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동래 부사 임의백을 불러서 일본의 사정에 관해 자세히 듣다
상이 전 동래 부사(東萊府使) 임의백(任義伯)을 소견(召見)하여 묻기를,
"너는 동래에 오래 있었으니 일본(日本)의 사정에 대해 보고 들은 것을 아뢰도록 하라."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신이 동래에 있을 때에 들으니, 일본은 백성이 매우 번성하고 살길은 매우 어려우므로 저희끼리 도륙하여 강한 자가 약한 자의 고기를 삼킨다 합니다. 원가강(源哥康)004) 이 심처왜(深處倭)를 진복(鎭服)하려고 강호(江戶)로 거처를 옮겼는데, 강호와 왜경(倭京) 사이는 길이 머나 인가가 촘촘히 잇달아서 여염이 번성한 것이 우리 나라의 종가(鍾街)와 같고 군사가 많기도 예전에 없던 것이라 합니다. 남조(南朝)의 신사(信使)가 서로 통하고부터 상선(商船)이 잇달아 와서 왜경에 정박한다 합니다. 접때 남조에서 왜국에게 군사를 청하니, 왜인이 ‘조선은 교린(交隣)의 정분이 두터우므로 급한 일이 있으면 구제할 수 있으나 남조는 일찍이 서로 통한 의리가 없으므로 구제할 수 없다.’ 하므로 남조의 사신이 통곡하며 가지 않고 그대로 왜국에서 죽었는데, 근래 그 의논이 조금 변하여 혹 구제하려는 의논이 있다 합니다. 또 왜인이 늘 남조는 형세가 강성하고 청국은 쇠잔하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남조가 과장한 말인 듯합니다. 또, 왜경은 인심이 매우 나쁘지는 않으나, 마도(馬島) 사람은 그 나쁜 것이 유난히 심한데 도주(島主)가 어리석으므로 장차 그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 줄 것이라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원가(源家)가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칠 때에 맨 먼저 임금을 시해한 죄를 묻고 다음에 조선 사람을 함부로 죽인 죄를 물었으니, 그 자손이 어찌 그 조훈(祖訓)을 어기겠습니까. 원가가 그 나라에 오래 살아있는 것이 실로 우리 나라의 이익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에 들으니 그 나라에 평가(平哥)의 양자가 있다 하던데,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고 또 기세가 있는가?"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고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으나, 관백(關白)의 친족이 다 국정을 잡았으니, 다른 걱정이 없을 듯합니다."
하였다. 임의백이 또 아뢰기를,
"임진년에 강호(講好)한 뒤에 도주가 강호에서 사자(使者)를 보내는 것은 우리 나라에 폐단이 있다고 관백에서 말하여 도중(島中)에서 임시 직함으로 사자를 보내는데, 이른바 제1선(第一船)이 이것입니다. 그 뒤에 평조신(平朝信)005) 이 화호(和好)를 자기 공이라 하므로 우리 나라에서 벼슬을 주고 배를 주었는데, 혹 세견(歲遣)이라고도 하고 특송(特送)이라고도 하여 이름이 여러 가지이고 주는 것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평조신이 죽은 뒤에는 평조흥(平朝興)006) 이 대신하여 그 배를 받았고, 평조흥이 또 그 아비의 원당(願堂)을 위하여 향화선(香火船)을 얻기를 청하자 조정에서 허락하였습니다. 이 밖에 또 언만(彦滿)·언삼(彦三)·의성(義成)의 배가 있습니다. 따로 명목을 세워 교묘히 그 수를 늘려서 이제 33척의 많은 수에 이르렀는데, 앞으로 또 의진(義眞)의 배를 허락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배 한 척에 주는 것이 얼마나 되는가?"
하매, 임의백이 아뢰기를,
"한 배에 주는 것은 1천여 동(同) 또는 수백 동이고 다른 물건도 이와 비슷한데 해마다 상례(常例)로 삼으며, 접대와 잔치에 드는 비용도 한정이 없습니다. 영남 한 도는 이 때문에 쇠잔합니다."
하였다. 임의백이 또 아뢰기를,
"평조흥이 관백에게 도주를 참소하기를 ‘조선이 일본을 대우하는 데에 본디 성의와 예의가 없는데 도주가 조선을 위하여 중간에서 주선하고 주는 물건을 사사로이 받았다.’ 하였으므로 관백이 도주에게 이것을 힐문하니, 도주가 ‘강호에서 조선에 아무 일을 직접 청하여 허락하는지 허락하지 않는지를 보면 참언의 허실을 밝힐 수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인(優人)과 마대(馬隊)를 우리 나라에 청하였으나, 그때 최명길(崔鳴吉)이 건의하여 허락하지 않고 다만 수역(首譯) 홍희남(洪喜男)을 강호에 보냈습니다. 관백이 갖가지로 공갈하고 협박하였는데, 홍희남이 끝내 굴복하지 않고 매우 힘써 도주를 변명해 주고 또 평조흥의 아비가 벼슬을 받은 정상을 지척하였습니다. 평조흥은 이 때문에 죄받아 지방에 귀양가고 그 배는 도주에게 옮겨 주었는데, 이번에 또 원가강의 원당을 섬 안에 설치하고 향화선을 얻기를 청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그가 굳이 청하더라도 우리가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으면 그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또 아뢰기를,
"마도는 왜국의 관방(關防)인 요충지이고 동래는 그와 서로 마주하여 산천 초목을 똑똑히 볼 수 있으므로 방비하는 방책을 허술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동래부의 속오(束伍)는 겨우 4백 명을 채울 뿐이고 사변이 있으면 경주 진관(慶州鎭管)에서 징발하여 가도록 당초에 제도를 세운 것을 알 수 없습니다. 또, 해진(海鎭)의 변장(邊將)은 녹봉을 받을 길이 없으므로 군사를 줄여 베를 거두어서 자급하는데, 이것은 변장의 죄가 아닙니다. 해변에 사는 자를 토병(土兵)에 원정(元定)하고 베를 거두어 주면 편리할 듯합니다. 또, 봉수(烽燧)·후망(候望)의 일은 전에 이미 계문하였거니와, 동래는 만해(蠻海) 가에 있는 땅끝이어서 왜선이 나오는 것을 미리 알 길이 없으므로 본부와 수영(水營)에 각각 후망하는 곳을 두고 또 항해하면서 변방의 사변에 대비하는 것이 고사(故事)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폐지하여 행하지 않으므로 왜선이 갑자기 오면 부사(府使)가 미처 치계(馳啓)하지 못하고 수사(水使)가 미처 옷을 입기도 전에 변이 닥칩니다. 지금의 계책으로는 봉수연대(烽燧烟臺)에 따로 후망하는 군사를 두고 배 한 척을 보면 포 한 방을 쏘게 하여 열 방이 넘으면 적선이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변경(邊警)을 알리는 규례이니, 이것으로 정식을 삼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또 동래와 양산(梁山) 사이에 험조(險阻)한 곳이 있으니, 산성(山城)을 쌓고 군향(軍餉)을 저축해야 하겠으며 부사가 방어사(防禦使)를 겸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본이 우리와 수호(修好)하였더라도 실은 믿을 수 없다. 임진란 이후에는 변방의 방비를 수칙(修飭)하는 일이 하나도 없었으니, 우리 나라가 게을리하는 것이 심하다 하겠다. 이제 네 말을 듣고 보니 의견이 없지 않다. 우리 나라에서 배를 주는 수와 배마다 주는 물건을 낱낱이 열거해 적고 또 네 소견을 진술하여 들이라. 쓰고 안 쓰는 것은 국가에 달려 있으니, 너는 물러가서 상세히 써서 아뢰도록 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
○上召見前東萊府使任義伯問曰: "爾久在東萊, 日本事情, 以見聞達之可矣。" 義伯曰: "臣在東萊時, 聞日本人民極盛, 生理極難, 自相屠戮, 强呑弱肉。 源哥康欲鎭服深處之倭, 移居江戶, 江戶, 倭京之間, 道里遙遠。 而人居稠密, 烟火相望, 閭閻之盛, 若我國鍾街, 軍兵之多, 近古所無。 自南朝信使, 相通商舡, 連續來泊於倭京。 頃者南朝, 請兵於倭國, 倭人以爲: ‘朝鮮則交隣分厚, 有急可救, 而南朝, 則曾無相通之義, 不可救也。 南朝之使, 痛哭不去, 仍死於倭國。 近來其議稍變, 或有欲救之議云。 且倭人每言, 南朝勢盛。 淸國殘敗, 似是南朝誇張之言也。 且倭京則人心不至甚惡, 而馬島之人, 其惡尤甚, 島主昏劣, 將欲傳位於其子矣。" 又曰: "源家之伐秀吉也, 首數弑君之罪, 次數濫殺鮮人之罪, 其子孫, 豈反其祖訓。 源 家之久在於其國, 實我國之利也。" 上曰: "前聞其國, 有平哥養子云, 其人尙存, 且有氣勢乎?" 義伯曰: "其人尙存, 心懷怨毒, 而關白親族, 皆執國政, 似無他虞矣。" 義伯又曰: "壬辰講好之後, 島主以江戶送使, 有弊於我國, 言于關白, 而自島中, 假銜送使, 所謂第一舡者是也。 其後平朝信, 以和好爲己功, 故自我國, 授官而給舡, 或稱歲遣, 或稱特送, 名號多端, 所給漸增。 朝信死後, 平朝興代受其舡。 朝興又爲其父願堂, 請得香火舡, 而朝廷許之。 此外又有彦滿、彦三、義成之舡, 別立名目, 巧增其數, 今至三十三隻之多。 而前頭又將許義眞舡矣。" 上曰: "其舡一隻所給, 幾何?" 義伯曰: "一舡所給, 或千餘同, 或數百同, 他物稱是, 歲以爲常, 接待供晏之需, 所費無限, 嶺南一道, 由此凋殘矣。" 義伯又曰: "平朝興讒島主於關白曰: ‘朝鮮之待日本, 本無誠禮, 而島主爲朝鮮, 周旋於中間, 而私受其贈。’ 關白以此詰問島主, 島主以爲: 若自江戶, 直請某事於朝鮮, 見其從與不從, 則可證讒言之虛實。 仍請優人及馬隊於我國, 其時崔鳴吉, 建議不許, 只送首譯洪喜男於江戶。 關白恐脅百端, 喜男終不屈, 伸辨島主甚力, 又斥朝興之父受官之狀, 朝興由是被罪, 謫於外, 其舡則移給島主, 今者又設源哥康願堂於島中, 而求得香火舡。 臣之妄料, 則渠雖固請, 我若牢執不許, 則彼亦末如之何矣。 又曰: "馬島, 倭國之關防要害, 東萊與之相對, 山川草木, 瞭然可見, 備禦之策, 不可踈虞, 而萊府束伍, 僅滿四百, 脫有事變, 調赴慶州鎭管, 當初立制, 未可知也。 且海鎭邊將, 無可食之路, 故減軍收布以自給, 此非邊將之罪也。 若令居邊者, 元定土兵, 收布以給, 則似爲便好矣。 且烽燧候望之事, 曾已啓聞, 東萊濱於蠻海地盡頭, 倭舡之出, 無預知之路, 本府及水營, 各有候望之處, 且航海待邊, 乃是故事, 而今則廢閣不行。 倭舡奄至, 則府使未及馳啓, 水使未及着衣, 而變已及矣。 爲今之計, 宜於烽燧烟臺, 別置候望之軍, 見一舡而放一炮, 若過十放, 則可知賊舡之來矣。 此是報邊警之規, 以此定式宜矣。 又於東萊、梁山之境, 有險阻處, 宜築山城, 蓄積軍餉, 而以府使兼防禦使則好矣。" 上曰: "日本雖與我修好, 其實不可信也。 壬辰之後, 一無修飭邊備之擧, 我國恬憘, 可謂甚矣。 今聞爾言, 不無意見。 我國給船之數及每船所給之物, 一一列錄, 且陳爾所見而入之。 用與不用, 在於國家, 爾其退而詳書以啓可矣。"
-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2면
- 【분류】왕실-국왕(國王) / 군사-군정(軍政) / 외교-왜(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