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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4월 18일 임인 1번째기사 1660년 청 순치(順治) 17년

복제에 관한 호군 윤선도의 상소문

호군 윤선도(尹善道)가 상소하였다.

"성인이 상례(喪禮)에 있어 오복(五服)으로 정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하신 일이겠습니까. 집에서 쓰면 부자의 천륜이 밝아지고, 나라에서 쓰면 군신의 신분이 엄절해지며, 천지의 존비와 종묘 사직의 존망도 모두 거기에 매여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는 그야말로 막중하고 막대하여 털끝만큼이라도 틀려서 안 되는 이유가 바로 거기 있는 것입니다. 적통을 이어받은 아들은 할아버지와 체(體)가 되는데, 아버지가 적자의 상에 복제를 꼭 참최 3년으로 한 것은 자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조종(祖宗) 적통을 이어받을 것이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는 사가(私家)에서도 그렇게 하는데 하물며 국가이겠으며, 삼대(三代) 태평 시절에도 그러했는데 하물며 말세 위의(危疑)스러운 때이겠습니까. 그렇다면 신하와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함부로 날뛰는 무리들이 넘보는 것을 막는 길이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았을 때 국가를 둔 이라면 그 예에 있어 삼가지 않으면 되겠으며 엄격하게 않으면 되겠습니까? 잠시라도 소홀히 여겨 내버려둘 수 있는 일입니까?

신이 선왕이신 효종 대왕 상사를 듣고 대왕 대비 복제에 대하여 《예경(禮經)》을 상고하였더니, 성인이 위하신 뜻이 사실은 할어버지와 체(體)가 되고 있음에 있고, 또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도 사실은 천리에 근원을 두고 종통(宗統)을 정하자는 뜻이어서, 당연히 자최(齊衰) 3년으로 하는 것이 너무나 분명한 일이요, 의심할 것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초에 예관이 《의례(儀禮)》 주에 의하여 기년의 복으로 정했을 때, 조야를 막론하고 지식 있는 사람이면 모두 해괴하게 여기고 무슨 뜻으로 그렇게 하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국가 종통도 그로 인하여 약간 흐릿한 느낌이 있으며 어쩌면 다소 흔들리고 있는 것도 같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대통(大統)을 밝히고, 백성들 마음을 안정시키고, 종묘 사직을 굳건히 할 예가 되겠습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면 뼈가 놀라고 가슴이 써늘합니다. 그야말로 즉시 의논하여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될 문제인데, 연기(練期)가 다가오도록 뉘 하나 국가를 위하여 그 말을 올린 자가 없이 고요하기만 하여, 신이 한가로이 있으면서 깊이 생각할 때 너무나 종묘 사직을 위하여 걱정이 되었는데, 지난번 전 장령 허목이 예경을 상고하여 한 장의 소문을 올렸다고 듣고는 신이 참으로 국가에 사람이 있음을 기뻐하였습니다.

아, 허목이 말한 것은 예의 정대한 원리를 논한 것일 뿐만 아니라 사실은 나라 다스리는 빈틈없는 계책이기도 한데, 만약 천리의 절문(節文)에 밝지 아니하고 신하로서 진실한 충성심이 아니라면 그 말을 어떻게 하겠으며 또 어떻게 감히 그 말을 올리겠습니까? 그를 듣지 않았다가는 후회 막급일 것입니다. 전하께서 우선 마음으로 단안을 내리시고 즉시 예관으로 하여금 성경(聖經)에 의하여 바로잡게 하셔야 했는데, 그것을 다시 송시열에게 물으신 것은 유신(儒臣)을 우대하는 뜻으로 하신 것이니, 시열로서는 마땅히 문순공 이황기대승의 공박한 설을 듣고는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종전의 견해를 바꾸고는 ‘만약 기 아무개가 아니었더라면 천고의 죄인이 되는 길을 면치 못할 뻔하였다.’ 했듯이 하여야 했는데, 시열은 도리어 자기 잘못을 꾸미기 위하여 예경의 문자들을 주워모으고 게다가 자기 소견까지 붙여서 너무 번거로울 정도로 많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시열은, ‘정작 아비가 자식을 위하여 참최를 입는 이유가 오로지 할아버지와 체가 되고 있음에 있다.’ 한 것과, ‘성인이 그 예를 엄절하게 한 이유가 오로지 대통과 종묘 사직을 이어받음에 있다는 예경의 주된 뜻에 관하여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지도 못했고 말하지도 못하여, 신으로서는 그의 말에 승복할 수도 없고 또 그의 뜻도 알 수가 없습니다. 신이 비록 학문에 어둡고 지식이 얕아 예경에는 원래 깜깜하지만 그러나 천리가 있는 곳, 성인이 예를 만든 주지만은 일찍이 알아도 보았으며 대의는 짐작하고 있습니다. 시열이 잘못 인용한 설에 대하여 신이 그 중요한 부분을 추려 하나하나 논변하겠습니다.

시열이, 소설(疏說)의 ‘차장자를 세우고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구절을 인용하면서 그 아래에 또 이르기를, ‘지금 반드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내야지만 허목의 설을 비로소 따를 수 있다.’ 하였는데, 그 말은 참으로 말도 안 되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효종 대왕은 바로 인조 대왕의 차장자입니다. 소설에 이미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하는 분명한 기록이 있으면, 대왕 대비의 복이 자최 3년일 것은 털끝만큼도 의심스러울 것이 없고, 그대로 딱 잘라 행하면 그뿐이지 왜 꼭 다시 차장자는 서자가 아니라는 분명한 기록을 찾아야 한다는 책임을 허목에게 지우는 것입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문왕이 나라를 전하면서는 백읍고를 두고 무왕에게 전했으나, 주공이 예를 만들면서는 장서(長庶)를 구별하는 데 부단한 노력을 하였다.’ 했는데, 신이 생각기는, 문왕이 한 일은 성인이 당시 사정에 맞도록 규정한 큰 권도이고, 주공이 만든 예는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제도를 만든 정상적인 법으로서 그것은 그 두 성인이 각기 시기 적절하게 한 일이지, 주공이 어찌 백읍고를 위하여 그 예를 만들었을 것입니까? 그렇다면 꼭 그 예를 고집하여 효종 대왕이 적장자가 아니라 하고 대왕 대비가 3년을 입지 않아야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시열의 논의에, 장자가 성인이 되어 죽은 것을 두 번 세 번 말했는데, 그가 가장 요점을 두고 단정한 말은 ‘장자가 비록 성인이 되어 죽었더라도 그 다음들을 모두 장자로 명명하고 참최를 입는다면 적통(嫡統)이 존엄하지 못하다.’ 한 것입니다. 그의 말이 꼭 성인이 되어 죽은 것에 비중을 두는 뜻은, 성인이 되어 죽으면 적통이 거기에 있어 차장자가 비록 동모제(同母弟)이고, 비록 이미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고, 비록 이미 왕위에 올라 종묘를 이어받았더라도 끝까지 적통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니, 그 말이 사리에 어긋나지 않습니까? ‘적(嫡)’이라는 것은 형제 중에서 적우(嫡耦)할 사람이 없다는 칭호이고, ‘통(統)’이라는 것은 물려받은 사업을 잘 꾸려가고, 서물(庶物)의 으뜸이 되며, 위에서 이어받아 후대로 전한다는 말인데, 차장자를 세워 후사를 삼았으면 적통이 다른 데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차장자가 아버지의 가르침을 받고 하늘의 명령을 받아 할아버지의 체로서 살림을 맡은 뒤에도 적통이 되지 못하고 적통은 오히려 타인에게 있다고 한다면, 그게 가세자(假世子)란 말입니까? 섭황제(攝皇帝)란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차장자로서 왕위에 선 이는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에 대하여 감히 임금으로 군림할 수 없고, 이미 죽은 장자의 자손 역시 차장자로 왕위에 오른 이에게는 신하 노릇을 않는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만약 자기 실언을 깨닫는다면 반드시 둔사(遁辭)로 해명하기를, ‘적통불엄(嫡統不嚴) 이 네 글자는 다만 만세를 두고 장유(長幼)의 차례를 엄히 하기 위하여 한 말이다.’ 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 네 글자는 위아래 문세(文勢)로 볼 때 그렇지가 않으니, 누가 그의 뜻이 그렇다고 믿겠습니까? 또 더구나 장유의 차례만 엄히 하고 군신(君臣)의 신분은 엄히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고금 천하에 그러한 의리가 어디 있으며, 하늘의 이치와 선인의 법도가 과연 그렇겠습니까? 아, 고공(古公)017) 이 비록 계력(季歷)을 후계자로 세웠지만, 태백(泰伯)018) 이 자손이 있으면 고공의 적통은 그래도 태백의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나라 안 백성들 마음이 일정치 못할 것인데 계력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나겠습니까? 문왕이 비록 무왕을 세웠으나 백읍고가 후사가 있었으면 문왕의 적통이 그래도 백읍고 자손에게 있어야 할 것입니까? 그리되면 천하의 마음들이 헷갈려서 무왕의 자손들이 어떻게 배겨날 것입니까?

시열은, 종통(宗統)은 종묘 사직을 맡은 임금에게로 돌리고, 적통은 이미 죽은 장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적통·종통이 둘로 갈리게 되는데 그러한 이치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또 시열 자신도 이통(二統)은 없다는 말을 했습니다. 시열의 식견이 비록 부족한 점은 있지마는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깜깜하기야 하겠습니까. 그렇다면 그가 세 번씩이나 ‘성인’을 들먹이면서 또 적통이 존엄하지 못하다는 말을 했는데, 그 뜻을 신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고 보면 시열은 망령스러운 자가 아니면 어리석은 자입니다. 국가 대례를 어찌하여 꼭 그 사람 논의에 따라 정할 것입니까?

시열이 또 이르기를, ‘아비 된 자 한 몸에다 너무나 많은 참최복을 지고 있지 않은가.’ 하고서, 심지어 세종조의 여덟 대군을 들어 변증을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세종의 수명이 비록 짧고 여덟 대군 모두가 비록 단명했다고 하더라도, 어찌 여덟 대군 모두가 각기 3년복이 되게 불행해질 이치가 있으며, 게다가 문종·세조 두 대왕까지 합쳐 3년짜리가 아홉이 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서 비록 소진(蘇秦)의 궤변으로도 틀림없이 그러한 말로 감히 남을 꺾으려고는 않을 것입니다. 송준길이 차자에서 말한 ‘가령 사대부 집의 적처 소생이 10여 명 되는데, 맏이가 죽어 그 아버지가 그를 위해 3년을 입고 둘째가 죽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가 죽고 다섯째가 죽으면 모두 3년씩 입을 것인가?’ 한 그 말과 함께 모두 있을 수 없는 이치인 것입니다. 그들 말이 그렇게 딱 들어맞는 것도 이상한 일이지만 그 두 사람 견해야말로 진짜 형제지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시열이 논의에서 이르기를, ‘대왕 대비가 소현의 상에 인조 대왕과 함께 이미 장자를 위한 복을 입었는데, 그 의리가 어떻게 오늘에 와서 바꿔질 수 있겠는가?’ 하였는데, 그가 말한 장자의 복이란 어느 복입니까? 그때 과연 참최 3년을 입었던가요? 그리하였으면 지금도 당연히 소설의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정의에 따라 3년으로 정해야 할 것이고, 그때 만약 혹시라도 기년으로 정했다면 그것은 예관이 실례를 하여 그리되었던지 아니면 혹시 인조 대왕께서 무슨 은미한 딴 뜻이 있어서였을 것입니다. 이리 보나 저리 보나 신으로서는 모두 모르는 일입니다. 그때는 비록 기년으로 정하였더라도 오늘 효종의 복은 대왕 대비가 자최 3년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열의 말에, ‘부왕(父王)이 서자(庶子)를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으면 비록 이미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후(母后) 혼자서 어떻게 감히 3년을 입을 것인가?’ 한 그 말은 더욱 무리한 말이고 더욱 알쏭달쏭한 말입니다. 대체로 태자(太子)의 ‘태(太)’는 바로 ‘적(嫡)’ 또는 ‘장(長)’과 글자 뜻이 같은 자인데,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이고, 세자(世子)의 ‘세’도 적·장과 뜻이 같은 글자이나 그 칭호를 더욱 구별있게 하여 특별히 표가 나도록 한 것입니다. 이름하여 ‘태자’ ‘세자’라고 했으면 그가 바로 살림을 맡고 승중(承重)을 하고, 할아버지와 체가 되었다는 의미가 부여된 것으로서 ‘적’ ‘장’ 두 글자보다 오히려 더 돋보이는데, 이미 세자가 되고서도 장자라고는 할 수 없는 그러한 이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소설에 그래서 차장자를 세운다고 하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세울 당시에 가리켜 차장자이지 이미 세워진 후에는 당연히 곧바로 장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자가 되었으면 장자라고 아니할 수 없는 것이고, 그가 죽었을 때는 참최를 입지 아니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물며 대통을 이어받아 군림을 한 그 후에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그를 위해 참최를 입지 않을 이치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시열이 말하기를,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도 3년으로 한다 하고, 그 아래 또 서자는 승중하여도 3년으로 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 두 설이 서로 모순이 되고 있다.’ 하였는데, 신의 어리석은 생각에는 거기에서 말한 그 서자라는 것이 과연 정실(正室)이 낳은 중자(衆子)를 지칭한 것이라면 과연 윗 글월과 모순이 되지만, 만약 첩잉(妾媵)의 소생을 가리켜 말한 것이면 윗 글월과 모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시열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그것이 분명 첩잉의 자식을 지칭한 것이 아니고 바로 중자를 지칭한 것임을 알아 모순이 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까? 또 시열 예문(禮文)에서 말하고 있는 서자라는 것이 모두 중자를 지칭한 것이라고 한다 하여도 그것쯤은 가릴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인조 대왕이 하늘의 섭리를 따르시고 문무의 도를 지키면서 효종 대왕을 세자로 삼으셨는데, 효종 대왕이 이미 세자가 되신 후에도 그를 장자라고 하지 않고 적자라고 하지도 않고 오히려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하물며 나라의 어른이 되어 군림한 그 후까지도 장자·적자라 하지 않고 끝까지 서자라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시열이 효종 대왕을 끝까지 서자에다 비기려고 한 그 뜻을 신은 또 알 수가 없습니다.

시열은 또 불이참(不貳斬)을 증거로 내세우는데, 예경의 불이참이라는 말은 그것을 이름이 아니라, 그것은 같은 때에 존자(尊者)가 둘이 있을 수 없다는 뜻에 불과한 것입니다. 전상(前喪)·후상(後喪)이면 같은 때도 아니고 높음 역시 차이가 없는데, 어찌하여 전상만을 참최로 하고 후상을 참최로 않는다는 것입니까? 소설에 차장자를 세우고 역시 3년을 입는다고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며, 또 그 말은 천리(天理)·성경(聖經)과도 모든 면이 꼭 맞는 말입니다. 하물며 우리 효종 대왕은 세자가 되었을 당시로 논하자면 그 장(長)이나 존(尊)이 소현과 대등하지만, 군림한 이후로 논하자면 그 장과 존이 소현에 비할 바 아닌데, 소현에게는 참최를 입었으면서 효종에게는 참최를 입지 않아 될 일입니까? 시열의 그 말은 소설과 어긋나고 있을 뿐 아니라 사실 성경과도 배치되는 말이고, 성경과 배치될 뿐만 아니라 사실은 천리에 어그러진 말입니다.

시열이 또 말하기를, ‘효종 대왕이 대왕 대비에 대하여는 군신(君臣)의 뜻이 있는데, 대왕 대비가 도리어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으로 대왕의 복을 입을 것인가?’ 하였는데, 그것은 더욱 터무니없는 말입니다. 참으로 그 말대로라면 성인이 예를 만들면서 아버지가 장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자식이 아버지를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며, 임금이 세자를 위하여 참최를 입게 했는데, 그것은 신하가 임금을 위하여 입는 복이 아니랍니까? 어쩌면 그의 말이 이렇게도 사리에 당찮습니까.

아, 선왕조 시절부터 믿고 소중히 여겨 모든 것을 맡겼던 자로 두 송(宋)만한 자가 없었습니다. 제(齊)의 환공(桓公)이오(夷吾)019) 에 대하여, 하나도 중부(仲父)요 둘도 중부였으며, 한(漢)의 소열(昭烈)공명(孔明)과의 사이가 마치 물고기와 물이었지만 어찌 이보다야 더했겠습니까. 하물며 늠인(廩人)이 계속 식량을 대고 포인(庖人)이 계속 고기를 댔으니, 바로 옛날 대현을 대우했던 예였습니다. 그러했기 때문에 조정에서도 그들을 유현(儒賢)으로 쳐주었고, 그 두 사람 역시 그 이름을 마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조야의 공론은 그들을 현자로 여기지 않으며, 신과 같이 어리석은 자도 그들을 현자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군자가 그 나라에 있을 경우 임금이 써주면 그만큼 안부 존영(安富尊榮)을 누린다.’ 하였는데, 이들 두 사람이야말로 임금의 신임을 그렇게 독차지했었고 그리고 또 상당히 오랜 기간을 그리하였으나, 자기 자신들 안부 존영은 최고를 누렸다 할 수 있지만 임금을 안부 존영하게 만들었다고는 듣지 못했습니다. 이미 유현 대우를 받았으면 사부로서의 책임을 사피할 수는 없을 것인데, 선왕을 잘못 보도하여 함궐(銜橛)의 걱정020) 이 있기까지 하였으니, 간하여 들어주지 않으면 떠나버리는 것은 되지만 그 직에 있으면서 그 책임을 맡았을 때는 부(傅)는 덕의(德義)를 펴야 하고, 보(保)는 신체(身體)를 보호해야 하는데, 그 의리가 어디 있습니까? 재궁(梓宮)을 제대로 쓰지 못했던 일 같은 것은 국가를 가진 이로서는 만고에 없었던 이변으로서 그러한 일들을 볼 때 편안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의관(衣冠)을 영원히 간직하는 일은 바로 마지막을 보내는 대사(大事)인데, 주자(朱子)도 종묘 혈식(血食)을 오래 가게 하는 길이라 하여 소를 올려 강력히 말했던 것을 보면, 그 자리의 길흉(吉凶)에 따라 관계된바 막중함을 알 만합니다. 그런데도 최고 길지를 버리고 흠결이 있는 곳으로 옮겨 잡은 것은 자못 그 택조(宅兆)를 골라 정하여 영원한 편안함을 도모하는 도리가 아닌 것으로, 일만세 유택(幽宅)이 그럴 바에야 그것이 어찌 일시적 불안에 그치고 말 일입니까? 재해가 함께 닥치고 기근이 거듭거듭 이어져 공사(公私) 모두가 곤경에 빠져있고, 나라는 가난하고 백성은 유리되어, ‘임금이 뉘와 함께 흡족을 누릴 것입니까?’ 하고, 또는 ‘내가 누가 있어 임금 노릇을 할 것인가?’ 했던 그러한 걱정들이 밤낮으로 그치지 않고 있는데, 이렇고서 부유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복(福)과 위(威)를 아래서는 만들어내는데 위에서는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이미 높다고 할 수 없겠으나, 심지어 왕위에 계시기 10년이 된 뒤에도 아직껏 적(嫡)과 장(長)이 되지 못하고, 국가에서 대우하는 예가 중자의 그것과 대등하다는 것은 천리 성경에 크게 어긋난 일일 뿐만 아니라 높지 않기로도 너무 심한 게 아니겠습니까? 편안하지 못하고, 부유하지 못하고, 높지 못하고, 영화롭지 못함이 모두 그 속에 있어 논하잘 것이 없습니다. 현자를 등용하여 효과가 그렇다면 고금 천하의 국가에 어느 누가 현자 등용하는 것을 귀히 여기겠습니까?

아, 그 두 사람들 학식과 심술에 있어서는 신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들이 한 행위를 살펴보면 인후하지 못한 자 아니면 슬기롭지 못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예설에만은 밝기를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그들 두 사람이 일생 갈고닦은 것이 예학(禮學)이라고 하기 때문에 남들도 예학이라면 그들을 추대하고, 자기 자신들도 담당해 왔는데, 그런데 국가 대례에 있어 견해가 틀리기 거의 그 모양이니, 하물며 자신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방법이나 나라를 굳건히 하고 천하에 위엄을 떨치는 대계에 대하여 논의할 수 있겠습니까? 아, 애석한 일입니다.

송시열이 논의를 끝맺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이로 하여 더 강론하고 더 밝혀 십분 정당한 결과를 가져온다면 어찌 다만 일시적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했는데, 시열이 참으로 그러한 생각이 있다면 남이 박정(駁正)한 말을 틀림없이 거역하지는 않을 것이며, 따라서 시열의 그 말은 취택할 만한 말이 됩니다. 그리고 송준길도 논의의 말단에서, ‘천하의 의리는 끝이 없고 문의(文義)에 대한 견해도 각기 다른데, 어떻게 일률적으로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단정할 것입니까?’ 했는데, 그 말도, 자기 입에서 나온 것 이상으로 남의 옳은 의견을 존중하여 한 말이면 역시 취택할 만한 말입니다.

혹자는 주장하기를, ‘우리 나라가 선대에는 자기 아랫사람 복에 대하여는 많이 간편을 취하여 강복을 하고 3년을 입지 않았는데, 지금 어떻게 다시 옛날 예대로 할 것인가?’ 한다는데, 그렇다면 등(滕)나라 대부(大夫)가 자기 조상들 단상(短喪) 제도를 따르자던 주장이 예이고, 맹자(孟子)문공(文公)에게 3년을 입도록 권한 것은 예가 아니라는 것입니까? 뿐만 아니라 옛날처럼 나라가 공고할 때라면 강복을 하더라도 그것이 실례가 되어 부끄러울 뿐이지 종묘의 제사에 있어서는 해가 없겠지만, 이렇게 백성들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위아래가 위태위태한 대통(大統)을 밝혀야 하는 이러한 대례를 어떻게 조금이나마 소홀히 다룰 것입니까?

또 혹자는, 당초에 이미 잘못 정한 것인데 지금으로서는 추복(追服)하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는가 보나, 옛날 송(宋)나라 임금 상에 옅은 색만으로 상복을 만들었는데, 유신(儒臣) 주희(朱熹)가 추개(追改)를 건의한바 있었습니다. 지금 기년으로 강복한 것이 송의 옅은 색 상복과 다를바 없으므로, 주자가 건의했던 대로 추복을 하는 것이 바로 불원복(不遠復)021) 입니다. 그게 오히려 끓는 물을 만지고도 찬물에 씻지 않고, 서리를 밟고서도 얼음을 대비하지 않았다가 결국 뭇 백성들로 하여금 국가 종통(宗統)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는가 의아하게 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또, 아낙들 복 입는 것은 남자와 달라 복제를 3년으로 정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나, 그 역시 그렇지 않습니다. 비록 효자가 거상(居喪)하는 예에 있어서도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는 기록이 있으니, 지금 이 대왕 대비 복제도 3년으로 의주(儀注)를 고치고 팔방(八方)에 알리어 대소 신민들로 하여금 조정 공론이 다른 뜻이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 그리하여 명분을 바로잡고, 국시(國是)를 정하고, 그리하여 나라를 안정된 태산 위에다 올려놓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 밖의 내전에서의 자질구레한 일들은 예경에서 말한, 시기를 살피고 힘을 헤아려 행하라고 한 교훈대로 따르면 불가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대체로 소설을 쓴 이가 성인이 아닌 바에야 한 마디쯤은 성경에 맞지 않는 경우도 어찌 없겠습니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지 않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지 않으면 따르지 않아야 하지만, 만약 천리로 미루어 보아도 맞고 성경에다 맞추어 보아도 맞으면 왜 따르지 않을 것입니까? 소설에 이른바, ‘차장자를 세워도 역시 3년을 입는다.’ 한 그 말은, 천리와 성경에 딱 들어맞는 말로서 명명 백백 조금도 의심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지금 그 예에 대하여 의논하려면 마땅히 그 설을 취용할 것이지 달리 찾을 것이 없습니다. 때문에 어리석은 신으로서는, 기년 제복(除服)은 결코 해서 안 될 일이고 3년상으로 정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바입니다. 신의 이 말은 모두가 신이 근거없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사실 옛 성인의 예경의 뜻이며 천리에 근원한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서둘러 바로잡도록 하소서.

신이 견묘의 충정을 이기지 못하여 오직 군부와 종묘 사직이 있음을 알고 자신이 있음을 생각지 않았기에 시대의 저촉을 범해가면서 바른말을 올리는 것이니,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사람으로 하여 말까지 폐기하지는 마소서. 신은 이 상소가 받아들여지느냐 않느냐와, 이 말대로 실현이 되느냐 안 되느냐로 주세(主勢)가 굳건하고 못하는 여부와, 국조(國祚)가 연장되고 안 되는 여부를 점칠 것입니다."

이 상소가 정원에 올려지자, 승지 김수항(金壽恒)·이은상(李殷相)·오정위(吳挺緯)·조윤석(趙胤錫)·정익(鄭榏)·박세성(朴世城)이 아뢰기를,

"금방 부호군 윤선도 상소가 정원에 도달하였는데 그 상소 내용을 보았더니, 예를 논한다는 핑계로 마음 씀씀이가 음흉하였고, 어지러울 정도로 남을 속이고 허풍을 치면서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습니다. 말의 출납에 있어 오직 진실을 요하는 도리로서는 이러한 소문을 결코 받아들여서는 안 될 일이오나 다만 생각기에, 성상께서 보시면 시비와 사정이 판가름날 것이므로 소문이 들어간 후 성상께서 그의 정상을 통촉하시고 분명히 가려서 호되게 물리칠 일이지, 신들이 지레 퇴각할 수는 없을 것 같아, 이 소문을 받아들인 뜻을 감히 아뢰는 바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소문을 알면서 왜 받아들였는가? 도로 내주라."

하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전 참의 윤선도는 심술이 바르지 못하여 감히 음험한 상소문으로 상하의 사이를 너무도 낭자하게 헐뜯고 이간질하였으니, 그 죄 빠져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중한 법으로 다스려야 마땅하겠으나 차마 죄주지 못할 사정이 있으니, 그냥 가벼운 법을 적용하여 관작을 삭탈하고 시골로 내쫓으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46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 [註 017]
    고공(古公) : 고공 단보(古公亶父)로, 문왕의 할아버지.
  • [註 018]
    태백(泰伯) : 고공 단보의 장자.
  • [註 019]
    이오(夷吾) : 관중(管仲).
  • [註 020]
    함궐(銜橛)의 걱정 : 거마(車馬)가 질주하여 전복 당하는 걱정.
  • [註 021]
    불원복(不遠復) : 길을 잘못 들었다가 금방 되돌아옴.

○壬寅/護軍尹善道上疏曰:

聖人之於喪禮, 制爲五服, 豈偶然也? 用之於家, 而父子之倫乃明, 用之於國, 而君臣之分乃嚴, 天地之尊卑, 宗社之存亡, 無不係於此矣。 此所以莫重莫大, 而不可以毫髮僭差者也。 承統之子, 與祖爲體, 父之於嫡子之喪, 其爲服制, 必以斬衰三年者, 非爲子也, 乃爲承祖宗之統也。 私家尙如此, 況國家乎, 三代太平之世, 尙如此, 況於末世危疑之際乎? 然則定臣民之心志, 絶不逞之覬覦, 在於此矣。 夫然則有國家之於此禮也, 其可不謹乎? 其可不嚴乎? 其可斯須有忽而置之耶? 臣聞先王孝宗大王之喪, 大王大妃之服, 考諸禮經, 聖人之所爲者, 實在於與祖爲體之義, 及聖人之制禮, 實在於原天理、定宗統之義, 則當爲齊衰三年, 昭然明矣, 無可疑者。 而當初禮官儀註, 定爲期年之服, 朝野臣民之有識者, 莫不怪駭, 未曉其意之所在, 而國家宗統, 因此而有所不明, 抑亦似有所不定, 此豈明大統、定民志、固宗社之禮也? 思之至此, 則骨驚心寒。 此誠不可不卽議釐正, 而練期將迫, 寥寥無一人爲國家進此言者, 臣宴居深念, 不勝宗社之憂, 頃聞前掌令臣許穆考據禮經, 投進一疏, 臣誠喜國家之有人也。 嗚呼! 許穆之言, 非徒議禮之大經, 實是謀國之至計, 如非明於天理之節文, 而純於臣子之忠諒, 則其能爲此言乎, 其敢進此言乎? 此厥不聽, 後悔莫及。 殿下所當斷自宸衷, 卽令禮官, 依聖經釐正, 而其所以復詢於宋時烈者, 優禮儒臣之意也, 時烈正當如文純公 李滉奇大升駁正之說, 瞿然而改其前見曰: ‘若非奇某, 幾不免千古罪人’ 云云者矣, 時烈乃反有遂非文過之計, 掇拾禮經文字, 附會己意, 其爲辭說, 不勝其煩。 而其於禮經父之於子, 所以斬衰者, 只在於與祖爲體, 而聖人之所以嚴此禮者, 只在於統承宗廟之大旨, 則終始見不到說不出, 臣實未服其言, 而未曉其意也。 臣雖蒙學淺識, 素昧禮經, 然於天理之所在, 聖人禮制之所主, 則亦嘗有所理會, 而見其大意矣。 時烈謬引之說, 臣請撮其大要, 而逐條論辨焉。 時烈引疏說 ‘立次長, 亦爲三年之文,’ 而其下又曰: ‘今必得次長, 不爲庶子之明文, 然後許穆之說乃可從也。’ 云, 其言眞所謂不成說話也。 今我孝宗大王, 是仁祖大王之次長。 而疏說旣有 ‘立次長亦爲三年之明文,’ 則大王大妃之服齊衰三年, 實無毫髮可疑, 斷然行之而已, 何必更責, 必得次長不爲庶子之明文於也? 時烈曰: ‘文王傳國, 則捨伯邑考武王, 而周公制禮, 則必拳拳於長庶之辨,’ 臣以爲文王之事, 聖人制義之大權; 周公之禮, 聖人立經之常法, 此自是兩聖人時措之宜, 周公豈爲伯邑考, 而作此禮也? 然則其可執此禮, 而謂孝宗大王非嫡長, 而謂大王大妃不爲三年乎? 時烈之議, 稱長子成人而死者, 至再至三, 而其緊要斷定之語曰: ‘長子雖成人而死, 而次長皆名長子而服斬, 則嫡統不嚴。’ 云。 其言蓋是必欲歸重於成人而死者, 其意蓋曰: 成人而死, 則嫡統在於此, 次長雖本同母也, 雖己與祖爲體也, 雖已踐其位、承宗廟也, 終不得爲嫡統也, 此言不亦悖理乎? 夫嫡者, 兄弟中無敵耦之稱也, 統者, 修緖業首庶物, 承上垂後之號也, 立次長爲後, 則復容嫡統之在他乎? 次長承父詔受天命, 體祖主器之後, 猶不得爲嫡統, 而嫡統猶在於他人, 則是假世子乎? 攝皇帝乎? 且次長而立者, 不敢君於已死之長之子孫, 而已死之長之子孫, 亦不臣於次長而立者乎? 時烈如覺其失言, 則必以遁辭解之曰: ‘嫡統不嚴四字, 只是爲嚴萬世長幼之序’ 而發也云矣。 嫡統不嚴四字, 上下文勢, 不如此, 誰信其意之如此也? 又況徒嚴長幼之序, 而不嚴君臣之分可乎? 古今天下, 安有此義也, 天之理、聖人之經, 果若是乎? 嗚呼! 古公雖立季歷, 而泰伯有後, 則古公之嫡統, 猶在於泰伯之後乎? 然則一國之群志未定, 而季歷之子孫, 何可保也? 文王雖立武王, 而伯邑考有後, 則文王之嫡統, 猶在於伯邑考之後乎? 然則天下之群志未定, 而武王之子孫, 何可保也? 時烈以宗統歸於主廟社之君, 而以嫡統歸於已死之長子乎? 然則嫡統宗統, 岐而二之也, 又豈有此理也? 且時烈亦有無二統之說。 則時烈之見識, 雖有所未逮, 豈至於如此之暗也? 其然則三稱成人, 而又稱嫡統不嚴之意, 臣不敢知也。 夫然則時烈非妄則愚也。 國家大禮, 何可必徇此人之議, 而定之也? 時烈又曰: ‘爲父者一身之上, 其斬不已多乎’, 至以世宗朝八大君, 設辭而證之, 臣愚以爲: ‘世宗之聖壽雖無疆, 而八大君雖皆短命, 豈有八大君各立三年而不幸, 而幷文宗世祖兩大王爲九三年之理也?’ 此乃必無之事, 雖之詭辯, 必不敢以如此等說禦人也。 宋浚吉議箚所言: ‘設有大夫士嫡妻所生有十餘子, 第一子死, 其父爲之服三年, 第二子死, 其父又服三年, 不幸而第三死、第四死、五六死, 則皆爲之服三年乎’ 云者, 均是必無之理也。 其言之沕合異哉, 而二人所見, 眞所謂之政也。 時烈之議曰: ‘大王大妃於昭顯之喪, 旣與仁祖大王, 同爲長子之服, 則其義何可變於今日也云? 其所謂長子之服, 何服也? 其時果行斬衰三年乎? 其然則今當? 一依疏說, ‘立次長亦爲三年之義,’ 而定爲三年也, 其時如或以期年爲服, 則是禮官失禮之所致歟, 抑或仁祖大王有微意於其間歟。 以此以彼, 臣皆不知矣。 其時雖爲朞服, 而今日孝廟之服, 則大王大妃, 不可不爲之齊衰三年也。 時烈之言曰: ‘父王旣以爲庶子, 而不服三年, 則雖已承統母后, 何敢獨服三年乎’ 云者? 尤爲無理, 而尤有所不可曉者也。 大抵太子之太字, 卽嫡字長字之義也, 而尤別其號, 表章而特之者也, 世子之世字, 亦嫡字長字之義也, 而尤別其號, 表章而特〔書〕 之者也。 名之曰太、名之曰世, 則其所以主器承重與祖爲體之義, 尤有所著顯於嫡長二字也, 旣爲世子, 而不謂長子, 容有是理歟? 疏說所以有立次長之言也。 然當立之時, 指爲次長, 而旣立之後, 則義當直謂之長也。 然則爲世子, 則不可不謂之長, 而於其死也, 不可不爲之服斬也。 況承統君臨之後, 容有不謂之長, 而不爲之服斬之理乎? 時烈曰: ‘疏說旣曰: 立次長亦爲三年, 而其下又曰, 庶子承重, 不爲三年, 此二說自相矛盾。’ 云, 而臣愚謂此所謂庶子, 果是正室衆子之稱, 則誠與上文矛盾矣, 如指妾媵所生而言, 則不與上文矛盾矣。 時烈何所據, 而明知此不是妾子之稱, 此是衆子之稱, 而以爲矛盾乎? 且任使時烈以爲禮文所謂庶子, 皆是衆子, 而此則姑不足辨矣。 惟是仁祖大王律天時、憲, 以孝宗大王爲世子, 孝宗大王旣爲世子之後, 其可不謂之長不謂之嫡, 而猶謂之庶乎? 況長國家而君臨之後, 亦可不謂之長、不謂之嫡, 而猶謂之庶乎? 時烈之終欲擬孝宗大王於庶子者, 臣又不敢知也。 時烈又以不貳斬爲據, 禮經不貳斬之說, 非此之謂也, 此不過一時無二尊之義也。 前後喪非一時, 而其尊無異同, 則豈可獨斬於前喪, 而不斬於後喪乎? 此疏所以有立次長, 亦爲三年之說, 而其言允合於天理聖經矣。 況我孝宗大王以爲世子時論之, 則其爲長、其爲尊, 與昭顯等矣, 以君臨之後論之, 則其爲長、其爲尊, 非昭顯之可比也, 其可於昭顯, 獨當斬衰, 而於孝廟獨不當斬衰乎? 時烈此言, 非獨背於疏說, 實背於聖經, 非獨背於聖經, 實背於天理矣。 時烈又曰: ‘孝宗大王, 於大王大妃, 有君臣之義, 大王大妃, 乃反以臣服君之服, 服大王乎云, 尤爲無據之說也。 信斯言也, 聖人制禮, 父之於長子服斬者, 非子服父之服乎? 君之於世子服斬者, 非臣服君之服乎? 何其言之無稽, 至於此也。 嗚呼! 自先朝所倚重而委任者, 無如兩 桓公之於夷吾, 一則仲父, 二則仲父, 昭烈之於孔明, 猶魚之有水, 何以加此? 況廩人繼粟, 庖人繼肉, 乃古者待大賢之禮也。 是以朝家以儒賢目之, 而斯二人者, 亦不辭儒賢之名矣。 然朝野公論, 不以爲賢, 而如臣愚闇者, 亦不以爲賢也, 何也? 孟子曰: ‘君子居是國也, 其君用之, 則安富尊榮’, 斯二人者, 得君如彼其專, 而亦云久矣, 自己之安富尊榮, 則可謂極矣, 而君上之安富尊榮, 則未之聞也。 旣以儒賢待之, 則師傅之責, 不可辭也, 而不能輔導先王, 至有銜橛之虞, 諫不行而去, 則可也, 在其職而任其責則傅, 傅其德義, 保, 保其身體之義, 惡在? 至如梓宮之不得用, 乃萬古有國家者, 所未有之變也, 如此等事, 其可謂之安乎? 至於衣冠之藏, 乃送終大事也, 朱子以爲宗廟血食久遠之計, 陳疏力言, 則可知地之吉凶, 所關莫重。 而捨其極吉, 移就欠缺, 殊非卜其宅兆以安厝之之道, 萬世之宅如此, 則其爲不安, 豈但一時也? 菑害竝至, 饑饉荐臻, 公私俱困, 國貧民流, 君孰與足, 吾誰爲君之憂, 宵旰不已, 如此而可謂富乎? 作福作威, 在於下而不在於上, 固不可謂之尊, 而至於臨御十年之後, 猶不得爲嫡爲長, 而朝家所以待之之禮, 猶有所與衆子等者, 則非徒大有悖於天理聖經, 其爲不尊, 不亦甚乎? 不安不富, 不尊不榮, 乃在其中, 不須論也。 用賢之效如此, 則古今天下國家, 誰以用賢爲貴也。 噫! 斯二人之學識心術, 則臣不能知之矣, 夷考其事迹, 則非不仁則不智也。 夫然則其能獨明於禮家乎? 然斯二人者, 一生所講, 在於禮學, 故人推禮學, 己亦擔當, 而其於國家大禮, 所見之謬, 類如此, 況可與議於修己治人之術, 固國威天下之謨乎? 吁! 可惜也。 宋時烈之議末端曰: ‘若因此而講明, 歸於十分是當, 則豈但一時之幸而已哉?’ 時烈誠有此意, 則必不忤人之駁正, 時烈此言, 誠可取也。 宋浚吉之議末端曰: ‘天下之義理無窮, 文義之見解各異, 又安可以一槪, 斷定其然與不然乎’ 云, 此言不啻若自其口出, 則其亦可取也。 或以爲: ‘我國先代, 在已下之服, 多從簡而降, 不爲三年, 今何可復古禮’ 云, 然則滕國大夫, 從先祖短喪之說, 禮也, 而孟子之勸文公行三年者, 非禮歟? 且在昔國家鞏固之時, 則猶爲降服, 只是失禮爲愧, 而猶無害於宗祊矣, 當此群志未定上下危疑之日, 如此明大統之大禮, 何可少忽也? 或以爲當初業已謬定, 今難追服云, 而昔者之君喪, 只以淺淡色爲服, 儒臣朱熹建議追改。 今之降服朞, 無異於之淺淡服, 則依朱子之議追服, 實是不遠復也。 此不愈於執熱不濯, 履霜不戒, 而終令群下, 致疑於國家宗統之未定乎? 或以爲閨壼行喪, 異於男子, 定爲三年之制, 似爲未妥, 此亦不然矣。 雖孝子居喪之禮, 亦有相時度力, 而行之之文, 今玆大王大妃之服, 以三年改儀注, 行會八方, 使大小臣民, 曉然知朝議之無異意, 以之正名, 以之定國是, 以之措國勢於泰山之安而已。 而其他閨壼中細小節目, 則一依禮經, 相時度力而行之之訓, 有何不可? 大槪作疏說者, 非聖人則安得無一言不合於聖經也? 若推之天理而不合, 揆之聖經而不合者, 則不從可也, 若推之天理而合, 揆之聖經而合者, 則何可不用也? 疏所謂: ‘立次長亦爲三年之說,’ 允合天理聖經, 此實明白無疑者也。 今之議此禮, 當用此說, 不可以他求者也。 是以臣愚以爲朞而除服, 決不可爲, 而定爲三年之喪, 決不可不爲也。 臣之所言, 皆非臣所杜撰, 實是古聖人禮經之意, 而原於天理者也, 伏願聖明, 速圖釐正。 臣不勝畝忠, 只知有君父、有宗社, 而不知有一身, 犯時諱而進危言, 伏願聖明, 不以人廢言也。 臣以此疏之入不入, 此言之行不行, 卜主勢之固不固, 國祚之延不延也。 疏呈政院, 承旨金壽恒李殷相吳挺緯趙胤錫鄭榏朴世城啓曰: "卽者副護軍尹善道上疏到院, 觀其疏語, 則假託論禮, 用意陰凶, 譸張眩亂, 略無顧忌。 其在出納惟允之道, 如此之疏, 決不當捧入, 而第念是非邪正, 難逃於聖鑑之下, 疏入之後, 惟在聖明洞燭其情狀, 明辨而痛斥之, 似不可徑先退却, 故此疏捧入之意敢啓。

上曰: "如此之疏, 旣知而何以捧入乎? 還出給。" 遂下敎于攻院曰: "前參議尹善道心術不正, 敢上陰險之疏, 詆譖上下之間, 極其狼藉, 厥罪難逭。 所當繩以重律, 而有不忍罪者, 姑從輕典, 削奪官爵, 放逐鄕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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