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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20권, 효종 9년 6월 1일 정묘 1번째기사 1658년 청 순치(順治) 15년

집의 이단상이 왕자·공주 등의 상에 조문하는 예에 대해 아뢰다

집의 이단상(李端相)이 인피하기를,

"신이 어제 본부의 계사에 대해 내린 비답을 보니, 말씀이 매우 엄하여 심지어는 임금을 견제하는 이름만 취하려 한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하로서 이러한 죄명을 졌으니 참으로 하루도 조정의 반열에서 얼굴을 들고 있을 수 없으므로 신은 너무나 부끄럽고 두려워하다 못해 땅을 파고 들어가고 싶습니다.

이번에 대군의 집에 친히 납시어 제사를 지내려는 일은 실로 상께서 오래도록 애통하시다 스스로 억제하지 못하여 그러신 것입니다. 다만 생각건대 예에는 절제가 있으므로 인정대로만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아우의 상사에 세 번이나 친히 납시는 예는 세상에 행해지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은 참으로 우매하여 삼대(三代) 이래로 이 예를 행한 자가 몇이나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시험삼아 우리 나라의 《오례의(五禮儀)》를 들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왕자·공주·옹주의 상에는 성복(成服)한 뒤에 한 번 친히 납시어 조문하는 것은 국가의 일정한 제도인데, 이 예도 행하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당초 《오례의》를 참작하여 제정할 때에 어찌 세 번 친히 납시는 고대의 제도가 있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마는, 이러한 절목에 대해 강론해 정하지 않은 것은 실로 고금의 사리가 다르기 때문에 한결같이 옛날의 예만을 따를 수 없어서 그런 것입니다. 더구나 신하의 상에 친히 제사지내는 한 조목은 《오례의》에서 거론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의례(儀禮)》 중에도 확실한 조문이 없으니, 설사 후세 제왕들이 한때 행한 적이 있다 하더라도 원래 정해진 제도가 아니므로 본받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일찍이 조종조에서 혹 형제간의 상을 당하여 세 번씩 친히 납시어 제사지내는 의절을 모두 행하지 않은 것은, 어찌 조종이 정한 제도를 중히 여겨 자기 한 몸의 사적인 슬픔을 억제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로 논한다면 전하께서 굳이 친히 제사지내려 하신 것은 자기 한 몸의 사적인 슬픈 마음을 펴고자 한 것이고, 신들이 간쟁해 마지않은 것은 조종이 정한 제도에 어긋날까 염려한 것입니다. 더위를 무릅쓰고 힘든 거둥을 하시면 옥체가 상하기 쉬우므로 신하들의 마음에 진실로 구구한 염려가 많은데다가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친히 제사지내려 하신 일은 본래 본받을 만한 옛날의 제도가 없고 또 우리 조정의 일상적인 예가 아니고 보면, 성상의 도리로서는 의당 선왕의 제도를 따르셔야 되고 법을 맡은 관원들도 예에 근거하여 의논해야지 찌는 듯한 날씨에 대해서 먼저 논할 일이 아닌 듯싶습니다. 때문에 어리석고 참람함을 헤아리지 않고 경솔하게 아뢰었습니다만, 말을 분명하게 만들지 못하여 전에 없던 엄한 분부를 내리시게 하였으니, 황송하고 부끄러워서 참으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신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이단상이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아뢰기를,

"양사의 많은 관원들이 인혐하고 물러갔습니다. 전하께서 대군의 상에 두 번이나 친히 가셨으니 인정과 예절을 이미 펴신 것입니다. 또 날씨가 무더운 때에 옥체를 수고롭게 움직여 제사에 임하여 몹시 슬퍼하시다가 몸을 상하지나 않을까 염려되고 보면 양사가 간쟁해 마지않는 것은 참으로 전하를 아끼는 정성에서 한 것입니다. 이번의 엄한 분부는 실정에 벗어난 것입니다. 별로 체직할 만한 잘못이 없으니, 김우석·홍중보·이은상·이성항·정인경·이단상을 모두 출사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47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丁卯/執義李端相引避曰: "臣於昨日, 伏見答本府啓辭之批, 則辭旨極嚴, 至以徒取制君之名爲敎。 爲人臣子, 負此罪名, 則誠不可一日擧顔於朝列, 臣慙悚震悸之極, 直欲鑽地以入也。 今此大君家親臨致祭之擧, 實由於聖上, 久益傷慟, 殆不能自抑, 而第念禮制有節, 亦不可徑情而直行。 三臨之禮, 不行於世久矣。 臣誠愚昧, 雖未知三代以來, 行此禮者有幾, 而試擧我朝《五禮儀》而言之。 則王子、公、翁主之喪, 只於成服後, 一番臨弔者 乃是國家一定之制, 而此禮之不行者, 亦已久矣。 當初《五禮議》參定之時, 豈不知古有三臨之制, 而此等節目, 曾不講定者, 誠以古今異宜, 實不可一遵古禮而然也。 況親祭臣喪一款, 則不但《五禮儀》之所不擧論, 亦無明文於《儀禮》中。 設有後世帝王行之於一時者, 而原非定制, 其不可取法也明矣。 曾於祖宗朝, 或遭天倫之慼, 而三臨親祭之儀, 皆莫之行者, 豈不以重祖宗之定制, 而抑一己之私痛乎? 以此論之, 則聖上之必欲親祭者, 將伸一己之私痛也, 臣等之必欲爭執者, 恐違祖宗之定制也。 觸冒勞動, 玉體易傷, 群下之心, 固切區區之慮, 而臣之妄意, 今者親祭之擧, 本無古制之可倣, 且非我朝之常禮, 則在聖上之道, 固宜遵守先王之制, 而執法之官, 亦當據禮論列而已, 日氣之炎熱, 似不當先論。 故不揆愚僭, 率爾陳啓, 而措語未瑩, 致有無前之嚴旨, 兢惶愧恧, 誠不知致身之所。 請鐫削臣職。" 答曰: "勿辭。" 端相退待物論。 憲府啓曰: "兩司多官引嫌而退。 殿下於大君之喪, 至於再臨, 情禮固已伸矣。 且値天時炎熱, 勞動玉體, 臨奠哀慟, 恐或致傷, 則兩司之論執, 固出於愛君之誠。 今此嚴旨, 出於情外。 別無可遞之失, 請金禹錫洪重普李殷相李性恒鄭麟卿李端相竝出仕。"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147면
  • 【분류】
    정론-간쟁(諫諍) / 왕실-종친(宗親) /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