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우제·유계 석방·소현 세자 아들을 서울로 데려오는 문제를 논의하다
상이 기우제를 지내기 위하여 재전(齋殿)에 있으면서 삼공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의 극심한 가뭄은 고금에 없던 바이며 하늘이 견책을 보이는 것은 실로 내가 부덕한 때문이니 몹시 부끄럽다."
하니,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나라에 재변이 있으면 삼공은 자신의 허물로 삼아 사면하는 것이 옛 규례입니다만, 형식적인 일이기 때문에 신들은 묵묵히 일을 수행해 왔습니다. 전하께서도 반드시 스스로 노력하셨을 것입니다만, 그 허물을 가만히 생각해 보면 모두가 신들이 성상의 마음을 체득하여 덕화(德和)를 돕지 못했기 때문에 재앙이 거듭 이르게 된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신이 비록 정성을 다하여 비를 빈다 하더라도, 내가 실지로 하늘에 죄를 지었는데 감히 하늘을 감동시키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이에 재계하는 집에서 경들을 인견하여 도움되는 말을 들어서 그 실책을 보완하고자 한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하교하시어 사람들의 말을 듣고자 하신 지가 이미 여러 날이 되었는데, 한 사람도 진언(進言)하는 자가 없습니다. 이는 지난날 전교에 대응하는 상소를 올렸으나, 모두 채용하시는 실상이 없었으므로 잠자코 있는 풍습이 이미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내가 그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정성이 미진해서이다."
하였다. 좌의정 김육(金堉)이 아뢰기를,
"심지명(沈之溟)은 처음 역적의 공초에 언급되었을 때에는 홍전(洪瑑)과 차이가 없었는데, 재차 변사기(邊士紀)의 공초에 언급되었기 때문에 홍전은 사면했으나 심지명은 유배한 것입니다. 대체로 그가 광주(廣州)에서 병사를 빌렸다는 말은 날짜와 달수를 따져보니 심지명이 광주에 제수되기 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조금도 의심할 만한 흔적이 없습니다. 사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유계(兪棨)는 비록 양이(量移)하라는 은명(恩命)을 입었으나 정상을 참작해 볼 때 용서해 주어도 되겠기에 이에 감히 심리하는 가운데 넣어 의계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유계의 죄는 심대부(沈大孚)와 처음에는 차이가 없었으나, 유계가 대관이 되고 나서는 반드시 자기의 뜻을 펼치고야 말려고 했으니 진실로 국법이 있다면 어떻게 심상하게 보아 넘기겠는가. 심지명의 일에 대하여 영상과 우상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니, 정태화 등이 아뢰기를,
"이미 서로 알고 있었던 흔적이 없고 제배(除拜)한 날짜도 역시 서로 틀리니, 용서해 주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정배한 지가 오래되지 않았는데, 완전히 풀어주기는 어려울 듯하니, 등급을 감면해 주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상이 삼공에게 이르기를,
"교동(喬桐)에 유치해 둔 아이는 【소현 세자의 아들이다.】 어리고 병이 많은데, 오랫동안 섬에다 유치했다가 혹시라도 불행한 일이 생기면 그 참담한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항상 서울에다 두고 싶었으나 북쪽 사람들이 소문을 들을까 염려하여 그 때문에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로는 북쪽 사람들이 힐문하는 단서가 없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교동에 유치해 두면 본현에 폐를 끼치게 되고 서울에 있게 하면 북쪽 사람들이 소식을 들을까 염려되니 이징(李澂)073) ·이숙(李潚)074) 과 함께 있게 하는 것이 보다 편리하겠습니다."
하고, 김육과 우의정 이시백(李時白)이 아뢰기를,
"신들이 일찍이 서울로 옮겨 오자고 청하였는데, 지금 어찌 다른 말을 하겠습니까. 북쪽 사람들이 물어오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는데, 어찌 힐문받을 염려가 있겠습니까. 전하께서 여기까지 하문하시니, 이 얼마나 성덕에 빛나는 일입니까."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저들이 현재 틈을 엿보고 있으니 힐책해 올 걱정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김육이 아뢰기를,
"구왕(九王)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그러한 걱정이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청나라 사람이 어떻게 우리 나라 일에 대해 다 알 수 있겠는가. 대체로 전후에 걸쳐 힐책했던 일은 모두 정명수(鄭命守)가 조종했기 때문이다. 이때를 당하여 이 아이를 서울로 옮겨 온다면 힐문해 올 걱정이 전혀 없을지 어떻게 보장하겠는가."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서쪽 지방에 사는 사람 중에는 정명수와 친밀한 자가 꽤 많으므로 우리 나라에서 발생하는 미세한 일까지도 서로 통하지 않은 일이 없으니, 저들이 끝까지 이 일에 대하여 소문을 듣지 않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만약 이 일을 가지고 트집을 잡으면 무슨 말을 못하겠는가마는 나는 이 때문에 염려하고 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지금 이러한 상황에 이르러 마음대로 할 수 없으므로 후환을 일으킬까 염려되어 감히 받들어 따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자, 김육이 아뢰기를,
"그렇다면 재자관(䝴咨官)이 오래지 않아 돌아올 터이니 저들의 형편을 상세히 알아본 후에 처리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재자관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잘 헤아려 처리해도 늦지 않겠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열네 살 난 변사기(邊士紀)의 아들이 경원(慶源)에 정배되었는데, 듣자니 용기와 담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은 필시 국가를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을 것이므로 북쪽 변방에 있게 하면 후환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남쪽 변방 절도(絶島)에 이배(移配)하소서."
하니, 따랐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가 불행하여 역적의 변란이 잇따라 일어났으므로 역적과 연좌된 사람으로 숙질(叔姪)간의 친분이 있는 자까지도 이미 관노(官奴)로 삼았으니 비록 사면하라는 영이 있더라도 이들은 용납할 수 없는데, 여러 도에서 품계하는 것을 매번 보면 이런 자들이 섞여 있으니 일이 매우 부당하다. 이후부터는 다시는 거론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처음에 강옥(姜獄)075) 이 이미 완결된 뒤에 소현 세자의 세 아들을 모두 제주(濟州)에 유배보냈는데, 둘은 일찍 죽고 단지 셋째 아들만 살아 있으므로 상이 특별히 불쌍히 여겨 함양(咸陽)에 양이(量移)토록 하였다. 이윽고 교동으로 옮겨 놓고 때로 옷과 음식물을 하사하여 보살펴 주는 뜻을 보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소현의 아들들이 살아 있는지에 대하여 묻자 조정에서 이미 죽었다고 답하였다. 이 뒤로는 청나라 사신이 와도 다시 제기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지나치게 가뭄에 대한 걱정을 한 나머지 심리하는 법전을 들어 죄인을 관대하게 풀어 주고, 또 소현 세자의 셋째 아들을 서울로 데려와서 보살펴 주기에 편리하도록 하고자 해서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46면
- 【분류】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 가족-친족(親族)
- [註 073]
○上將禱雨, 在齋殿, 引見三公。 上曰: "今玆旱災, 振古所無, 天之示譴, 實由寡躬之不德, 予甚慙懼。" 領議政鄭太和曰: "國有災異, 則三公引咎辭免, 乃古例也, 而事涉文具, 故臣等泯默隨行矣。 殿下亦必自勉於躬, 而靜思厥咎, 無非臣等不能仰體聖心, 裨輔德化, 以致災沴之荐臻也。" 上曰: "大臣雖至誠禱雨, 而予實獲罪于天, 其敢望上格天心乎? 玆接卿等于齋室, 冀聞藥石之言, 以補闕失。" 太和曰: "下敎求言, 已有日矣, 而無一人進言者。 此是前日應旨之疏, 皆無採用之實, 故已成噤默之風矣。" 上曰: "是予聽納之誠, 有所未盡故也。" 左議政金堉曰: "沈之溟之初出賊口, 與洪瑑無異, 而以其再出於士紀之供辭, 故赦瑑, 而編配之溟矣。 蓋其借兵廣州之說, 以日月考之, 在於之溟未除廣州之前, 少無可疑之跡, 赦之宜矣。 兪棨雖蒙量移之恩, 本情可恕, 故玆敢議啓於審理中矣。" 上曰: "兪棨之罪, 與沈大孚初無異同, 而及棨爲臺官, 必欲逞志而後已, 苟有國法, 安可視以尋常乎? 沈之溟事, 於領、右相意何如?" 太和等曰: "旣無與知之跡, 除拜日月, 亦且相左, 似宜容恕。" 上曰: "定配未久, 似難全釋, 減等可矣。" 上謂三公曰: "喬桐留置兒, 【昭顯世子之子。】 稚弱多病, 久置島中, 或至不幸, 可勝慘怛? 常欲致之京中, 恐煩北人之聽聞, 以此不果矣。 自今以後, 可無北人詰問之端否?" 太和曰: "置諸喬桐, 則貽弊於本縣, 處之京城, 則有煩於聽聞, 不如與澂、潚同處之爲便也。" 堉及右議政李時白曰: "臣等曾請移致京中, 今豈有他說? 北人之不問已久, 寧有詰問之慮? 殿下之問及此, 其有光於聖德, 爲如何哉?" 太和曰: "彼方伺釁詰責之患, 不可不慮也。" 堉曰: "九王已死, 寧有此憂?" 上曰: "淸人豈盡知我國事乎? 凡前後詰責, 皆是鄭命守之所操縱也。 當此之時, 移置此兒於京中, 則詰問之患, 安保其必無乎?" 太和曰: "西路人, 與鄭命守親密者頗多。 我國微細之事, 無不相通, 安知彼之終不得聞乎?" 上曰: "彼若欲執此生梗, 何患無辭? 予以是爲慮焉。" 太和曰: "臣非不欲將順聖上之美意, 而時勢到此, 不得自由, 恐致後患, 不敢承奉矣。" 堉曰: "然則齎咨官不久當還, 詳知彼中形勢, 然後處之似當矣。" 上曰: "姑待齎咨官之回, 商量處之, 亦未晩也。" 太和曰: "士紀之子, 年十四者, 定配於慶源, 而聞有勇力。 此人必不係念於國家, 置之北邊, 恐有後患。 請移配於南邊絶島。" 從之。 上曰: "國家不幸, 逆變繼起, 逆賊緣坐之人, 如叔姪之親者, 旣沒爲官奴, 則雖有赦令, 不可容議, 而每見諸道稟啓, 則混及此類, 事甚不當。 今後更勿擧論可矣。" 初, 姜獄旣完之後, 昭顯世子三子, 竝配于濟州, 二人夭歿, 只有第三兒, 上特加矜憐, 量移咸陽。 已而徙置喬桐, 時賜衣資、食物, 以示眷念之意, 淸使嘗至我國, 問昭顯諸子存否, 朝廷答以已死, 自是淸使之來, 更不提起。 至是, 上憂旱甚切, 旣擧審理之典, 疏釋罪人, 又欲移第三兒於京城, 以便保育, 召大臣議之。
- 【태백산사고본】 8책 8권 49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546면
- 【분류】과학-천기(天氣)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 왕실-종친(宗親) / 외교-야(野) / 가족-친족(親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