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영의정 이경석이 전지에 응해 올린 인사·형벌·붕당 등에 대한 상소
전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전지(傳旨)에 응하여 상차하기를,
"신이 지난번 입대(入對)한 뒤에 어리석은 잘못을 범한 것을 돌이켜 반성해 보니 송구스러움을 견딜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구구한 충성을 바치고 싶어하는 뜻은 아홉 번을 죽더라도 후회가 없을 터인데, 더구나 이제 명까지 받았으니 감히 전의 이야기를 부연하여 진달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옥으로 만든 술잔이 신분에 맞지 않으면 그것이 보배이기는 하지만 쓸 데가 없는 것처럼 말을 함에 있어 성실하지 않으면 일에 무슨 유익함이 있겠습니까. 신은 삼가 생각건대, 지금 재이(災異)를 없애고 화평을 이루는 방법은 아마도 전의 잘못을 고치고 전의 습관을 바꾸고 묵은 폐단을 개혁시켜 한 시대의 이목을 혁신시키는 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나 천하의 수많은 일은 큰 근본이 있는 것인데 근본이 확립되지 않으면 그 수많은 일들을 어떻게 해 나갈 수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큰 근본이라고 하는 것은 전하의 한 마음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타고나신 자품이 명달(明達)하고 한없이 넓고 큰 도량을 지니셨으므로 즉위하신 이래 큰 과실이 전혀 없었으며, 성색과 화리(貨利) 등 화란(禍亂)을 초래할 수 있는 요인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선왕께서 부탁하신 현명함과 전하께서 계술(繼述)하신 선의(善意)가 진실로 둘 다 지극하고도 진미(盡美)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공효가 드러나지 않은 채 속습이 점점 투박해져 백성들의 원망이 날로 불어나고 하늘의 원망이 더욱 극심하여지고 있으니, 이것은 또한 모두 아랫사람이 잘 도와서 봉행하지 못한 탓으로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전하께서 자신의 몸에 돌이켜 반성해 보신다면 큰 근본에 대해 과연 그것을 먼저 확립시켜 그 방법을 극진히 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만일 극진히 하지 못한 점이 있다면 이것이 오늘날 마땅히 힘을 기울여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왕자의 학문은 본디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만 마음의 공부에는 처음부터 두 가지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옛날의 임금들이 심술(心術)을 바룸에 있어 엄공(嚴恭)과 인외(寅畏)를 급선무로 삼지 않은 사람이 없는데, 곧 전하께서 바야흐로 스스로 연마하고 있는 것이 이것입니다. 한결같이 이를 독실히 하여 조금도 간단(間斷)이 없게 하신다면, 《서경》에 이른바 ‘진실로 중도(中道)에 의거하여 실행하라.’ 한 것과, 《대학》에 이른바 ‘성의(誠意)·정심(正心)’과 《중용》에 이른바 ‘중화(中和)를 이룬다.’는 경지를 모두 이를 통하여 나아가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마음을 함양하는 공부가 익숙한 연후에야 가슴속에 보존된 것이 천리와 한 덩어리가 되어 깊고 두터워져서 우뚝하게 정당하여 치우치게 되는 걱정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밖으로 발현되는 것도 사물에 따라 각기 알맞게 되어 절로 도리에 합당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이 어찌 급박하게 구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겠으며, 또한 어떻게 한번 발돋움한다고 해서 곧 도달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항상 힘써 노력하여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야 아무도 보고 듣는 이가 없는 곳에서도 두려워하고 삼가며, 잠시 잠깐 사이에도 보존하고 성찰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는 사물을 대할 적마다 본심이 힘차게 약동하여 마치 샘물이 쉬지 않고 흐르고 천운(天運)이 끝이 없는 것과 같이 되는 것인데, 요(堯)·순(舜)·우(禹)··탕(湯) 문(文)·무(武)가 천하를 다스리던 방법도 모두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신이 지상(紙上)에다 말한 것으로 비슷한 경개(梗槪)를 대략 보인 것일 뿐 감히 도를 알았다고야 할 수 있겠습니까. 전하의 성명(聖明)하심으로 잘 유념하시어 뜻을 다지신다면 그 진취되는 조예(造詣)는 신처럼 우매한 사람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니, 어찌 종사의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습니까.
전하께선 이미 더욱 허물을 살피시어 하늘의 견책에 답할 마음을 지니고 계시니 큰 과오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로 말해야 할 만한 것이 있다면 어떻게 감히 지나간 일이라고 해서 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눈앞에 보이는 것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대저 황천(皇天)은 전하께서 두려워하고 계시고 전하는 신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으니, 전하는 곧 신민들의 하늘인 것입니다. 하늘의 하늘을 가지고 신민들의 하늘에 비유해도 괜찮겠습니까. 하늘이 우양(雨暘)·한욱(寒燠)·풍뢰(風雷)·상설(霜雪)을 각각 그 시기에 따라 내린 연후에야 온갖 품물(品物)이 모두 형통되어 민생이 편안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여 비가 내려야 하는데도 비가 내리지 않고 비가 내려서는 안 되는데 비가 내리거나, 추워야 하는데도 춥지 않고 춥지 않아야 하는데 춥거나, 바람과 천둥이 제때에 있지 않거나, 서리와 눈이 계절을 어기고 내리거나 한다면, 품물(品物)이 어떻게 살 수 있겠으며 사람이 어떻게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금년에 하늘이 내린 재앙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전하께서 두려워하시는 것이 또 이와 같습니다.
이것을 가지고 생각해 본다면 임금의 위노(威怒)는 천둥 벽력 같을 뿐만이 아니고, 베거나 귀양보내는 형벌은 서리와 눈 같을 뿐만이 아닙니다. 그런데 전하께서 성기(聲氣)를 사납게 하여 책벌(責罰)을 가함에 있어 노해서는 안 되는데 노하고, 가두어서는 안 되는데 가두고, 귀양보낼 필요가 없는데 귀양보내고, 벨 필요가 없는데 벤다면, 신서(臣庶)가 된 입장에서 얼마나 경계하고 두려워하겠습니까. 어찌하여 기상(氣象)의 수참(愁慘)이 다시 이와 같이 되었단 말입니까.
한 가지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헌부는 법을 집행하는 관서인데 추감(推勘)함에 있어 오직 법만을 따르면서 사죄(私罪)로 결단하지 않을 경우, 헌부는 모두 그로 인해 벌을 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비록 공죄(公罪)에 관계되는 것일지라도 반드시 사죄에 해당시키고, 추문을 받는 사람도 사죄로 결단해 주기를 요구하기도 하는데, 이는 죄가 중하면 혹 가볍게 해주는 수가 있지만 가벼우면 반드시 중하게 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하여 공사(公私)와 경중을 율법에 의거하여 정하는 경우가 적게 되고 법도 이 때문에 공평성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가 큰 사람이 공명을 얻게 된다는 것이 불행하게도 근사하게 되고 만 실정입니다. 더구나 살육하는 형벌은 부득이하게 시행해야 하는 것인데, 율법에 있어 죽여서는 안 되는데도 죽이거나 시기가 형을 집행하는 데 해당되지 않는데도 형을 집행하는 것은 자못 경신(敬愼)하는 도리가 아닌 것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천성적으로 살리기를 좋아하는 인덕(仁德)을 타고 나셨습니다. 그래서 근일 옥사를 다스릴 즈음에 죄수를 위해서 살릴 길을 찾아 주려 한 것이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지난달 한 정배(定配)될 죄인이 있었는데, 그 자신 형벌을 요구한 것을 인하여 율법 밖의 법을 적용하였습니다. 이것이 한때 악을 징계하기 위한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만일 근일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의(異議)가 제기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등등의 형벌은 그 또한 중도에 맞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리고 성심(聖心)에도 반드시 뉘우치고 계실 것입니다.
신이 삼가 세종조(世宗朝)의 하교를 살펴본 적이 있는데, 거기에 이르기를 ‘형벌은 정치를 돕기 위한 것이고 율법은 형벌을 결단하는 것으로서 이는 고금의 상법(常法)이다. 그러나 율문(律文)에 기재된 것은 한정이 있고 사람의 범죄는 끝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형서(刑書)에 율문은 있으나 정조(正條)가 없으면 비슷한 것을 인용하여 비부(比附)시키게 하라는 글이 있게 된 이유인 것이다. 대저 형벌은 진실로 성현이 삼가는 것이니, 상하가 비부함에 있어 털끝만한 차이에 대해서도 더욱 돌보아 유념해야 된다. 그런데 지금의 법리(法吏)들은 비부할 즈음에 대부분 무거운 법을 따르고 있어 내가 매우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죄가 중하게 하기에도 의심스럽고 가볍게 하기에도 의심스러워 그 정리(情理)가 서로 대등한 경우에는 당연히 가벼운 법전을 따라야 되는 것이고, 정리가 무거운 쪽에 가까우면 법에 합치되게 하도록 힘써야 되는 것이다. 《서경》에 이르기를 「삼가고 삼가서 오직 형벌을 신중히 할지어다.」 했는데, 내가 늘 가슴속에 새기고 있다. 또 《서경》에 이르기를 「그대를 경유하는 옥사(獄事)를 삼가서 우리 나라를 흥왕하게 하라.」 했으니, 유사(有司)는 유념하라. 그대 형조는 이를 중외에 널리 효유하게 하라.’ 하였습니다. 이런 간절한 하교를 전후 비일 비재하게 내렸는데, 전하의 마음인들 어찌 이와 같지 않으시겠습니까.
형벌을 신중히 하라는 하교는 동일하지만 율법에 따라 결단하지 않으면 중도에 지나치는 일이 없을 수 없습니다. 유찬(流竄)시키는 것이야말로 순(舜)임금의 조정에서 사흉(四凶)을 죄준 것입니다. 만일 범죄 사실이 유찬시킬 만해서 유찬시킨다면 사람들이 모두 열복할 것이니, 누가 감히 원망하겠습니까. 하옥시켜 다스리는 벌이 유찬에 견주어 보면 가볍지만, 오라를 지워 감옥에 가두는 것은 명기(名器)를 더럽히는 것입니다. 땅에 선을 그어놓고 감옥이라고 해도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비통한 이야기인 것입니다. 가령 가둘 만해서 가둔다면 또한 어떻게 감히 이의를 제기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간혹 의당 가볍게 해야 되는데도 유찬시키는 경우도 있고, 죄가 중하지 않은데도 옥에 가두는 경우도 있고, 또한 일이 지난간 뒤에도 노여움이 격발하여 죄를 가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것은 모두 올바르게 하지 못한 것들입니다. 사대부들이 이 때문에 애석해 하고 길가는 사람들도 이 때문에 탄식하고 있는데, 다행히 머지 않아 회복된다 하더라도 화기를 손상시키는 것이 많습니다.
《주역》 복괘(復卦)의 육삼효(六三爻)에 이르기를 ‘자주 회복되는 것이 위태롭기는 하지만 허물은 없으리라.’ 했는데, 정전(程傳)에 말하기를 ‘회복하는 것은 안고(安固)를 귀히 여기는 것인데, 자주 회복하고 자주 잃는 것은 회복하는 것이 안고하지 못한 것이다. 선으로 회복되었다가 누차 잃는 것은 위태로운 도(道)이다. 성인(聖人)이 선으로 옮겨 가는 길을 열어 회복하는 것 자체는 인정해 주면서도 누차 잃는 것을 위태롭게 여겼기 때문에, 위태롭지만 허물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자주 잃는다는 이유로 회복하는 것을 막아서는 안 된다. 자주 잃는 것은 위태로움이 되지만 자주 회복하는 것이야 무슨 허물이 되겠는가. 허물은 잃는 데에 있는 것이지 회복하는 데 있는 것은 아니다.’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형벌을 적용함에 있어 처음에는 잘못하였더라도 곧바로 고친다면 허물이 없기는 하지만 누차 잃으면 위태로운 도리가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면 노여움을 다스릴 수 있다.’고 했으니, 자신의 사심을 극복하는 공부를 감히 소홀히 할 수 있겠습니까. 아, 곁에 강인한 보필자가 없으면 필사(匹士)도 오히려 걱정을 하는 법인데, 어진 사람이 있지 않고서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오직 어진 사람을 보필자로 삼아 모두 충간(忠諫)을 힘쓰도록 해야 될 것입니다. ‘나의 잘못을 그대가 보필해야 하는 것이니, 그대는 면전에서는 나의 말을 따르다가 물러가서 뒷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은 순임금이 우(禹)임금을 책한 것이 아니었습니까. 고종(高宗)이 부열(傅說)에게 명하기를 ‘아침 저녁으로 선언(善言)을 진달하여 나의 덕을 보필하도록 하라.’ 하였고, 부열이 고종에게 아뢴 것도 또한 ‘나무는 먹줄을 따르면 똑바르게 되고 임금은 간언을 따르면 성스러워지는 것입니다.’ 했습니다. 이윤(伊尹)이 태갑(太甲)을 훈계할 적에 탄식하면서 고한 것도 간언을 어기지 말고 따르라는 것이었습니다. 태갑하편(太甲下篇)에서 또 말하기를 ‘간언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리거든 반드시 도리에 반성하여 찾아보고, 진언이 임금의 마음에 거슬리지 않거든 반드시 올바른 도리가 아닌가 하고 반성하여 찾아보아 야 합니다.’ 하였습니다. 당우(唐虞) 삼대(三代) 때 상하가 서로 면려한 것은 오직 자신의 잘못을 보필하고 진언을 받아들이고 간언을 따를 것을 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뒤로 후세에 태평한 정치를 한 세상이라고 호칭된 경우에는 그 임금이 반드시 간언을 잘 따랐고 그 신하들도 반드시 직간을 잘 했었습니다. 한 문제(漢文帝)와 당 태종(唐太宗)의 일에서도 이를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안으로는 법가(法家)와 필사(拂士)가 없고 밖으로는 적국(敵國)과 외환(外患)이 없으면 나라가 항상 망하는 법이다.’ 했는데, 이는 천자와 제후의 존망도 쟁신(爭臣)의 다소(多少)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필사와 쟁신이 국가에 있어 그 비중이 이와 같은 것이니, 이것이 오늘날 거울로 삼아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위징(魏徵)이 말하기를 ‘태종(太宗)의 정치가 정관(貞觀)005) 의 처음만 못하다.’고 하자, 태종이 그 이유를 물으니, 대답하기를 ‘정관 초기에는 사람이 간언을 올리지 않을까봐 걱정하여 항상 유도하여 말을 하게 했고, 중간에는 기뻐하여 따랐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서 억지로 따르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렵게 여기는 기색이 있으니, 이것이 다른 이유인 것입니다.’ 했습니다. 태종이 그 일이 무엇이냐고 묻자,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전에 원율사(元律師)를 죽이려고 할 적에 손복가(孫伏伽)가 말하기를 「법으로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고 하니, 폐하께서 난릉 공주(蘭陵公主)의 원유(園囿)를 하사했는데 그 값이 백만금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이 상을 준 것이 너무 많다고 하자, 폐하께서 말하기를 「짐이 즉위한 이래 간언을 진달하는 자가 있지 않았기 때문에 상을 준 것이다.」 했으니, 이는 유도하여 말을 하게 한 것입니다. 사호(司戶) 유웅(柳雄)이 망령되이 관자(官資)에 대해 호소하자 폐하께서 베려고 하였습니다만, 대주(戴胄)의 간언을 받아들여 중지했으니, 이는 기뻐하여 따른 것입니다. 근래 황보 덕삼(皇甫德參)이 소장을 올려 낙양궁(洛陽宮)을 수치(修治)하는 것을 간하자 폐하께서는 노하였습니다. 비록 신의 말로 인해서 혁파하긴 했습니다만 이는 억지로 따른 것입니다.’ 하였는데, 태종이 말하기를 ‘공이 아니면 이런 것을 언급할 수 없다. 사람은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것이 고통스러울 뿐이다.’ 했습니다. 태종이 가뭄을 인하여 조서(詔書)를 내려 5품 이상의 관원들에게 봉사(封事)를 올리게 하자, 위징(魏徵)이 상소하기를 ‘폐하의 의지와 업적이 정관(貞觀) 초년에 견주어 점차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이 모두 10개 조항입니다.’ 했는데, 태종이 크게 포장(褒奬)하고 상을 내렸습니다.
대저 억지로 따르는 것도 전만 못하다고 했는데, 꺼리는 기색을 내보여 천리 밖에서 사람을 막는 경우야 장차 뭐라고 말해야 하겠습니까. 만일 위징으로 하여금 오늘날에 진언하게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없는 조짐에 대해 논열(論列)하게 한다면, 아마도 10개 조항에 그치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것이 전하께서 마땅히 두렵게 여겨 고쳐야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이른바 전의 허물을 고치라고 한 것은 이것입니다.
당 목종(唐穆宗)이 묻기를 ‘개원(開元)006) 연간에 치도(治道)가 융성했던 것은 무엇을 연유해서 그렇게 된 것인가?’ 하니, 재상 최식(崔植)이 대답하기를 ‘현종(玄宗)이 즉위하여 요숭(姚崇)·송경(宋璟)을 얻었는데 이 두 사람이 주야로 부지런히 노력하여 임금을 도(道)의 경지로 올려 놓았습니다. 송경이 언젠가 손수 《상서(尙書)》의 무일편(無逸篇)을 쓰고 그림으로 그려서 진헌하여 황제로 하여금 출입할 적에 살펴보고 스스로 경계하게 하였습니다. 그 뒤 낡아 잘 보이지 않자 그만 산수도(山水圖)로 대신하였는데, 그로부터 점점 정사에 태만하여졌고 좌우에서도 다시 잠규(箴規)를 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간신들이 날로 용사(用事)하게 되어 낭패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예로부터 국가의 치란은 항상 어진 사람을 기용하느냐의 여부와 직언을 아뢰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여기에서 더욱 증험할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잠규(箴規)가 스스로를 경계시키는 데에 관계되는 것이 또한 큰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세종(世宗)께서 변계량(卞季良)에게 이르기를 ‘빈풍(豳風)007) 과 무일편(無逸篇)에 농사짓는 어려움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지만, 본토(本土)의 풍속은 중국과는 다르다. 민간의 생업에 대한 어려움과 요역(徭役)에 대한 고통을 경이 달에 따라 그림으로 그리고 이어 경계(儆戒)하는 말을 지어서 올리라.’ 했는데, 경계하는 말은 방책(方冊)에 기재되어 있습니다만, 특별히 그림을 그리게 한 것은 그 의도가 매우 성대한 것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학연의(大學衍義)》의 숭경외(崇敬畏) 상·하권 가운데에서 초출(抄出)하여 1책으로 만들고 아울러 빈풍과 무일을 함께 써서 어안(御案)에 비치하여 두고 살펴보며 반성하는 데 대비하게 한다면, 시서(詩書)의 훈모(訓謨)와 전기(傳記)의 경계가 한번 책을 열 때 눈앞에 환히 드러나게 되어 공구수성(恐懼修省)하는 도리에 또한 유익함이 많게 될 것입니다.
신이 선조(先朝) 때 재변을 당하여 진언(進言)하면서 감히 《주례(周禮)》의 황정(荒政)에 대한 열두 가지 조항과 유향(劉向)의 《설원(說苑)》의 육사(六邪)·육정(六正) 및 《한서(漢書)》의 자사(刺史)에 대한 여섯 가지 조목의 일에다가 탕(湯) 무(武)의 반명(盤銘)·석명(席銘)까지 아울러 언급하면서 1통을 등서(謄書)하여 한가히 있을 적에 성찰(省察)할 수 있게 할 것을 청했었습니다. 그리고 또 고려(高麗)의 명신(名臣)인 김심언(金審言)·최충(崔冲)이 건백(建白)한 전례에 의거하여 정원으로 하여금 황정과 육정·육사와 자사의 여섯 조항을 정부와 육조에 부송(付送)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속사(屬司)의 벽에다 기록하게 하는 동시에 외방은 팔도의 감사와 양부(兩府)의 유수(留守)에게 두루 유시하여 주현(州縣)의 대청 벽에다 아울러 써서 걸어두게 하여 항상 조심하고 면려하게 하기를 청하여 시행하도록 명한다는 윤허를 받들었습니다. 그리고 어람(御覽)하실 글은 즉시 옥당의 신하로 하여금 1통을 써서 들여오게 했는데, 그뒤 정원이 잘 신칙시키지 못하고 내외의 관사(官司)에서도 잘 수거(修擧)하지 못했던 탓으로 대청 벽에 써서 걸어놓은 데가 매우 적었습니다. 서울이 이와 같았으니 외방은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당시에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구나 세월이 오래된 뒤에야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 한 가지 일을 가지고도 백 가지 일이 퇴폐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 태만으로 인한 폐습이 너무합니다. 이런 습성을 고치지 않으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원은 곧 후설(喉舌)의 자리로서 백사(百司)를 호령하는 직임입니다. 이 때문에 조종조(祖宗朝)에서는 반드시 승지를 구임(久任)시켰고, 동벽 승지(東璧承旨)로서 노고가 가장 현저한 자의 경우에는 바로 아경(亞卿)의 반열로 승진시켰습니다. 선조(先祖) 때에도 경솔히 체직시키지 않아서 오래된 경우는 10여 개월이고 가까워도 6, 7개월을 밑돌지 않았습니다. 이는 그 직임에 오래 있게 되면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전일(專一)해져서 각방(各房)에 분부하는 일을 행했는지의 여부를 역력히 알 수 있는 것은 물론, 팔도 백사(百司)의 태만을 일일이 추책(推責)할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3, 4개월이 되면 반드시 기어이 체직시켜 2, 3개월에도 이르지 못한 경우가 태반입니다.
근년의 일에 대해서는 신이 감히 알 수가 없습니다만, 전일의 일을 가지고 말하여 본다면 오래된 관리가 남아 있지 않아서 구규(舊規)를 알지 못하고 벼슬도 또 자주 바뀌어 전의 일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한번 분부하고 나면 다시 규찰하지 않았으므로 응당 거행해야 될 것도 전혀 모르고 있기가 일쑤이며, 심지어는 승전(承傳)을 받들고도 아득하게 깨닫지 못하고 있는 등 대부분이 그러했습니다. 천위(天威)가 지척인 곳에서도 이런 폐단을 면하지 못했는데, 이런 습관을 고치지 않고서는 정령을 시행할 수가 없습니다.
더욱 한심스러운 것은 《소학》을 권장하여 힘쓰게 하고 풍속을 규정(糾正)하게 한 것이야말로 계하된 일인데도 비국과 예조에서 경외에 재삼 신칙시켜 반복했으나 외방 수령들이 더욱 만홀히 여기고 있는 점입니다. 궁벽하고 잔폐된 고을로서 인물이 드물고 적은 곳이라면 그래도 핑계댈 수가 있겠습니다만, 웅주(雄州)·대부(大府)로서 스승이 될 만한 자도 있고 배워야 될 사람이 있는데도 또한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난번 위에서 인륜이 밝혀지지 않은 것을 통분스럽게 여겨 특별히 윤음을 내린 뒤에도 마음을 움직이지 않고 있어 어떤 고을도 잘 시행하고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조정의 명령을 무시하고 군상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것은 너무도 경악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습관을 고치지 않는다면 장차 무너진 기강을 진작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조정은 사방에서 본받는 것이고 명관(名官)은 백료(百僚)들이 공경하는 바입니다. 따라서 명관은 스스로 삼가고 단속하여 뛰어난 식견이 볼 만한 연후에야 조정이 엄숙해지고 백료들이 꺼리는 것이 있게 되는 법입니다. 옛날의 명류(名流)들은 자신을 단속하는 것이 존경할 만했기 때문에 사람들도 공경했는데, 지금의 명류들은 왕왕 방종한 것을 즐기면서 자신을 단속하는 것을 싫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에서 금주(禁酒)시킨 것이 한두 번뿐만이 아닌데도 술 마시는 것을 고아한 풍치로 삼는 사람이 아직도 간혹 있습니다. 대간(臺諫)이 되어서는 삼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다시(茶時)의 회좌(會坐)를 본부(本府)에서 하지 않고 근처에 있는 인가를 취택하여 뜻에 따라 편할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시에 나아가는 것도 매우 늦어서 간혹 먹고 난 뒤에 느릿느릿 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금란(禁亂)은 참람한 짓을 금단하는 것인데, 취득한 금물(禁物)을 혹 종자(從者)에게 주기도 한다고 합니다. 이 말이 사실이라면 기강이 무너진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도 없습니다. 사람의 진퇴와 용사(用捨)는 모두 전조(銓曹)에 달려 있는 것인데, 이런 습관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장차 조정을 바룰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붕당이 국가에 화해(禍害)를 끼치는 것은 임금이 깊이 증오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또한 식견이 있는 사람들도 깊이 근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근래 조정의 의논이 더욱 분열되어 풍색(風色)이 아름답지 못한 탓으로 절통한 성교(聖敎)로 면대(面對)하여 귀엣말을 하듯이 효유하였으니, 만일 조정의 신하들이 조금이라도 의리를 안다면 어떻게 감히 우러러 몸받아 마음을 고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예로부터 임금들이 이를 증오하여 왔습니다만, 갑자기 변별하려고 하다가 보면 주자(朱紫)008) 가 혼란되기 쉬워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틈을 타고 날뛰게 되는 법입니다. 이 때문에 육지(陸贄)가 말하기를 ‘군자는 인재를 아끼는 것으로 마음을 삼고 소인은 선인을 해치는 것으로 이로움을 삼는다. 사랑해서 끌어들이면 편당에 가깝게 되고, 해치며 막으면 공적인 행동처럼 보이는 법이다. 편당에 가깝게 되면 분변해 보지도 않고 갑자기 의심하게 되고, 공적인 행동처럼 보이면 조사해 보지도 않고 먼저 믿게 되는 것이다.’고 했는데, 선유들이 우려한 것이 여기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위에서 공명 정대함으로 임하고 전관(銓官)이 취사를 잘못하지 않아서 충후한 사람을 숭상하여 기용하고 너무 극심한 의논은 배척한다면, 비록 치우친 마음이 있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멋대로 기탄없이 할 수 있겠습니까.
아, 어려서 교양시키는 것이 단정하지 못하면 커갈수록 더욱 경망스러워진다고 했으니, 이는 진실로 천고의 지론(至論)입니다. 어린 사람들이 훌륭한 선비가 되기를 바란다면 어릴 적에 배양하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것은 7년 병에 3년 묵은 쑥을 구하는 것과 같아서 비축해 두지 않으면 끝내 얻을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소학》의 가르침에 대해 비난하고 비웃는 사람이 많은데, 이 말도 오활하게 여겨 반드시 더욱 비웃고 손가락질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비유하자면 의원이 증상에 따라 약을 투여하는 것과 같으니, 경박스런 습성을 다스리려면 이것을 버리고 무엇으로 하겠습니까. 안으로는 예조(禮曹)에서 밖으로는 감사가 거듭거듭 신칙시킨다면 그럭저럭 날짜만 넘기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습니까.
태학(太學)은 많은 선비들이 모여 있는 곳인데, 인재의 배양과 성취는 관직(館職)에 적격자를 얻는 것과 관계가 있습니다. 예전에는 사유(師儒) 이상의 관원은 반드시 가려서 선발했는데,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사성(大司成)은 더욱 누구나 감당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니어서 문행(文行)이 있는 이가 아니면 참여할 수가 없었으며, 또한 직임을 자주 체차시키지도 않았습니다. 신이 선조(先朝) 때 계달(啓達)하면서 구례(舊例)에 의거하여 대사성은 다른 직임에 제배했다 하더라도 대사성을 겸임하게 할 것을 청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뒤 해조에서 성명을 상고하지 않고 정원에서도 신명(申明)시키지 않은 탓으로 이 법규가 드디어 폐기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금방 임명되었다가 금방 체직되곤 하여 오래 있을 수가 없게 됨에 따라 늘상 하고 있는 과시(課試)도 아직껏 제때에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은 물론, 준례에 따른 통독(通讀)도 정폐된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현관(賢關)009) 의 읍양(揖讓)하는 풍조가 점점 옛날만 못하게 되었으니, 사습(士習)이 무슨 수로 야박해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진실로 애석하고도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왕세자께서는 아름다운 자질을 타고나셨고 또 숙성하시어 학업이 날로 증진되고 있으니, 이는 실로 종사의 무궁한 복록인 것입니다. 세자를 보도(輔導)하는 책임은 전적으로 궁료(宮僚)들에게 있으니, 그 직임이 또한 중하지 않습니까. 학궁(學宮)과 춘방(春坊)의 관원을 신중히 가려야 하는 것은 모두 전부(銓部)의 임무이니, 문견을 널리하여 선발 제수한다면, 대소의 관원이 모두 적격한 직임을 얻게 될 것입니다.
전 사업(司業) 선우협(鮮于浹)은 경서에 밝고 행실을 연마하면서 궁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선비입니다. 그런데, 근일 전조에서 전혀 까맣게 잊고 있으니, 또한 매우 애석한 노릇입니다. 이 사람은 매우 가난하여 경직(京職)을 제수하더라도 양식을 별도로 대주지 않으면 지탱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서서히 객사(客使)가 돌아가기를 기다려 도로 관직(館職)을 제수한 다음 성균관으로 불러다가 제생(諸生)들과 함께 경전에 대해 토론하게 한다면 절차 탁마하는 데 있어 유익함이 반드시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시로 경연이나 서연(書筵)에 입시하게 한다면 또한 마땅하지 않을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전 군수 서원리(徐元履)는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고 행실도 있으며 또 재주와 식견도 있으니, 그를 대직(臺職)이나 관직(館職)에 둔다고 해서 불가하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전 군수 최온(崔蘊)과 전 장령 심광수(沈光洙)·조속(趙涑)은 위에서 이미 그들의 인품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시 번거롭게 논하지 않겠습니다. 이들을 모두 임용한다면 마땅히 보탬이 되는 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전 현감 강여즙(康汝楫)은 장재(將才)가 있다고 계달했었는데, 해조에서 찰방(察訪)에 제수했습니다. 찰방이 그 자신에게는 영광스러운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만, 인재를 조용(調用)하는 본의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선 놔 둘 수도 있습니다. 전 부사(府使) 허억(許檍)은 일찍이 진사(進士)로서 호종(扈從)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있을 적에 손수 칼을 잡고 사졸들을 몰고 나아가서 남성(南城) 밖에서 승전(勝戰)했었습니다. 그때 즉시 형조 좌랑을 제수했었으니, 이 사람도 일이 있을 때 쓸 만한 사람입니다. 관리로 있으면서도 청렴결백하였는데 파직되어 돌아간 뒤에는 끼니를 제때에 때울 수 없는 처지였어도 간알(干謁)을 일삼지 않은 채 도하(都下)에서 굶주리고 있습니다. 인재가 모자란 것이 지금 같은 때가 없는데 쓸 만한 인재가 있어도 해조에서 잘 물어서 찾지 않은 채 전연 의망하지 않고 있으니, 이런 습관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현능한 사람이 진출할 길이 없습니다.
종사의 제사는 국가의 큰 일로서 구차스럽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공자는 먼저 부서(簿書)에 의거, 제기(祭器)의 숫자를 정당하게 정하여 계속 잇대기 어려운 사방의 물건으로 부서에 근거하여 정한 제기에 공궤하게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는 물품에 상수(常數)가 있다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전생서(典牲署)에서 제향(祭享)에 공궤하는 유모(柔毛)010) 가 부족한 경우에는 따로 분정하면 되는 것인데, 외방에서 객사를 전송할 적에 쓰는 양과 바꾸어 공궤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과연 이 말이 사실이라면 더없이 구차스러운 것입니다. 정결하게 해야 하는 천물(薦物)을 어찌 이렇게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사사(祀事)를 정결하게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내수사에서 진고(陳告)하여 투탁(投托)하는 것과 궁가에서 절수(折受)받아 입안(立案)하는 것은 그 폐단이 극도에 이르렀으므로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에 대해 사문(査問)하는 거조가 있기는 하였으나 종전에 관리가 된 자들이 감히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고 감사가 된 사람도 감히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습니다. 산림(山林)은 보기가 쉬운 것인데, 경성(京城)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도 아직 숨기고 있는 데가 있으니, 외방의 먼 곳이야 어찌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묵은 포흠은 백성들의 가장 큰 폐단이 되고 있는데 세월이 오래 되어 징수하기가 어려우면 그 폐해가 온 고을에 파급되기 마련입니다. 비록 탕척시키라는 명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일찍이 수령을 지낸 자들이 해유(解由)를 내기 어려운 것을 우려하여 미납된 것을 이미 납입된 것인 양 속여서 상사(上司)에 보고했기 때문에 혜택이 백성들에게 이르지 않고 있으니, 진실로 마음 아픈 일입니다. 이제 제도(諸道)의 감사들로 하여금 일일이 조사해 내어 탕척하게 한다면 백성들이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폐단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원망을 해소시킬 수 없을 것입니다.
백성들의 휴척(休戚)은 수령에게 달려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법과 아름다운 뜻이 있다고 하더라도 수령을 잘 가리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옛날의 임금들은 특별히 양리(良吏)들을 기록해 두었는데, 혹 어병(御屛)에다 이름을 쓰게 하기도 하고 혹 전주(殿柱)에다 이름을 써서 붙이게 한 것은 이 때문인 것입니다. 불쌍하게도 우리 백성들의 고달픈 생활이 극도에 이르렀습니다. 게다가 거듭 흉년까지 들었으니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전후 수령들 가운데 치적이 훌륭하다고 소문이 난 사람이 있으면, 감사가 치계(馳啓)하고 어사가 서계(書啓)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이런 사람들이 만일 산직(散職)에 있다면 기용하시고, 파직이 되었으나 범한 죄가 중하지 않으면 서용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읍재(邑宰)에 결원이 생길 경우 순차적으로 보임하면 백성들의 행복이겠습니다.
암행 어사가 염탐함에 있어 마음을 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민간의 훼예(毁譽)라는 것은 혹 일방적인 호오(好惡)에 의거하여 나올 수도 있는 것이므로 그들의 말이 모두가 공론이라고 기필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공교한 말로 잘못을 수식했을 경우에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결과를 면치 못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잘 다스리면서 공심에 의거하여 봉행하는 사람도 왕왕 법망에 걸리는 수가 있는 것이니, 묘당에 묻고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널리 채택한 뒤, 죄가 가볍고 여러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일컫는 사람은 이렇게 탕척시키는 때를 당하여 수용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천거법(薦擧法)은 각기 자기가 알고 있는 사람을 천거하게 하여 적격자를 얻으려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인데, 사심이 앞서는 것이 습속으로 굳어져 대개 구차스럽게 충차(充差)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는 봄부터는 이 법을 반드시 엄하게 다시 밝혀 천거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전처럼 허술하게 하는 일이 없게 하소서.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으면 허위의 습관만 자라게 될 것입니다.
훈신(勳臣)들 집의 구사(丘史)는 일찍이 수의(收議)를 인하여 선조(先朝)의 수교(受敎)에 의거해서 도로 지급해 줄 것으로 판하(判下)한 지 얼마 안 되었습니다. 이제 듣건대 대장 구인후(具仁垕)가 진달한 차자 때문에 이미 정해진 법령을 도로 다시 저지시켰다고 합니다. 그 사이의 미안스러운 정상에 대해서는 많은 말을 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이 한 가지 일의 잘못이 여러 가지 잘못을 겸하고 있습니다. 선왕의 법이 폐기되어 정령이 미덥지 못하게 됨에 따라 조정의 기강이 더욱 무너져 내렸으니,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외방 사람들이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사치의 폐해는 재물을 낭비할 뿐만이 아니라 귀천의 구별이 없어지고 상하의 장복(章服)이 없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평안함은 상하의 분수가 정해지는 데에서 생기는 것인데, 상하의 분수가 문란해지면 무슨 화(禍)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궁중의 복식에서 먼저 주옥과 비단을 없애게 하소서. 그리고 당하의 명관(名官)은 비단을 입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법부(法府)에서 일체 법전에 의거하여 금단할 경우, 위에서 시행하면 아래에서는 더욱 순종해 따르기 마련이니, 어찌 공효가 없겠습니까.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의 마음이 안정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정(人情)011) 이 마구 횡행하여 날로 불어나고 달로 커져 가기 때문에 경외(京外)의 백성들이 지탱하여 견뎌 낼 수가 없는 것이 대부분 여기에 연유합니다. 사옹원의 선부(膳夫)가 날마다 공궤하는 어선(御膳)에 대해서도 인정을 독책하여 징수하고 있는데, 그 숫자가 번번이 배나 됩니다. 그런데도 하리(下吏)들이 감히 말을 하지 못하고 관원들도 감히 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고했을 경우에는 뒷날의 독책이 배도 더 됩니다. 감히 말도 못하고 감히 고하지도 못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인 것입니다. 금중(禁中)의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모시면서 멋대로 조종(操縱)하는 것이 이 정도에 이르렀으니, 각사(各司)에서 날뛰는 것이야 또 말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먼저 사옹원을 통렬하게 징계한다면 외사(外司)의 하리들도 조금은 단속될 것입니다.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백성들이 견디어 낼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조종조에서 나라를 다스린 법이 《대전(大典)》에 상세히 기재되어 있습니다. 《대전》 이외에 또 《속록(續錄)》이 있고, 《속록》 이외에 또 열성(列聖)들의 수교(受敎)가 있는데, 이는 모두 금석같은 법전으로서 동요시킬 수 없는 것입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가 장차 망하려면 새로 만든 법제가 많게 된다.’고 했습니다. 법이 오래되면 폐단이 생기게 되는데, 폐단이 생기면 무턱대고 고수하는 것도 마땅하지 않습니다만, 그렇다고 구장(舊章)·성헌(成憲)을 경솔히 무너뜨려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지금 정치에 종사하는 사람들치고 《대전》을 알고 있는 사람이 드뭅니다. 《대전》을 이미 잘 알지 못한다면 《속록》과 수교를 또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문과 초시에 합격된 자가 회시(會試)에 응시할 적에, 이조에서는 서관(庶官)에 대해, 감사는 수령에 대해, 모두 《대전》을 강(講)하게 한 것은 의도가 있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겉치레에 불과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관직에 임하여 직무를 수행하면서도 법전의 뜻을 알지 못한 채 임의로 결단하는 일까지 있게 되었습니다. 대저 이것은 모두가 금과 옥조(金科玉條)를 궤안(几案) 사이의 먼지처럼 하찮게 여긴 탓으로, 법에 저촉이 되어도 알지를 못하고 금법을 범해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낭관을 천전(遷轉)시키는 데 있어 반드시 달 수를 채우지 않고 있고, 각처의 구임(久任)시킬 자리에도 반드시 구임시키지 않고 있습니다. 호조·병조·형조는 더욱 일이 많은 곳인데, 관사(官司)는 여관이 되어 있고 이서(吏胥)는 숙박객이 되어 있으니, 사무를 어떻게 거행할 수 있겠으며 간위(奸僞)를 어떻게 방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폐단을 변혁시키지 않는다면 직사(職事)를 처리해 갈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아, 해오던 습관과 오래된 폐단 가운데 변혁시켜야 될 것이 이뿐만이 아닙니다만 특별히 개략적인 것만을 진달한 것입니다.
《맹자》에 이르기를 ‘성(誠)은 천도(天道)이고 성(誠)하게 할 것을 생각하는 것은 인도(人道)이다. 지극히 참된데도 감동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 않고, 참되지 않은데도 감동시킬 수 있었던 경우는 있지 않다.’고 했습니다. 신이 형편없기는 하지만 외고 있는 말은 바로 옛날 성인과 현인들의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사람 때문에 말을 폐기하지 마시고 옛날 성인과 현인의 말은 반드시 행해야 된다고 여겨 지성으로 연마하시며 하늘에 응하는 실상을 극진히 하신다면, 인화를 초치할 수 있고 하늘의 노여움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니, 해오던 습관과 오래된 폐단을 제거하기 어려움을 염려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신의 이 차자를 밖에 퍼뜨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습니다. 만일 가하다고 윤허하시어 정원에 내려 숭경외(崇敬畏) 등 편과 폐습(弊習) 가운데 개혁해야 될 것들을 주서(注書)로 하여금 초사(抄寫)하게 한 다음,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여 품지(稟旨)하게도 하고 행하게도 한다면 더없는 다행이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차본(箚本)이 진달된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다. 볼 적마다 마음이 끌려 싫어지는 것을 모르겠다. 이것은 단충(丹忠)이 담긴 말로 가슴속 깊은 곳에서 나온 자연스러운 것임을 알겠으니, 어찌 유념하여 행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단지 불민(不敏)한 것이 한심스러울 뿐이다. 바라건대 경은 자신이 산지(散地)에 있다는 것으로 사양하지 말고 계속 소장을 올려 나의 과실을 부지런히 지적해주면 어찌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니겠는가. 차자에서 조목별로 진달한 일은 모두가 매우 합당하고 좋은 계책이니, 마땅히 묘당으로 하여금 은밀히 논의하게 한 다음 제사(諸司)에 분부하여 중외(中外)에 신칙토록 하겠다."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대신이 나라를 걱정하는 지성은 진퇴(進退) 때문에 다름이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영부사 이경석은 주야로 국가를 생각하고 전하를 간절히 생각하기 때문에 이런 많은 말을 누누이 진달하게 된 것인데, 오늘날의 약석(藥石)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신들이 감히 일일이 거론하여 앙달할 수가 없습니다. 옛사람이 한 말은 마땅히 1통을 등사하여 좌석(座席)의 곁에다 두게 하겠습니다만, 성상께서 마음에 새기기에 달려 있습니다. 아래에서 봉행해야 할 일에 대해서는 의당 육조(六曹)로 하여금 각기 자신들에게 소속된 것으로 응당 행해야 될 것을 살피게 하겠으며, 경외에 신칙시켜 실효(實效)가 있게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註 005]정관(貞觀) : 당 태종의 연호.
- [註 006]
개원(開元) : 당 현종(唐玄宗)의 연호.- [註 007]
빈풍(豳風) : 《시경》의 편명.- [註 008]
주자(朱紫) : 정인(正人)과 사인(邪人)임.- [註 009]
○前領議政李景奭應旨上箚曰:
臣於向日登對之後, 追省愚戇之失, 不勝悚慄之至。 顧其區區願忠之志, 雖九死而靡悔, 況今命之矣, 敢不演前說, 而陳之乎? 玉巵無當, 雖寶匪用, 言而不實, 奚益於事? 臣愚竊以爲, 當今弭災致和之道, 恐不外乎改前過、變舊習、革宿弊, 以新一世之耳目也。 抑天下萬事, 有大根本, 根本不立, 則萬事何做? 所謂大根本, 唯在殿下一心耳。 恭惟殿下, 天資明達, 大度恢豁, 自卽阼以來, 絶無大過失, 聲色、貨利, 凡所以招禍亂者, 無一有焉。 先王付托之明、殿下繼述之善, 信乎兩至而盡美矣, 而治效未著, 俗習漸偸, 民怨日滋, 天怒愈甚, 此亦無非在下者, 不能贊襄奉行而然也, 而殿下反躬自省, 則其於大根本, 果能有以先立, 而盡其方耶? 若猶有未能盡者, 則此非今日之所當着力者耶? 王者學問, 自有別焉, 心上工夫初無二道。 古昔人主之正心術, 未有不以嚴恭寅畏爲先務, 嚴恭寅畏, 卽殿下之方所自修者是已, 一此而篤焉, 罔有間斷, 則《書》所謂允執厥中, 《大學》所謂誠意正心, 《中庸》所謂致中和, 皆由是進。 然必須涵養之功熟, 然後存諸中者, 渾然深厚, 亭亭當當, 未有偏倚之患。 發乎外者, 卽事卽物, 各適其宜, 自有恰好底道理, 此豈可急迫以求, 亦豈可一蹴便到? 常加勉力, 積以歲月, 戒愼恐懼於不睹不聞之地, 操存省察於須臾造次之間, 觸處潑潑如泉流之不息、天運之無窮, 堯、舜、禹湯、文、武治天下之道, 皆不出乎此也。 然此特臣於紙上語, 粗見梗槪之髣髴, 其敢謂知道哉? 以殿下之明聖, 克念而加之意, 則其所造詣, 非臣愚昧所能量也, 豈非宗社之幸哉? 殿下旣以益加省愆, 答天譴爲意, 則雖無大過, 苟有可言, 何敢以旣往, 而不說乎? 試以目前所見告焉。 夫皇天, 殿下之所畏也; 殿下, 臣庶之所畏也則殿下卽臣庶之天也。 以天之天, 喩臣庶之天可乎? 惟天雨暘、寒燠、風雷、霜雪, 各順其時, 然後品物咸亨, 而民生安矣。 如或當雨而不雨, 不當雨而雨; 或當寒而不寒, 不當寒而寒, 風雷之不以時, 霜雪之失其節, 則物何得而生, 人何得而安? 今年天降之災如此, 故殿下之畏之也如此。 以此思之, 則人主之威怒, 非特雷霆; 誅竄之刑罰, 不啻霜雪, 而殿下厲其聲氣, 加以責罰, 不當怒而怒, 不當囚而囚, 不必竄而竄, 不必誅而誅, 則爲臣庶者, 其爲警誡震悚如何? 氣象之愁慘, 復如何哉? 以一事言之, 則憲府執法之官也。 推勘惟律之依, 而不斷以私罪, 則憲府竝被其罰。 以此, 雖係公罪, 必當之以私罪, 被推之人, 亦或求其斷以私罪, 蓋重則或輕, 輕則必重。 於是乎公私輕重以律者尠, 法以之傾矣。 深者獲公名, 不幸近矣。 況殺戮之刑, 出於萬不得已, 而律不可殺而殺, 時不當刑而刑, 則殊非敬愼之道也。 伏惟, 殿下好生之仁, 出自天性。 近日讞獄之際, 爲囚求生, 靡不至矣。 前月有一定配罪人, 因渠自速于刑, 用法於律外。 此出於一時之懲惡, 而若在近日, 必與於生議矣。 此等刑罰, 其亦不得其中者也, 聖心必有悔焉。 臣竊嘗伏見, 世宗朝下敎有曰: "刑以輔治, 律以斷刑, 古今之常法也。 雖然, 律文所載有限, 人之所犯無窮, 所以刑書, 有律無正條, 引類比附之文。 夫刑固聖賢之所愼, 而上下附比毫釐之際, 尤所當恤。 今之法吏, 於比附之際, 率從重典, 予甚愍焉。 罪之疑於重、疑於輕, 情理相等者, 則當從輕典, 若其情理近於重者, 務合於法。 《書》曰: ‘欽哉欽哉, 惟刑之恤哉?’ 予所服膺。 又曰: ‘式敬爾由獄, 以長我王國。’ 攸司其念之。 惟爾刑曹, 曉諭中外。" 惻怛之敎, 前後非一, 殿下之心, 亦何嘗不如此哉? 恤刑之敎, 同一揆也, 而若不從律斷之, 則或不無過中之擧也。 至於流竄, 乃舜朝之罪四凶者。 如有罪犯可竄而竄, 則人將咸服, 誰敢冤之? 下理之罰, 視竄雖輕, 束縛牢狴, 名器汚衊。 畫地不入, 實是悲痛之辭也。 若使可囚而囚, 則亦何敢議? 間或宜輕而被竄者有之, 不重而見囚者有之, 亦或事過之後, 激成而加罪者有之, 此皆不得其正者也。 士夫爲之悼惜, 道路以之嗟吁, 雖幸不遠而復, 其傷和氣則多矣。 《大易》之《復》六三曰: "頻復, 厲, 旡咎。" 程子傳之曰: "復貴安固, 頻復頻失, 不安於復也。 復善而屢失, 危之道也。 聖人開遷善之道, 與其復而危其屢失, 故云厲, 旡咎, 不可以頻失而戒其復也。 頻失則爲危, 屢復何咎? 過在失而不在復也。" 殿下於用罰, 始則雖過, 旋輒改之, 可謂旡咎, 而屢失, 危之道也。 先儒云: "克己, 可以治怒。" 克己之工, 其敢忽乎? 嗚呼! 旁無强輔, 匹士猶憂, 不有賢者, 其何能國? 惟賢者之輔弼也, 罔不以忠諫爲務。 "予違汝弼, 汝無面從, 退有後言。" 者, 非舜之所以責於禹者乎? 高宗之命傅說也曰: "朝夕納誨, 以輔台德。" 說之復于王也, 亦惟曰: "木從繩則正, 后從諫則聖。" 伊尹之訓太甲也, 歎息而告之者, 從諫弗咈也。
其於《太甲》下篇又曰: "有言逆于汝心, 必求諸道; 有言遜于汝志, 必求諸非道。" 唐、虞三代之時, 上下交相勉者, 惟弼違、納誨、從諫是望焉。 降而後也, 號稱治平之世, 則其君也必能從諫, 其臣也必能直諫。 漢 文帝、唐 太宗之事, 亦可驗矣。 孟子曰: "入則無法家、拂士, 出則無敵國、外患者, 國恒亡。" 天子、諸侯存亡, 亦以爭臣之多少言之。 拂士、爭臣之於國家, 其重若此, 此非今日之所可監者乎? 魏徵以爲: "太宗之政, 不逮貞觀之初。" 太宗問其故, 對曰: "貞觀之初, 恐人不諫, 常導之使言, 中間悅而從之。 今則不然, 雖勉從之, 猶有難色, 所以異也。" 太宗問其事, 對曰: "下昔欲殺元律師, 孫伏伽以爲: ‘法不當死。’ 陛下賜以蘭陵公主園, 直百萬。 或云賞太厚, 陛下云: ‘朕卽位以來, 未有諫者, 故賞之。’ 此導之使言也。 司戶柳雄妄訴官資, 陛下欲誅之, 納戴冑之諫而止, 是, 悅而從之也。 近皇甫德參上書, 諫修洛陽宮, 陛下恚之。 雖以臣言而罷, 勉從之也。" 太宗曰: "非公不能及此。 人苦不自知耳。" 太宗因旱詔, 五品以上上封事, 魏徵上疏以爲: "陛下志業, 比貞觀初, 漸不克終者, 凡十條。" 太宗深加奬賞。 夫勉從, 猶以爲不逮於前, 訑訑之色, 拒人千里, 則將謂之何? 若使魏徵進言於今日, 論列其漸不克終者, 恐不止於十條, 此非殿下所當惕然改之者乎? 臣所謂改前過者此也。 唐 穆宗問: "開元治道之盛, 何致而然?" 宰相崔植曰: "玄宗卽位, 得姚崇、宋璟, 此二人早夜孜孜, 納君於道" 璟常手寫《尙書》 《無逸篇》, 爲圖以獻, 勸帝出入觀省以自戒。 其後汚暗, 乃代以山水圖, 稍怠於勤, 左右不復箴規。 奸臣日用事, 以至於敗。 自古以來, 國家治亂, 恒由於賢者之用不用、直言之聞不聞, 於此尤可驗。 其箴規之有關於自警, 亦有大焉。 我世宗謂卞季良曰: "《豳風》、《無逸》備載稼穡之艱難, 然本土之俗, 異於中國。 民間生業之艱、徭役之苦, 卿其逐月作圖, 仍述儆戒之語以進。" 夫儆戒之語, 載於方冊, 而別令作圖, 意甚盛矣。 今若就《大學衍義》 《崇敬畏》上下卷而抄爲一冊, 竝與《豳風》、《無逸》而書之, 置諸御案, 以備觀省, 則《詩書》之訓、傳記之戒, 一開卷而瞭然於目前, 其於恐懼修省, 爲益亦多矣。 臣在先朝, 遇災進言, 敢陳《周禮》十二荒政、劉向 《說苑》六邪、六正及《漢書》刺史六條之事, 竝及湯 武盤、席之銘, 請寫一通, 以寓閒燕之省察。 又請依麗朝名臣金審言、崔沖建白之例, 令政院取荒政及六正、六邪、刺史六條, 付諸政府與六曹, 使之各錄于屬司之壁上, 外則遍諭八道監司、兩府留守, 州縣廳壁, 竝令書揭, 常加惕厲, 得蒙命施。 御覽之文, 卽令玉堂之臣, 寫進一通, 而其後政院不能申飭, 內外司亦不能修擧, 廳壁之上書揭者絶少。 京中如此, 外方可知。 當時尙然, 況於年久? 只此一事, 可見百事之頹廢, 甚矣怠慢之習也。 此習不變, 則事無可爲矣。 政院卽喉舌地, 號令百司之任也。 是故祖宗朝必久任承旨, 東壁承旨勤勞最著者, 則輒陞亞卿之列。 在先朝亦不輕遞, 久者十餘朔, 近不下六七朔。 蓋居其職久, 則察其任專, 而各房分付之事行未行, 可歷歷知也, 八路百司之慢忽者, 亦可一一推責。 今則若過三四朔, 必期於遞, 不及二三朔, 而遞免者居多。 近年之事, 臣未敢知, 而以前日之事言之, 故吏無存, 不識舊規, 官又數易, 未諳前事。 一番分付, 更不糾察, 應所擧行, 漫不知省, 甚至於捧承傳, 而漠然未覺者滔滔。 天威咫尺之下, 未免如此, 此習不變, 則政令無以行矣。 尤可寒心者, 勸課《小學》, 糾正風俗, 乃是啓下之事, 備局、禮曹申飭京外, 再三反覆, 而外方守令尤甚慢之。 僻邑殘縣人物稀少之處, 則猶有可諉, 雄州、大府有可師者、有可學者, 而亦不之行。 向者自上痛人倫之不明, 特降綸音之後, 亦不動心, 未聞某邑能有行者。 不有朝廷之令, 不畏君上之命, 一至於此, 此非可愕之甚乎? 此習不變, 則將無以振頹綱矣。
朝廷, 四方之所取, 則名官百僚之所相敬。 名官能自謹飭, 風裁可觀, 然後朝廷肅而百僚憚矣。 古之名流, 其律己也可敬, 故人亦敬之, 今之名流, 往往樂放縱而惡繩檢。 自上禁酒, 非止一再, 而以含盃爲高致者, 猶或有之。 爲臺諫不可不謹, 而茶時之坐, 不於本府, 取其近家, 惟意所便。 其赴茶時也甚晩, 或有食後, 緩緩往者。 禁亂所以禁僭亂也, 禁物之得, 或給其從者云, 信斯言也, 紀綱之壞, 無足怪矣。 進退用舍, 都在銓曹, 此習不變, 則將無以正朝廷矣。 朋黨之害, 禍人家國, 非惟人主之所深惡, 抑識者之所大憂也。 近來朝論, 益復携貳, 風色不佳, 聖敎痛絶, 若提耳面命, 如使廷臣稍知義理, 何敢不爲之仰體改心? 自古人主惡之, 而欲爲驟辨, 則朱紫易亂, 讒侫乘之。 是以陸贄之言曰: "君子以愛才爲心, 小人以傷善爲利。 愛而引之則近黨, 傷而阻之則似公。 近黨則不辨而遽疑, 似公則不覈而先信。" 先儒之所慮, 亦未嘗不在於此。 然自上臨之以公明, 銓官不失其取舍, 崇用忠厚之人, 斥其已甚之論, 則雖有偏私之心, 何得肆然無忌憚哉? 噫! 蒙養不端, 長益浮靡, 此誠千古之至論。 如欲使爲善士, 莫若培養於幼時。 是猶求三年之艾於七年之病, 而不畜則終無可得之理。 《小學》之敎, 人多譏笑, 此言迂緩, 必益嗤點, 而譬如醫者之隨證投藥, 欲治浮靡, 舍此何以? 內而禮曹、外而監司, 申申檢飭, 則不猶愈於悠泛度日乎? 太學, 多士之所聚, 作成人才, 係館職之得人。 在昔師儒以上之官, 必加掄選, 意非偶然。 大司成則尤非人人所可堪當, 非有文行, 不得與焉, 亦不可數遞之任也。 臣嘗啓達於先朝, 請依舊例, 大司成雖拜他職, 兼帶大司成, 而厥後該曹不考成命, 政院亦不申明, 此規遂廢。 乍拜旋遞, 不能久居, 尋常課試, 尙不以時, 循例通讀, 停輟已久。 賢關揖讓之風, 漸不如昔, 士習何由而不薄? 誠可歎惜。 王世子玉質夙成, 學業日進, 此實宗社無疆之福也。 輔導之責, 專在宮僚, 爲任不亦重乎? 學宮、春坊之愼簡, 無非銓部之任, 廣加聞見而選授, 則大小皆得其職矣。 前司業鮮于浹, 經明行修, 固窮之士也。 近日銓曹, 置之相忘, 亦甚可惜。 此人貧甚, 雖除京職, 若無庖廩之別饋, 則無以支矣。 徐待客使之還, 還除以館職, 召致泮中, 俾與諸生, 討論經傳, 則切磋之益, 必不淺鮮。 時使入侍於經幄、書筵, 亦何不宜? 前郡守徐元履, 自少志學, 有行且有才識, 處之臺職、館職, 夫誰曰不可? 前郡守崔蘊、前掌令沈光洙ㆍ趙涑, 自上已知其爲人, 故不復煩論。 此人等一體任用, 則似當有所裨補矣。 臣嘗啓達前縣監康汝楫有將才, 而該曹授以察訪。 察訪於渠, 亦云榮矣, 而非調用之本意也。 然此則姑可置之, 前府使許檍, 曾以進士, 扈入南漢, 手提尺劍, 驅出士卒, 戰勝於南城之外, 卽授刑曹佐郞, 此亦緩急可用之人也。 爲吏亦能廉白, 罷歸, 朝不慮夕, 而不事干謁, 飢餓於都下。 人才之乏, 莫如此時, 而雖有可用之才, 該曹不能求問, 絶不擬望, 此習不變, 則賢能無由進矣。 宗社之祀, 國之大事, 其不可苟也明矣。 孔子先簿正祭器, 不以四方之食, 供簿正, 言其物之有常也。 典牲署祭享所供柔毛, 不足則別定可也, 而似聞, 將以外方上送客使所用之羊, 換供云。 果如此言, 則苟且莫甚。 吉蠲之薦, 豈容如是? 此弊不革, 則祀事無以潔矣。 內需之陳告投托、宮家之折受立案, 爲弊極矣, 言者多矣。
雖有査問之擧, 而從前爲官吏者, 不敢以實報; 爲監司者, 不敢以實聞。 山林易見也, 而京城不遠之地, 尙有所隱諱, 外方遐遠之處, 安得不然? 至於積年逋欠, 最爲民之大弊, 歲久難徵, 害及一邑者。 雖有蕩滌之命, 而曾爲守令者, 慮其解由之難出, 以未納爲已納, 瞞報上司, 故惠澤未究, 良可痛心。 若令諸道監司, 一一査出而蕩滌, 則民可蒙惠。 此弊不革, 則民怨無以消矣。 生民休戚, 係於守令。 雖有良法美意, 莫如守令之是擇。 古之人君, 特記良吏, 或疏名御屛、或貼名殿柱, 良以此也。 哀我民生, 困苦極矣。 重之以失稔, 何以生活? 前後守令之有聲績者, 監司馳聞, 御史書啓。 若此之類, 如在散地則用之, 若在罷職而所犯不重則敍之。 邑倅之缺, 次第補遣, 則民生幸矣。 暗行之廉問, 非不盡心, 而民間毁譽, 或出於好惡, 其言未必盡公, 而巧言飾非, 則未免信聽。 善治而奉公者, 往往罹於文罔, 詢諸廟堂, 博採群議, 若涉惟輕, 衆所稱冤者, 則當此蕩滌之日, 收用無乃可乎? 薦擧之法, 使之各擧所知, 欲得其人, 而私勝成習, 類多苟充。 春來此法, 必須申嚴, 毋令薦者, 歇後如前可也。 此弊不革, 則徒長虛僞矣。 勳臣家丘史, 曾因收議, 依先朝受敎還給事, 判下甫耳。 今聞以大將具仁垕之陳箚, 已定之令, 還復沮撓。 其間未安之狀, 不欲多言, 此一事之失, 數失兼焉。 先王之法廢而政令不信, 朝綱益壞, 此弊不革, 則外方失其望矣。 奢侈之害, 非但靡財費物, 貴賤無別, 上下無章。 安生於上下之分定, 而上下之分亂, 則禍何所不至? 宮中服飾, 先去珠、繡, 堂下名官, 不服絹紗。 法府之禁, 一依法典, 則上好下甚, 豈無其效? 此弊不革, 則民志無以定矣。 人情刁蹬, 日滋月深, 京外人民之不能支堪, 率多由此, 而司饔院膳夫之於日供御膳, 責徵人情, 其數輒倍。 下輩不敢言, 官員不敢告。 如或告之, 則後日之責, 尤有倍焉。 不敢言、不敢告者以此也。 禁中至近之地, 其操縱之恣, 乃至於此, 各司刁蹬, 又何足言? 痛懲先於饔院, 則外司下輩, 亦可少戢。 此弊不革, 則民生無以堪矣。 祖宗朝治國之法, 於《大典》詳之矣。 《大典》之外, 又有《續錄》, 《續錄》之外, 又有列聖受敎, 此皆金石之典, 不可撓者也。 古人云: "國之將亡, 多新制。" 法久弊生, 弊生則不宜膠柱, 而舊章成憲, 不可輕壞也。 今之從政者, 鮮知《大典》, 《大典》旣不能知, 則其於《續錄》、受敎, 又何能知乎? 文科初試者之赴會試也, 吏曹之於庶官也, 監司之於守令也, 皆講《大典》, 意有所在, 而不過爲虛文之歸。 居官莅職, 任意決事, 不曉法典之意者。 大抵皆是金科玉條, 埋沒於几閣之塵埃, 觸法而不之知, 犯禁而不之覺。 郞官遷轉, 未必准朔, 各處久任, 未必久處。 戶、兵、刑三曹, 尤是劇曹, 官司爲傳舍, 吏胥爲居停, 事務何以擧, 奸僞何以防? 此弊不革, 則職事無以理矣。 嗚呼! 舊習宿弊之可變可革者, 不止於此, 而特陳其槪耳。 孟子曰: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至誠而不動者, 未之有也, 不誠未有能動者也。" 臣雖無似, 其所誦之言, 乃古之賢聖人之言也。 伏願聖明, 勿以人廢言, 以古之賢聖人之言, 爲必可行也, 修之以至誠, 以盡其應天之實, 則人和可以致之, 天怒可以回矣。 舊習宿弊, 何患難祛? 臣之此箚, 不宜宣泄。 如蒙報可, 下于政院, 如崇敬畏等篇及弊習之可改革者, 令注書抄寫, 分付各該司, 使之或稟或行, 幸甚。
答曰: "箚本之進, 已多日矣。 每嘗觀覽, 亹亹不知其厭也。 是知忠赤之言, 出於腑肺之自然, 敢不服膺, 而第恨不敏耳。 惟卿毋以身居散地爲辭, 連進疏章, 勤攻予之過失, 豈不幸甚? 箚中條陳之事, 無非至論嘉猷, 當令廟堂密議, 而分付諸司, 申飭中外焉。" 備局回啓曰: "大臣憂國之至誠, 不以進退有異。 領府事李景奭, 夙宵毣毣, 懸情宸極, 有此縷縷萬言, 無非當今之藥石, 臣等不敢枚擧仰達。 古人云, 當寫一通, 置之座側, 惟在聖上體念而已。 至於自下奉行之事, 則宜令六曹, 各察其屬之應行者, 申飭京外, 使有實效。" 上從之。
- 【태백산사고본】 10책 10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605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역사-전사(前史)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친(宗親)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윤리(倫理)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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