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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5권, 효종 6년 10월 24일 갑술 3번째기사 1655년 청 순치(順治) 12년

충청도 유생 김유 등이 상소하여 호남 유생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청하다

충청도 유생 김유(金洧)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은 멀리 궁벽한 시골에 사는데, 백홍성(白弘性)이 성묘(聖廟)의 제수를 욕되게 한 죄가 있으면서도 허위로 날조하여 치계해서 성총을 기만하였고 일을 맡은 신하는 유생 정석(丁晳) 등을 죄주기를 청하자 처음에는 엄하게 형벌을 가하라는 하교가 있었고 끝내는 정배(定配)하라는 분부를 내렸다는 것을 처음 들었습니다. 이어서 듣건대 배위(裵緯) 등이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서 부르짖다가 또 정거(停擧)의 처벌을 당했다 하며, 또 듣건대 대신이 그에 대해 말하고 삼사(三司)가 그에 대해 간쟁하고 태학이 그에 대해 변론을 하였다가 성상의 노여움이 가일층 격화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합니다. 신들은 처음에는 놀랐고 끝내는 탄식했습니다.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모아, 발을 싸매고 멀리 와서 한번 어리석은 소견을 진달하여 성인을 높이고 유학을 숭상하는 우리 전하의 정치를 도우려고 생각했습니다만, 또한 말이 신임을 받지 못하여 전하의 뜻 밖에 나지나 않을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의 전말과 실상은 이미 조정 신하의 계문이나 호남 유생의 상소에서 상세히 아뢰었을 것이니, 신들이 중복하여 늘어놓을 필요가 없겠습니다만, 대개 홍성의 죄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국휘(國諱)가 있는 날에 소를 잡아 풍악을 베풀며 군사를 먹인 것이 첫째요, 제사지내는 전례의 중대함을 생각하지 않고 제수품을 더럽힌 것이 둘째요, 거짓 내용의 계문을 함부로 진달하여 많은 선비들을 무함한 것이 셋째입니다. 한꺼번에 이런 세 가지 대죄를 저질렀으니, 이것은 조정이 통렬히 배척해야 할 바이며 모든 사람이 함께 꾸짖어야 할 바입니다. 어찌 호남 한 도만 통분해 할 일이겠습니까. 정석 등이 예전에 없던 일을 목격하고 한갓 성인을 높이는 성의만 간절한 나머지 몸에 미칠 재앙은 생각지 않고 오직 악을 미워하는 마음만을 품고서, 향숙(鄕塾)에 전해오던 규범에 따라 죄를 성토하는 통문(通文)을 띄웠으니, 과격한 실수는 혹시 있을 수 있겠으나 소요를 야기시켰다는 견책은 실로 뜻밖인 것입니다. 이것이 배위가 상소를 올리게 된 까닭입니다. 배위 등이, 홍성이 죄가 있는데 처벌을 받지 않는 것을 이미 보았고 또 정석 등이 죄가 없으면서 견책을 당한 것을 듣고서, 같은 목소리로 팔뚝을 걷고 심혈을 쏟아 상소했던 것은 또한 성묘(聖廟)와 사전(祀典)을 존중하며 전하의 실수를 바로잡으려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은 성명께서 마땅히 너그럽게 용납하여 장려해야 할 일입니다. 어찌 죄를 주지 않다 뿐이겠습니까. 홍성이 성현을 모독하고 임금을 기만한 것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이니, 국기(國忌)를 당하여 군사를 호궤한 것은 또한 지엽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그를 죄줌에 있어서 그 한 가지만을 적용하고 그 두 가지는 빠뜨렸습니다.

그리고 일을 맡은 신하가 감히 유생을 죄주라는 말로 방자하게 신구할 계획을 하였으니, 그때의 탄핵은 실로 가벼운 처벌이었던 것인데, 전하께서 별안간 실정에서 벗어나는 하교를 내려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유생들에 대해서는 기를 꺾는 것으로 부족하여 모욕하였고 모욕하는 것으로 부족하여 유배시키기도 하고 정거(停擧)시키기도 하면서 호강(豪强)하다고 지목하고 완악한 풍조라고 단정하여, 뒤 폐단을 막기 어렵다고 말하는 한편 나라의 기강이 펴지지 못할 것이라고 하였으니, 아, 너무 심하십니다. 홍성은 저처럼 죄가 있는데도 파직에 그치고, 정석배위 등은 저처럼 죄가 없는데도 법률을 편파적으로 무겁게 부과하고 의금부에 잡아 들이게 하는 분부를 내리기까지 하였으니, 전하께서는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뒤 폐단을 막을 수 있고 나라의 기강이 펴질 수 있다고 여기십니까. 조처가 마땅함을 얻지 못하면 인심이 자연 복종하지 않고, 인심이 복종하지 않으면 비록 날마다 유생을 한 명씩 처벌한다 하더라도 공공의 의논에 대해서는 어쩌시겠습니까.

대저 선비란 나라의 원기(元氣)입니다.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리는 자들이 육성하지 않음이 없었고, 본조에서 선비를 대우함도 또한 후하였습니다. 국초 이래로 관학에 부황(付黃)하는 규정이 있었는데, 죄가 명교(名敎)에 관련이 있는 경우 그의 이름에 누런 종이 쪽지를 붙이면 직책이 비록 정승의 자리에 있다 하더라도 감히 조정에 서지를 못하였으니, 이것은 국조가 사론(士論)을 중시하고 사기(士氣)를 배양하는 바였습니다. 이번 호남 유생들이 홍성의 죄를 성토한 것을 가지고서 사신을 모욕했다는 죄를 억지로 덮어씌운 일은 아무래도 선비를 배양하는 성스러운 조정의 도리가 아닐 듯합니다. 신들은 호남 유생들과는 사는 곳도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얼굴도 본래 알지 못하니, 어찌 감히 털끝만큼이라도 호남 유생들의 처지를 위하여 이런 말을 하는 것이겠습니까. 또한 말이 입에서 나오면 죄가 자신에게 가해져 정석배위의 전철을 다시 밟게 되리라는 것을 모르는 바도 아니지만, 일이 성묘에 관련되는데 끝내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는다면 사문(斯文)의 죄인이 됨을 면치 못할 것이니, 성명의 아래에서 이런 망언한 죄를 얻는 것쯤이야 감수하겠습니다.

아, 예전의 선비에 대한 형벌은 매로 볼기를 치는 데 지나지 않았고, 기록에 말하기를 ‘선비는 죽일 수 있을지언정 욕되게 할 수는 없다.’ 하였습니다. 이제 전하께서 정석의 죄를 용서하지 않고 배위의 처벌을 풀어주지 않는다면 끝내 많은 선비들의 기대를 저버리게 될 것이며, 홍성의 악을 다스리지 않고 유사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후세에 무어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답하지 않았다. 이때 전남 도사 박세성(朴世城)이 치계하기를, "정석(丁晳)김기추(金起秋) 등이 체포 명령을 듣고는 많은 종들을 인솔하여 관리를 결박해 놓고 망명 도주하였다."고 하였다. 대개 정석 등이 체포에 응할 때 자기 노모를 찾아가 작별할 것을 요청하자, 형리가 집이 멀다는 것을 이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정석이 술취한 김에 성을 내어 형리를 구타하고는 어미를 찾아가 만나 뵈었다. 기추도 또한 압송해가는 자와 약속하고 사사로이 집에 갔다. 형리가 정석 등이 도주하였다고 현감 반윤기(潘潤沂)에게 달려가 보고하니, 윤기는 다시 제대로 알아보지도 않고 성급하게 도사에게 보고했고 도사는 조정에 보고하였다. 정석 등이 애당초 망명할 계획은 없었으므로 어미를 만나 본 뒤 곧바로 체포에 응하여 상경하였다.

상이 처음에 세성의 치계를 보고 정원에 하교하기를,

"정석 등이 한편으로는 망명 도주하고 한편으로는 김유 등으로 하여금 상소하여 신구하게 하였으니, 일이 매우 해괴하다. 장차 어떻게 처리해야 할 것인지 본원은 의논해서 아뢰라."

하니, 정원이 아뢰기를,

"김유 등은 정석 등과 거주하는 곳이 아주 머니, 서로 내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그리고 많은 선비들이 상소로 진술한 것은 일리가 있으니 앞질러 캐물어서는 안 되며, 우선 정석 등을 체포하여 심문한 뒤 만일 서로 내통한 자취가 있다면 법에 따라 다스리는 것이 마땅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김유 등이 성인을 빙자하여 사심을 달성하려 한 정상이 몹시 해괴하므로 무겁게 다스려서 풍조를 바로잡고 싶다만, 지금 본원의 계사가 이와 같으니 우선 그대로 둔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정(軍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忠淸道儒生金洧等上疏曰:

臣等遠伏窮鄕, 初聞白弘性有致辱聖廟粢盛之罪, 而搆虛馳啓, 欺罔聖聰, 有司之臣, 請罪儒生丁晳等, 始有嚴刑之敎, 竟下定配之命。 繼而聞裵緯等, 封疏叫闔, 又被停擧之罰, 又聞大臣言之, 三司爭之, 太學辨之, 以致天怒漸激, 轉加一層。 臣等始焉驚惑, 終焉歎惜。 聚首齊聲, 裹足遠來, 思欲一陳狂瞽之說, 以裨我殿下尊聖崇儒之治, 無亦言不見信, 而居殿下之意外也耶? 其時顚末實狀, 已悉於廷臣之啓、湖儒之章, 臣等不必疊床而臚陳之。 蓋弘性之罪有三。 搥牛於國諱之日, 張樂犒師, 一也, 罔念乎祀典之重, 汚穢粢盛, 二也, 冒陳其欺罔之啓, 誣捏多士, 三也。 一擧而做此三大罪, 此朝家之所當痛斥, 而人類之所當共棄者, 豈獨爲湖南一道之駭憤而已哉? 丁晳等目見無前之事, 徒切尊聖之誠, 不思逮身之災, 唯懷嫉惡之心, 遵依鄕塾之流規, 乃發聲罪之通文, 則過激之失, 容或有之, 起之鬧之責, 實出料外, 此裵緯之疏, 所以發也。 等旣見弘性有罪而無罰, 又聞等非罪而獲戾, 同聲扼腕, 瀝血抗疏, 亦出於尊聖廟、重祀典, 而匡殿下之失矣。 此聖明之所宜優容而嘉奬之, 奚但不罪而止哉? 弘性之侮聖欺君, 罪合罔赦, 國忌犒師, 抑其末也。 而殿下之罪之也, 擧其一, 而遺其二焉。 且有司之臣, 敢以罪儒之言, 恣爲營救之計, 其時白簡, 實是末減, 而殿下遽下情外之敎, 使不敢盡言。 至於儒生, 則摧折之不足, 而慢罵之, 慢罵之不足, 而或定其配, 或停其擧, 目之以豪强, 斷之以頑習, 一則曰後弊難防, 一則曰國綱不振, 噫嘻! 太甚矣。 有罪如弘性, 而罷職而止, 無罪如, 而科律偏重, 至下拿致王府之命, 殿下以爲如是而后, 後弊可防, 國綱可振歟? 擧措不得宜, 則人心自不服, 人心不服, 則雖日罪一儒, 其如公議何? 夫士者, 國家之元氣也。 自古爲國家者, 莫不扶植, 而本朝之待士, 其亦厚矣。 國初以來, 館學有付黃之規, 罪有關於名敎, 而黃其姓名, 則職雖在於卿相, 而不敢立朝, 此國朝之所以重士論, 而培士氣也。 今以湖儒之聲罪弘性, 勒加侮辱王人之罪, 則恐非聖朝培養之道也。 臣等與湖儒, 居相遠也, 面素昧也, 豈敢有一毫爲湖儒地, 而爲此言哉? 亦非不知言發於口, 罪加於身, 復踵之轍, 而事關聖廟, 終無一言, 則未免爲斯文之罪人, 聖明之下, 獲此妄言之罪足矣。 噫! 古者章甫之刑, 不過箠楚。 《記》曰: "儒可殺, 而不可辱。" 今殿下不釋丁晳之罪, 不解裵緯之罰, 則終失多士之所望矣。 不治弘性之惡, 不正有司之失, 則無以有辭於後世矣。 不報。 時全南都事朴世城馳啓以爲: "丁晳金起秋等, 聞有拿命, 多率家奴, 結縛官人, 亡命脫逃。" 蓋等之就拿也, 請歷別其老母, 刑吏以家在迂路不許。 乘醉發怒, 敺打刑吏, 往見其母, 起秋亦與押去者相約, 私往其家, 刑吏以等逃去, 奔告于縣監潘潤沂潤沂不復究問, 遽報于都事, 都事轉聞于朝。 等初無亡命之計, 見母之後, 卽就拿上京。

上初見世城之啓, 下敎于政院曰: "丁晳等一邊亡命逃走, 一邊使金洧等投疏伸救, 事極驚駭。 將何以處之, 本院議啓。" 政院啓曰: "金洧等與丁晳等, 居住懸遠, 似無相通之理。 而多士陳疏, 意有所在, 不宜徑加推究, 姑待丁晳等捕得拿問, 然後若有相通之迹, 則依法治之宜矣。" 答曰: "金洧等藉聖濟私之情, 極可痛駭, 將欲重治, 以正士習, 而今者本院之啓如此, 今姑置之。"


  •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31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군사-군정(軍政)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