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징·이숙 등의 작호를 회복시키라는 명에 대해 대신들이 불가함을 아뢰다
이징(李澂)·이숙(李潚) 등의 작호(爵號)를 회복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징과 숙을 이미 서울로 돌아오게 하여 궁궐을 출입시켰으니, 이는 실로 삼대(三代) 이후에 보지 못한 일입니다. 비록 순(舜)임금이 상(象)을 대우한 것이라도 이보다 지나칠 수 없을 것이니, 모든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흠앙하고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삼가 해조(該曹)로 하여금 그 작호를 전대로 회복시키라는 명령을 받아 보니, 신들은 마땅히 성상의 분부대로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만, 당초에 이미 선원록청(璿源錄廳)의 계사(啓辭)를 인하여 대신들과 의논해 작호를 삭제하고 이름만을 기록하였으며 아울러 그 어미가 흉역(兇逆)으로 죽게 된 사유를 기록하였으니, 그 죄가 종사(宗社)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다시 종친의 반열에 넣어 마치 평범한 죄로 파직을 당하였다가 서용된 자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듣지 않았다. 양사(兩司)가 복작시키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또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대신에게 의논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심지원, 영돈녕부사 김육, 연양 부원군(延陽府院君) 이시백은 모두 아뢰기를,
"사정(私情)을 따라 공론을 거스릴 수 없습니다."
하고, 영중추부사 이경여는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징과 숙이 석방되어 돌아오는 날 가까운 탑전에서 하교를 받았는데, 성상의 뜻이 부드럽고 온화하여 분명 요(堯) 순(舜)과 같은 마음이었고 천리 도심(天理道心)과 전체 묘용(全體妙用)이 남김없이 다 드러났으니, 입시한 신하들 가운데 누군들 감탄하지 않았겠습니까. 또 하인과 서리들 중에도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반년 동안 가뭄을 걱정하다가 그 이튿날 큰 비가 내리게 된 일로 말하자면 중외(中外)가 반가워 하며 모두가 하늘과 같은 성상의 덕을 우러러보았습니다. 이어서 복작시키라는 명령이 내리니 성상의 훌륭한 생각이 시종 중단 없는 것을 더욱 흠앙하였습니다. 옛날에 주공(周公)이 삼숙(三叔)을 토죄(討罪)할 때에 그 괴수인 관숙은 사형시키고 채숙은 7승(七乘)의 수레로 가두었으며 곽숙은 3년 동안 버려두었다가 그 후에 작읍(爵邑)을 회복시켰으니, 곽숙이 범한 바는 관숙과 차이가 있으나 대저 역모를 함께 한 자였습니다. 성인께서 죄의 경중을 분별하여 각각 사리에 합당하게 하였으니, 지금까지도 주공의 덕을 칭송함이 쇠하지 않고 있습니다. 곽숙은 몸소 똑같이 역모를 범한 자인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였으니, 이보다 가벼운 자도 성인께서 처리함에는 또한 반드시 그에 합당한 방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징과 숙을 5년 동안 위리 안치하였으니 7승(乘)으로 가둔 데에 비교할 만하고, 지금에 이르러 복작시키도록 명하셨으니 주(周)나라의 인후(仁厚)한 유의(遺意)에 부끄러울 것이 없습니다. 국가를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데에는 관작이 있고 없는 것은 관계가 없을 듯합니다. 당초 방환(放還)시킨 것은 실로 보존하려는 데서 나온 것이고 오늘날은 복작시켜 사은(私恩)을 다하려고 하시니 정리와 법으로 참작해보건대 두 가지 모두 합당한 듯합니다. 오직 성상께서 인(仁)을 몸받고 의(義)를 헤아리며 중도(中道)를 잡아 살펴 처리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
하니, 상이 경여의 의논을 따랐다. 이 뒤로 양사(兩司)가 여러 달 동안 쟁집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
○丁酉/命復澂、潚等爵號。 政院啓曰: "澂、潚旣已放還都下, 出入禁中, 此實三代以下所未見之事。 雖舜之待象, 無以過此, 凡在臣僚, 孰不欽仰感激。 而卽伏見令該曹, 仍其爵號之命, 臣等所當依聖旨分付。 而但當初旣因《璿源錄》廳啓辭, 議大臣削去爵號, 只錄其名, 竝錄其由兇逆致死之由, 則其罪係關宗社。 豈可復齒宗班, 有同尋常罪廢收敍者哉? 上, 不聽。 兩司請還收復爵之命, 上又不從。 累啓, 命議于大臣。 領議政鄭太和、右議政沈之源、領敦寧府事金堉、延陽府院君 李時白皆以爲: "不可循私情而拂公議。" 領中樞府事李敬輿以爲: "臣於頃者澂、潚放還之日, 榻前盈尺之地, 仰承下敎, 聖意藹然, 分明堯、舜底心, 天理道心, 全體妙用, 呈露無餘, 入侍諸臣, 孰不感歎, 輿臺胥吏, 亦莫不欣悅。 至於憂旱半年, 翌日大霈, 中外聳動, 咸仰聖德之如天, 而繼有復爵之命, 益欽聖上善念之發, 無間始終也。 昔者周公討三叔之罪, 致辟其魁, 以七乘囚, 霍叔三年不齒, 其後復其爵邑, 霍之所犯, 與管有異, 蓋其同逆者也。 聖人輕重差別, 各當其理, 至今稱周公之德不衰。 霍叔以身犯同惡之人, 猶且如此, 則輕於此者, 聖人處之, 亦必有其道矣。 澂、潚五年圍置, 足擬七乘之囚, 到今復爵, 無愧周家仁厚遺意。 設爲國家遠慮, 有爵無爵, 恐無關係矣。 當初放還, 實出保全, 今日復爵, 以究私恩, 參以情法, 似得兩宜。 惟在聖上體仁度義, 執中而審處之。" 上從敬輿議。 是後, 兩司累月爭執, 乃從之。
- 【태백산사고본】 16책 16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59면
- 【분류】인사-관리(管理) / 왕실-종친(宗親) / 사법-행형(行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