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 참판 송준길을 인견하여 시사에 대해 의논하다
상이 이조 참판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천재와 시변이 없는 날이 없었으나 어젯밤에 친 천둥과 번개는 더욱 놀랍고 두렵다. 오늘 세자가 마침 서연을 열기 때문에 특별히 경을 부른 것이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도 걱정이 놓이지 않아서 막 뵙기를 청하려 하다가 못한 참이었습니다. 주자의 차자에 ‘겨울의 우레는 우환이 명년에 있다.’고 하였는데, 신이 지난 겨울에 우레의 변으로 인해 또한 이런 말로 아뢰었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도 기억하고 있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춘추》에 재이로 기록된 것 중에 ‘운석(隕石)’이란 것이 있는데 정자가 해석하기를 ‘마땅히 돌이 떨어졌다[石隕]고 써야 하는데 돌을 떨어지게 하였다[隕石]라고 쓴 것은 재이를 인사(人事)에 결부시켰기 때문이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노유(老儒)가 보통 하는 이야기이지만 지극한 이치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양호(兩湖)의 연해에 흉년이 가장 심하게 들었다 하는데 영남도 그러한가?"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양호의 백성들이 가장 많이 흩어졌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구중 궁궐 깊은 곳에서는 필시 이 말이 지나치다고 할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나는 여염에서 낳았기 때문에 자못 백성들의 고통에 대해 알고 있으나 세자는 대궐 문밖을 나간 적이 없으니 어떻게 민사의 어려움을 알겠는가. 내가 능에 참배할 때에 세자로 하여금 두루 길가의 민가를 보게 하여 백성들이 가난하게 살고 있는 상황을 알도록 하고 싶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성상 분부가 여기까지 미치니 참으로 다행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양호의 부역은 불가불 변통하여야 하겠고, 연해안의 아홉 고을은 전세를 모두 탕감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나의 병이 점점 나아져 가니 자주 신하들을 접견하여 《심경(心經)》을 강하고 듣지 못한 것을 듣고자 한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옛사람이 말하기를 ‘사람을 대하면 엄숙하여지고 혼자 있으면 흐트러지며 나보다 나은 사람과 함께 있으면 유익하고 나만 못한 자와 함께 있으면 손실된다.’고 하였습니다. 만일 자주 신료들과 접하여 조용히 강마하신다면 성상의 마음에 보탬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께서 이처럼 정신을 가다듬고 계시는데도 치적의 효과는 더욱 막연하기만 하니 그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체통이 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신이 전번에 헌부에 있을 때 부중의 모든 일이 기축년에 비하여 판이하게 달랐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잠시 동안 직무를 보자 도성 안의 면모가 바뀌었는데,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에 법을 지켜 흔들리지 않고 공도를 넓혀 나아가고 있다고 여기는 데서 온 것에 불과하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금중(禁中)에 출입한 지 오래 되었지만 대궐 안의 엄숙하지 못함이 오늘보다 심한 적은 없었습니다. 정원의 대청 앞에 여인들과 수레·말이 섞여 오가니 매우 괴이합니다. 전하께서는 밝게 살펴 엄히 금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부득이하다면 요금문(曜金門)으로 출입하게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승지는 거듭 주의시켜 금지하도록 하라."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군사를 다스리고 무예를 강마하는 일은 참으로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소견에는 숨은 걱정이 있다고 여깁니다. 병(兵)이란 마치 불과 같아서 단속하지 않으면 저절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서울에다 무사를 많이 모아 두는 것은 아마도 옳은 일이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는 송 태조(宋太祖)가 말한 ‘천명이 있는 자는 마음대로 하게 둔다.’는 말로 법을 삼고 있다."
하자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감히 꼭 화란이 있을 것이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무부를 대하는 도리는 반드시 은혜와 위엄을 아울러 베풀어야만 후환이 없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5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과학-천기(天氣) / 구휼(救恤) / 재정-전세(田稅) / 군사-군정(軍政) / 사법-치안(治安)
○癸未/上引見吏曹參判宋浚吉。 上曰: "天災時變, 無日無之, 而昨夜雷電, 尤極驚懼。 今日世子適開筵, 故特召卿耳。" 浚吉曰: "臣憂慮未已, 方欲請對, 而未果矣。 朱子箚辭曰: ‘冬雷憂在嗣歲’, 臣於去冬, 因雷變, 亦以此仰達矣。" 上曰: "予亦記之矣。" 浚吉曰: "《春秋》書災異, 有曰隕石, 程子稱之曰: ‘當以石隕書之, 而以隕石書之’ 者, 以災異歸之於人事也。 此雖老儒, 常談至理, 亦不外於此也。" 上曰: "兩湖沿海, 飢荒最甚云, 嶺南亦然否。" 浚吉曰: "兩湖之民, 流散最多。 伏想九重深邃之中, 必以此言爲過也。" 上曰: "然。 予生于閭閻, 頗知民間疾苦, 而世子不曾出闕門外, 安知民事之艱難乎? 予於拜陵時, 欲令世子, 歷見路傍民家, 俾知民生貧窶之狀耳。" 浚吉曰: "聖敎及此, 不勝幸甚。" 又曰: "兩湖民役, 不可不變通, 沿海九 邑, 全減田稅可也。" 上從之。 上曰: "卽今予病漸愈, 欲頻接臣隣, 講論《心經》, 益聞所不聞耳。" 浚吉曰: "古人云 ‘對人則莊, 獨居則肆, 與勝己者處則益, 與不如己者處則損。’ 若頻接臣僚, 從容講劘, 則庶可澆灌聖心矣。" 又白: "聖上勵精如此, 而治效逾邈, 其故何也, 體統不立也。 臣頃忝憲府, 府中凡事, 比諸己丑年頓異矣。" 上曰: "卿暫時供職, 都下變色, 此不過人以爲執法不撓, 恢張公道故也。" 浚吉曰: "臣出入禁中久矣, 闕內不嚴, 未有如今日之甚。 政院臺廳之前, 女人輿馬, 雜遝以行, 甚可怪也。 聖上宜明察而嚴禁之。 如不得已, 則使從曜金門出入可也。" 上曰: "承旨申飭禁斷。" 浚吉曰: "治兵講武, 是固不可已之擧, 而以臣愚見, 亦有隱憂。 兵猶火也, 不戢將自焚。 輦轂之下, 多聚武士, 恐非所宜。" 上曰: "予以宋 太祖 ‘有天命者, 任自爲之’ 之說, 爲法焉。" 浚吉曰: "臣非敢以爲必有禍亂也, 凡待武夫之道, 必恩威兼濟, 然後可無後患也。"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55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과학-천기(天氣) / 구휼(救恤) / 재정-전세(田稅) / 군사-군정(軍政) / 사법-치안(治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