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의정 조익의 졸기
대광 보국 숭록 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議政府左議政) 조익(趙翼)이 졸서(卒逝)하였다. 조익의 자는 비경(飛卿)이다. 성리학(性理學)에 잠심하였고 젊어서 급제하였다. 일찍이 과제(課製) 때에 동해무조석론(東海無潮汐論)을 지었는데, 문충공(文忠公) 이항복(李恒福)이 보고 ‘세상에 어찌 이만한 식견이 있는가.’ 하였다. 광해(光海) 초기에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잡았을 때 서로 친하게 지내기를 바라고 전랑(銓郞)에 천거하려 하였으나, 조익이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정인홍(鄭仁弘)이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 제현(諸賢)을 공박하여 배척할 때에 조익이 옥당에 있었는데 동료와 함께 상차하여 그 죄를 논하였다. 이 때문에 고산 찰방(高山察訪)으로 폄출(貶黜)되었는데, 모후(母后)가 유폐되어 윤기(倫紀)가 아주 무너진 것을 보고 곧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한번도 성시(城市)에 들어오지 않았다. 계해년에 반정(反正)하고서는 맨 먼저 옥당에 들어갔는데 걸핏하면 성인의 학문과 선왕의 정치를 인용하니, 인조(仁祖)가 번번이 허심탄회하게 들었다. 지금의 성상께서 즉위하고서 드디어 정승이 되었는데 조익이 상이 큰일을 할 뜻이 있는 것을 보고 알면 말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어버이를 지극한 효성으로 섬기고 자제로서의 일을 늙어도 게을리하지 않고 지켰다. 상중에 있을 때에는 3년 동안 죽을 먹고 밤낮으로 호곡하여 피가 침석(枕席)을 적셨다. 늘 공경을 지키고 본심을 간직하는 것을 일생의 공부로 삼았고 종일 바르게 앉고 병이 있지 않으면 비스듬히 기댄 적이 없었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을 종사(從祀)하는 논의를 힘껏 주장하다가 상의 뜻을 거슬러 향리에 물러가 경적(經籍)에 침잠하였다. 이때에 졸서하니, 나이는 일흔 일곱이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그가 지은 《서경천설(書經淺說)》·《용학곤득(庸學困得)》 등의 책 가운데에서는 주자장구(朱子章句)를 제법 고쳤는데, 사람들이 이 때문에 흠잡는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8면
- 【분류】인물(人物)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趙翼卒, 翼字飛卿, 潛心性理之學, 少登第, 嘗於課製, 著《東海無潮汐論》。 文忠公 李恒福見之曰: "世豈有如此見識乎。" 光海初, 李爾瞻當路, 願與交歡, 將薦銓郞, 翼終不答。 鄭仁弘攻斥李彦迪、李滉諸賢, 翼在玉堂, 與同僚箚論其罪, 由是貶爲高山察訪。 見母后幽閉, 倫紀斁絶, 卽棄官還鄕, 一不入城市。 及癸亥反正, 首入玉堂, 動引聖人之學、先王之政, 仁祖輒虛己以聽。 今上嗣位, 遂入相。 翼見 上有有爲之志, 知無不言。 事親至孝, 執子弟之役, 至老不懈。 及居喪, 啜粥三年, 日夜號哭, 血漬枕席。 常以持敬存心, 爲一生工夫, 終日危坐, 非有疾病, 未嘗跛倚。 力主李珥、成渾從祀之論, 忤上旨, 退休鄕里, 沈潛經籍, 至是卒, 年七十七, 諡文孝。 其所著《書經淺說》、《庸學困得》等書中, 頗改《朱子章句》, 人以此疵之。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8면
- 【분류】인물(人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