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희유의 일과 역강의 옥사에 대한 발언 등에 대해 신하들에게 이르다
상이 대신(大臣) 및 비국의 여러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전번에 옥당 및 간원이 차자를 올려 아뢴 일은, 외간에 반드시 말이 많을 것이라고 생각되기에 지금 말을 아니할 수 없다. 어제 옥당 관원의 뜻을 보건대, 나의 전후 전교를 모두 잘못된 것을 수식하여 스스로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주강 때에 이태연이 또 아뢴 바가 있었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러하였다.】 당초 한희유의 여식을 뽑아들일 때에 한 궁가(宮家)에서 대궐에 나와 말하기를 ‘한희유가 많은 조사(朝士)들과 결탁하고 있으니 이 일이 아마 분잡스럽게 될 듯하다.’라고 하였는데, 지금의 상황으로 보건대, 그 말이 과연 그대로 맞았다. 박장원이 그 단서를 조금 발론하니, 이태연이 잇따라 말하기를 ‘재이(災異)가 이러하니 궁녀(宮女)를 내보내는 것이 옳다.’ 하였다. 모르겠거니와 이태연이 반드시 이 여인네를 내보내고자 한 것이 장차 어디에 쓰려고 한 것인가? 대개 내보내야 한다는 말로 보면 필시 딴 뜻이 있었던 듯한데, 내가 어찌 도리어 그 욕을 받는 자가 아니겠는가. 그 뜻이 이와 같았다면 명백하게 아뢰는 것이 옳았다. 어찌 감히 이러한 태도를 취했단 말인가."
하였다. 이때 상이 말과 표정에 심히 노여움을 띠고 즉시 한 환관에게 명하여, 직접 세자궁(世子宮)으로 가서 한희유의 딸을 내보내도록 하였다. 이어 여러 신료들에게 하교하기를,
"지금 이 거조가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나 경들로 하여금 나의 뜻을 분명하게 알도록 하려는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번 민정중(閔鼎重)의 상소 안의 말은, 만약 끝까지 추문한다면 마땅히 역당(逆黨)으로 다스려야 했는데, 불문에 부치라고 한 전일의 전교는 내가 사실 가벼이 입밖에 낸 것이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민정중의 이 의논을 신은 다행스럽지 못하다고 생각합니다. 신의 뜻은 좌상(左相)이 이미 압니다. 당초 역강(逆姜)의 옥사(獄事)090) 는 신들만 눈으로 본 것이 아니라 성상께서도 직접 보고 직접 들은 것입니다. 지금 이러한 의논이 있게 되면 후세의 사람들이 이 옥사를 어떻게 여기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내가 깊이 생각한 바도 사실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심양(瀋陽)에 있을 때에 소현(昭顯)의 관사에 목괴(木塊)가 하나 있어서 혹 목침으로 쓰기도 하고 혹 평상을 받치기도 했는데, 몇 년 뒤에 갑자기 가지와 잎이 나오고 오래지 않아 소현이 죽었다. 그때 역강이 울면서 말하기를 ‘3년된 나무 토막에 갑자기 가지와 잎이 생겨났으니, 장차 반드시 큰 경사가 있으리라고 여겼는데, 어찌 이러한 변란을 만날 줄 알았으랴.’라고 하였다. 반드시 큰 경사가 있으리라고 한 그 말로써 보건대, 반역할 마음의 싹이 반드시 이미 오래 전에 생긴 것이다. 또 범이나 이리 같은 짐승들도 새끼를 사랑할 줄 아는데, 소현이 죽은 뒤에 낳은 유복자는 인정으로 헤아려 보건대 어찌 더욱 사랑할 만한 아들이 아니었겠는가. 소현의 병이 처음에는 대단한 것이 아니다가 마침내 구제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이른 것은 꼭 역강이 아기를 잉태한 일 때문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때에 이런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었다. 이 때문에 역강이 그 자취를 덮어 감추려고 하여 마침내 그 아이를 죽였다. 궁녀(宮女)인 정렬(貞烈)이 아이가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는 이상하게 여겨 묻기를 ‘어떤 놈의 고양이 새끼가 이런 소리를 내느냐?’고 하였다 한다. 이런 일을 차마 하였는데 무슨 일인들 차마 못하겠는가. 역강의 흉패스러움이 이러한데도 오늘날 사람들이 선왕(先王)의 전후 전교를 믿지 아니하고 반드시 신구(伸救)하고자 하는 것은 무슨 의도인가? 나는 매우 통분스럽다. 비록 여러 세대 뒤에라도 만약 역강의 일을 조정에 아뢰는 자가 있으면 역당(逆黨)으로 논하여 바로 궐정에서 추국하여 다스리도록 하라. 혹 강포한 신하나 흉악한 사람이 있어서 이 전교를 따르지 않거든 삼사(三司)의 백공(百工)들은 모두 즉시 다투어 논집하여 역당으로 논하는 것이 옳다. 이 뜻을 내외의 각 해사(該司)에 분부하도록 하라."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몸을 움츠리고 감히 한 사람도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났다. 한희유에 대한 논란은 처음에 오정위(吳挺緯)에게서 나왔는데 도리어 또 겁을 먹고는 반드시 이태연에게로 돌리고자 하였다. 혹자는 말하기를 "인평(麟坪)의 집안에서 대궐 안에 말을 퍼뜨리기를 ‘이태연이 반드시 한희유의 딸을 내보내고자 한 것은 첩으로 삼으려는 뜻이 있었던 것이다.’라고 했는데, 마침 이때에 이태연이 수재(水災)에 대한 박장원의 말을 인하여, 당(唐)나라 태종(太宗)이 궁녀를 내보낸 데에 대한 말을 우연히 발설하였다. 상이 이른바 ‘반드시 딴 뜻이 있었다.’ ‘내가 도리어 욕을 받았다.’는 등의 말로 하교한 것은 대개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58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
- [註 090]역강(逆姜)의 옥사(獄事) : 소현 세자빈 강씨(姜氏)가 세자를 독살하고 조정을 저주했다는 무함을 당하여 사약을 받아 죽은 옥사. 효종이 즉위하자 민정중이 그 억울함을 상소하였다.
○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上曰: "頃者玉堂及諫院陳箚之事, 外間想必多言, 故玆不得不言矣。 昨見玉堂官員之意, 予之前後所敎, 皆歸於飾非自解之地, 予甚愧之。 【晝講時李泰淵又有所達, 故上敎如此。】 當初希愈女選入時, 有一宮家, 來言於闕中曰: ‘希愈多結朝士, 此事恐致紛紜。’ 以今觀之, 其言果驗矣。 朴長遠微發其端, 而李泰淵繼之曰: ‘災異如此, 放出宮女可矣。’ 未知泰淵必欲出此女, 將焉用之? 槪以放出之語見之, 則必有他意存焉, 予豈非反受其辱者哉? 其意如此, 則明白直陳可矣, 何敢爲此態也?" 時, 上聲色甚厲, 卽令一宦, 親往世子宮, 放出希愈之女。 仍下敎于諸臣曰: "今此擧措, 非不知未妥, 而欲令諸卿, 明知予意耳。" 上又曰: "頃者閔鼎重疏中之語, 若窮問, 則當以逆黨治之, 而前日不問之敎, 予實輕易發口矣。" 領議政鄭太和曰: "鼎重此論, 臣以爲不幸也。 臣意則左相已知之矣。 當初逆姜之獄, 非但臣等之目覩, 亦聖上之所親見, 而親聞者也。 今有如此之論, 則後來之人, 當以此獄爲何如也?" 上曰: "予所深思, 亦實在此。 曾在瀋中, 昭顯館裏, 有一木塊, 或作枕或支床, 而數年之後, 忽生枝葉, 未久昭顯卒逝。 逆姜泣而言曰: ‘三年木片, 忽生枝葉, 將謂必有大慶, 豈知反遭此變也?’ 以其必有大慶之語觀之, 則其逆心之萠, 必已久矣。 且虎狼猶知愛子, 而昭顯旣卒之後, 生遺腹男, 揆以人情, 豈非尤可愛者乎? 昭顯之病, 初非大段, 終至於難救者, 未必不由於逆姜懷孕之故。 其時有此云云之說, 以此逆姜欲掩其迹, 竟殺其兒。 宮女貞烈聞兒將死之聲, 怪而問之曰: ‘何物猫兒, 乃作此聲?’ 云,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逆姜之兇悖如許, 而今人之不信先王前後之敎, 必欲伸救者, 是何意也? 予甚痛之。 雖閱累世之後, 若以逆姜事, 聞於朝者, 論之以逆黨, 直以庭鞫治之。 或有强臣兇孽, 不遵此敎, 則三司百工, 皆卽爭執, 論以逆黨可矣。 此意分付于內外各該司。" 諸臣瑟縮, 莫敢發一言而退。 希愈之論, 初發於挺緯, 而還又惶㤼, 必欲歸之於泰淵。 或云: "麟坪家宣言於闕內曰: ‘泰淵之必欲出希愈之女者, 有卜妾之意。’ 云, 適於此時, 泰淵因朴長遠水災之說, 偶發唐宗放出宮女之語。 上之所謂必有他意、予反受辱等敎, 蓋出於此。" 云。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7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558면
- 【분류】왕실-궁관(宮官) / 왕실-비빈(妃嬪) / 사법-탄핵(彈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