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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 2권, 현종 1년 3월 21일 병자 1번째기사 1660년 청 순치(順治) 17년

좌참찬 송준길의 상소문

좌참찬 송준길이 상소하기를,

"신이 예학(禮學)에 있어서는 평소 강습을 못하였고 왕조(王朝)의 예는 더욱 깜깜합니다. 선왕의 초상을 당하여 무엇인가 도움이 되도록 마음을 다해 토론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이미 미리 강습을 못했기 때문에 하는 일마다 사리에 어긋난 일만 하여, 지금 와서 생각하면 황공하고 두려울 뿐입니다. 그 복제(服制)에 대한 문제는 신도 참여하여 들은바 있는데, 창황한 즈음이라서 미처 주소(注疏)의 여러 설까지 세밀히 상고하지는 못했으나 그 사이에는 사실 다소의 우여곡절이 있었고, 또 다소 의심스러운 곳이 없었던 것도 아닙니다. 대신들 뜻이 모두, 국조 전례로는 자식을 위하여 3년복을 입는 제도는 사실 없고 고례(古禮)로 하더라도 명명 백백하게 밝혀놓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후일 후회스러운 일이 있을지 모를 바에야 차라리 국조 전례를 그대로 따르는 것이 낫다고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신도 다른 소견 없이 드디어 기년제로 정했던 것입니다.

그 후 바깥 논의가 분분하여, 혹자는 대왕 대비께서 선대왕에 대하여 당연히 3년을 입어야 한다고도 하고, 심지어는 참최(斬衰)를 입어야 마땅하다고 주장하는 자도 있으며, 혹자는 또 정희 왕후(貞熹王后)009) 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 3년을 입었다고도 하는데, 그 말이 분명한 증거가 있는 말인지 신으로서는 알 수 없으나 조종조에서 과연 그렇게 하였다면, 오늘의 예는 참으로 의심할 만하여 신은 여기에서 더욱 대단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상신(相臣)에게 고하여 《실록(實錄)》을 상고하고 나서 다시 논의하자고 청하기도 하였으나, 국가가 다사하여 미처 못했던 것입니다.

이번에 장령 허목이 그 상소문에 경전을 인용하고 의리에 입각하여 매우 장황한 논설을 하였습니다. 신이 그의 논설에 대하여 비록 감히 할 말을 다해가면서 서로 힐난할 수는 없으나, 그러나 의심되는 곳이 없지 않습니다. 《의례(儀禮)》에서, ‘아버지가 장자(長子)를 위하여’라고 한 것은 위아래를 통틀어 한 말입니다. 만약 허목의 말대로라면 가령 사대부의 적처(適妻) 소생이 10여 명인데, 첫째 아들이 죽어 그 아비가 그를 위하여 3년복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둘째가 죽으면 그 아비가 또 3년을 입고 불행히 셋째가 죽고 넷째, 다섯째, 여섯째가 차례로 죽을 경우 그 아비가 다 3년을 입어야 하는데, 아마 예의 뜻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입니다. 주소에 이미, 둘번째 적자(嫡子) 이하는 통틀어 서자(庶子)라고 한다는 뜻을 분명히 밝혀놓았고, 그 아래다는 ‘체(體)는 체이나 정(正)이 아니라고 한 것은 바로 서자로서 뒤를 이은 자를 말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 허목은 그 ‘서자’를 꼭 첩의 자식으로 규정지으려 하고 있습니다. 과연 그렇다면 이는 주소를 낸 이의 말이 앞뒤가 서로 현격한 차이가 있게 되니, 아마 그러한 이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기년조에서 말한 ‘장자·장자부(長子婦)’ 등도 허목은 모두 첩의 자식으로 단정하였는데, 예의 뜻이 과연 그런 것인지, 신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저으기 생각건대 주소에서 말한 ‘첫째 아들이 죽으면’ 한 것은, 바로 그 아래서 말한 ‘적자로서 폐질(廢疾)이 있거나 만약 죽고 자식이 없어 전중(傳重)이 되지 못하여 3년복 대상이 되지 못한 자’ 그것일 것입니다. 전중을 받지 않은 첫째 아들이 죽었으면 적처가 낳은 둘째를 후사로 세우고 역시 장자라고 명명할 것이며, 불행히 또 죽어도 기왕에 첫째 아들을 위하여 3년을 입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후사가 된 둘째를 위하여 3년을 입는 것이지만, 만약 첫째가 폐질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자식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이미 그를 위하여 3년을 입었으면, 비록 그 뒤에 둘째가 올라와 후계자가 되었더라도 3년을 입지 않고 기년만 입는데, 그게 바로 그 아래서 말한 ‘체는 체이지만 정이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첩의 자식이 후사가 되었으면 비록 첫째 아들이 폐질이 있거나 자식이 없어 3년을 입지 않았더라도, 또한 첩의 자식을 위하여 3년을 입지는 않는 것이기 때문에, 위에다 ‘적처 소생이다’라고 특별히 밝혀 둔 것입니다. 신이 꼭 그렇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마 예의 뜻은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허목의 논설 외에 또 혹자의 논설도 있는데, 그는 ‘제왕(帝王)의 집은 대통 이은 것을 중히 여기기 때문에, 태상황(太上皇)이 사군(嗣君)의 상에 있어 비록 지차 아들로서 들어와 대통을 이었더라도 모두 3년을 입어야 마땅하다.’ 하고 있는데, 과연 그렇다면 비록 형이 아우의 뒤를 잇고 숙부가 조카의 뒤를 이었더라도 정체(正體)이거나 정체가 아니거나 따질 것 없이 모두 3년을 입을 수 있다는 것입니까? 그는 예문에 없는 예로서 감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렇기는 하나 천하의 의리는 무궁 무진하고 문장 해석의 견해도 각기 다른 것인데, 또 어떻게 한데로 몰아 그렇다 그렇지 않다를 단정할 것입니까? 신이 젊은 시절 예문을 강습하지 못하였고 지금 와서는 또 늙고 병들고 눈도 어두워 전주(箋註)에 주력할 힘이 없으므로, 이 대례(大禮)를 당하여 감히 남과 오르내리면서 변론할 수가 없습니다. 오직 바라건대 성상께서 예를 아는 신하들에게 널리 물으시고, 또 빨리 사관을 보내 《실록》도 상고하게 하시어 다시 더 참고하고 상량하여 지극히 정당한 결과를 찾으소서."

하니, 답하기를,

"상소 내용에 대하여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리라."

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대왕 대비 복제에 관하여 대신들과 이미 의논을 하였고 아직 서계를 못하였는데, 영의정이 의논 드린 맺음말에 ‘그동안 너무 황급하고 촉박하여 《실록》을 미처 상고하지 못했는데 정희 왕후가 예종 대왕에 대하여, 문정 왕후가 인종 대왕에 대하여 이미 행하였던 제도를 모두 상세히 상고하여 참작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기에, 신들로서는 제신들이 올린 논의가 모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가 입계 때에 《실록》에서 찾아낼 것을 함께 여쭈려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준길의 상소문 내에도 《실록》을 상고하자는 말이 있고, 성상께서도 예관으로 하여금 의논하여 처리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대신·유신의 말들이 모두 이러하니, 춘추관으로 하여금 조례에 의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여, 상이 윤허하였다. 춘추관이 아뢰기를,

"강화부에 소장된 《실록》을 사관을 보내 상고해 오도록 해야 할 것이나, 다만 본관에 비치된 강화 소장본 실록치부(實錄置簿)를 상고하였더니, 예종조 말년 치와 명종조 초년 치의 《실록》이 다 성질(成帙)이 안 되었습니다. 적상 산성(赤裳山城) 소장본이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태백산(太白山)·오대산(五臺山)에 비하면 거리도 꽤 가까우니, 바라건대 수일 내로 사관을 보내 상고하여 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4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註 009]
    정희 왕후(貞熹王后) : 세조(世祖)의 비(妃) 윤씨(尹氏).

○丙子/左參贊宋浚吉疏曰:

臣於禮學, 素未講習, 至於王朝之禮, 尤所昧昧。 當先王初喪之日, 非不欲竭心討論, 有所裨補, 而旣不預講, 隨事顚錯, 至今思之, 惶悸冞深。 服制一款, 臣固與聞, 蒼黃之際, 雖未及細考注疏諸說, 其間實有多少曲折, 又不無多少疑難。 大臣之意, 皆謂我朝典禮, 實無爲子三年之制, 其在古禮, 倘不十分明白, 或有他日之悔, 則無寧遵用國典之爲愈。 故臣亦無異見, 遂以期制爲定矣。 厥後外議紛然, 或以爲大王大妃之於先大王, 當服三年, 至有以爲當服斬衰者, 或以爲, 貞熹王后之於我睿宗大王, 亦服三年, 此說之有明據, 臣不能知, 而祖宗朝所行果如是也, 則今日之禮, 誠有可疑者, 臣於此尤不勝瞿然之至。 蓋嘗告諸相臣, 請考實錄以來, 以爲更議之地, 而朝家多事, 有所未遑矣。 今者掌令許穆之疏, 引經據義, 論說甚勤。 臣於此論, 雖不敢索言相難, 而亦有所不能無疑者。 蓋《儀禮》父爲長子, 通上下而言者也。 若如之說, 則設令大夫士適妻所生有十餘子, 而第一子死, 其父爲之服三年。 第二子死, 其父又服三年, 不幸而第三死, 第四第五六死, 皆爲之服三年, 竊恐禮意, 決不如此也。 註疏旣明言第二嫡子以下, 通謂庶子之義, 而其下文, 謂體而不正, 卽庶子爲後者也。 此庶子, 必以妾子當之。 果爾則疏家之說, 前後自相逕庭, 似無是理, 而期條所謂長子長子婦等處, 亦皆以妾子爲斷, 未知禮意, 果如是否, 此臣之所未曉也。 竊疑疏謂第一子死者, 卽下文所謂適子有廢疾若死, 而無子不受重, 不得三年者也。 第一子之不受重者死, 則取適妻所生第二長者, 立以爲後, 亦名長子, 不幸而又死, 則旣不爲第一子服三年, 故應爲第二爲後者服三年, 若第一子不至有廢疾無子, 旣爲之服三年, 則第二子雖他日陞爲後, 而亦不服三年, 只服期, 卽下文所謂體而不正是也。 若妾子爲後, 則雖第一子廢疾無子, 不服三年, 而亦不爲妾子服三年, 故上文特言適妻所生以明之。 臣雖不欲質言, 而無乃禮意, 自如是耶? 說之外, 又有或者之論, 以爲帝王家以繼統爲重, 太上皇爲嗣君之喪, 雖支子入承者, 皆當服三年, 果爾則雖以兄繼弟叔繼姪, 毋論正體非正體, 皆可服三年耶? 無於禮之禮, 恐不敢輕議也。 雖然天下之義理無窮, 文義之見解各異, 又安可以一槪斷定其然與不然乎? 臣少闕講禮之功, 及今衰病眼昏, 無以用力於箋註之間, 當此大禮, 不敢與人上下辨論。 惟願聖明, 博詢於識禮諸臣, 且速遣史官, 考出實錄, 更加參商, 以求至當之歸。"

答曰: "疏辭當令禮官議處焉。" 禮曹啓曰: "大王大妃服制, 已議大臣, 時未書啓, 而領議政獻議中結語以爲: ‘曾於急遽之際, 未及考出實錄, 貞熹王后之於睿宗大王文定王后之於仁宗大王, 已行之制, 竝宜詳考參定。 臣曹欲待諸臣獻議畢到入啓之時, 以實錄考出一款, 竝爲仰稟矣。 今者浚吉疏中, 亦有考出實錄之語, 而自上有令禮官議處之敎。 大臣儒臣之言, 旣皆如此, 令春秋館依例擧行。" 上允。 春秋館啓曰: "江華府所藏實錄, 當遣史官考出, 而但取考本館所在江華實錄置簿, 則睿宗朝末年及明宗朝初年實錄, 俱未成帙。 赤裳山城所藏實錄, 非但完備, 且比諸太白五臺, 道里頗近, 數日內, 請發送史官, 考出以來。" 上允之。


  • 【태백산사고본】 2책 2권 1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4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