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의 상소와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죽었다. 죽음에 임하여 상소하기를,
"신의 병이 날로 더욱 깊어지기만 하니 실날 같은 목숨이 얼마나 버티다가 끊어질런지요? 아마도 다시는 전하의 얼굴을 뵙지 못할까 생각되므로 궁궐을 바라보며 비오듯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제왕의 학문에서 귀중히 여기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정신을 하나로 모아 밖으로 치달리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전하께서 종전부터 학문을 강마하시면서 과연 이 도리를 잃지 않으셨습니까? 악정자 춘(樂正子春)은 한낱 필부였습니다만, 한 발자국을 뗄 때에도 부모를 잊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오늘날 다치신 것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 악정자 춘에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송 효종(宋孝宗)에게 철장(鐵杖)과 목마(木馬)가 뜻을 가다듬어 원수를 갚는 데 무슨 도움이 되었습니까. 주희(朱熹)와 같은 때에 살면서도 주희로 하여금 수십 일도 조정에 있게 하지 못하였으니 정말 애석한 일이었습니다. 전하께서 오늘날 심학(心學)에 힘을 써야 하실 것은 다만 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015) 를 완미하고 탐색하시는 것입니다. 맹자가 말하기를 ‘백성을 보호하면서 왕 노릇을 하면 막을 수가 없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백성이 편안하여 삶을 즐겁게 누리면 어찌 군사가 없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흉년이 들어서 백성들이 흩어져 사방으로 가려 하는데 승호(陞戶)하는 일이 또 이때에 생겨 대신들이 다투어 간했지만 되지 않았으니 이 무슨 일입니까. 전하께서 후회하셔야 할 것입니다. 비록 열 번 명령을 바꾼다 하더라도 무슨 지장이 있겠습니까. 나라의 근본을 기르는 일은 오늘의 급선무인데, 찬선을 맡길 사람은 송시열과 송준길보다 나은 자가 없을 것입니다.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시종 공경스러운 예로 맞아 지성으로 대우하여 멀리하려는 마음이 없게 하소서.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이미 서필원(徐必遠)을 추천하여 맡겼는데, 이는 신이 만일 갑자기 죽게 되면 하루 아침에 돕는 자가 없어 일이 중도에서 폐지되고 말까 염려되어서입니다. 그가 사은하고 떠날 때 전하께서는 힘쓰도록 격려하여 보내시어 신이 뜻한 대로 마치도록 하소서.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은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병이 위급하고 정신이 어지러워 대략 만분의 일만 들어 말씀드렸습니다. 황송함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경의 차자를 살펴보니 매우 놀랍고 염려가 된다. 진술한 말은 모두가 지극한 의논이었다.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호남의 일에 대해서는 이미 적임자를 얻어 맡겼으니 우려할 것이 있겠는가. 그리고 경은 늙었으나 근력이 아직도 강건하고 병이 깊이 들었지만 신명(神明)이 도와줄 것이다. 어찌 쾌차의 기쁨이 없겠는가. 경은 안심하고 잘 조리하라."
하였다.
김육은 기묘 명현(己卯名賢)인 대사성 김식(金湜)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효행이 독실하였고 장성하자 문학에 해박하여 사류들에게 존중받았다. 광해조 때에는 세상에 뜻이 없어 산 속에 묻혀 살면서 몸소 농사짓고 글을 읽으면서 일생을 마칠 것처럼 하였다. 인조 반정에 이르러 제일 먼저 유일(遺逸)로 추천되어 특별히 현감에 제수되고 이어서 갑과(甲科)에 뽑혔고 벼슬이 영의정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강인하고 과단성이 있으며 품행이 단정 정확하고, 나라를 위한 정성을 천성으로 타고나 일을 당하면 할말을 다하여 기휘(忌諱)를 피하지 않았다. 병자년에 연경에 사신으로 갔다가 우리 나라가 외국 군사의 침입을 받는다는 말을 듣고 밤낮으로 통곡하니 중국 사람들이 의롭게 여겼다. 평소에 백성을 잘 다스리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여겼는데 정승이 되자 새로 시행한 것이 많았다. 양호(兩湖)의 대동법은 그가 건의한 것이다. 다만 자신감이 너무 지나쳐서 처음 대동법을 의논할 때 김집(金集)과 의견이 맞지 않자 김육이 불평을 품고 여러 번 상소하여 김집을 공격하니 사람들이 단점으로 여겼다. 그가 죽자 상이 탄식하기를 ‘어떻게 하면 국사를 담당하여 김육과 같이 확고하여 흔들리지 않는 사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나이는 79세였다. 그의 차자 김우명(金佑明)이 세자의 국구(國舅)로서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에 봉해졌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52면
- 【분류】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
- [註 015]위 무공(衛武公)의 억계시(抑戒詩) : 위 무공은 나이가 95세가 되어서도 억계시 12장을 지어 항상 곁에서 외우게 하여 마음을 깨우치고 신하들로 하여금 늙었다고 멀리하지 말 것을 경계하였다.《시경(詩經)》 대아(大雅) 탕지십(蕩之什) 억(抑).
○己亥/大匡輔國崇祿大夫領敦寧府事金堉卒。 臨終上疏曰:
臣之病, 日益沈綿, 如縷之命,幾何而絶也。 恐不得更覩天顔, 瞻望宸極, 泣涕如雨。 所貴乎帝王之學者, 謂存心主一, 而不外馳也。 殿下從前講學, 果不失此道乎? 樂正子春, 一匹夫耳, 一擧足而不敢忘父母。 殿下今日之所傷, 乃至於此, 不瑕有愧於子春乎? 宋 孝宗鐵杖木馬, 何益於銳意復讐, 而與朱熹同時竝生, 不能使立朝數十日, 誠可惜也。 殿下今日之所當致力於心學者, 只玩索衛武公之抑戒也。 孟子曰: "保民而王, 莫之能禦也。" 民安而樂其生, 則豈患無兵哉? 凶年饑歲, 民將散而之四, 而陞戶之擧, 又出於此時, 大臣爭之, 而不能得, 此何事也? 殿下之所當悔也。 雖十易其令, 何害焉? 輒養國本, 今日之急務, 贊善之任, 無過於兩宋。 願殿下終始敬禮, 待之以誠, 俾無遐心焉。 湖南之事, 臣已薦徐必遠而付之, 臣若溘然, 則恐一朝無助, 而事至於中廢也。 陛辭之時, 願殿下慰勉而送之, 以終臣意。 臣之所欲陳者, 不止於此,而疾病危急, 精神怳惚, 略擧萬一。 不勝惶恐。
答曰: "省卿箚辭, 深用驚慮。 所陳之言, 無非至論, 可不體念焉。 湖南事, 卿旣得人而付之, 何憂何慮。 且卿雖老, 筋力尙强, 病雖深, 神明所扶, 豈無勿藥之喜乎? 卿其安心善攝。" 堉己卯名賢大司成湜之後也。 自少篤於孝行, 及長文學該博, 爲士類所推重。 在昏朝, 無意於世, 屛居峽裏, 躬耕讀書, 若將終身。 及仁祖反正, 首擧遺逸, 超授縣監, 尋擢魁科, 官至首相。 爲人剛果, 操履端確, 殉國之誠, 出於天稟, 遇事盡言, 不避忌諱。 丙子奉使燕京, 聞本國被兵, 日夜號哭, 華人義之。 平生以經濟自任, 及爲相, 多所施設。 兩湖大同之法, 其所建白也。 但自信太過, 初議大同之法, 與金集不合, 堉遂懷不平, 累陳疏攻集, 人以此短之。 及卒, 上歎曰: "安得擔當國事, 堅確不撓如金堉者乎?" 年七十九, 次子佑明, 以當宁國舅, 封淸風府院君。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52면
- 【분류】인물(人物) / 정론-정론(政論) / 왕실-국왕(國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