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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12권, 효종 5년 6월 3일 신유 2번째기사 1654년 청 순치(順治) 11년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재이에 대하여 의논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재이(災異)가 이와 같으니 앞으로 어떻게 하여야 그치겠는가?"

하니,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영남의 냇물이 붉어진 일과 관서(關西)의 우박과 북로(北路)의 눈이 모두 지극히 놀랍습니다. 신들이 차지해서는 안 될 지위를 더럽힌 소치가 아닌 것이 없기에 더욱 걱정되고 두렵습니다."

하고, 부제학 홍명하(洪命夏)가 아뢰기를,

"성덕(聖德)이 지극하기는 하지만 반성하여 찾아보면 어찌 잘못이 없겠습니까. 기뻐하고 성내실 때에 절도에 맞지 않는 일이 많은데, 재이를 그치게 하는 방법은 실덕(實德)을 힘쓰는 데에 달렸을 뿐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경의 말이 이와 같으니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병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유신(儒臣)이 진언(進言)할 때 꼭 성의(誠意) 정심(正心)을 말하지만 사무(事務)에 있어서는 착실한 공(功)이 없으니 우활(迂濶)하다고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성의 정심을 제대로만 하면 일마다 모두 알맞게 될 것이니, 성의 정심은 근본이고 사공(事功)은 말(末)이다. 근본을 다스리면 말도 다스려지는 법인데, 근본과 말 어느 한 가지도 폐할 수 없다."

하였다. 대사헌 심지원(沈之源)이 아뢰기를,

"지금 지리하게 장맛비가 내리자 특별히 탄신 하례를 취소하였고 남쪽 백성들이 굶주리자 즉시 구제하는 은전을 베풀었으니, 성덕(聖德)이 지극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 다만 귀에 거슬리는 말은 때때로 듣기 싫어하시기도 합니다. 지난번 윤득열(尹得說)의 말은 곧 예(例)에 따라 아뢴 것인데, 상의 노여움이 갑자기 폭발하여 지나치게 무거운 벌을 주었으므로 물의(物議)가 모두 성명(聖明)의 잘못된 거조(擧措)라고들 합니다."

하고, 명하가 아뢰기를,

"이상진(李尙眞)의 말은 이미 여유있게 수용하셨으면서 유독 윤득열만 죄를 주시니, 신은 성냄에 잘못이 있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득열의 계사(啓辭) 말단에 있는 ‘공론(公論)을 기다려 처치하소서.’라는 등의 말은 마치 임금을 규제하여 한 마디 말도 내지 못하도록 하는 것과 같음이 있었으니, 이는 지극히 해괴하다."

하였다. 명하가 아뢰기를,

"말단에서 한 말도 실상 예에 따라 한 것인데, 근시(近侍)의 신하를 수갑을 채워 가두기까지 하였으니, 예로부터 이와 같은 조치는 있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승지를 돌아보고 이르기를,

"득열이 당초에는 함부로 행동한 잘못이 있었으나 이미 벌을 주었으니 석방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정유성(鄭維城)이 아뢰기를,

"재이를 만나 수성(修省)함에는 검소함을 숭상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신이 본조에서 지난번 화공(畵工)을 점검하여 보니 모두 내사(內司)에 들어갔다 합니다. 혹 새로 짓는 전각(殿閣)에 단청하는 일이 있어서입니까? 또한 짜낸 비단의 품질이 거칠다는 죄로 상의원(尙衣院)의 능라장(綾羅匠) 2명을 모두 구속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런 재이를 만나 몹시 두려워하는 때에 비단 짜는 일을 중지할 수는 없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화사(畵師)는 병풍의 그림을 그리는 일로 지금 내정(內庭)에 들어왔다. 능라장을 구속한 것은 필시 상의원의 짓일 것이다."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청평위(靑平尉)012) 의 신궁(新宮)이 아직 공사가 끝나지 않았는데 전하 잠저(潛邸)의 본궁(本宮)에 비하여 칸 수가 배나 많습니다. 어찌하여 궁가(宮家)를 이다지 과도하게 만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소문이 잘못된 것이다."

하였다. 김육이 이르기를,

"남별궁(南別宮)은 옛 왕자의 궁입니다. 임진란 뒤에 명(明)나라 장수가 ‘왕자의 저택이 이처럼 굉장하니 그대 나라가 결딴난 것은 당연하다.’ 하였습니다. 이 말을 가지고 보면 중국 공자(公子)의 저택이라도 이처럼 크지는 않은 것입니다."

하고, 유성이 아뢰기를,

"선조조(宣祖朝)에는 부마(駙馬)들 집을 모두 집값을 주고 사영(私營)하도록 하여 국가에 번거롭지 않게 하였다 합니다."

하고, 후원(厚源)이 아뢰기를,

"신이 태조(太祖)가 옹주(翁主)에게 준 집의 문권(文券)을 보니, 겨우 20여 칸이었는데, 그 검소한 덕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71면
  • 【분류】
    과학-천기(天氣)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재정-상공(上供)

  • [註 012]
    청평위(靑平尉) : 효종의 셋째 사위 심익현(沈益顯).

○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上曰: "災異如此, 將何以弭之?" 左議政金堉曰: "嶺南之川赤、關西之雹、北路之雪, 俱極驚駭。 無非臣等忝居匪據之致, 益增憂懼矣。" 副提學洪命夏曰: "聖德雖至, 而反而求之, 則豈無闕失乎? 喜怒之際, 多有不中節之擧, 弭災之道, 在於懋實德而已。" 上曰: "卿言如此, 予當體念。" 兵曹判書元斗杓曰: "儒臣進言, 必曰誠意正心, 而至於事務上, 無着實之功, 可謂迂闊也。" 上曰: "果能誠正, 則事皆得宜。 誠正本也, 事功末也。 其本治, 則末亦治也, 本末不可偏廢。" 大司憲沈之源曰: "今者淫雨成霖, 則特罷賀禮; 南民飢餓, 則卽施賑典, 聖德可謂至矣, 而第逆耳之言, 時或厭聞。 頃日尹得說之言, 乃是循例之啓, 而天怒遽震, 用罰太重, 物議皆以爲聖明之過擧也。" 命夏曰: "李尙眞之言, 旣已優容, 而獨罪尹得說, 臣恐有失於忿懥上矣。" 上曰: "得說啓辭末端, 待公論處置等語, 有若箝制人君, 使不得出一言, 此極駭異也。" 命夏曰: "末端措語, 實是循例, 而近侍之臣, 至於械杻以囚, 自古未有如此擧措也。" 上顧謂承旨曰: "得說當初, 雖有妄作之失, 而旣已施罰, 釋之可也。" 禮曹判書鄭維城曰: "遇災修省, 莫如尙儉, 而臣曹頃日點閱畫工, 則皆入內司云。 無乃新搆殿閣, 有丹雘之役耶? 且尙衣院綾羅匠三名, 以織錦品粗之罪, 命皆囚禁云。 當此遇災恐懼之日, 織錦之役, 未可停罷耶?" 上曰: "畫師以屛障圖畫之事, 方入內庭, 而至於囚禁綾羅匠, 必是尙衣院所爲也。" 曰: "靑平尉新宮, 尙未訖功, 而比殿下潛邸本宮, 間架倍多, 是何治宮家過度也?" 上曰: "此傳者之誤也。" 曰: "南別宮, 古之王子宮也。 壬辰亂後, 將言: ‘王子第宅, 如是宏大, 爾國宜其板蕩也。’ 以此見之, 則雖中朝公子之第宅, 不如是之大也。" 維城曰: "宣祖朝駙馬之家, 皆給價, 使私營之, 不煩於國家云矣。" 厚源曰: "臣得見太祖之給翁主家舍文券, 則僅二十餘間, 其儉德可想矣。"


  • 【태백산사고본】 12책 12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71면
  • 【분류】
    과학-천기(天氣) / 정론-정론(政論) / 사법-탄핵(彈劾) / 왕실-종친(宗親) / 재정-상공(上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