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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10권, 효종 4년 3월 4일 경오 4번째기사 1653년 청 순치(順治) 10년

옥당이 올린 진강·동전 유통·대동법 시행 등에 대한 차자

옥당이 상차하기를,

"국가의 형세가 날로 위태로워지고 하늘의 노여움이 날로 극심해져 가뭄이 들지 않는 해가 없고 재변이 없는 달이 없습니다. 정월에 지진(地震)이 발생한 변이와 음산한 무지개가 해를 가로지른 변괴가 발생했는데, 이는 실로 전고에도 드문 일입니다. 하늘이 경계를 보인 것이 이와 같이 엄하니, 힘써 실덕(實德)을 연마하여 변이를 해소시킬 방법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옛말에 이르기를 ‘하늘에 응답하는 것은 실답게 해야 하고 겉치레로 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신들이 실답게 한다[實]는 한 글자를 가지고 전하에게 말씀드겠습니다.

전하께서 날마다 경연을 여시니 학문에 부지런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만, 글을 보고 강독할 때 장구(章句)를 어기지 않는 것에 불과할 뿐 덕을 증진시키고 정치에 적용하는 실상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모두가 신들이 경서를 인용하고 뜻을 진달하여 성학(聖學)을 잘 돕지 못한 소치로서 진실로 성궁(聖躬)의 탓으로 돌릴 수 없는 것입니다. 돌아보건대 신들과 같은 사람을 관직에 앉혀 숫자만 채우게 한 결과 성심껏 널리 구하여 자문(咨問)에 대비하지 못하게끔 되었으니, 이것이 학문을 강하면서도 실효가 없게 된 이유인 것입니다.

전하께서 처음 정사를 하실 적에는 지성으로 어진이를 구하고 유일(遺逸)로서 청명(淸名)이 있는 선비들을 불러들여 조정에 포열(布列)시켰으므로 치화(治化)의 융성함을 기대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점진적으로 일을 진행하지 않고 완급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였으므로, 안으로는 의견을 달리하는 흔단이 야기되었고 밖으로는 공갈을 동반한 힐책이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창황스럽고 전도된 가운데 서로 잇따라 물러갔는데, 전하께서도 놀랍고 걱정스러운 나머지 스스로 저상되어 다시 거두어 수용하지 못한 채 까맣게 잊어버린 지경에 버려두었으니, 누군들 처음을 계승하지 못한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조정의 신하 가운데 정직하고 미더운 신하가 진언했다가 죄를 입었는데 1년이 지나도 다시 서용하지 않고 있으니, 이것은 전하께서 어진이를 좋아하는 실상이 없는 것입니다.

전하께서는 즉위하신 처음에 백성들의 고통을 부지런히 돌보시어 폐단에 대해 널리 물었으므로 덕음(德音)이 미칠 때마다 중외(中外)의 사람이 환희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국 변통시키는 거조가 없었던 탓으로 도리어 백성들이 실망하게 되었으니,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전화(錢貨)를 통행시키는 것이야말로 재화를 넉넉하게 하기 위한 방도이니, 만일 사방에 잘 유포하여 온 나라가 힘입을 수 있게끔 한다면 어찌 이 백성들의 큰 행복이 아닐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우리 나라는 본디 구리[銅]가 나는 산이 없어서 오로지 해외(海外)의 공봉(貢奉)에만 의존하고 있으니, 돈을 주조하여 통행시키는 것이 진실로 쉽지 않습니다. 기필코 통행시키려고 한다면 반드시 돈을 일단 많이 주조한 다음 점진적으로 유통시킴으로써 백성들로 하여금 그것이 이롭고 해가 없다는 것을 조금 알게 한 연후에야 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혹 급박하게 독촉하여 신뢰감을 갖기도 전에 강요한다면 아마도 재화가 넉넉해지기도 전에 백성이 먼저 고달프게 될 것입니다.

호서(湖西)의 대동(大同)은 선정(善政) 가운데 가장 큰 것인데, 방책을 익히 강구하지 않은 탓으로 앞으로 계속해 나가기 어려운 걱정이 있게 되었습니다. 거칠고 짧은 면포(綿布)를 쓰지 말게 한 것은 바로 폐단을 바로잡으려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경솔하게 법령을 반포하여 어리석은 백성들이 법을 하찮게 여기게 하는 습관만 조장시켰으니, 이것은 모두 전하의 정령이 실답지 못했던 결과입니다.

전하께서 쌓여온 폐단을 개혁하여 거꾸로 매달린 것과 같은 급박함을 구제하려 한다면, 반드시 널리 순방(詢訪)하여 시비를 잘 조정시킨 뒤에야 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묘당에 있는 신하들 또한 각기 몸소 담당하고 나서서 마음을 비우고 익히 강론하여 합당하게 되도록 힘을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의견이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고 하여 물러가 앉아서 방관만 한다면 되겠습니까. 이 또한 전하께서 책려(策勵)해야 할 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이 몇가지 일에 대해 더욱 유념하소서."

하였다. 이때 재이(災異)가 잇따라 나타나서 상하가 걱정하고 두려워하고 있는데도 언지(言地)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진계(進戒)하는 이가 하나도 없자, 상이 드디어 말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양사(兩司)를 지척하였기 때문에 옥당이 이 차자를 올린 것이다. 상이 답하기를,

"걱정하고 있는 즈음에 충직한 말이 경연에서 나왔으므로 기쁨을 가누지 못하겠다. 강학(講學)을 실답게 하지 못한 것이 어찌 그대들의 죄이겠는가. 처음을 계속해 가지 못한다는 탄식은 나도 스스로 알고 있는 바이다. 사람을 서용하는 것과 정령을 반포한 것이 실답지 못하다는 말은 모두 경계하여 살피도록 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2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금융-화폐(貨幣)

○玉堂上箚曰:

國勢日危, 天怒日甚, 無年不旱, 靡月無災。 元月地震之異、陰虹貫日之變, 此實前古所罕有者。 天之示警, 如此其嚴, 則其可不務修實德, 思所以消弭哉? 古語曰: "應天以實, 不以文。" 臣等請以實之一字, 爲殿下獻焉。 殿下日開經筵, 非不勤學, 而不過臨文講讀, 不失章句而已, 其於進德出治之實蔑如焉。 此無非臣等未能引經陳義, 裨補聖學之致, 固不可歸之於聖躬, 而顧使如臣等, 備位而充數, 不能誠心求訪, 以備咨詢, 此講學之無其實也。 殿下初政, 至誠求賢, 延召遺逸淸名之士, 布列朝端, 治化之隆, 庶幾可待, 而作事無漸, 緩急失宜, 內起携貳之釁, 外致恐喝之問, 蒼黃顚倒, 相繼退去, 殿下亦驚憂自沮, 不復收攬, 置之相忘之域, 孰不曰不承權輿也? 且如朝中直諒之臣, 進言而被罪, 經年不復, 此殿下好賢之無實也。 殿下於卽位之初, 勤恤民隱, 訪問弊瘼, 德音所曁, 中外歡忻, 而終無變通之擧, 反失民望, 豈不惜哉? 且錢貨之行, 乃裕財之道, 若能流布四方, 擧國賴之, 豈非斯民之大幸乎? 但我國本無出銅之山, 專仰海外之貢, 鑄錢通行, 固未易矣。 必欲行之, 必須鑄之旣多, 行之有漸, 使民稍知其利而無其害, 然後可行也。 其或督責急迫, 强之於未信之前, 則恐財未裕, 而民先困也。 湖西大同, 善政之大者, 而講之未熟, 前頭有難繼之憂。 綿布之麤短者, 勿令行用, 乃矯弊之意也, 而率爾出令, 長愚民玩法之習, 此皆殿下政令之無實也。 殿下如欲革流來之弊, 救倒懸之急, 必廣詢博訪, 是非相濟而後行之。 至於在廟堂者, 亦各以身擔當, 虛心熟講, 要歸其當可也。 若以爲, 議不己出, 却坐傍觀, 其可乎哉? 此亦殿下策勵處也。 伏願殿下, 於此數者, 加之意焉。

時, 災異疊見, 上下憂懼, 而在言地者, 無一人進戒, 上遂以不言, 斥兩司, 故玉堂有是箚。 上答曰: "憂虞之際, 忠讜之言出於經幄, 不勝嘉悅。 講學之無實, 豈爾等之罪也? 不承權輿之歎, 亦所自知也。 用人與政令無實之言, 皆當警省焉。"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20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과학-천기(天氣) / 왕실-경연(經筵) / 인사-관리(管理) / 금융-화폐(貨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