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당의 강관을 소대하여 《심경》을 강하고 시사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옥당의 강관을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사람은 모두 다른 사람에 대해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을 지니고 있다.[人皆有不忍人之心]’는 대목에 이르러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불인인지심’이란 곧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맹자(孟子)가 어찌하여 ‘사람은 모두 수오지심(羞惡之心)·사양지심(辭讓之心)·시비지심(是非之心)을 갖고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던가?"
하니 이조 판서 송시열이 아뢰기를,
"측은지심은 곧 인(仁)이 발동한 것인데, 인은 의(義)·예(禮)·지(智)를 거느리기 때문에 측은 역시 수오·사양·시비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맹자가 여기에서 맨 먼저 ‘불인인지심’을 말하여 강령을 제시하고 그 아래에 수오·사양·시비를 하나하나 열거하였으니, 차례로 조리있게 한 것이 곧 이와 같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맹자》의 이 장(章)이야말로 가장 분명하게 사람을 가르쳐 주는 곳입니다. 시험삼아 《맹자》의 수편(首篇)을 가지고 말해 보건대 제 선왕(齊宣王)이 갑병(甲兵)을 일으키고 사신(士臣)을 위태롭게 할 때는 조금도 애석하게 여기는 마음이 없다가 소를 보고서는 이 마음이 왈칵 일어나 막을 수 없게 된 것과 같습니다.
주자(朱子)는 일찍이 사단(四端)을 사시(四時)에 배열하여 인을 봄, 예를 여름, 의를 가을, 지를 겨울로 삼았으며, 또 일찍이 사단을 음양(陰陽)으로 분류하였는데 인과 의를 양에, 의와 지를 음에 소속시켰습니다. 대체로 인은 하늘의 봄과 같기 때문에 네 가지 중에 첫 자리를 차지한 것이고, 지는 하늘의 겨울과 같은 관계로 양면의 도리를 다 가지고 있는데 일단 시(是)를 구별하고 또 비(非)를 구별하는 것이 마치 겨울이 일단 만물을 마감시켰다가 또 만물을 시작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하고 찬선 송준길이 아뢰기를,
"사람에게 측은지심이 없으면 곧 죽은 물건과 다름이 없으니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과 동물이 이 기(氣)를 똑같이 품부받았는데, 금수(禽獸)가 금수로 된 까닭은 단지 그 1단(一端)만을 품부받았기 때문이니, 벌이나 개미가 군신(君臣) 관계의 사회를 이루는 것은 의라 할 것이고 원앙이 정답게 짝지어 사는 것은 예라 할 것입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초목을 가지고 살펴 보건대, 막 싹터 나올 때는 모두 이런 마음을 갖고 있으니, 그 체(體)를 볼 수 있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뜰에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庭草不除]이나 닭과 병아리가 노는 모습을 보는 것[觀鷄雛]이나 노새의 울음 소리를 들은 것[聽驢鳴]에 대해029) 옛사람은 모두 측은지심에 속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횡거(橫渠)가 황자(皇子)의 탄생 소식을 듣고 기뻐하다가 기민(飢民)을 보고는 밥맛을 잃었는데030) 선유(先儒)가 이를 측은지심이라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요즘 병환 때문에 오래도록 서로 만나보지 못했는데 오늘 만나서 좋은 말을 듣게 되니 내 마음이 기쁘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사단(四端) 칠정(七情)에 대해 이황(李滉)은 말하기를 ‘사단은 이가 발해 기가 따르는 것[理發氣隨]이고 칠정은 기가 발해 이가 타는 것[氣發理乘]이다.’고 하였는데, 이이(李珥)는 말하기를 ‘사단과 칠정 모두 기가 발해 이가 타는 것인데, 사단은 기에 엄폐되지 않은 것이고 칠정은 기에 엄폐되어 이가 주재(主宰)하지 못하는 것을 겸하여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하고 준길이 아뢰기를,
"국초에 명유(名儒) 권근(權近)이 일찍이 이런 주장을 하였는데, 그뒤에 정지운(鄭之雲)이 《천명도(天命圖)》를 지으면서 이 설을 기본으로 하였습니다. 이황의 논 역시 이것을 옳게 여겼습니다만 ‘이발기수’와 ‘기발이승’의 말을 하였기 때문에 기대승(奇大升)과 왕복하여 토론을 벌이게 되었던 것인데 서로 길을 달리 한 채 해결되지 않았었습니다. 그래서 이이가 글을 지어 변론하였던 것인데 기대승의 논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심상한 논설이 아니니, 성상께서 학문하실 때 마음에 유념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사단과 칠정은 단지 선(善)의 한 쪽만을 끄집어내어 말한 것입니다."
하고 시열이 아뢰기를,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둘로 한 것은 권근에 근본한 것인데, 대개 이기(理氣)란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이이가 온당치 않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와 기가 각각 일물(一物)이기 때문에 ‘이는 이이고 기는 기이다.’고 합니다만, 그러면서도 원래 서로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에 ‘기(器) 역시 도(道)이고 도 역시 기이다.’고 하는 것인데, 기(器)는 기(氣)이고 도(道)는 이(理)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맹자》의 대지(大旨)는 단지 사람으로 하여금 방심을 거두어들이게 하는 것으로서, 밖에 있는 것을 들어오게 하여 큰 근본을 확립한 뒤 그 선단(善端)을 확충시키고, 안에 있는 것을 유출시켜 달도(達道)가 행해지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이른바 태극(太極)의 동정(動靜)이고 인심(人心)의 적감(寂感)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참으로 중요한 말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어린 아이가 우물 속에 빠지려는 것을 보면 가슴이 덜컥하면서 측은지심이 발동하는 법이라고 한 이 대목을 임금된 분은 마음에 유념하여야 할 것입니다. 시험삼아 요즘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상께서 백성을 진휼하시느라 겨를이 없는데, 이렇게 하시는 것이 백성들의 소리를 듣기 싫어해서도 아니고 칭찬받으려고 해서도 아닐 것입니다마는, 만약 시종 여일하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저 무지한 백성들이 필시 앞으로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우리들을 진휼하는 것은 성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그 소리가 듣기 싫어서이고 단지 백성에게 좋은 소리를 들으려고 하는 것일 뿐이다.’ 할테니, 이렇게 되면 맹자가 말한 것과 다르게 되고 말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찬선의 말이 옳다. 내가 만약 안으로 살펴서 명예를 구하거나 소리가 듣기 싫어서 하는 뜻이 마음 속에 조금이라도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다면 그것은 곧 성(誠)이 아닐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와 같이 분부하시니 흠앙하며 감격스러워지는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언어에 감동되면 본심이 자연히 나오는 법이다. 내가 경의 말을 듣고 이런 말을 하게 된 것 역시 수오지심(羞惡之心)이 감발(感發)되어 그런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맹자》의 이 장이야말로 간절하기 그지없어 사람들을 감동시킬 만하니, 아무리 극악한 사람이라도 선단(善端)이 미상불 발현될 것이다. 그런데 순경(荀卿)은 어찌하여 인성이 악하다고 하였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주(紂)가 무척 어리석고 포악하긴 했지만 ‘내가 태어나 이렇게 된 것이 천명(天命)이 아니겠는가.’ 하였으니, 그래도 천인 관통(天人貫通)의 이치를 안다 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인심(人心)이 없어지지 않은 점이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잔인한 성격은 사람들과 같지 않았다. 포락형(炮烙刑)을 어떻게 차마 행했단 말인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인심은 지난(至難)한 것으로서 조금만 살피지 않고 그대로 따르다 보면 이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그래서 원성(元聖)께서도 ‘성(聖)이라도 생각하지 않으면 광(狂)이 된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주가 잔인하기도 했지만 달기(妲己)가 그런 형(刑)을 보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렇게 했던 것이다."
하였다. 시열이 귀산(龜山)031) 의 ‘일삼을 것도 없다.[事無足爲]’는 한 귀절을 거론하면서 아뢰기를,
"‘할 것도 없다[無足爲]’고 말한 것은, 사람이 진정 마음을 바로하기만 하면 수고롭게 하지 않아도 일이 모두 순리대로 된다는 말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맹자 이전에는 사단(四端)을 말한 자가 없다가 맹자 때에 와서 비로소 이를 말했기 때문에, 주자(朱子)가 사단을 밝혀 제시한 곳을 가리켜 사직을 안정시킨 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대개 맹자가 양주(楊朱)와 묵적(墨翟)을 물리치면서 삼성(三聖)을 계승했다고 스스로 말했습니다만, 그래도 사단을 밝힌 공과 비교하면 그 공이 오히려 적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전생서(典牲署)는 제향(祭享)을 전담하고 사축서(司畜署)는 객사(客使)의 수요를 전담하는데, 사축서를 전생서에 통합시켰으니 지극히 일이 온당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다시 사축서 관원을 설치하소서."
하니, 따랐다. 시열이 아뢰기를,
"동몽 교관(童蒙敎官)을 지금 변통시키려 하는데, 찬선 송준길이 이미 국자(國子)의 책임을 겸하고 있으니, 그로 하여금 서로 의논하여 교관을 더 두고 과정을 설치하여 교훈토록 하소서."
하니 준길이 강력하게 사양하며 물러가기를 청하였다. 상이 시열에게 이르기를,
"찬선이 줄곧 사퇴만 하고 있는데, 경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니, 시열이 아뢰기를,
"초야의 신하에 대해서는 오직 그의 근력과 재국(才局)을 헤아린 뒤에 그의 거취를 정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경의 말이 옳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사학(四學) 유생들이 수재(守齋)토록 당초에 정한 조정의 뜻은 실로 범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근일 그에 따른 폐단이 막심하니, 우선 유생이 거재(居齋)하는 규정을 없애고 교관을 더 설치해서 그들을 교훈토록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좋다고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근일 실없는 이야기나 하고 술 마시기를 숭상하는 일이 사부(士夫)의 다반사가 되었는데, 이는 대체로 모범을 보일 만한 자가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때문에 내가 경들을 오래 붙들어두려고 하는 것이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선묘(宣廟) 초년에 특별히 이황(李滉)을 불렀는데 당시 조야(朝野)에서 얼마나 기대를 걸었는지 상상할 만합니다. 그런데 이황이 굳이 사양하고 내려가자 사람들이 모두 의아해 했는데, 이이(李珥)는 이에 대해 ‘능력을 헤아리고 분수를 감안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이황처럼 재주와 덕이 있는 사람도 오히려 이러하였는데, 신 같은 자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황이 얼마나 고사(固辭)했는지는 모르겠다만, 경의 재주와 학문을 가지고 말하건대 어찌 감당하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하자 준길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이렇게까지 분부해 주시니, 이 때문에 신이 더욱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삼가 보건대 성상께서 전에 《심경》을 강하시다가 ‘성기(性氣)가 사나워진다.’는 대목에 이르러 되풀이해 읽으시면서 신하들을 책려하셨는데 그때 성상의 뜻이 온화하셨습니다. 그런데 성상의 건강이 편찮으신 뒤로부터 신은 정령(政令)을 내리고 언어 동작을 하시는 즈음에 성상의 마음이 혹 화평한 도리를 잃지는 않았나 삼가 걱정되는데, 근일 대신(臺臣)을 대우하는 도리에 있어서도 상당히 미진한 점이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예컨대 ‘여민제(呂閔齊)를 위해 복수해 주려는 것인가.’ 하는 등의 분부를 내리신 것은 정말 말씀이 온당치 못했다 할 것인데, 어쩌면 성상의 마음에 불평스러운 의사가 계셔서 그런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익(李翊)의 계사(啓辭)에 대한 비답에 관하여 경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였다. 준길이 아뢰기를,
"이는 신이 헌부에 있을 때 발단이 되었던 것이기 때문에 신이 감히 그 사이에 간여할 수는 없습니다만, 대체로 볼 때 이위국(李緯國)은 형장(刑杖)을 함부로 쓴 잘못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시진(金始振)은 꼭 특별히 체직시킬 것까지는 없을 듯하였다. 그런데 이익이 처치한 것을 보건대 시진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른 채 흐리멍덩하게 출사시키기를 청하였고, 급하지도 않은 일을 급급하게 논계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체직시켰을 뿐이다."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시진에 대해서는 신이 가장 잘 아는데 오늘날과 같은 때를 당하여 임금을 사랑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데 있어 이 사람을 따라갈 자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헌직(憲職)에 있을 때 자못 풍채가 있었는데, 지금 사소한 일로 그만 이렇게까지 되었으므로 신이 삼가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시진이 조곡(糶穀)을 받고서 곧바로 상환했으니 일의 체계에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하였다. 시열이 아뢰기를,
"지금 본조의 계사(啓辭)에 따라 이미 천목(薦目)을 받았습니다만, 계해년 초에도 유생을 참상(參上)으로 올려 발탁한 경우가 있었고, 병자년 간에도 이런 규정이 있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말이 옳다. 학생이라 하더라도 재주가 쓸 만하면 가려 선발해서 계하(啓下)된 뒤에 조용(調用)토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66면
- 【분류】재정-국용(國用)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구휼(救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29]뜰에 무성한 잡초를 제거하지 않은 것[庭草不除]이나 닭과 병아리가 노는 모습을 보는 것[觀鷄雛]이나 노새의 울음 소리를 들은 것[聽驢鳴]에 대해 :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2 염계학안(濂溪學案) 하(下) 부록(附錄)에 "정명도(程明道)가 말하기를 ‘주무숙(周茂叔:주돈이의 자)에게 창 앞에 풀이 무성한데도 뽑지 않은 것에 대해 물으니 「저 풀도 나의 의사와 똑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자후(子厚:장재의 자)가 노새 울음소리를 들을 때에도 역시 그와 같이 말하였다.’고 하였다." 하였고,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3 명도학안(明道學案) 하(下) 어록(語錄)에 "닭과 병아리가 노는 모습을 보면 인(仁)을 알 수 있다."고 하였음.
- [註 030]
횡거(橫渠)가 황자(皇子)의 탄생 소식을 듣고 기뻐하다가 기민(飢民)을 보고는 밥맛을 잃었는데 : 《송원학안(宋元學案)》 권18 횡거학안(橫渠學案) 하(下) 부록(附錄)에 역시 정명도(程明道)의 말을 인용해 수록되어 있음. 여기서 횡거는 송(宋) 장재(張載)의 호이다.- [註 031]
귀산(龜山) : 송(宋)나라 양시(楊時).○上召對玉堂講官, 講《心經》, 至人皆有不忍人之心, 上曰: "所謂: ‘不忍人之心’, 卽惻隱之心也, 然則孟子何以只言 ‘人皆有惻隱之心’, 而不言 ‘人皆有羞惡ㆍ辭讓ㆍ是非之心’ 也。" 吏曹判書宋時烈曰: "惻隱之心, 卽仁之發也, 仁統義禮智, 故惻隱亦統羞惡辭讓是非。 是故孟子於此, 首言 ‘不忍人之心’, 以提其綱, 而其下遂列數羞惡、辭讓、是非, 次第條理, 乃如此矣。" 又曰: "孟子此章, 誨人最分明處也。 試以孟子首篇言之, 則齊宣王興甲兵、危士臣時, 少無所惜,而至於見牛, 則此心藹然, 而不可遏。 朱子嘗以四端, 分排於四時, 以仁爲春, 禮爲夏, 義爲秋, 智爲冬, 又嘗分屬於陰陽, 以仁義屬陽, 義智屬陰矣。 蓋仁則猶天之春, 故居四者之首, 智猶天之冬, 故有兩面底道理, 蓋旣別其是, 又別其非, 猶冬之旣終萬物, 又始萬物也。" 贊善宋浚吉曰: "人無惻隱之心, 則便是死物, 非人也。 人與物, 均稟是氣, 而禽獸之爲禽獸, 以其只稟其一端故也, 蜂蟻之君臣, 是義也, 關睢之夫婦, 是禮也。" 時烈曰: "以草木觀之, 則方其發生之時, 皆有是心, 體見可矣。" 浚吉曰: "庭草不除, 觀鷄雛、聽驢鳴, 古人謂之皆屬於惻隱也。" 又曰: "橫渠聞生皇子而有喜, 見飢民而食便不甘, 先儒以此謂之惻隱也。" 上曰: "近緣病患, 久未相接, 今日相見, 得聞好語, 予心喜悅矣。" 時烈曰: "四端七情, 李滉則以爲: ‘四端理發氣隨也, 七情氣發理乘也’, 李珥則以爲: ‘四端七情皆氣發理乘, 而四端不爲氣所掩者也。 七情兼言爲氣所掩, 而理不能主宰者也。’ 浚吉曰: "國初名儒權近, 嘗有是說, 其後鄭之雲作《天命圖》, 而祖是說。 李滉之論, 亦以此爲是, 而有 ‘理發氣隨、氣發理乘’ 之語, 與奇大升往復, 論岐而未決。 故李珥作書以辨之, 而以奇大升之論爲是。 此非尋常論說, 乃聖學所當體念處也。" 又曰: "四端七情, 只是拈出善之一邊處言之也。" 時烈曰: "以理氣分而岐之者, 本於權近, 而大槪理氣, 元不相離, 故李珥以爲未安也。 理與氣各是一物, 故曰: ‘理自理、氣自氣’, 然而元不相離, 故曰: ‘器亦道、道亦器’, 器者氣也, 道者理也。" 又曰: "孟子大旨, 只是使人收其放心, 使在外者入來, 而立大本, 擯其善端, 使在內者流出, 而行達道, 此所謂太極之動靜, 人心之寂感也。" 上曰: "此眞要語也。" 浚吉曰: "見孺子之入井, 而有怵惕惻隱之心, 此尤人君體念處也。 試以近日之事言之。 聖上爲民汲汲賑恤者, 非惡其聲而然也, 非要譽而然也, 若不能終始如一, 則彼無知之民, 必將曰: ‘吾王之賑恤吾輩者, 非出於誠心, 只爲惡其聲也, 只爲要譽於吾民, 而爲之也’, 如此則與孟子之言異矣。" 上曰: "贊善之言是矣。 予若內省自覺, 微有要譽惡聲之意於心裏, 則便是非誠矣。" 浚吉曰: "聖敎如此, 不勝欽仰感激也。" 上曰: "大槪言語感動, 則本心自然而發。 予之聞卿言, 而發此語者, 是亦羞惡之心所感發而然也。" 又曰: "孟子此章, 極其懇切, 有動得人處, 雖極惡之人, 善端未嘗不發。 見荀卿何以謂之性惡也。" 時烈曰: "紂雖甚昏暴, 謂 ‘我生不有命在天’, 是猶知天人貫通之理矣, 便是人心不亡處也。" 上曰: "殘忍之性, 與人不同。 炮烙之刑, 何忍爲之也。" 時烈曰: "人心至難, 斯須不察, 因循到此。 故元聖有惟聖罔念作狂之語矣。" 上曰: "非但紂爲殘忍, 妲己好觀此等刑, 故爲此耳。" 時烈擧龜山事無足爲一句曰: "謂之 ‘無足爲’ 者, 言人苟能正心, 則不勞而事皆得其理也。" 又曰: "孟子之前, 未有言四端者, 至孟子始言之, 故朱子指發明四端處, 謂之有安社稷功。 蓋孟子闢楊、墨, 自謂承三聖, 然視明四端, 則此功反小也。" 時烈曰: "典牲署專主祭享, 司畜署專主客使之需,而合設於典牲署, 事極未安。 請復設司畜署官員。" 從之。 時烈曰: "童蒙敎官, 今將變通, 而贊善宋浚吉, 旣兼國子之任, 請使之相議, 加設敎官, 課程敎訓。" 浚吉力辭乞退。 上謂時烈曰: "贊善一向辭退, 卿意如何?" 時烈曰: "草野之臣, 惟當量其筋力才局而後, 定其去就也。" 上曰: "卿言是矣。" 時烈曰: "四學儒生之守齋, 當初朝家之意, 實非偶然, 而近日其弊太甚, 姑罷儒生居齋之規, 加設敎官, 使之敎訓則得矣。" 上曰: "善。" 時烈曰: "近日浮談與崇飮, 爲士夫之梁肉, 蓋無矜式而然矣。" 上曰: "此予所以欲卿等之久留也。" 浚吉曰: "宣廟初年, 特召李滉, 其時朝野之所希望可想, 而李滉固辭下去, 人皆疑之, 而李珥謂之量能度分。 以李滉之才德, 尙爾如此, 況如臣者乎?" 上曰: "李滉之固辭, 雖未知如何, 而以卿才學言之, 豈有不可堪之事乎?" 浚吉曰: " 聖敎至此, 此臣所以尤極惶恐者也。" 浚吉曰: "伏見聖上前講《心經》, 到性氣粗暴處, 爲之三復, 而策勵臣工, 聖意蓋藹然矣。 自玉候遠豫之後, 臣竊恐聖心, 於政令云爲之際, 或失和平底道理, 而近日待臺臣之道, 亦頗有未盡之事。 如爲呂閔齊雪恥等敎, 誠非穩當辭語矣, 無乃聖心有不平底意思而然耶?" 上曰: "李翊啓辭之批, 於卿等之意何如?" 浚吉曰: "此是臣在憲府時所發端, 故臣不敢干預其間, 而蓋李緯國則不無濫刑之失矣。" 上曰: "金始振似不必特遞, 而李翊之處置, 全昧始振實狀, 曚曨請出, 而不急之事, 汲汲論啓, 故特遞之耳。" 時烈曰: "始振臣知之最熟, 當今之時, 愛君憂國, 無此比矣。 其在憲職, 頗有風采, 今因小事, 乃至於此, 臣竊惜之。" 上曰: "始振之受糶卽償, 何傷於事體乎?" 時烈曰: "今因本曹啓辭, 已受薦目, 癸亥初, 有以儒生陞擢參上者, 丙子年間, 亦有此規矣。" 上曰: "此言是矣。 雖學生, 其才可用, 則抄選啓下後, 調用可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6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66면
- 【분류】재정-국용(國用)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왕실-경연(經筵) / 사상-유학(儒學) / 구휼(救恤)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