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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8권, 효종 3년 4월 26일 정묘 1번째기사 1652년 청 순치(順治) 9년

재해 문제에 관해 민정중이 상소를 올리고, 이에 대해 논의하다

부교리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기를,

"삼가 성상의 하교를 보건대, 성상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시고 재해를 경계하시어 몸이 편치 못하도록 반성하시는 한편 전교를 내리시어 방안을 찾으시는데 말뜻이 하도 간절하여 신은 감격한 나머지 감히 생각한 바를 아룁니다. 다만 드리고 싶은 말씀이 기밀(機密)에 관계되는 일이어서 감히 글을 드러낼 수가 없기에 삼가 이 첩황(貼黃)으로써 올립니다."

하였는데, 그 첩황에,

"하늘의 조화가 불행하여 나라가 어려움을 겪게 되자 상하가 걱정에 쌓여 항시 구제하지 못할까 염려해 왔는데 더군다나 하늘의 뜻이 좋지 않아 재앙이 거듭 이르니 국가의 형세가 전도되어서 마치 물이 더욱 깊어진 듯한데, 올해 가뭄이 또 이렇게까지 극심하니 백성들이 불안 속에 다 죽어갑니다. 아, 진실로 크게 한숨 짓고 눈물 질 만한 때라 하겠습니다.

신이 삼가 보건대, 성명께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밤낮으로 애태우시면서 자책하시기를 매우 간절히 하시고 허물 찾기를 매우 급하게 하시면서 널리 바른 말을 찾으시는 등 윤음(綸音)이 간절하시니 백성들도 감격하여 눈을 씻고 우러러 보면서 만분의 일이라도 정성을 바치고자 하는데 더구나 신같이 노둔한 자가 오랫동안 경악에서 모시면서 매우 두터운 은혜를 받았는데, 망언을 할까 경계하고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한마디도 진달하지 않은 채 성명을 저버려서야 되겠습니까. 인하여 생각건대, 신이 성대한 시대를 만나 외람되게 크나큰 은혜를 입어 시종(侍從)의 자리에 있으면서 이미 몇 년을 지냈는데도 한번도 조그마한 도움을 드려 은혜에 보답하지 못했으나 성상께서는 매번 잘 보살펴 주시고 물리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리석은 신이 취할 것이 뭐가 있다고 이렇게 하셨습니까. 혹시 성상께서 신의 어리석음을 가련하게 여기시고 신이 딴 마음이 아닌 염려와 애착이었다는 것을 살피시어 너그럽게 포용해 주셔서 일 맡길 것에 대비하신 것이라면, 신 역시 어찌 감히 청반(淸班)에 버티고 있으면서 헛되이 성상의 총명(寵命)을 욕되게 하여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현명하신 전하 앞에 모두 말씀드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먼저 신이 평소에 품고 있었던 뜻을 진달하고 그 다음에는 요즘 사정에 대하여 말씀드려서 성상으로 하여금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통찰하시도록 하고, 신 역시 성상께서 품고 있는 뜻이 과연 어떠한 것인가를 알고 싶습니다. 신이 처음에 벼슬을 할 때 외람하게 급제하였는데 통적(通籍)한 이래로 누차 근열에 제수되었습니다. 전후 임명에 대하여 감히 굳이 사직하지 않았던 것은 신의 재주와 능력이 감당할 수 있다고 여겨서가 아니라 다행히 성상께서 임어하시어 탄식을 하며 장차 크게 한번 무엇인가를 해 보시려고 한 때를 당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료들은 종종걸음을 치지만 계획이 하루를 미치지 못하고 꾀가 멀리 가지 못하여 위에서는 의지할 바가 없고 아래에서는 명을 받들어 실행한 바도 없이 그럭저럭 세월만 보내다가 결국 성상의 의지는 점점 나태해지고 시세는 더욱 떨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랜 국사가 마치 물이 골짜기를 달리듯, 해가 서산에 떨어지듯 하여 이미 쇠잔함이 심하고 어지러움이 형상으로 나타나고 있어서, 장차 우리 성상께서 무엇인가를 하시려는 뜻에 부응하여 천하 후세에 할 말을 남기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이 삼가 자신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허물을 참고 무릅쓴 채 나아가 성상을 가까이 모시고 생각한 바를 모두 진달하고 물러나오려 하였습니다. 그런데 경연에 나아가 또 감히 말씀을 다 드리지 못했던 것은 진실로 사람이 미미하고 계획이 천박하여 아무런 도움을 드리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큰 뜻을 세워 표준을 삼고, 인재를 모아 원기를 왕성하게 하고, 언로(言路)를 넓게 열어 백성들의 실정을 통하게 하고, 사공(事功)을 분발하여 대업을 넓히라는 소청을 드렸는데, 신의 정성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의가 천박하고 말이 졸렬하다 보니 마음을 털어놓고 있는 대로 드린 말씀이지만 진부한 얘기거나 망령스런 말이 되어, 마침내 위로는 성상을 감동시키지 못하고 아래로는 저의 어리석은 생각을 전달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신의 죄입니다.

그러나 신이 감히 의혹된 마음을 품고 스스로 움츠러들지 않은 것은, 진실로 임금과 신하 사이엔 성의가 곁들여 있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신의 본래의 의도를 전하께서 혹 깊이 살피지 못하셨거나 성상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가를 여러 신하들이 헤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전하께서 위로는 하늘의 위엄을 엄중히 하시고 아래로는 백성의 사정을 가엽게 여기시어 두려운 생각으로 도모하지 아니한 것이 없으시니, 바로 이 때가 신하로써 충성을 바칠 날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이 죄를 무릅쓰고 정성을 다하여 간곡한 저의 심정을 모두 진달하여 전하께서 거두어 주시거나 물리치시기를 바라는 이유입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셨으므로 신이 감히 번독스럽게 청하지는 않겠습니다만, 인재(人材)를 수습하라는 말에 대해서는 또 다시 반복하여 말씀드리겠으니,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신이 삼가 요즈음의 실태를 보니, 인물이 대단치 않아 조정에 인재가 모자라고 세상 일에 마음을 쏟는 자가 드물어 단지 일을 맡고 있는 한두 사람의 신하만이 날로 생활하는 사이에 대처해 나갈 뿐입니다. 천리마를 놓아두고 천리를 가는 일과 뗏목을 타고 큰 바다를 건너는 일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도 그 어려움을 알 수 있습니다. 고종(高宗)이 도를 생각하자 부열(傅說)이 일어났고, 선왕(宣王)이 난리를 평정하려 하자 신보(申甫)가 나왔으니 성상께서도 지성으로 구하면 됩니다. 어찌 요즘 세상이라 하여 훌륭한 사람이 없겠습니까. 그러나 여자는 자신을 지키는 것을 정조로 삼고, 선비는 재주를 팔지 않는 것을 귀하게 여깁니다. 비록 훌륭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진실로 성의와 예의가 없다면 전하께서 어떻게 그를 쓰실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지난해에 유신들을 후한 예로 발탁할 때에 사람들이 모두 진용되는 것을 기뻐했는데, 신은 홀로 이 사람들이 혹시라도 차질을 빚어 성상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서 ‘선비들이 일의 실정에 어두워 국가에는 도움이 없다.’고 여기시게 되어 문득 후일 훌륭한 사람을 구하는 뜻에 장애가 될까 염려했었는데, 며칠이 못 가서 이 생각이 과연 들어맞아 일이 시기와 더불어 서로 어긋나 결국엔 낭패를 겪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전하에게 말씀을 드리는 자들이 진실로 유도(儒道)로 말씀드리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재능이란 반드시 양성한 뒤에 이루어지는 것이며, 찾은 다음에 이르러 오는 것입니다. 옛날 성왕(聖王)이 인재를 널리 구하고 예로 초빙하되 조정을 대상으로 하지 아니하고 초야를 대상으로 했으며, 훌륭한 신하와 명철한 선비들이 시대에 호응하여 세상에 나온 자들은 현달한 자가 아니고 한미한 자들이었으니, 오늘날도 초야에 은거하면서 전하의 요구에 응하여 전하의 뜻을 이루어줄 사람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닙니까. 신이 지난번 경연에서 이러한 뜻을 대략 진달하였으나 감히 두루 지적하여 말씀드리지 않았던 것은 사실 사람이 못나고 직책이 낮아서 천거하지 않았던 것으로, 한번 신의 입에서 나오게 되면 문득 많은 사람들의 기대에 경시되어 피차가 손해만 있고 아무런 이익이 없기 때문입니다. 전하께서 진실로 성심을 갖고 구하신다면 그 사람을 모를까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또 오늘날 전하께서 사람을 구하시고 말을 채용하시는 데 있어서 마음에 거스리는 데서 찾지 않고 뜻에 영합한 말이나 사람만 구하고 들으시므로, 조금 두각(頭角)을 드러낸 자는 조정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시사(時事)의 그릇된 것 중에서 가장 크게 그릇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백성들의 실정이 누구를 말미암아 통하겠으며, 일이 누구를 말미암아 수립되겠습니까. 이것이야말로 신이 한밤에 잠을 못 이루고 탄식하며 매번 말을 아니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아, 바야흐로 지금 나라의 형편은 자주 위축되고 하늘의 경계는 기세가 대단하므로 말할 만한 일도 신이 다 할 수 없는데, 어떻게 또 신의 마음에 서려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 바다에 표류한 한인(漢人)은 어찌 우리가 옛날에 섬겼던 명나라의 백성이 아니겠습니까. 설령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어찌 차마 모두 그들을 포박하여 조금도 거리낌 없이 원수에게 몰아 보낼 수 있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인정상 답답한 일이며 성상의 마음에도 슬픈 일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보냈던 자들이 모두 사형을 당했는데, 지금 이들이 죽음을 면치 못할 줄을 알면서 또 죽을 곳으로 강제로 보내는 것은 어찌 우리 나라가 차마 할 일이겠습니까. 이들이 거친 파도에 표류하여 가까스로 살아나 하늘이 내려준 도움으로 우리 나라에 도착한 것이므로 그들은 옛날을 생각하며 살아갈 수 있을 곳으로 여겼을 터인데, 도리어 천 리 밖으로 보내어 모두 북쪽으로 보낸다면 그들의 불쌍한 처지를 설명하기에 어찌 많은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인정상 차마 못할 일이며 하늘의 뜻도 반드시 편치 못할 것입니다. 옳지 못한 일을 행하여 죄없는 자를 죽이는 일이 어찌 하늘의 화기(和氣)를 손상시켜 흉재(凶災)를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제주(濟州)는 본래 바다 가운데 있는 절도(絶島)이므로 피차의 소식이 누설되지 않을 만큼 비밀스런 곳입니다.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하여 보내 가고 싶은 대로 가도록 맡겨 둔다면 뜻밖에 발생할지도 모를 환란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므로 만일 그들을 섬에 있게 하고 늠료(廩料)를 약간 지급하여 죽지 않게 해주어 여생을 마치게 한다면 은혜와 의리를 펼 수 있고 조처하기도 편리할 것입니다. 비록 다시 간사한 적들이 은밀히 내통하여 오랑캐들이 책망을 한다 하더라도 가서 확인해 보기는 어려울 것이므로 빈말로만 위협을 할 것이니 사세를 미루어 헤아려 볼 때필시 큰 염려는 없을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날 그들을 잡아보낼 때에 정적(鄭賊)이 오히려 ‘너희 나라에 쇄마(刷馬)가 얼마나 많은가?’ 하였는데, 그 마음에는 우리 나라에 계획이 없다는 것을 가소롭게 여겼던 것입니다.

지금 어찌 이 일을 거울 삼아서 전에 했던 일을 징계로 삼지 않으십니까. 만에 하나 끝까지 비밀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우리가 장차 바른 말로 말하기를 ‘명나라는 지난날 우리 부모 나라가 아닙니까. 지난번에 대국(大國)이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보았는데 진실로 그러한 줄을 알면서 차마 죽을 곳으로 몰아보내지 못해서이지 딴 뜻이 있어서가 아니다.’고 하면, 저들이 비록 짐승과 같은 자들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이 일 때문에 한나라의 화친을 잃으려고 하지는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신이 붓을 들고 여기까지 쓰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하염없이 흐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성상께서는 어떻게 여기십니까. 지난날 이무(李袤)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이무의 말이 아니라 사실은 온 나라 사람들의 공통된 말이었습니다. 이무가 위엄 아래 감히 말을 다하지 못한 것이 있습니다만, 신은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과 같은데 생각한 바가 있으면 어찌 감히 모두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고 생각됩니다. 신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강역(姜逆)의 옥사가 처음에 나인들 사이에서 나오자, 사람들이 조역(趙逆)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니, 온 세상이 듣고서 놀라움과 당혹을 금치 못했습니다. 지난번에 두 역적이 이미 패하여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났는데 지금 여항간 대중들의 말에 더러 두 역적의 간교함이 위로 성상의 귀를 가리울 수도 있다 합니다. 그러나 신은 이것이 외인들이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여기는데 전하께서 반드시 모두 통촉하시어 두루 살피셨으리라 생각됩니다만, 만일 혹시라도 그 사이에 한 가지라도 의심할 단서가 있으면, 형제의 인륜은 하늘에서 근본한 것이니 속히 신설하여 구천에 있는 영령을 위로하고 재앙(災殃)과 여기(戾氣)를 이완시키소서. 다만 생각건대, 이 일이 선조(先朝)에 관계되므로 전하께서 필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시겠지만 그럴 듯한 방법으로 속이면 현명한 사람도 면하기 어려운 것이니 어찌 선왕의 큰 덕에 누가 되겠습니까. 오늘날 잘 계승하고 잘 기술한다면 선왕에게 빛이 날 것입니다. 만약 그렇다면 하늘에 있는 선왕의 영령이 어찌 이 일을 전하에게 기대하지 않겠습니까. 설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옳고 그름에 관하여 흔쾌히 결정하시어 백성들의 의혹을 제거하는 것이 또한 가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이 자녀들은 왕가의 혈속인데, 어린 아이로서 아직도 섬에 갇혀서 그 목숨이 실낱같이 위태롭습니다. 만에 하나 하루아침에 안개와 이슬에 병을 얻어 제 명대로 다 살지 못하고 죽게 되면 비록 다시 소급하여 불쌍히 여긴다 하더라도 이미 때는 늦습니다. 성상께서도 이를 염려하시어 누차 자비로운 말씀을 하셨으나 그때마다 대신은 매번 오랑캐 사신이 와서 물을지도 모른다는 혐의를 두었습니다. 형편상 어려운 점이 비록 이와 같다고는 하나 알맞게 처치하는 것이 실지로 우리에게 있으니, 어찌 성상의 뜻을 받들어 실행하여 우리 성덕을 넓히지 않는단 말입니까. 더구나 그 딸이 성장하여 이미 오래 전에 시집을 갔으니, 마땅히 추은(推恩)하여 관직과 급료를 주어 속적(屬籍)토록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어찌 우리 임금의 혈속으로 하여금 시골에 파묻혀 한 고을의 평범한 사람이 되어 살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유계(兪棨)의 경우는, 신이 용서해 주어도 되겠다는 글을 두 번이나 올렸는데 지금 듣자니 심리하는 문안에 그의 성명을 지우고 황지(黃紙)를 붙여 내렸다고 합니다. 이는 전하께서 윤기(倫紀)의 밖으로 내치시어 심하게 끊어버린 것입니다. 신은 그지없이 두렵고 황송하여 비로소 전에 드린 말씀이 망령된 것으로서 스스로 큰 죄인을 옹호하는 처지에 빠져들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감히 죄를 지고 안이하게 혼자만이 형벌을 면할 수가 없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먼저 벌을 내리시어 신의 죄를 밝히소서. 그러나 어리석은 신이 감히 목숨을 걸고 한 말씀 드리겠으니 성상께서는 더욱 유의하소서. 신이 듣건대, 까마귀와 솔개의 알을 깨뜨리지 아니해야만 봉황새가 찾아오고 비방한 죄를 벌주지 않아야만 아름다운 말을 해주는 자가 온다고 하였습니다. 설사 유계의 광망(狂妄)함이 만일 비방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오히려 성세(盛世)에 가두어 두지 말아서 허물을 감싸주는 덕을 드러내야 합니다. 유계는 선조(先朝) 때 시종(侍從)하던 신하일 뿐만 아니라 전하께서 일찍이 관대하게 여겼던 자가 아닙니까. 어찌 감히 선왕을 비방하여 스스로 막대한 죄를 지었겠습니까. 당초에 유계가 유신으로서 국가의 큰 일을 당하여 단지 전례(典禮)를 토론하여 성상의 참고로 드리려고 했던 것뿐입니다. 그러한 유계를 만약 비방한 죄로 꾸짖는다면 온 나라가 모두 그의 원통함을 인정할 것입니다. 유계는 본래 충성심이 강한데다 소박하고 우직한 자로서 말주변이 없는데 거듭되는 참소에 성상께서 속으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성상께서는 마음을 풀고 기운을 평이하게 가지시어 다시 더욱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한 사람이 원한을 품게 되면 하늘의 기운도 어긋나게 되는 것인데 유계만 드넓은 은전의 혜택을 받지 못하였으니 하늘이 공평하게 감싸주는 뜻이 아닌 듯합니다.

신이 성상의 자애로움을 믿고서 죽음을 무릅쓰고 번독스럽게 하였으니, 신의 죄는 만 번 죽어야 할 만큼 큽니다. 생각건대 신이 진달한 바가 말하지 않아야 할 말을 한데다, 또 극히 망령됩니다만 이미 생각한 바를 모두 말하라는 분부를 받고는 저의 직분을 헤아려 보건대, 또한 마땅히 정성을 다하여 솔직한 심정을 말씀드려야 하겠기에 감히 죽음을 무릅쓰고 상소를 올리오니, 혹시라도 채납되어 전하께서 하늘을 두려워하여 재해를 이완시키려는 실상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신이 말씀드리는 것은 모두 국가의 기밀이므로 쉽게 누설이 되어 뜻밖의 환란을 초래해서 그들의 노여움만 사 위로 성덕(盛德)에 누가 될까 염려되었습니다. 구구한 저의 어리석은 충성심이 이것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이와 같은 사실을 손수 써서 밀봉하여 진달하오니, 삼가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조금이나마 살펴 주소서."

하였다. 상소를 들이자, 상이 즉시 그를 불러들여 대면하고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를 보니, 대체로 전지에 응하여 상소한 말이었다. 역강(逆姜)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였는데, 그대가 어떻게 들어서 알고 이 말을 하였는가?"

하니, 민정중(閔鼎重)이 대답하기를,

"신이 오랫동안 가까운 반열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도움을 드린 바가 없던 차에, 마침 하늘이 재해를 내려 경계를 보여 가뭄이 매우 참혹한 시기를 만나 성상의 심기가 걱정과 두려움에 쌓여 밤낮으로 편치 못해 하시다가 전지를 내리시어 해결책을 구하시는 등 정성이 지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신은 직분상 끝까지 잠자코 있을 수 없어 감히 생각한 바를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강(逆姜)의 옥사에 대해서는, 신은 나이 젊은 신진이므로 그 옥사가 처음 발생했을 당시의 실정을 자세히 모릅니다. 대체로 이 옥사가 궁중에서 나온 것이므로 그 사이의 실상에 대해서 외인들로서는 알기도 어려운 바이며 말하기도 어려운 일입니다. 변란이 지친에게서 발생하였으므로 사람들은 모두 당혹해 하였는데 그 당시 어떤 사람은 조역(趙逆)김적(金賊)이 실지로 그 일에 참여하였다고 하자, 여항(閭巷) 간에서는 서로 의아해 하며 지금까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두 역적이 법의 심판을 받아 간사한 꾀가 모두 드러나니 사람들은 더욱 당혹해 하며 모두가 두 역적이 속여가지고 그 옥사를 일으킨 것이라고 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성상께서는필시 그들의 정상을 통찰하셨을 것입니다. 진실로 의혹스러운 단서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천륜(天倫)의 지극한 정에 필시 애처로움이 배나 될 것이니, 신생(辛生)을 엄하게 국문하여 그들로 하여금 즉시 원한을 풀게 하고, 만일 역모한 사실이 명백하다면 역시 빠른 시일 내에 시비를 결정하여 온 나라 사람들의 의혹을 말끔히 제거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법(常法)으로 말하면 그대는 중죄를 면하기 어려우나 내가 이미 구언(求言)을 하였고, 그대가 진달한 것도 생각한 바를 반드시 진달하겠다는 뜻에서 나왔으므로 직접 대면하여 말하고자 한 것이다."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생각한 바가 있어서 죽음을 각오하고 소를 올렸는데, 너무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죄를 주지 않으시고 사대(賜對)까지 받게 하셨으니, 황공하고 감격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결정난 옥사를 다시 언급할 것이 없다만, 외부 사람이 이 일 때문에 시끄럽게 했던 것은 선왕(先王)께서도 일찍이 아셨던 일이다. 대체로 이른바 조역(趙逆)김적(金賊)를 의심하게 된 것은 아마 맨 처음에 의혹을 풀지 못해서 그런 것일 것이다. 이 옥사는 심상한 사변이 아니었는데 어찌 한두 흉도가 선왕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설사 소현 세자(昭顯世子)가 살아 있을 때에 이러한 사변이 있었다 하더라도 지금 두 역적의 흉계로 본다면 혹 의혹할 만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인데, 소현 세자가 이미 죽었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도 결코 기업(基業)을 부탁할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을 외부 사람도 다 같이 아는 바이므로 두 역적이 실로 꺼릴 바가 없는데, 어찌 계획을 세워 속임수를 썼을 리가 있겠는가. 역강(逆姜)이 신임했던 의정(義貞)이라고 하는 계집종이 취복(就服)한 공사에, ‘강씨가 황금 3, 4냥을 자주 본가에 보내왔다.’고 하니, 이점으로 보아 많은 돈을 나누어 주어 수많은 무리를 결속한 것이 반드시 이것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체로 이러했기 때문에 불량배들이 그 실상을 감추고 근거없는 말을 주장한 것인데, 세속 사람들은 원래 주된 견해가 없는데다가 시비를 잘 알지 못하므로 와전된 말에 선동되어 국시(國是)가 정해지지 못하게 하고 말았으니, 필경 아름답지 못한 말이 생겨서 과인에게까지 미칠 줄을 나는 알고 있다.

지난날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말은 진실로 매우 한심하다. 외부 사람이 이렇게 의심을 하므로 선왕이 매번 이것을 염려하였으며 예옥(禮玉) 【강씨의 어미이다.】 승복한 것에 대하여, 혹자는 김자점(金自點)이 위협하여 억지로 단안(斷案)을 만들었다 하니,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는가. 강문성(姜文星) 【강씨의 생질이다.】 첩이 저주하는 묘기가 있어 문성의 후처가 그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 한다. 대개 그의 흉악한 모의가 처음엔 그 집에서 비롯되어 결국엔 안팎에서 서로 호응하여 같은 처지에 있는 자들이 서로 구제하였던 것이다. 만약 근거가 없는 일이라면 저주한 그 일의 진상을 어떻게 그가 승복한 공사에 명백하게 언급하였겠는가. 이 일은 위협해서 이루어질 일이 아닌데도 세상 사람들은 아는 자나 모르는 자 모두가 한결같이 의심을 하고 있으니, 애석하게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생(辛生)을 국문하자고 청한 것은 김진종(金晉宗)이 이른바 승려를 엄하게 국문하면 자연 승복할 것이라는 말과 서로 같으니, 매우 무리한 말이다. 그대는 나이가 젊은 사람이므로 그 당시 옥사의 실정에 대하여 필시 다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일찍이 그 일의 실상에 대하여 자세히 들어보지 못했었는데, 지금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그 전의 의혹이 깨끗이 풀렸습니다. 지난날 이무가 그 일의 단서에 대하여 약간 언급하였으나, 감히 분명하게 말하지 못했는데 신의 생각에는 임금과 신하는 아비와 자식 같으므로 진실로 들은 일이 있으면 마땅히 숨김없이 말씀드려야 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감히 상소하였던 것입니다."

하였다. 승지 이홍연(李弘淵)이 아뢰기를,

"지금 매우 자상하신 성상의 하교를 받고 나니, 신하들의 의혹이 이젠 풀리게 되었으며, 여항 간에 떠도는 실없는 말도 이제는 그치게 되었습니다. 다만 무리를 결속지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실로 매우 미안합니다. 오늘날 전하의 신하 중에 어느 누가 역강의 무리란 말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당초에 떠도는 말이 그 반역의 실상을 숨겼으므로 내가 이것을 지적하여 말한 것이지 오늘날 그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은 아니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이미 말의 실마리를 끄집어냈으니 모두 말을 하겠다. 국가가 불행하여 대역 부도한 사람이 궁중에 들어왔으니 그 일을 말로 다 할 수 있겠는가. 소현(昭顯)은 본래 착한 사람이었으나 다만 마음 속에 주장이 없는 병통이 있었다. 그래서 비할 데 없는 험악한 역강(逆姜)이 오직 애써 임금의 총명을 가리고 흉패한 일을 자행하였지만, 소현 역시 제재를 가하지 못했던 것이다. 예로부터 왕가(王家)의 형제들이 어렸을 때부터 각각 스승에게 나아가 배우다가 어느 정도 성장하면 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하므로 실지로 서로 모여서 지내는 즐거움이 없고 동궁(東宮)에 있어서는 명분이 존엄하므로 또 자주 서로 만나볼 수가 없다. 선왕(先王)께서 일찍이, 친한 동기간에 각기 다른 곳에 거처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시고 이 법규를 과감하게 없애버린 다음 나의 형제에게 명하여 어릴 때부터 성장할 때까지 한 집에서 거처하기를 마치 평범한 사대부 집에서처럼 하였으므로, 높고 낮은 구분이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서로 우애하는 정이 다분하였다.

그런데 변란 후 내가 심양에 잡혀 갔을 때 강씨가 하는 행위를 눈여겨 보니 비할 데 없이 흉험하였는데, 소현은 끝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므로 선왕이 일찍이 소현이 현명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지난날 심양에 갔을 때 강씨가 평소에 탁자를 받쳐 놓았던 나무 조각을 다락 위에 두었다가 돌아올 때에 소리쳐 말하기를 ‘나무 조각에서 가지와 잎사귀가 돋았다.’고 하면서, 감춰두고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않더니, 소현의 상을 당해서는 또 곡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처음에 이것을 신기한 상서라고 여겼는데 지금 도리어 재앙이 되었다.’ 하였는데, 대체로 세자의 자리에 있으면서 상서를 바란다는 것은 이것이 과연 무슨 마음이란 말인가.

옛날 허 세자 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085) 고 하였는데, 이 일 또한 어떠한가. 소현(昭顯)이 병이 나자 의원이 진찰을 해 보고 조심하여 조섭하지 아니한 때문이라고 하였는데, 강씨가 싫어하여 이 사실을 숨겼으며, 소현의 상을 당한 뒤에 유복자(遺腹子)마저 살해하여 그 병을 숨긴 흔적을 엄폐하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하는데 무엇을 차마 못하겠는가. 사람의 아비로서 미혹한 마음에 가리워져서 심지어 자식까지 죽이는 경우가 옛날에도 간혹 있었으나 어미로서 자식을 죽이는 경우는 무조(武曌)086) 말고는 들어보지 못했으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조차 없다. 내가 효성이 없어 남에게 신용을 받지 못하므로 세상에 떠도는 실없는 이야기가 오래까지 그치지 않고 있으니, 내 매우 통탄해 마지 않는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미 성상의 하교를 듣고 나니 모든 의혹이 환하게 풀렸습니다. 이후부터는 신민들도 마땅히 의혹을 풀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진실로 의심할 만한 단서가 있었다면 내가 어찌 지금까지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 아이는 바로 소현의 혈속이며, 그들의 죄가 아니다. 그리고 그 아이가 본래 질병이 많으므로 항상 서울로 데려오고 싶었으나 마침 구애되는 일이 많아서 뜻대로 하지 못했다. 재자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곳 형편을 들어본 다음에 천천히 처리하려고 한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들은 바에 의하면 그 아이 역시 건강하지 않다고 하는데, 만일 어느날 갑자기 기후(氣候)에 몸을 상하여 섬에서 죽게 되면 아마도 전하께서 은혜를 베푸시는 도리가 아닐 듯 싶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나 역시 염려하고 있었다. 마땅히 잘 처리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사위는 지금 아무 직명이 없어 보통 사람과 같습니다. 국법에 의친(儀親)의 자손이라 하더라도 으레 보관(補官)을 주는 규정이 있는데, 이 사람은 바로 소현(昭顯)의 사위입니다. 왕가(王家)의 혈속을 향리에 사는 보통 사람과 비등하게 할 수 없으니, 관직을 제수하고 녹봉을 주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일은 조정에서 마땅히 잘 헤아려 처리할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탐라(耽羅)로 표류해 온 한인(漢人)은 비록 그대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나 역시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대의(大義)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람의 도리로만 따져봐도 사실 차마 못할 일이다. 지난날 우리 나라 사람이 잘 처리하지 못하고 명나라의 백성을 묶어서 호랑이 입에다 던져 넣어 마침내 모두 참사를 당하게 하였으니, 내 항시 통한을 금치 못한다. 그런데 지금 또 이자들을 저들에게 몰아 보내다니 내가 어찌 차마 이런 일을 하겠는가. 다만 생각해 보면 이미 잘 처리하지 못했으니, 비록 따뜻한 약간의 인정을 베풀어 숨겨주고 보내지 않는다 하더라도 국가의 계획으로 보면 비밀이 누설될 염려가 없지 않고, 누설된 뒤에 저들이 비록 우리 나라에게 책망한다 하더라도 그 염려가 반드시 국가가 멸망하는 데까지 이르지는 않을 것이니 염려할 것이 없다. 그런데 매번 이러한 일로 그 허물을 일을 맡고 있는 신하에게 돌려 으르고 놀리며 만 가지로 욕을 보이고 있다. 이경석(李景奭)이경여(李敬輿)는 모두 일을 맡았던 대신으로 거의 불측한 지경에 빠져 아직도 버려진 가운데 있는데, 나로 하여금 임의로 쓰지 못하게 하니 실지로 다시 이와 같은 염려가 있을까 염려된다. 지금 나라를 원망하는 간사한 무리가 기회를 틈타 꾀를 부리려고 하는 자가 없지 않을 것인데, 국가에서 진실로 살펴 분변하기가 어려우므로 비록 의심스럽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너는 필시 음흉한 역적일 것이다.’ 하고서 죄를 줄 수 있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는 미봉책을 쓰는 것만 못하므로 한갓 스스로 개탄만 하고 있다. 내 이미 재주가 없는데다 조정에 있는 여러 신하들도 의지할 만한 사람이 없어 시세(時勢)가 여기에 이르니 일이 구차하고 소략한 경우가 많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천 리나 되는 넓은 땅을 소유하고서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했다.’ 했는데, 지금 수천 리나 되는 강토를 가지고서 움추린 채 활기를 되찾지 못하고 있으니 더욱 한스럽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시운이 불행하여 이 어려움을 당했는데, 기밀이 사전에 드러나 비밀스러운 계획이 없으니 어찌 크게 걱정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표류해 온 한인(漢人)을 지금 만약 배를 마련해서 돌려보내면 뜻밖에 생길지도 모르는 화를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주(濟州)는 절도이므로 모든 일을 비밀리에 할 수 있으니, 그들을 섬 안에 있게 하고 관에서 늠료(廩料)를 지급하여 여생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 어찌 불가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대의 말은 잘 생각해 보고 한 말이라고 하겠다. 다만 만약 비밀을 지키지 못하게 되면 결국 저들의 힐책을 받을 것이니, 당초에 곧바로 보내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그대 말을 시행하기 어렵다마는, 이 다음부터는 비국에 말하여 변신(邊臣)에게 분부하기를 ‘혹시라도 다시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경우 수신(帥臣)에게 번거롭게 보고할 것 없이 바로 비국에 알려 품처토록 하되, 만일 타고 있는 배가 견고하여 실을 만하다면 그곳에서 잘 보호하여 보내도록 하고 배가 부서진 경우에도 즉시 치계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고 시끄럽게 소문이 나지 않게 하라.’고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지난해에 불러 쓴 신하들은 모두 시골에서 글을 읽던 사람으로 돈독하게 수양을 한 공이 있으니, 만약 그들을 조정에 있게 했다면 어찌 세상의 모범이 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꺼려하는 바가 되지 않았겠는가. 그 당시 흉적의 무리들이 저희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여기고서 오랑캐에게 유언 비어를 퍼뜨려 그들로 하여금, 척화(斥和)하는 거조가 다시 재야 선비들한테서 나올 것이라고 의심을 하게 하여, 마침내 위협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시세가 이렇게 되어 그들을 다시 쓰지 못한 것이지 내가 어찌 그들을 잊어버려서 그러했겠는가. 실지로 이 두세 명의 신하에게 화를 끼치게 될까 두렵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 당시에 송시열(宋時烈) 등이 일을 세밀하게 하지 못하여 마침내 낭패되고 말았는데 신은 실로 한스럽게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무릇 사람의 재주에 대하여 어떻게 두어 달 만에 능력이 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송시열을 재주가 없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가 재주가 있는지 없는지 아직 시험해 보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지난번에 송시열의 상소에 대하여 내가 비답하기를 ‘비록 시골에 있다 하더라도 생각한 바가 있으면 숨기지 말고 모두 진달하여 나의 헛점과 실책을 보완토록 하되 마치 좌우에 있는 것처럼 하라.’고 했던 것은 사실 뜻한 바가 있어서였다. 다만 형편에 구애되어 지금은 채용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보려고 한 것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이에 이르렀으니 실로 이는 신민의 다행입니다. 선비가 세상의 실정에 대하여 어두운 점은 있다 하더라도, 성상의 좌우에 두어 드나들며 바른말을 하게 하여 위로는 성상의 덕을 보필하고 아래로는 세상의 본보기가 되게 하는 데 있어서는 선비가 아니면 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날 불러 쓴 신하는 비록 청나라 사람에게 말을 들을까 혐의스러우나 이밖에 어찌 또 채용할 만한 훌륭한 인재가 없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시골에 있는 사람이라도 구애되는 바가 없는 자라면 내가 채용할 수 있다. 과연 누구를 지목하겠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현재 윤휴·윤선거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유학(儒學)으로 당대의 촉망을 받고 있습니다. 전하께서 특명으로 백의(白衣)를 소견하시기를 고사(古事)처럼 하시어 제각기 갖고 있는 생각을 진달하게 하여 그들의 재주가 쓸만하면 채용하고 그렇지 않으면 돌려보내는 것이 가합니다. 윤휴윤선거는 모두 세신(世臣)인데, 만약 그들의 인품을 논한다면 윤휴는 재주와 식견이 탁월하고 윤선거는 국량이 견고하고 확실합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선비를 채용하는 방법은 조용히 순서에 따라 해야 하는데, 매양 서둘러 진용하려 하고 세상 사람들도 또 따라서 지나치게 책망을 하여 낭패를 사게 하니, 이야말로 탄식할 일이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요즈음 사람들 가운데 세상 일에 전혀 마음을 쓰지 않는 자는 실로 쓸만한 재주가 없습니다만, 이 사람들은 비록 시골에 있다고 하더라도 세상을 잊지 않은 자들이니, 전하께서 정성을 다하여 부르시면 어찌 나와서 전하의 쓰임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의 재주와 학문은 세상에서 추대하는 바이니 여러 신하들에게 물어보아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그들의 성명(姓名)을 써서 올리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그대의 상소 중에 유계의 일을 논하면서 ‘별도로 참소가 자주 있었던게 아니냐.’고 한 것은 까닭이 있다. 그대만 이 말을 한 것이 아니라 그전부터 이런 말이 있었다. 이른바 관용을 베풀었다는 말은 당초에 옥당이 차자를 올렸을 때 너그럽게 답한 것을 지적한 듯한데, 이는 많은 관원에게 답한 것이지 어찌 유계를 위한 것이겠는가. 유계가 상소를 올린 뒤에 곧바로 그의 죄를 다스리지 않은 것은 졸곡(卒哭)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용히 처리하고자 해서였다. 내가 어찌 사람들이 참소하는 말을 듣고서 죄를 주겠는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이른바 너그럽게 용서를 했다는 것은 상소를 한 후에도 여러번 근반(近班)에 제수되었기 때문이었고, 이른바 참소가 자주 있었다는 것은 신이 반드시 이러한 일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처음에 실정이 아닌 일로 성상의 노여움이 갈수록 격렬했으므로 그 이유를 찾지 못하여 혹시 이러한 일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 것이니, 가상적으로 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가 당초에 단지 상소만 했었다면 어찌 노여워할 것이 있었겠는가. 논계(論啓)하여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미웠던 것이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이 일에 대하여 신이 상세히 알고 있으므로 그를 용서해 주는 것이 가하다는 상소를 누차 올렸었습니다만, 지금 마땅히 그 말씀에 대하여 마무리를 짓겠습니다. 그 당시에 전하께서 새로 즉위하셔서 언관을 너그럽게 대하셨으므로 단지 종조(宗祖)와 시호가 겹치는 것을 미안하게 여겼으므로 전례에 합당하지 않은 점을 진달하려 했던 것입니다. 부제학 여이징(呂爾徵)이 최초로 그 논의를 제기하여 두 번이나 회의를 하였지만 결국 차자를 올리지 못했습니다. 심대부가 예를 논의한 거조를 중간에 그만 둘 수 없다 하고 먼저 상소를 올렸는데, 유계도 상소를 잇따라 올렸습니다. 유계가 간관(諫官)이 되었을 때 사피한 말이 실책이 많았으므로 이 일로 죄를 삼으면 저도 달갑게 여기겠지만 이는 언어의 실수에 불과합니다. 그가 선왕을 폄하하고 박대했다는 하교에 대해서는 신은 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 뒤에 조빈(趙贇)은 사간이 되고 유계는 헌납이 되었는데, 조빈은 말하기를 ‘이 일은 막대한 전례이므로 다시 논의하지 않을 수 없다.’ 하고 유계도 말하기를 ‘대간이 아뢴 말은 사체가 자못 달라 임금을 의논한 일에 가까우므로 차자를 올려 논쟁하는 것만 못하다.’ 하니 조빈도 그럴 듯하게 여겨 연명(聯名)하여 차자를 올리려고 이미 상소를 초해 놓았는데, 다른 일로 인하여 체직되는 바람에 그 일을 하지 못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유계 등의 본정이 다른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 사람은 충후(忠厚)한 기풍이 있었다. 송 인종(宋仁宗)이, 미세한 잘못이 있다 하여 상미인(尙美人)여이간(呂夷簡)의 참소를 받아들여 후비를 폐치하는 행위를 하였는데도 당시에 심히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고 묘호(廟號)를 인종(仁宗)이라고 하였었다. 모르겠다만 요즈음 사람의 논의가 송나라 선비보다 얼마나 뛰어나기에 기필코 자기의 뜻을 펼치려 하는가."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신이 진달하는 것은 그 본정이 사실 다른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설령 유계 등이 비방한 죄가 있다 하더라도 어찌 성명의 세상에서 금고를 당하게 하여 허물을 덮어주는 덕성을 보여주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록 구언하는 전교를 내리지 않았더라도 가까이 모시는 신하들은 마땅히 생각한 바가 있으면 반드시 진달하여야 할 것인데 하물며 내가 이미 구언하였고 그대가 또한 숨김없이 모두 진달하였으니, 내가 과실로 여기지 않는다. 비답을 내리지 않은 것은 번거롭게 소문이 날까 염려되었기 때문에 그대를 불러보고 하유하는 것이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4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

  • [註 085]
    허 세자 지(許世子止)가 약을 맛보지 않은 것에 대하여 옛 사람은 오히려 임금을 시해했다 : 춘추 시대 허(許)나라의 도공(悼公)이 여름철에 병이 들어 세자가 올린 약을 먹었는데, 중독이 되어 죽으니, 춘추전에 "‘허 세자가 그 임금을 죽였다.’고 썼다. 이는 세자가 아버지가 먹을 약을 먼저 맛보지 않은 것을 죄준 것이다." 하였다. 《춘추전(春秋傳)》 소공(昭公) 19년.
  • [註 086]
    무조(武曌) : 당(唐)의 측천무후. 고종(高宗)의 후비(后妃)로 고종의 사후에 그의 아들 중종(中宗)과 예종(睿宗)을 폐하고 스스로 제위(帝位)에 올라 국호를 고쳤음.

○丁卯/副校理閔鼎重上疏曰:

伏覩聖上畏天驚災, 側身修省, 下敎求言, 辭意懇切, 臣不勝感激, 敢陳所懷, 而第其所言, 有關機密, 不敢露章, 謹此貼黃以上。

其貼黃曰:

天造不幸, 國步艱虞, 上下惴惴, 恒恐莫濟, 而加以天心不豫, 災沴荐臻, 國勢顚隮, 如水益深, 而今歲之旱乾, 又至此極, 民庶遑遑, 大命近止。 嗚呼! 誠可謂太息流涕之秋也。 臣伏覩, 聖心儆懼, 夙夜焦煎, 自責甚切, 求過甚急, 敷求直言, 綸音懇惻, 凡在臣民, 莫不感激拭目, 思欲效萬一, 何況如臣駑劣, 久侍經幄, 受恩深厚, 其可以妄言爲戒、獲罪爲懼, 不進一言, 孤負聖明哉? 仍念, 臣遭遇盛際, 濫荷洪私, 忝在侍從, 已經數年, 未嘗有一毫裨益, 有所報答, 而然聖上每軫眷渥, 不賜屛斥。 不知聖上, 何取於愚臣而至於此也? 或者, 聖上憐臣愚戇、察臣憂愛, 靡他, 優容假借, 以備任使, 則臣亦何敢竊冒淸班, 虛辱寵命, 而不盡胸中之所蘊於明主之前哉? 臣請先陳臣之素志, 次及近日之事, 俾聖上有以洞察臣愚衷, 而臣亦欲知聖志之所存, 果如何耳。 臣初爲祿仕, 濫竊科第, 通籍以來, 累除近列。 前後拜命, 不敢固辭者, 非謂臣之才分自能堪當, 幸値聖上臨朝, 發嘆將大有爲, 而顧惟在廷之臣僚, 蹜蹜計不及日, 謀不及遠, 上無所倚仗, 下無所承奉, 荏苒日月, 終至聖志漸懈, 時勢益隤, 悠悠國事, 如水赴壑, 如日下山, 衰微旣甚, 亂亡成象, 將無以仰副我聖上有爲之志, 而爲天下後世辭。 故臣竊不自量, 忍尤冒進, 庶幾獲近天光, 一陳所懷, 而奉身以退。 及登筵席, 又不敢盡言者, 誠慮人微計淺, 無足裨補。 然其請立大志, 以爲標準; 收拾人材, 以壯元氣; 廓開言路, 以通下情; 奮發事功, 以恢大業, 臣之眷眷, 要不出此, 而誠意淺薄, 辭說拙訥, 其所敷心瀝肝之言, 未免陳談妄說之歸, 竟不能上感天聽, 下達愚悃, 此則臣之罪也。 然臣不敢便生疑惑, 輒用自沮者, 良以君臣之間, 貴在誠意交孚, 愚臣本意, 殿下或未之深察, 聖心所在, 群下不可以窺測也。 方今殿下所以上嚴天威, 下恤民隱, 惕厲圖惟, 靡不用極, 則正是人臣效忠之日, 此臣之所以冒竭惓惓, 思欲畢陳危衷, 以冀殿下之進退之矣。 伏惟聖志堅定, 臣不敢瀆請, 而收拾人材之說, 請又以反覆之, 而惟殿下垂察焉。 臣竊觀近日人物眇然, 朝廷乏才, 經心世務者, 罕見其人, 只有一二當事之臣, 酬應於日用之間而已。 舍騏驥而致千里, 乘泛柎而濟大海, 不待智者, 而知其難矣。 高宗思道而傅說起, 宣王撥亂而申甫降, 在聖上至誠以求之耳, 豈以今世而無賢哉? 然女以自守爲貞, 士以不衒爲貴。 雖有龍蟠鳳逸之賢, 苟無誠與禮也, 殿下烏得而用之哉? 至於向年儒臣等之優禮奬拔也, 人皆喜其進用, 臣獨慮是人等, 或不無差失, 不能盡副聖心所須, 以爲儒者闊於事情, 無益於國, 而便沮日後求賢之志, 曾未幾日, 此慮果符, 事與時違, 終致狼狽。 今日進言於殿下者, 固知難以儒說。 然人之才, 必有養而後成, 有求而後至。 古昔聖王, 旁求禮招者, 不朝而野; 碩輔、哲士應時而出者, 不顯而微, 則當今之時, 隱伏山野, 足以應殿下之求, 而成殿下之志者, 又安知其無是人哉? 臣頃於筵席, 略陳此意, 而不敢歷指以告者, 實恐人微職卑, 不堪薦進, 一出臣口, 便輕衆望, 彼此有損, 徒爲無益爾。 殿下苟能誠心以求, 何患不知哉? 抑又今日殿下之取人聽言也, 不于逆于心, 而于遜于志, 是取是聽, 稍有頭角者, 便不能自立於朝, 此恐時事乖違之大者也。 下情何由而通, 事功何由而立乎? 此臣之中夜竊歎, 而每不能忘言者也。 嗚呼! 方今國勢頻蹙, 天戒爀然, 可言之事, 臣不能悉, 抑又以所槪於臣心者, 言之可乎? 嗚呼! 漂海漢人, 豈非我昔日天朝之赤子乎? 設令國家不幸至此, 尙何忍一切縛縶遺黎, 驅送仇敵, 略無疑難哉? 此誠人情之所怫鬱, 聖心之所怛然者也。 況前日所送, 皆被屠殺, 而今又知其不免, 而迫就死地, 豈我國之所可忍爲也? 此輩飄蕩海濤, 九死十生, 賴天之賜, 得到我疆, 心念舊日, 謂得活境, 而轉俘千里, 悉投有北, 其爲矜惻, 奚足多言? 人情之所不忍, 天意亦必有不平者矣。 行不義、殺無辜, 豈不足感傷天和, 以致凶災乎? 濟州本是海中絶島, 彼此消息, 可秘勿泄。 今若具船以送, 任其所之, 則意外之患, 不可不念, 如其接置島中, 略給廩料, 待以不死, 以終其年, 則恩義旣伸, 擧措亦便。 雖復奸賊陰通, 虜人致責, 旣難往驗, 空言肆嚇, 逆料事勢, 必無大患。 況前日執送之時, 賊猶云: "爾國刷馬幾許多也?" 其心固已竊笑我國之無謀。 今胡不鑑於此, 而懲前之爲哉? 萬有一不得終秘, 則我將直辭以言曰: "天朝非前日父母之國乎? 向者旣見大國之屠殺, 誠不忍知其然而迫就死地也, 非有他也?" 彼雖豺狼, 固不欲以此而失一國之和也必矣。 臣援筆至此, 不覺涕之無從也。 不識聖上以爲如何哉? 頃日李袤之請鞫辛生者, 非之言也, 實是國人之所共言也。 於嚴威之下, 有不敢索言者, 臣以爲, 君臣猶父子也, 凡有所懷, 何敢不盡? 臣竊謂, 逆之獄, 初出於內間人, 謂逆、賊, 實與其事, 擧世聽聞, 不無驚惑。 向者二賊旣敗, 奸計畢露, 卽今閭巷衆談, 或以爲二凶奸巧, 或能上蔽天聽也。 然臣以爲, 此非外人所可得知, 殿下必已備燭, 而周察之矣。 如或其間有一毫可疑之端, 則兄弟之倫, 本之天顯, 速宜伸雪, 以尉九泉、以弭災戾。 但念, 此事干係先朝, 殿下必以是爲難, 而欺蔽以方, 聖哲難免, 則何嘗有累於先王之大德, 而今日之善繼善述, 適足有光於先王矣。 如其然也, 先王在天之靈, 豈不以此望之於殿下也? 如或不然, 亦望快示是非, 以去國人之疑, 不亦可乎? 且其子女, 乃是王家血屬, 藐然孩兒, 尙拘海島, 危喘如綫。 倘或一朝霧露所傷, 不終天年而死, 則雖復追加矜憐, 已無及矣。 惟聖上亦嘗念此, 累發慈悲, 而大臣每以虜使來問爲嫌。 形勢之難便, 雖云如此, 處置得宜, 實在於我, 曷不爲將順, 以廣我聖德乎? 況其女長成, 歸人已久, 則合宜推恩, 補官給祿, 編之屬籍。 豈可使吾君血屬, 淪沒閭巷, 作一鄕里凡人也? 至於兪棨, 則臣嘗再陳可恕之狀, 而今聞審理文案, 沒其姓名, 付黃以下。 是殿下斥於倫紀之外, 而深絶之也。 臣不勝瞿然惶悚, 始覺前言之爲妄, 而自陷於營護大罪之地。 臣不敢負罪自安, 獨免刑章, 伏願殿下, 先賜譴罰, 以彰臣罪。 然臣愚昧死敢言, 更願聖上加之意也。 臣聞, 烏、鳶之卵不毁而後, 鳳凰來; 誹謗之罪不誅而後, 嘉言至。 設使之狂妄, 萬一出於誹謗, 猶不當錮於聖世, 以彰含垢之德。 惟也, 非先朝侍從之臣, 殿下之所嘗優容者乎? 豈敢訾謗先王, 自取莫大之罪戾乎? 當初, 以儒臣, 當國家大事, 只欲討論典禮, 以備聖聽耳。 若以訾謗罪之, 則擧國皆知其冤矣。 本孤忠樸愚, 不理於口, 無乃別有三至之讒, 至於慈母之前乎? 亦惟聖上之平心易氣, 更加之意也。 一夫抱冤, 天氣爲之謬戾, 之獨不蒙曠蕩之典, 恐非天覆之意也。 臣仰恃聖慈, 負死瀆擾, 臣罪萬死, 抑臣所陳, 語涉忌諱, 且極狂妄, 而旣承聖旨, 諭之以盡言, 揆以愚分, 亦當畢殫忱悃, 以暴心肝, 故玆敢冒死上章, 或冀採納, 以少裨殿下畏天弭災之實, 而然臣所言, 皆國家機密, 直恐易於洩漏, 以招意外之患, 徒爲觸忤, 上有累於聖德。 區區愚忠, 有見乎此, 敢此手寫, 密封以進, 伏乞聖明, 少垂察焉。

疏入, 上卽召見面謂之曰: "覽爾疏辭, 蓋是應旨進言, 而語及逆之事, 爾有何聞知, 而出此言耶?" 鼎重對曰: "臣久侍近班, 無所裨補, 適當天災示警, 旱暵孔慘, 聖心憂畏, 夙夜靡寧, 下敎求言, 誠意懇至。 分義所在, 終不敢泯默, 敢陳所懷。 至如逆獄事, 則臣以年少新進, 當初獄情, 不得其詳, 而蓋此獄, 出於宮掖, 其間實狀, 外人之所難知難言者也。 變生至親, 人皆驚惑, 其時或以爲, 逆、賊, 實與其事, 閭巷傳疑, 至今未息。 逮至兩賊伏法, 奸謀畢露, 群情愈惑, 皆以爲, 兩賊有所欺蔽, 而鍊成其獄也。 伏惟聖上, 必已洞察其情狀矣。 苟有一毫可疑之端, 則天倫至情, 必倍惻怛, 嚴鞫辛生, 俾卽伸冤, 如或逆狀明白, 則亦宜早定是非, 快去國人之疑惑也。" 上曰: "以常法言之, 爾難免重罪, 而予旣求言, 爾之所陳, 亦出於有懷必達之義, 故欲面言之爾。" 鼎重曰: "臣旣有所懷, 冒死陳疏, 而曲加優容, 不以爲罪, 至蒙賜對, 不勝惶恐感激。" 上曰: "已斷之獄, 更無可言, 而外人之以此囂囂, 先王亦嘗洞知矣。 夫所謂致疑於逆、賊者, 蓋其初疑未釋而然也。 此獄旣非尋常之變, 則豈一二凶徒所可欺蔽先王者哉? 若使昭顯在世之時, 已有此變, 而以今兩賊兇計觀之, 則或不無可疑, 而昭顯旣沒, 一男兒爲人, 決不可付托基業, 則外人之所共知, 兩賊實無所顧忌, 有何用計欺蔽之理哉? 逆之所信任女奴義貞就服供辭以爲, 頻送黃金三四兩于本家云, 於此可見散盡千金, 而徒黨之盛, 未必不由於此也。 夫如是故, 不逞之輩, 掩其實狀, 譸張浮言, 而世俗之人, 元無主見, 不諒是非, 扇動傳訛, 以致國是靡定, 予知畢竟必有不美之言, 亦及於寡躬矣。 頃日請鞫辛生之說, 誠極寒心。 外人之致疑如此, 故先王每以此爲慮, 而至於禮玉 【姜之母。】 之承服, 或以爲, 自點威脅, 勒成斷案, 豈有是理? 文星 【姜之娚。】 之妾, 妙於詛呪, 文星後妻, 亦死於詛呪云矣。 蓋其兇謀, 始於其家, 終至內外相應, 而同惡相濟。 若無根因, 則詛呪本末, 何以明白於其承服之供辭耶? 此則非威脅可得, 而世人之知與不知者, 一辭致疑, 吁亦不幸矣。 請鞫辛生者, 與金晋宗所云: ‘嚴鞫僧人, 則自爾承服。’ 之說, 正相同, 甚無謂也。 爾以年少之人, 必不能盡知其時獄情矣。" 鼎重曰: "臣未曾詳聞實狀, 今承聖敎, 快釋前疑。 頃日李袤微發其端, 不敢明言, 臣意以爲, 君臣猶父子, 苟有所聞, 固當盡言無諱, 故玆敢疏陳矣。" 承旨李弘淵曰: "今承聖敎, 不啻丁寧, 臣隣疑惑, 自此可釋; 閭巷浮言, 自此可息, 而第徒黨之敎, 實甚未安。 今日殿下臣民, 其孰有逆之徒黨乎?" 上曰: "當初訛言, 隱其逆狀, 故予指此而言, 非謂今日有如許人也。" 上又曰: "旣發言端, 可盡言之。 國家不幸, 大逆不道之人入於宮中, 可勝言哉? 昭顯自是善人, 而但有中無所主之病。 逆之險惡無比, 惟務壅蔽恣行凶悖, 昭顯亦不能制斷矣。 自古王家兄弟, 自幼各就阿保, 迨及長成, 又各異居, 實無團會之樂, 至於東宮, 則名分尊嚴, 又不得源源相見, 而先王嘗以爲, 同氣之親, 不可各處, 痛祛此規, 命予兄弟自幼及長, 同居一室, 有若閭閻士夫之家, 不知尊卑之有別, 相友之情, 有如是矣。 及至亂後, 予爲質於中, 目見之所爲, 則凶險無倫, 而昭顯終不覺悟, 是以, 先王亦嘗痛恨昭顯之不明矣。 前日赴時, 以其平日支床木片, 置諸樓上, 及還, 倡言以爲: ‘木片自生枝葉。’ 而秘不示人, 及遭昭顯之喪, 又哭而言曰: ‘吾始以爲奇祥, 今反爲災矣。’ 夫處儲貳之位, 而希冀祥瑞者, 是果何心也? 昔許世子 不嘗藥, 而古人猶以爲弑君, 則此又何如也? 昭顯在疾, 醫官診之以爲, 不能愼攝之致, 惡而諱之, 及其喪後, 有遺腹兒仍殺之, 以掩其諱疾之迹, 是可忍也, 孰不可忍也? 爲人父而有所蔽惑, 至於殺子, 則古或有之, 若其以母殺子, 則武曌後, 未之聞也。 此不可以人理責之, 而予無誠孝, 不能見信於人, 故世間浮議, 久而不已, 予甚痛恨。" 鼎重曰: "臣旣聞聖敎, 昭然開釋。 自此臣民, 亦當解惑也。" 上曰: "苟有可疑之端, 予豈至今置之耶? 其子乃是昭顯之血屬, 而非渠等之罪也。 且其兒素多疾病, 故常欲率來京中, 而適緣事多拘忌, 不果如意。 欲待齎咨官之回, 聞彼中形勢, 然後從容處之耳。" 鼎重曰: "聞其兒, 亦是未成人。 若或一朝觸傷風露, 死於島中, 則恐非殿下推恩之道也。" 上曰: "予亦念之。 自當善處矣。" 鼎重曰: "其壻則時無職名, 有同常人。 國法雖儀親子孫, 例有補官之規, 此卽昭顯之壻也。 王家血屬, 不可與鄕里凡人比等, 似當授職給俸矣。" 上曰: "此等事, 朝廷當商量而處之矣。" 上又曰: "耽羅, 雖無爾言, 予亦惻然。 大義不須言, 求之人理, 實所不忍。 前日我國之人不能善處, 束縛天朝赤子, 投諸虎狼之口, 竟至斬殺無遺, 予常痛恨。 今又以此輩驅送彼中, 予豈忍此乎? 但念旣不能善處, 則雖以煦煦少仁, 掩置不送, 其在國家之計, 漏洩之患, 亦不可不慮。 漏洩之後, 彼雖致責於國家, 其患必不至於覆亡, 不須關念, 而每以此等事, 歸咎於任事之臣, 恐嚇操縱, 侵辱萬端。 如李景奭李敬輿, 俱以倚任大臣, 幾陷不測, 尙在廢棄中, 使予不得任意用之, 實恐復有如此之患矣。 方今不無怨國之奸, 必欲乘釁售計, 而國家固難辨察, 雖或可疑, 豈敢曰汝必陰賊而加之罪乎? 到此地頭, 不如彌縫, 故徒自慨然。 予旣無才, 在廷諸臣, 亦無倚仗之人, 時勢至此, 事多苟簡。 古人云: ‘未聞以千里而畏人。’ 今以數千里疆域, 縮伏而不能振發, 尤可恨也。" 鼎重曰: "時運不幸, 値此艱厄, 而機事宣露, 未有密勿之謀, 豈非可憂之大者乎? 漂漢輩, 今若具船還送, 則意外之患, 不可不念。 濟州則乃是絶島, 凡事可以秘密, 姑令接置島中, 官給廩料, 以終天年, 豈不可乎?" 上曰: "爾言可謂善思之矣。 但若致不密, 畢竟爲彼人所詰責, 則不如當初直送之爲愈。 今難用爾言, 而此後則言于備局, 分付邊臣, 如或復有如此之事, 不必煩報帥臣, 直通于備局, 以爲稟處之地, 而如其所乘之船, 完固可載者, 則自其處善護以送, 其敗船者, 亦卽馳啓, 以待朝廷處置, 而俾不至煩人聽聞可矣。" 上又曰: "頃年召用之臣, 皆以山林讀書之人, 有篤信自修之功, 若置諸朝端, 豈不爲一世矜式, 而使人有所敬憚也哉? 其時兇賊輩以爲, 將不利於渠輩, 飛語虜中, 使彼遂疑斥和之擧, 復出於山野之人, 卒致恐嚇之患。 時勢至此, 不得復用, 予豈相忘而然也? 實恐貽禍於玆二三臣故也。" 鼎重曰: "其時宋時烈等, 作事不密, 竟致狼狽, 臣實恨之。" 上曰: "凡人之才, 豈可以判其能否於數月之內乎? 人言時烈無才, 而予則以爲, 未及試其有才無才耳。 向者時烈之疏, 予批以雖在山野, 凡有所懷, 悉陳無隱, 以補予闕失, 如在左右云者, 予實有意。 第拘於時勢, 今不能用, 故思聞其言耳。" 鼎重曰: "聖敎至此, 實是臣民之幸。 儒者闊於世情, 則雖或有之, 置諸左右, 出入啓沃, 上以裨補聖德, 下以矜式一世, 則非儒者莫可。 前日召用之臣, 則雖以致煩於淸人爲嫌, 此外亦豈無可用之賢才乎?" 上曰: "雖山林之人, 無所拘忌者, 則予可以用之矣。 果指誰歟?" 鼎重曰: "今世如尹鑴尹宣擧等, 俱以儒學, 爲時屬望。 殿下特命白衣召見如古事, 使之各陳所懷, 其才可用則用之, 不可用則遣還可也。 宣擧, 俱是世臣, 而若論其人品, 則才識超邁, 宣擧器局堅確矣。" 上曰: "用儒之道, 從容循序可矣, 而每欲汲汲進用, 世人又從而責望太過, 以致狼狽, 是可歎也。" 鼎重曰: "今世之人, 絶無留心世務者, 實無可用之才。 若此人等, 雖在山野, 亦非忘世之人, 殿下以誠求之, 豈不出而爲殿下之用哉? 其人才學, 爲世所推, 問于諸臣則, 亦可知矣。" 上命承旨, 書其姓名以進。 上又曰: "爾疏中論兪棨事以爲, 無乃別有三至之讒云者, 有由然矣。 非獨爾言, 自前已有此說矣。 所謂優容者, 似指當初玉堂上箚時優答, 而此所以答於多官, 豈爲也? 陳疏之後, 不卽治其罪者, 欲待卒哭, 從容處之故也。 予豈聽人讒言而罪之也?" 鼎重曰: "臣所謂優容者, 以其陳疏之後, 累除近班故也。 所謂三至之讒者, 臣非謂必有是事, 初以無情之事, 天怒轉激, 故求其由而不得, 慮或有此, 蓋設辭也。" 上曰: "於當初, 只上疏而已, 則有何可怒? 至欲論啓, 必伸己志, 是可惡也。" 鼎重曰: "此事臣所詳知, 故累陳其可恕之狀, 今當畢其說焉。 其時殿下新卽位, 優容言者, 故只以宗祖及疊謚爲未安, 欲陳典禮之不合。 副提學呂爾徵首發其論, 會議者再, 而竟不得上箚。 沈大孚以爲, 論禮之擧, 不可中止, 遂先投疏, 而兪棨之疏繼之矣。 爲諫官時, 避辭措語, 果是失着, 以此爲罪, 渠亦甘心, 此不過言語之失耳。 若其貶薄先王之敎, 則臣明知其不然。 其後趙贇爲司諫, 爲獻納, 以爲, 此是莫大典禮, 不可不更論, 以爲, 臺諫啓辭, 事體殊別, 近於議君, 不如陳箚爭之, 亦然之, 欲聯名上箚, 旣已搆草, 因事見遞而不果。 於此可見等之本情無他矣。" 上曰: "古人則有忠厚之風。 仁宗以微細之過, 用尙美人呂夷簡之讒, 至有廢后之擧, 而當時不爲深非, 廟號仁宗。 未知今人論議, 出於儒幾等, 而必欲伸己志耶?" 鼎重曰: "臣之所達, 陳其本情之實無他也。 設令等, 有誹謗之罪, 豈可錮於聖明之世, 不示含垢之德也?" 上曰: "雖非求言之敎, 近侍之臣, 固當有懷必達。 矧予旣求言, 而爾亦悉陳無隱, 予不以爲過矣。 不下批敎者, 慮煩聽聞, 故召見而諭之矣。"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49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인사-관리(管理) / 외교-야(野) / 왕실-비빈(妃嬪) / 왕실-종친(宗親) / 왕실-종사(宗社) / 사법-행형(行刑) / 변란-정변(政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