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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5권, 효종 6년 12월 4일 갑인 4번째기사 1655년 청 순치(順治) 12년

김육이 흠경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대비전을 세우는 것의 불가함을 논하다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예전에 우리 성종 대왕(成宗大王)창경궁(昌慶宮)수강궁(壽康宮)의 터에 세워 정희(貞熹)·인수(仁粹)·안순(安順) 세 대비(大妃)를 여기에 모시고, 명절이나 또는 나라에 큰 경사가 있는 때에는 문안한 뒤 이어서 명정전(明政殿)에 나아가 뭇 신하들의 조회를 받았다 하니, 대개 창경궁은 대비를 위해서 세운 것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1백 6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난번 자전께서 체후가 편치 못하시므로 총부(摠府)로 옮겨 모셨는데, 실로 오래 거처하실 만한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또 자전을 받들어 수정당(壽靜堂)에 옮겨 모셨는데, 신은 삼가 생각하기를 ‘성상의 마음은 가까운 곳에 모셔두고 아침 저녁으로 봉양하는 정성을 다하고자 하시는 것이니, 성상의 마음이 바로 성종 대왕의 마음이구나.’ 하였습니다. 이번에 삼가 듣건대, 경연 석상에서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비좁아 궁색하기 때문에 흠경각(欽敬閣)의 터에다 따로 전을 지으려 한다.’고 하교하셨다 하니, 봉양을 극진히 하시는 전하의 정성은 지극하지 않은 바가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은 거룩한 덕을 받들어 따를 것이며 누가 감히 받들지 않겠습니까. 다만 어리석은 신하의 소견으로는 불편한 것이 한 가지, 불가한 것이 두 가지가 있는 점이 한스럽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진달합니다.

대개 제왕의 거처는 깊숙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에 아홉 겹으로 안을 장엄하게 하고 빙 둘러 건물을 밖에 나열하는데, 더구나 후비(后妃)가 거처하는 곳이겠습니까. 흠경각 자리는 인정전 밖에 있는데, 산기슭에 노출되어 매우 깊숙하지 못하며, 금호(金虎)·요금(曜金) 두 문이 좌우에 있고 서영(西營)·북영(北營)이 그 밖에 있으므로 달리는 거마 소리가 시끄러워 새벽부터 저녁까지 소란합니다. 그리고 정전이 서쪽을 향하게 되어 바람이 몰아치는 가을과 겨울에는 반드시 배나 더 추울 것으로 누각을 겹으로 짓는다 하더라도 추위를 차단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전께서 편안히 계시기에는 반드시 수정당에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불편하다는 한 가지입니다.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大內)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말하였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또한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데다 또 멀며, 왼쪽을 숭상하는 예전의 예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첫 번째 이유입니다. 흠경각은 바로 세조 대왕(世祖大王)이 세운 것입니다. ‘하늘을 공경히 따라 삼가 백성들에게 생활에 필요한 절기를 나누어 준다.[欽若昊天敬授人時]’는 것은, 요(堯)임금이 하늘을 본받아 도를 행해서 백성을 다스린 것입니다. 이 각을 세운 것은 실로 천고의 제왕들에게 없었던 아름다운 뜻입니다. 성인께서 제작을 지극히 정밀하게 하셨으니 만세에 전해가며 법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비록 다시 설치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아울러 그 각까지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그 불가하다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이 흠경각은 본래 경복궁에 있었는데 현재 거처하시는 창덕궁에도 또한 있었습니다. 각각 두 곳에 건립하여 그 이름을 존속시켰고, 열성(列聖)들이 서로 계승하며 따라서 말미암는 옛 제도로 삼았는데, 지금 만일 이를 철거해 버린다면 후세에 무엇을 본받겠습니까. 공자는 초하루를 고(告)하는 데 올리는 희생양을 없애지 않고자 하였습니다.070) 예(禮)가 양에게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공자가 그 양을 보존하고자 한 것은 그 예를 아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 성스럽고 신령스런 분이 처음으로 세운 옛 누각이겠습니까.

신의 미미한 정성은 단지, 자전께서 평소 계시던 곳에 편안히 계시고 성상께서 세종·성종 등 열성의 아름다운 뜻을 상실하지 않기를 원할 뿐입니다. 죽을 날이 가까워 노망이 들었으므로 저촉함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였으니,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너그럽게 살피시고 다시 조정에 하문하신다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그 차자를 비국에 내렸다. 비국이 회계하여 아뢰기를,

"이 차자의 내용을 보건대, 고례를 논거로 인용하여 뜻이 매우 올바릅니다. 대내의 동쪽에 만일 지을 만한 터가 있다면 이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실로 사의에 합당할 것이나, 동편에 공한지가 없다는 것에 대해 신들이 일찍이 탑전에서 친히 성상의 하교를 받았습니다. 흠경각에 대해서는 《여람(輿覽)》을 상고해 보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서쪽에 있었고, 창덕궁에는 나타나는 곳이 없습니다. 비록 조종조의 옛 터는 아니지만, 흠경으로써 이름하였으니 굳이 철거할 필요가 없이 양(羊)을 보존하는 뜻을 붙여야 합니다. 그러나 달리 옮겨 지을 만한 곳이 없으며, 정전을 이곳에 짓는 것은 실로 부득이한 데서 나온 바이니, 백 번 생각해 보아도 달리 변통할 길이 없습니다. 신들의 말은 형세를 논한 것이고, 차자 가운데의 논의는 고제(古制)를 따르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비국의 말을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건설-건축(建築)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

  • [註 070]
    공자는 초하루를 고(告)하는 데 올리는 희생양을 없애지 않고자 하였습니다. : 노(魯)나라 문공(文公) 때부터 종묘에 매달 초하루를 고하는 예식을 폐지했는데, 희생으로 양(羊)을 바치는 의식만은 그대로 존속되어 왔다. 자공(子貢)이 양을 바치는 의식을 없애 버리려고 하니, 공자는 예의 정신을 보존시킨다는 뜻에서 그대로 의식을 존속시키라 하였다. 《논어(論語)》 팔일(八佾).

○領敦寧府事金堉上箚曰:

臣聞昔我成宗大王昌慶宮壽康宮之基, 以奉貞熹、仁粹安順三大妃, 至正節日及國有大慶, 問安之後, 仍御明政殿, 受群臣朝。 蓋昌慶, 爲大妃建也。 傳至于今, 一百七十有餘年。 頃緣慈候未寧, 移御摠府, 實非久御之所。 故又奉慈聖, 移御壽靜堂。 臣竊惟聖心, 欲就近如膝下, 以盡朝夕奉養之誠, 聖上之心, 卽成宗大王之心也。 玆者伏聞下敎筵中, 以壽靜堂依山窄阨, 欲營別殿於欽敬閣之基, 殿下致養之誠, 無所不用其極, 群臣將順盛德, 孰敢不奉承乎? 但愚臣之見, 只恨其有不便者一, 不可者二, 敢冒死陳之。 夫帝王之居, 欲其深邃, 故九重壯內, 周廬外列, 況后妃之所御乎? 欽敬之基, 在仁政殿外, 露出山樊, 極其淺狹, 金虎曜金兩門, 在左右, 西營、北營, 在其外, 駢闐喧聒, 晨夕紛擾。 正殿面勢西向當風, 秋冬之際, 寒澟必倍, 重樓複閣, 不能遮護。 慈殿寢御之安, 必不及壽靜。 此其不便者一也。 自古太后之所御, 必在大內之東, 故謂之東朝。 昌慶在東, 亦以此也。 移設於正殿西偏近外之地, 回互且遠, 不合於古禮尙左之義, 此其不可者一也。 欽敬閣, 乃世祖大王之所建。 "欽若昊天, 敬授人時", 之所以體天行道, 而理民也。 此閣之建, 實千古帝王所無之美意。 聖人制作, 極精至密, 可以傳之萬世而爲法。 今雖不得復設, 豈可竝與其閣, 而毁之乎? 此其不可者二也。 此閣本在景福宮, 時御昌德宮, 亦有之。 各建於兩處, 以存其名, 列聖相承, 以爲率由之章。 今若撤而去之, 後世何法焉。 孔子欲不去餼羊。 禮非在於羊, 而孔子存之, 愛其禮也, 況此聖創神垂之舊閣乎。 臣之微誠, 只願慈殿之安於恒御, 聖上之無失世宗成宗列聖之美意也。 垂死老妄, 不自覺其觸犯, 惟聖明恕察, 更問於朝廷, 不勝幸甚。

下其箚於備局, 備局回啓曰: "觀此箚辭, 援據古禮, 詞義甚正。 大內之東, 如有可搆之基, 則依此施行, 實合事宜, 而東邊之無隙地, 臣等曾於榻前, 親承聖敎。 至於欽敬閣, 攷諸《輿覽》, 則在景福宮康寧殿西, 而昌德宮無着見之處。 雖非祖宗朝舊基, 旣以欽敬爲號, 則不必撤而去之, 以寓存羊之義。 而他無推移之地, 正殿之營造於此, 實出於萬不獲已, 百爾思量, 更無變通之路。 臣等之言, 爲形勢也; 箚中之論, 遵古制也。" 上從備局之言。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3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37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건설-건축(建築) / 왕실-비빈(妃嬪) / 역사-전사(前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