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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6권, 효종 2년 6월 3일 무신 1번째기사 1651년 청 순치(順治) 8년

대신을 인견하고 외교·국가기강 문제·조세징수·지방 군사조직을 논의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원두표(元斗杓)가 아뢰기를,

"봉황성의 장수 여덟 사람이 한꺼번에 청국에 구금되었다는 말을 들었는데, 무슨 일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요즈음 듣건대 우리 나라 사람으로서 비밀히 상거래를 하는 자들이 깔려 있다고 하니, 성의 장수들이 구금된 것은 이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다. 의주 부윤으로 하여금 사실을 알아보게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듣건대 손이(孫伊)라는 자가 청국에서 권력을 잡고 있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른바 손이란 자는 그전 한(汗)의 심복으로서 지금의 한도 그를 신임하였으나 그 사람은 성질이 사나워 항상 남에게 굽히지 않기 때문에 면직되어 서인(庶人)이 되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제 필시 다시 등용한 모양인데 매우 불길한 사람이다."

하자, 형조 판서 이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최근 연경에 갔을 때 정명수의 기색을 보니 그전과는 전혀 달리 크게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빛이 있었으며, 의주에 당도했을 때 별이 떨어진 변고가 발생하자 청사(淸使)들이 서로 돌아보고 깜짝 놀랐으니, 저들 나라에 반드시 우려할 만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것일 것입니다."

하였다. 두표가 아뢰기를,

"의순 공주(義順公主)가 또 보로(甫老)에게 시집을 갔는데 그 사람이 동국의 일을 주관한다 하니, 마땅히 안부를 물어야 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차차 형세를 보아가며 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요즈음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져서 사람들이 법을 무서워하지 않아 만약 힘든 자리를 제수하면 어떻게 해서라도 벗어나려고 한다. 전 제주 목사 정언황(丁彦璜)은 국상(國祥)에 와서 참여한 것으로 보면 결코 심각한 병이 아닐 듯한데, 대신(臺臣)이 체차하라고 아뢰었으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며, 불러도 태연스레 오지 않아 사태를 관망하는 뜻이 있는 듯하니 이것이 가증스럽다."

하니, 영의정 김육이 아뢰기를,

"그 날짜를 헤아려 볼 때 당연히 왔어야 하는데도 아직 오지 않으니, 그 죄를 물어야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 제주 목사 정언황을 잡아다가 추고하라."

하였다. 김육이 아뢰기를,

"지금 상평청의 신하들이 때마침 다 입시하였으니, 민응형(閔應亨)이 진달한 바 양호(兩湖)에서 1결(結)에 쌀 세 말만 징수하는 법을 품정(稟定)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본청 신하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선조(先朝)에 호조 참판으로 있으면서 1결에 세 말을 징수하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여 공안(貢案)을 헤아려 정하고 선왕(先王)께서 판서 민성휘(閔聖徽)에게 하문하여 일이 거의 성사되어 가다가 최명길이 차자를 올려 풍년이 들 때까지 기다리자고 청하여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습니다. 저번에 민응형이 진소하여 세 말을 거두는 법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대체로 온갖 요역은 백성으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이 없고 그 중에 공물은 가장 견뎌내기 어려운 역입니다. 만약 이 법을 시행한다면 백성의 역이 반드시 고르게 되어 수화(水火)속에 놓여있는 듯한 백성이 구제될 가망이 있을 것이니, 신은 시행하는 것이 편의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법을 시행하거나 하지 않는 것은 오직 지부(地部)에 달려 있습니다."

하고, 두표가 아뢰기를,

"이 법은 대동법과 달라서 한번 1결에 세 말을 거둔 뒤에 다시 더 거두지 않으면 과연 편의할 듯하지만, 혹시 부득이하여 더 거둘 일이 생긴다면 백성의 원망이 반드시 갑절로 불어날 것이니, 신은 시행하지 않는 것이 편의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경들은 각자 의견을 말해 보라."

하니, 형조 참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 의논은 완벽하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내포(內浦)064) 는 부역이 유달리 무겁고 호남은 조금 가벼우니 양호의 백성은 똑같이 국가의 백성인데 한쪽은 무겁고 다른 한쪽은 가볍기 때문에 이와 같이 변통하고 옮겨 보내자는 의논이 있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 일은 호서의 부역을 변통하는 그것만이 아니란 말인가? 이른바 옮겨 보낸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 법을 호서 한 도에서만 행하면 징수한 쌀의 수량이 적어 한 도 공물의 부역을 충당할 수 없는데다 역을 고르게 하는 길이 아니기 때문에 이 법을 논의하는 자가 호서에 편중된 역을 호남으로 옮겨 정하려고 하지만, 신의 생각에는 호서의 역은 비록 한 푼의 감소가 있더라도 호남은 도리어 다섯 되가 추가되는 폐해가 있을 것으로 보이니, 감소된 자는 기뻐하고 추가된 자는 원망하는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만약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려고 하면 시행하는 것이 좋고 백성의 원망을 초래할 것이 염려되면 시행하지 않는 것이 좋으니, 이것이 이른바 완벽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이익을 받는 자는 적고 피해를 보는 자는 많으며, 과거의 원망이 사라지지 않고 새로운 원망이 다시 일어나는 것이다. 세 말 이외에 더 이상 징수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 때의 원망이 있더라도 시행하는 것이 마땅하지만, 세 말의 쌀로 어찌 허다한 역을 충당할 것인가. 만일 혹시 더 징수한다면 어찌 불편한 법이 아니겠는가."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혹은 서울에 바치기도 하고 혹은 본읍에서 수납하기도 하고 혹은 기인(其人)의 값을 주는 등 곡절이 복잡한데 신의 천성이 본디 꼼꼼하지 못하므로 변통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세선(稅船)065) 이 침몰하는 것으로 보면 바다로 운송하는 것도 매우 어렵다. 내가 보건대 무지한 하민(下民)들은 일이 자기에게 편한 점이 있더라도 공가(公家)의 지시를 들으면 반드시 싫어한다. 가령 백성들이 각자 싣고 운송하다가 배가 침몰하면 원망하지 않을 것이지만, 공가의 명령으로 운송하다가 침몰하면 반드시 원망할 것이니, 이 또한 사세가 곤란한 점이다."

하니, 두표가 아뢰기를,

"조운(漕運)은 배가 침몰하는 애로가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배에다 쌀을 실은 채로 도망하는 자도 있으니 극히 놀랄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국가의 전례는 추고의 법이 매우 엄중하여 금부에서 추고하는 규례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요즘에는 추고를 받는 자가 이를 대수롭지 않게 보아 추고를 받는 상태에서 행공(行公)하여 조금도 반성하고 조심하는 마음이 없는데다 헌부의 장관이 오랫동안 개좌(開坐)하지 않음으로써 추고를 완료하기가 쉽지 않으니, 일이 매우 한심하다."

하니, 공조 판서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추고 전지(傳旨)에 ‘하(下)’자만 쓰고 그 아래는 비워두어 아무 아문이라는 글을 쓰지 않았다가 상께서 ‘금부’라는 글자를 써넣으시면 나추(拿推)에 응하는 것이 이른바 금부 추고입니다. 그리고 행공 추고(行公推考)와 구전 정사(口傳政事)는 【시급히 차제(差除)할 일이 있으면 미처 정석(政席)을 열지 못하고 정관(政官)이 회의하여 삼망(三望)을 갖추어 곧바로 정원(政院)으로 보내니, 이것을 구전 정사라 한다.】 옛법이 아니고 모두 임진 왜란 뒤에 생긴 일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추고 전지를 옛 규례에 따라 ‘행공(行公)’ 글자를 쓰지 말고 ‘하(下)’자만 쓰며 해당 아문은 비워두어 나의 재결을 기다리도록 하되, 지금부터 법식으로 정하여 추고를 받는 자로 하여금 반성하고 조심하는 일이 있게 하라. 외방의 관리는 직무에 공백이 생길까 염려되니 그전대로 행공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헌부로 하여금 매일 개좌(開坐)하게 하고 육조(六曹)의 규례대로 그 개좌의 여부를 기록하여 월말마다 서계하라."

하였다. 이시방이 아뢰기를,

"경외(京外)의 거친 무명베에 대한 금지를 엄중히 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러한 베를 짜는 사람은 발견되는 대로 무겁게 다스리라는 뜻으로 각도에 신칙(申飭)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을 잘 봉행하지 않은 수령과 방백은 조사하여 추고하도록 하라."

하였다. 시방이 아뢰기를,

"신이 관장하고 있는 수어청(守禦廳)에 예속된 군병으로서 먼 도에 있는 자는 마땅히 가까운 도로 바꾸어 정하여 다급할 때 조발해 쓰는 것이 좋은데 계속되는 객행(客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품정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저번에 충청 병사의 장계를 보니, 도내에 관장하고 있는 네 진(鎭)의 군병이 강도(江都)남한(南漢)으로 나누어 예속되어 병사는 일개 군사 없는 장수가 되었다고 하였다. 이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는데 총융사(摠戎使)가 관장하는 군병을 갈라 남한으로 예속시키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자, 시방이 아뢰기를,

"경기의 보병으로 갈라 예속시키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고, 좌의정 이시백은 아뢰기를,

"신도 일찍이 이 직책을 맡은 적이 있습니다. 산성의 성가퀴는 2천 6백 군데로서 성가퀴를 지키는 군졸은 5만여 명을 써야 하는데, 현재 예속된 군병은 겨우 4만 명으로서 모자라는 수효가 1만 명이기 때문에 안동(安東)·대구(大丘) 등 진(鎭)의 군병 2천, 춘천진(春川鎭)의 군병 2천 5백, 광주(廣州) 등 다섯 고을의 군병 2천 3백을 나누어서 산성에 예속시켰는데, 병자년066) 뒤에 안동대구는 길이 멀다는 이유로 충주(忠州)·청주(淸州) 등 진과 강원도의 군병을 남한에다 예속시키고 공주(公州)·홍주(洪州)·전주(全州) 등의 진과 연안(延安)·배천(白川)의 군병을 강도에다 예속시켰습니다. 그러나 먼 지방의 군병은 반드시 제때에 산성으로 들어가 지키지 못할 것이니, 경기의 군병으로 이속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충청도의 군병은 본디 수효가 얼마인가?"

하니, 시백이 아뢰기를,

"4천∼5천 명에 지나지 않으니, 병사로 하여금 거느리고 강도로 들어가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후원은 아뢰기를,

"충청도의 군병은 1만 2천 명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남한산성의 성가퀴를 지키는 군병을 충청도의 군사로 바꾸어 예속시키는 것이 온당한지의 여부를 총융사와 상의하여 품처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교통-수운(水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금융-화폐(貨幣)

○戊申/上引見大臣及備局諸臣。 戶曹判書元斗杓曰: "聞, 鳳凰城將八人, 一時被囚於淸國, 未知因何事也。" 上曰: "近聞, 本國人潛商狼藉, 城將之被囚, 無乃以此故耶? 使義州府尹探問宜矣。" 斗杓曰: "聞, 孫伊爲名者, 用事於淸國云矣。" 上曰: "所謂孫伊, 以前汗之腹心, 今汗亦信任之, 而其人鵰悍, 常不屈於人, 故曾聞免爲庶人矣。 今必復用, 而甚是不吉人也。" 刑曹判書李時昉曰: "臣纔於赴時, 見鄭命守氣色, 則與前頓異, 大有憂懼之色。 及到義州, 有星隕之變, 諸使相顧失色, 彼國必有可慮之事而然也。" 斗杓曰: "義順公主又適甫老, 其人主管東事云, 似當存問矣。" 上曰: "姑且觀勢爲之。" 上又曰: "近來國綱解弛, 人不畏法, 若授苦任, 必欲圖免。 前濟州牧使丁彦璜來參國祥, 則決非委頓之病, 臺臣啓遞, 未知何意, 而偃然不來, 似有觀望之意, 是可惡也。" 領議政金堉曰: "計其日期, 當來而未及來, 則宜有罪責矣。" 上曰: "前濟州牧使丁彦璜拿推。" 金堉曰: "今者常平廳諸臣, 適皆入侍, 閔應亨所陳兩湖一結只收三斗米之法, 稟定宜矣。" 上曰: "本廳諸臣之意何如?" 時昉曰: "臣於先朝, 爲戶曹參判, 請行一結三斗之法, 詳定貢案, 先王下詢于判書閔聖徽, 事幾成, 而崔鳴吉陳箚, 請待豐年, 事竟不行矣。 頃日閔應亨陳疏, 請行三斗之法, 蓋百役無非出於民者, 而貢物最是難堪之役。 若行此法, 則民役必均, 如在水火之民, 庶有拯濟之望, 臣以爲行之便。 然此法之行不行, 唯在地部矣。" 斗杓曰: "此法異於大同, 一收一結三斗之後, 更不加徵, 則果似便宜, 而或有不得已加徵之擧, 則民怨必倍, 臣以爲不行便。" 上曰: "諸卿各言所見。" 刑曹參判許積曰: "此議有兩岐。 內浦則賦役偏重, 湖南則稍歇, 兩湖之民, 均是國家赤子, 而一重一輕, 故有此變通移送之議也。" 上曰: "然則此事不但變通湖西而已乎? 所謂移送者何也?" 曰: "只行此法於湖西一道, 則收米數少, 無以應一道貢物之役。 且非均役之道, 故議者欲移定湖西偏重之役於湖南, 而臣意則以爲, 湖西之役, 雖有一分之減, 湖南反有加五升之弊, 減者喜, 加者怨, 必然之勢也。 若欲均民役, 則行之可也, 若慮招民怨, 則不行可也, 此所謂兩岐也。" 上曰: "然則蒙利者少, 貽害者多, 舊怨未已, 新怨復起。 三斗之外更不加徵, 則雖有一時之怨, 亦當行之, 而以三斗之米, 何以應許多之役乎? 如或加徵, 則豈不難便乎?" 斗杓曰: "或納於京, 或收於本邑, 或給其人之價, 曲折煩碎, 臣性本踈闊, 恐不得變通也。" 上曰: "以稅舡敗沒觀之, 海運亦甚難矣。 予觀, 下民無知, 事雖有便於己者, 聞是公家之令, 則必厭之。 使民各自載運而舡敗則不怨, 令出公家而舡敗則必怨, 此亦事勢之難便者也。" 斗杓曰: "漕運不但有敗舡之患, 亦有全舡載米而逃匿者, 極可駭也。" 上曰: "國家舊例, 推考甚嚴, 有禁府推考之規云。 然近來被推者, 視爲尋常, 帶推行公, 少無警惕之心, 憲府之官久不開坐, 以致畢推之未易, 事極寒心矣。" 工曹判書李厚源曰: "推考傳旨, 只書下字, 空其下而不書某衙門, 自上書塡禁府字則就拿, 此所謂禁推。 且行公推考及口傳政事, 【有忙急差除, 則未遑開政, 政官會議備望, 直送于政院, 謂之口傳政事。】 非古也, 皆壬辰後事也。" 上曰: "推考傳旨, 依古例不書行公, 只書下字, 空其衙門, 以竢予裁處, 而自今定爲令式, 使被推者有所警憚。 外方之官則曠務可慮, 仍前行公可矣。 且令憲府逐日開坐, 依六曹例, 錄其坐不坐, 每於朔末書啓。" 李時昉曰: "京外麤木之禁, 不可不嚴, 織造之人, 隨見重治之意, 請申飭各道。" 上曰: "不謹奉行守令、方伯, 査推可矣。" 時昉曰: "臣所管守禦廳所隷軍兵之在遠道者, 當換定於近道, 以爲臨急調用之地, 而連因客行, 久未稟定矣。" 上曰: "頃見忠淸兵使狀本, 道內所管四鎭之兵, 分屬於江都、南漢, 兵使則作一無軍之將云。 此亦不可不慮, 以摠戎使所管兵, 割屬南漢可乎?" 時昉曰: "以京畿步兵, 割屬似當矣。" 左議政李時白曰: "臣亦曾經此任。 山城雉堞二千六百, 守堞之卒當用五萬餘, 而卽今所屬之兵僅四萬, 不足之數一萬。 故以安東大丘等鎭軍二千、春川鎭軍二千五百、廣州等五邑軍二千三百, 割屬山城, 而丙子之後, 以安東大丘爲路遠, 改以忠州淸州等鎭及江原道軍, 屬之南漢; 公州洪州全州等鎭及延安白川之軍, 屬之江都, 而遠地之軍, 必不及入守山城, 以畿輔軍兵, 移屬可矣。" 上曰: "忠淸道軍兵, 元數幾何?" 時白曰: "不過四五千, 令兵使領入江都可矣。" 厚源曰: "忠淸道軍兵, 一萬二千也。" 上曰: "南漢守堞軍兵, 以忠淸道軍換屬便否, 與摠戎使相議稟處。"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37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84면
  • 【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 사법-탄핵(彈劾)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교통-수운(水運)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금융-화폐(貨幣)