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현종실록 6권, 현종 3년 9월 17일 정해 2번째기사 1662년 청 강희(康熙) 1년

계후자 봉사 문제에 대해 대신들이 헌의하다

계후자(繼後子)가 있는데도 친자(親子)로 봉사(奉祀)케 하는 것을 개정하는 일에 대해 대신들이 헌의(獻議)하였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신이 삼가 국조(國朝) 가정(嘉靖)147) 계축년148) 의 수교(受敎) 내용을 듣건대, 후사(後嗣)를 세운 뒤에 친자를 낳았을 경우에는 친자로 봉사케하고 계후자는 중자(衆子)로 대우하여 양자로 된 것을 파기시키지 못하게 하였었습니다. 그런데 또 인조조(仁祖朝)에는 고(故) 상신(相臣) 최명길(崔鳴吉)이 계후한 뒤에 아들을 낳았는데. 호 문정공(胡文定公)149) 의 고사를 따라 계후자로 장자(長子)를 삼게 해 줄 것을 청하여 윤허를 받았었습니다. 전후의 영갑(令甲)150) 이 이와 같기는 합니다만, 천륜(天倫)이 한번 정해지면 그 차서는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옛사람들의 예를 찾아 보건대, 제갈 무후(諸葛武侯)151) 는 아들이 없어 형인 제갈근(諸葛瑾)의 아들 제갈교(諸葛喬)를 아들로 들였는데 그 뒤에 아들 제갈첨(諸葛瞻)을 낳았어도 를 적자(嫡子)로 삼았고, 호 문정공 안국도 형의 아들 호인(胡寅)을 양자로 들였는데 뒤에 두 아들 호영(胡寧)호굉(胡宏)을 낳았어도 을 후사로 삼았으니, 이것이야말로 본받을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지금 만약 대계(臺啓)대로 인조조의 수교 아래로 위배한 자들을 일체 바로잡으려 할 경우, 세월이 이미 많이 흘러 구근(久近)이 일정치 않을 테니, 들쭉날쭉 차이가 나 잘못되는 결과를 면치 못할까 염려됩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오늘부터 다시 밝히고 중외(中外)에 포고하여 반정(反正)한 뒤의 수교(受敎)를 영구히 항식(恒式)으로 삼게 했으면 합니다. 그러면 위로는 가정 연간의 수교를 폐기하는 것이 되지도 않고 아래로는 인조조의 성헌(成憲)도 어기지 않는 것이 되어, 편리할 듯싶습니다."

하고, 좌의정 원두표(元斗杓)는 아뢰기를,

"인후(人後)가 된 자를 아들로 삼는 것이야말로 《예경(禮經)》의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간혹 자기 소생으로 승중(承重)케 하는 일이 있는데, 이는 윤서(倫序)를 밝히고 적사(嫡嗣)를 중히 여기는 뜻이 결코 못됩니다. 이번에 간관이 예경에 의거하여 증거를 제시했는데 또 인조조의 수교까지 있으니, 신이 어떻게 감히 의견을 달리 하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정유성(鄭維城)은 아뢰기를,

"일단 입후(立後)한 뒤에는 부자의 윤기(倫紀)와 적서(嫡庶)의 차서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예경의 뜻이 지극히 엄한데, 어떻게 자신의 소생(所生)이라 하여 윤리를 문란시킬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인조조의 수교가 분명히 있어 조신(朝臣)들 또한 대부분 준행하고 있는데, 신이 어떻게 감히 다시 의논을 달리 할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가정 계축년의 수교에 의거하여 시행하라."

하였다. 그 뒤에 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수교대로 시행하라고한 명을 취소하도록 계청(啓請)하였는데,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47면
  • 【분류】
    가족-가족(家族) / 사법-법제(法制) / 정론-간쟁(諫諍)

  • [註 147]
    가정(嘉靖) : 명 세종(明世宗)의 연호.
  • [註 148]
    계축년 : 1553 명종 8년.
  • [註 149]
    호 문정공(胡文定公) : 북송(北宋)의 유학자 호안국(胡安國).
  • [註 150]
    영갑(令甲) : 법제.
  • [註 151]
    제갈 무후(諸葛武侯) : 제갈량(諸葛亮).

○以有繼後子, 而以親子奉祀者改定事, 諸大臣獻議。 領府事李景奭以爲: "臣竊聞國朝嘉靖癸丑受敎, 立嗣後生親子, 親子奉祀, 繼後子論以衆子, 毋得罷繼。 又於仁祖朝, 故相臣崔鳴吉繼後後生子, 請從胡文定公故事, 以繼後子, 爲長子蒙允。 前後令甲如此, 然天倫一定, 序不可易。 求諸古人, 則諸葛武侯無子, 取兄爲子, 及後生子, 而以爲嫡, 文定公安國, 養其兄子, 後生二子, 而以爲後, 此實可法者也。 今若依臺啓, 自仁祖朝受敎後, 有違者, 一切釐正, 則年所已多, 久近不齊, 恐不免參差異同之舛錯。 臣之愚意, 自今日申明布告中外, 反正後受敎, 永以爲式。 則上不廢嘉靖時受敎, 下不違仁祖朝成憲, 似爲便順。" 左議政元斗杓以爲: "爲人後者爲之子, 禮經明訓。 或以己出爲承重, 殊非明倫序、重嫡嗣之意。 今此諫官, 據經爲證, 又有仁祖朝受敎, 臣何敢異同。" 右議政鄭維城以爲: "旣已立後之後, 則父子之倫, 嫡庶之序, 已定矣。 禮經之意至嚴, 豈可以己出, 有所紊亂於其間。 況仁祖朝, 明有受敎, 朝臣亦多遵行, 臣何敢更容別議。" 上答曰: "依嘉靖癸丑受敎施行。" 其後司諫李敏迪啓請, 還寢依受敎施行之命, 而上竟不從。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47면
  • 【분류】
    가족-가족(家族) / 사법-법제(法制) / 정론-간쟁(諫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