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민을 구제하는 방책과 승니들의 환속, 도성내 이원의 혁파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흥정당(興政堂)에서 인견하고 먼저 기민을 구제하는 방책을 의논하였는데, 영의정 정태화가 기민이 있는 군현으로 하여금 다른 고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일지라도 일체 죽을 준비하여 진휼하게 하도록 청하였다. 상이 묻기를,
"만약 어사를 파견하여 진휼하는 일을 전담시켜 마을을 출입하면서 관리들을 단속하게 한다면 자못 보탬이 있겠는가?"
하니, 태화가 대답하기를,
"어사가 일시적으로 순행한다고 해서 실효가 있을지 기필할 수 없고 번거로운 폐단만 있을 것이니 보내지 않느니만 못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묻기를,
"어제 옥당의 차자에 각 고을의 미납 방출곡을 감면해야 한다고 극언했는데, 수령들은 어찌하여 그때 그때 거두어들이지 않아 점차 거두어들이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르게 했는가?"
하니,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실로 수령의 잘못입니다. 다만 근년에 해마다 흉년을 만나 수령들이 독촉해서 받아들이려고 해도 형세상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중에 사망하거나 유리하여 이사한 자가 있으면 강제로 징수하는 조치가 친척이나 이웃에게까지 미치기 때문에 매우 원망을 하게 됩니다."
하자, 상이 모든 도에 명하여 거두어들일 곳이 없는 것들을 상세히 조사하여 일일이 계문하도록 하고, 또 노약자들에 대한 금년도의 군포 징수를 감면할 것이며 어영군의 춘번(春番)과 하번(夏番)의 번상(番上)을 파하여 돌아가 농사를 짓게 하도록 명했는데, 이는 옥당의 차자 내용을 따른 것이다. 태화가 진언하기를,
"지난번 승니(僧尼)들을 환속시키라는 하교는, 그 의도는 매우 훌륭합니다만 그 중에는 갑자기 거행하기엔 곤란한 것도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다시 생각해 보니 필시 소요가 일어날 걱정이 있을 것이라는 마음이 들었다. 외방은 우선 천천히 하고 도성 내의 두 이원(尼院)을 먼저 혁파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역대 제왕들이 하지 못하던 훌륭한 조치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과단성 있게 시행하신다면 어찌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이 이원이 언제 창설되었는지 알 수 없는데, 전부터 의탁할 곳 없는 늙은 후궁들이 이원에 많이 거주하고 있고, 선왕조 때의 후궁도 나가 살고 있는 자가 있다고 합니다. 지금 만약 갑자기 혁파하게 되면 이들이 돌아갈 곳이 없게 되니 도리어 염려가 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궁중에 오래 전에 늙은 박 상궁(朴尙宮)이란 자가 있었는데, 선조조에 은혜를 받은 후궁이었다. 늙어 의탁할 곳이 없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자수원(慈壽院)에 나가 살기 수십 년이었는데 수년 전에 이미 죽었고 지금은 살고 있는 자가 없다."
하였다. 상이 이에 도성 내의 두 이원의 혁파를 명하고 40세 이하의 비구니는 모두 환속시켜 출가(出嫁)하게 하고, 그 나머지 늙어서 돌아갈 곳이 없는 자들은 모두 도성 밖 이원으로 내보냈으며, 나이가 넘은 사람도 환속하려는 자는 허락하라고 하였다. 또 예관에게 명하여 자수원에 가서 열성(列聖)의 위판을 모셔 내다 봉은사(奉恩寺)의 예에 따라 바로 정결한 곳에 파묻게 하였다. 태화가 진달하기를,
"순창인(淳昌人) 양운거(楊雲擧)는 일찍이 몇백 석의 미곡을 관에 납부했으며, 또 흉년이 들자 자기 개인 저축을 흩어 기민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므로 이에 힘입어 온전히 살아난 자가 자못 많습니다. 지금 만약 재물을 희사하여 빈민을 구제한 사람에게 상을 주던 옛날의 제도를 시행하기로 한다면 운거에게 상을 줌이 마땅합니다."
하니, 상이 상당한 관직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운거는 대대로 호남에 살았는데, 재산이 넉넉하여 백만 장자라는 명성이 있었다. 선왕조에도 일찍이 운거에게 가선(嘉善)의 품계를 제수했으나 받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사옹원 참봉에 제수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89면
- 【분류】재정-국용(國用) / 인사-임면(任免) / 왕실-국왕(國王) / 구휼(救恤)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군사-군역(軍役) / 사상-불교(佛敎)
○乙卯/上引見大臣、備局諸臣于興政堂, 先議賑饑之策。 領議政鄭太和請令飢民所在郡縣, 雖自他邑移徙, 一體設粥賑活。 上問若遣御史, 專掌賑事, 出入村閭, 檢飭官吏, 則頗有所益乎? 太和對曰: "御史暫時周行, 未必有實效, 秪益其煩弊, 不如不送矣。" 又問: "昨日玉堂之箚, 極言各邑逋糶之當減, 爲守令者, 何以每每不捧, 漸致難捧之弊乎?" 太和曰: "此固守令之過。 第近歲連値凶歉, 守令雖欲督捧, 其勢亦難。 其中或有死亡與流徙者, 侵徵之擧, 及於族隣, 殊涉冤矣。" 上命諸道詳査指徵無處之類, 一一啓聞。 又命減兒弱今歲收布, 命罷御營軍春夏番上, 俾得歸農, 從玉堂箚中語也。 太和進曰: "頃者僧尼還俗之敎, 意甚盛也, 而其間不無難於猝行者矣。" 上曰: "予亦更思之, 必有反致騷擾之患。 外方則姑徐, 城內兩尼院, 爲先革罷如何?" 太和曰: "此是歷代帝王所未有之盛擧。 聖上若斷然行之, 豈非美事乎? 第此尼院, 未知創設於何時, 而自前後宮之老而無依者, 多住尼院, 先朝後宮, 亦有出居者云。 今若猝罷, 此無所歸, 還可慮矣。" 上曰: "宮中舊有老朴尙宮者, 宣祖朝承恩後宮也。 年老無依, 落髮爲尼, 出居慈壽院數十年矣, 數年前已逝, 今無在者矣。" 上乃命罷城內兩尼院, 女尼年四十以下者, 竝令還俗許嫁, 其餘老無所歸者, 盡黜城外尼院。 年雖過限, 欲爲還俗者, 亦許之可也。 又命禮官, 詣慈壽院, 奉出列聖位板, 依奉恩寺例, 卽日埋安于凈地。 太和仍陳: "淳昌人楊雲擧曾納累百米穀於官, 又於凶歲, 散其私儲, 給與飢民, 民賴以全活者頗多。 今若用古者推獻助之賞, 賞雲擧則宜矣。" 上命除授相當職。 雲擧世居湖南, 饒於財, 有素封之稱。 先朝嘗授雲擧嘉善階, 不願受, 至是, 拜司饔參奉。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28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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