本之在此也。 至於文詞, 則小技身, 無大關於治道, 而猶設三旬之製, 取其優等, 或賜賞或賜畫, 或直赴殿試, 其所以奬勸之者, 亦至矣。 未知此擧, 廢於何時, 而至於上旬輪次之規, 則猶存也, 自殿下卽祚以來, 凡學校奬勸之擧, 幾乎盡廢矣。 古聖云學校之敎, 本之人君躬行心得之餘, 豈殿下典學之誠, 有所未至, 而其施諸學校者, 自至於日替, 臣竊惜之。 上之敎導者太踈, 故下之觀感者蔑效, 近來士習之偸薄、士氣之委靡, 誠爲識者之寒心也。 以至齋任不肯守直, 諸生厭於居齋, 廟庭閴然。 齋舍空虛, 目今留泮者, 只十餘人耳。 在家者, 雖聖廟有事之時及朔望焚香、春秋釋菜之日, 來參者絶少, 甚至執事之員, 有時不備, 良可慨也。 嗚呼! 敎養之得失, 實係國家之興替, 而今日之規模氣象如此, 則其驗從可知也。 觀感之化, 誠有本於殿下之躬行, 而若其節目之間, 則臣請試取本館學令, 略加變通, 臣願命禮曹酌定焉。 臣謹按學令曰, 每日擧官齊坐, 引諸生行庭揖禮後, 各抽上下齋一人, 講所讀書, 通者歲抄, 通考畫數, 合計於式年講畫。 臣今不知此規, 廢於何年, 而竊計日講者, 只二人而已, 則雖逐日如令, 似未着實, 且以一年所講畫數, 合計於式年, 則揆之今日事情, 亦必有妨礙難行處。 臣之愚意, 欲望朝廷, 許令學官, 每月四次通講上下齋諸生, 而所講則以三經四書, 輪回熟誦, 每次換易其所誦之卷。 若其通略之分, 則一從學令, 以貫通文義爲主, 齋生多, 則或連日會講。 通一年所講, 爲四十八次, 比及式年, 則三經四書, 幾乎三四輪誦矣。 每歲抄通考畫數, 自二十畫以上, 別書姓名入啓, 而賞格高下, 唯在上裁。 若夫製述之規, 出於特命者, 則固非自下所敢陳請。 如上旬輪次, 則自是應行之事, 而每以政府六曹館閣諸堂上有故, 逐年寢廢。 臣意當初設此, 出於勸奬。 本館輪次, 與兵曹都試參會諸官, 少無異同, 蓋以文武選才一體故也。 今都試, 則年年設行, 而輪次則全廢, 豈無跼文之譏乎。 考諸大典, 亦有有故, 則次日之文, 今後雖有故, 必令本館 啓稟, 設行於無故之日, 要不出其月, 則有何寢廢之歎乎? 中旬終旬兩輪次, 今雖不得更設, 許令本館, 每月二次設場。 所出之題, 則從學令之規, 每場出義疑賦表頌銘箴記中兩題, 策問則一道, 必於其日, 考次等第。 通一年所製, 爲二十四次, 至歲抄通考畫數, 自十畫以上, 別書姓名入啓, 而賞格高下, 唯竢上裁。 則只此二事, 庶或少補於激勸之道矣。 然念講經製述, 各自異業, 若不時賜直赴殿試, 而只賜畫數而已, 則其在講經之儒, 固爲優幸, 而其在製述之儒, 則旣無講業, 必至落莫, 而無興起之望矣。 議者必以直赴, 爲不可輕施, 而抑臣愚意, 則設使逐年, 而有直赴之命, 大比之前, 所賜者不過三人耳。 祖宗朝頻命製述, 特賜直赴者, 一年之內, 或至二人, 則今之歲賜一人, 何可慮其濫乎? 況臣之所請, 在於時賜乎。 且臣聞學校賜書, 乃是前代例恩, 而卽今本館所藏, 不滿二三百卷。 凡師生所閱, 輒皆借之閭里, 於此亦可見朝廷不崇學校之一也。 伏乞聖上, 特命禮曹, 印出八道所刊諸本, 以賜之, 俾資講讀, 且令(校館)〔校書館〕 , 每有印書, 輒以一本, 送于本館, 以爲永久之式。 此外些少變通之端, 具申禮曹, 以爲稟處之地, 不敢盡煩章奏。 仍竊伏念, 臣之蒙學後進, 猥當皐比, 每對章甫, 輒自心愧, 更何望講論切(嗟)〔磋〕 之益乎? 伏乞聖明, 察臣前後誠懇, 亟許遞免。"

上答曰: "爾之所陳之言, 實是養士之至意。 予豈不留心。 當令該曹稟處。 爾其勿辭。" 禮曹判書洪命夏啓曰:

"大司成閔鼎重身爲師儒之長, 目見文敎之廢, 條陳養士之方, 以爲復古之地。 自古國家爲治之務, 莫先於培養多士, 故祖宗朝崇儒作士之道, 靡所不用其極。 人才之蔚興, 治道之休明, 實由於此, 而其本在於躬行之化, 此正朝家所當遵行者也。 曾在先朝, 益恢振作之方, 停罷輪講, 別設課製, 或試於泮宮, 或試於禁庭, 且設祭酒之任, 通讀諸生, 以施聳動之擧, 庶有作成之効矣。 近年以來, 適値朝家有故, 循例課製, 亦未設行, 多士之落莫甚矣。 至於齋任諸生, 不肯居齋, 朔望焚香, 春秋釋菜之日, 亦未來參, 則事極寒心。 此雖士習之不美, 亦無非不能養正之致, 此則師長可以量施齋罰, 以矯弊習。 而夫士可以善導之, 不可以法制之, 唯在敎迪之如何。 本館學令, 乃祖宗朝已行之節目, 而亦載於法典中。 學官權減之後, 每日儒生考講之法, 又從而廢之, 今難猝然復古。 疏中所陳考講製述等事節目, 依倣古事, 略加變通, 誠有意見, 固當依此施行, 而但事貴必成, 法簡乃行。 每月四次考講, 二次課製, 意非不好, 而一朔之內, 許多官員, 頻數齊會, 通一年不撤, 其勢未易。 終難免有名無實之歸, 不可不參酌事勢, 折衷定式, 以爲必行之地。 每月大司成, 率本館官員上下齋諸生, 兩次考講, 在家諸生願講者亦許。 所講書則以四書三經, 輪回考講, 而以貫通文義爲主, 通略分數則一從學令, 《周易》《春秋》, 亦不倍畫。 通一年所講, 爲二十四次, 而每歲末, 通考畫數, 二十分以上, 抄報本曹, 以爲書啓之地。 所謂中旬輪次者, 乃四仲月製述之規也, 所謂終旬, 乃每月二十日後輪次之謂也, 停罷已久, 亦難復設。 今後則大司成以下, 每朔一次試製, 而一如場屋之嚴切, 勿使外人相通, 所出之題, 則賦表論策中, 每試只出一題, 必於其日, 考次等第。 通一年所製, 爲十二次, 而每歲末, 通考畫數, 十分以上, 抄報本曹, 以爲書啓之地。 考講及製述、賞格高下, 隨其分畫之多少, 以竢上裁, 而凡儒生講製, 非出於特命者, 則優等賞格, 直赴會試, 其次賜分, 又其次紙筆墨, 自是流來古例。 製述儒生, 旣無講業, 只蒙分畫, 則雖曰有落莫之嘆, 至於直赴殿試, 決不可輕議。 所謂上旬輪次者, 乃正月初七日、七月初七日也, 政府館閣本館堂上, 進參試取, 所謂春秋課試, 乃三月三日、九月九日也, 政府六曹館閣本館堂上, 一齊進參, 此與兵曹都試之規, 少無異同, 蓋文武一體選才之意。 故其日有故, 則次日爲之, 載在法典, 今後應行之日, 如有事故, 則本館啓稟, 設行於無故之日, 要不出其月之內似當, 令本館着實擧行, 且令校書館, 每於印出書冊之時, 輒以一本, 輸送本館, 以定恒式。"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7책 7권 1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7면
  • 【분류】
    인사-임면(任免)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