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양 부원군 이시백의 졸기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李時白)이 죽었다. 시백이 별다른 재능도 없고 또 재상으로서의 업적도 없었으나, 청백하고 충의롭고 근신한 절의만은 당시 재상 지위에 있던 여러 사람들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그는 병 중에 있으면서도 지성으로 하는 말들이 모두 나라 걱정하는 말이었고, 임종시에는 입으로 몇 줄의 유소(遺疏)를 남기기도 하였는데, 그 유소에,
"신이 두 조정에 걸쳐 지우(知遇)를 받고 은총은 분에 넘쳤으나 보답은 티끌만큼도 한바 없고, 다만 힘이 미치는 데까지 하다가 죽은 뒤에야 말려고 마음먹었을 뿐입니다. 다행히도 성명을 만났으나 죽음이 이미 임박하여 대궐을 우러러 보아도 천안(天顔)은 영원히 뵈올 수가 없습니다. 구구한 생각은 다만 성상께서 덕을 힘쓰고 업을 닦을 것이며, 정형(政刑)을 신중히 하여 비록 대벽(大辟)을 집행할 죄인이라도 쾌하게만 여기지 말고 반드시 더 어렵고 더 신중하게 하소서."
하고, 후로도 많은 말을 하였으나 끝맺음을 못하였다. 그의 아들 이흔(李忻) 등이 정서하여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이 유소를 보니 슬픈 마음 더욱 간절하다. 비록 끝맺음을 못한 글월이지만 그 꾸밈없는 충절과 못잊어하는 성의에 대하여 이를 띠에다 쓰고 가슴에 새겨두지 않을까보냐."
하고, 이어 근시를 보내 조의를 표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나 시백은 배우지도 못하고 술업도 없으면서 송시열·송준길 등을 추켜세워 심지어 이윤(伊尹)과 부열(傅說), 주공(周公)과 소공(召公)으로까지 소차에서 칭하였고, 능소를 수원(水原)으로 정하려 할 때에도 그곳은 안 된다는 쪽으로 강력 주장하였는데, 그것은 시열에게 붙어 그의 주장을 합리화시키려는 뜻이었으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흠으로 여기었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55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延陽府院君 李時白卒。 時白無他才能, 且乏相業, 而其淸白忠愼一節, 非一時在相位諸人之所及也。 病中諄諄, 皆是國憂, 臨絶, 口號遺疏數行曰: "臣受知兩朝, 恩踰涯分, 效蔑涓埃, 只期筋力所及, 死而後已。 幸遭聖明, 而大命已迫, 瞻望魏闕, 永隔天顔。 區區之懷, 只在於聖上之進德修業, 愼厥政刑, 雖得大辟, 勿以爲快, 必加難愼。" 其下則語甚多而不能了。 其子忻等, 繕寫以進, 上答之曰: "省此遺箚, 痛悼冞切。 雖是未畢之書, 其懇懇之忠, 戀戀之誠, 可不書紳而服膺焉。" 仍命遣近侍致弔。 然時白不學無術, 推許宋時烈、宋浚吉等, 至以伊、傅、周、召, 稱之於疏箚中, 水原山陵之議, 力主不可用之論, 其意蓋在附會時烈, 人以此疵之。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45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55면
- 【분류】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