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을 시행하는 법을 영돈녕부사 김육의 청에 의해 박수진을 등용하여 다시 정하다
전(錢)을 시행하는 법을 다시 정하였다. 처음에 전법(錢法)을 시행하려 했는데, 전이 적어 쓰기에 부족하여 양서(兩西) 연로의 제읍에만 겨우 시행했으나 거기도 또한 통행되지 않았으므로 상이 듣고 우선 서서히 할 것을 명하였다. 이때 영돈녕부사 김육이 청하기를,
"다시 법을 정하여 경기(京畿)의 작미(作米) 매 1결(一結) 8두에서 1두는 전으로 대신하되 곡물이 귀하면 2두를 전으로 대신하며, 점포를 기전(畿甸)과 양서(兩西)에 설치해서 가까운 데로부터 먼 곳에 미쳐 서울과 지방에 통행될 수 있도록 하소서. 그리고 호조·형조·한성부·장례원의 속포(贖布)는 전(錢)과 포(布)를 절반씩 하는 것을 허락하고 각사(各司) 공물가(貢物價)의 5분의 1과 각사의 고역(雇役), 호조·병조의 요포(料布)의 3분의 1은 다 전으로써 대신하도록 하소서. 또한 돈은 일정한 값이 없이 때에 따라 조절하는데 은(銀)을 기준으로 그 값을 정하되 은 한 냥(兩)을 전 6백 문(文)에 해당시키며, 미(米)와 포(布)는 은 값의 높고 낮음을 기준으로 하는데 쌀 1승(升)의 값은 전 4문에, 은 1냥의 값은 쌀 1섬에 해당하도록 하소서. 그리고 또 전을 훼손하는 것을 신칙하여 엄금하소서."
하고, 이어서 차자를 올려 박수진(朴守眞)을 천거하여 돈을 통행시키는 일을 위임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허락하였다.
이때 전을 훼손하는 것을 금하는 법이 비록 엄하였으나, 주장(鑄匠)의 무리가 전은 결코 시행되지 않는다고 하며 민간을 선동하여 염가로 전을 사들여 몰래 산속에 들어가 그릇들을 주조했다. 이로 말미암아 돈은 나날이 더욱 줄어들었으므로 상평청에 저축된 돈과 흩어져 밖에 있는 것을 통계해 보아야 수십만 관(貫)도 채 되지 않았다. 겨우 중인(中人) 열 가구의 자산쯤 되는 양을 가지고서 온 나라에 두루 시행하려 했기 때문에 시행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김육은 돈이 적어서 시행되기 어려운 것을 알지 못한 채 법이 정립되지 않아서라고 탓하여, 법을 다시 정하며 가혹하고 심하게 하니, 한 번씩 변경할 때마다 백성들은 번번이 손해를 보았다. 의논하는 자들이 다 그르다 하고 상께서도 또한 싫어하였으나, 김육은 견지하기를 오히려 굳건히 하였다.
박수진은 서울 사람이다. 본래 용렬하고 비루했으며, 가정이 몹시 가난하였다. 일찍이 한 가옥을 짓는데 계략으로써 초부(樵夫)·목동(牧童)을 모집하여 부역을 시켰다. 사람이 더러 그가 재능이 있다고 말하고, 수진이 또
"나를 등용하면 돈을 유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김육이 그것을 듣고 조정에 천거하였던 것이다. 수진은 얼마 안 가서 질병이 발생하여 죽었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8면
- 【분류】금융-화폐(貨幣) / 물가-물가(物價)
○癸亥/更定行錢法。 初錢法將行, 而錢少不足於用, 僅行於兩西沿路諸邑, 而亦未通行。 上聞之, 命姑徐之。 至是領敦寧府事金堉, 請更定科條, 京畿作米, 每一結八斗, 一斗則代以錢, 而穀貴則二斗代錢, 設鋪子於畿甸及兩西, 自近及遠, 使得通行於京外。 戶ㆍ刑曹、漢城府、掌隷院贖布, 許以錢布參半, 各司貢物價五分之一, 各司雇後戶、兵曹料布三分之一, 皆以錢代之。 錢無定價, 隨時低昻, 以銀折定其價, 銀一兩直錢六百文, 米布視銀直高下, 米一升直錢四文, 銀一兩, 直米一石。 且申嚴毁錢之禁。 仍上箚薦朴守眞, 委以行錢之事。 上, 許之。 時錢禁雖嚴, 鑄匠輩以爲錢必不行, 煽誘閭里, 以廉價貿錢, 潛入山中, 鑄成器皿。 由是錢日益耗, 常平所貯之錢, 通計散在外者, 不滿數十萬貫。 僅以中人十家之産, 欲以遍行於國中, 所以行之之難也。 堉不知錢少難行, 而咎法之不立, 更定科條, 苛細漸甚, 每一變更, 民輒失利, 議者皆以爲非, 上亦厭苦之, 堉持之猶堅。 朴守眞京人也, 素庸鄙, 家甚貧。 嘗營一屋, 以計募樵童役之人。 或言其有才, 守眞又言, 用我則錢可行, 堉聞之, 薦于朝。 守眞尋遇疾而死。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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