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상세검색 문자입력기
효종실록6권, 효종 2년 4월 26일 임신 1번째기사 1651년 청 순치(順治) 8년

형조가 전남도의 유현일이 몽둥이로 제 어미를 때려 죽인 일을 아뢰다

형조가 아뢰기를,

"전남도(全南道) 함열현(咸悅縣) 사람 유현일(柳玄逸)이 몽둥이로 제 어미를 때려 죽였습니다. 강상(綱常)의 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이놈처럼 흉악한 자는 없었는데 벌을 받기 전에 자살하였으니, 일이 매우 통분합니다. 그의 아우 세룡(世龍)은 이미 실상을 알고서도 처음에 바른 대로 고하지 않아 그 죄가 그의 형과 다름이 없는데, 본도의 감사는 한 차례 형신을 가하고 도로 곧 내보냈으니, 매우 옥사를 처결하는 사체를 잃었습니다. 마땅히 도로 세룡을 구금하여 다시 엄형을 가해 기어코 실정을 얻어내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어 하교하기를,

"현일은 죄가 대역(大逆)에 관계되니, 이미 죽었다고 하여 그대로 둘 수는 없다. 소급하여 법을 가하는 것도 안 될 것은 없으니, 대신에게 물어서 조처하라."

하였는데, 영의정 김육이 헌의하기를,

"자식으로서 손수 제 어미를 죽였으니, 흉역(凶逆)의 정상이 반적(反賊)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마땅히 법에 의해 정형할 일인데 미처 하옥되기 전에 자살해 버렸으니 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정도가 심하다고 하겠습니다. 다만 소급하여 벌을 가하는 법은 율문에 실려 있지 않은 것으로서 국가가 혹 역적의 괴수에게 시행하기는 해도 강상의 변에 있어서는 비록 미처 정형하지 못한 자가 있더라도 소급해 벌을 가한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불가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또 하교하기를,

"예로부터 흉역들 가운데 이놈처럼 제 손으로 제 어미를 죽인 자는 없었다. 만일 특별히 처치하는 일이 없으면 어떻게 이 나쁜 풍속을 깨우치겠는가. 이는 교화가 밝지 못한 데에서 나온 것으로서 진실로 과인의 죄이다. 한 가정의 역자(逆子)는 한 나라의 역신(逆臣)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다시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에게 의논하라."

하였는데, 경여가 헌의하기를,

"천하의 악은 마찬가지이니 시역(弑逆)의 변은 가정이나 국가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옛날 왕돈(王敦)이 죽은 뒤에 무릎을 꿇리고 목을 베자050) 당시 사람들이 통쾌하게 여겼으며, 주온(朱溫)051) 이 추후의 주륙을 면하자 후세에서는 유감으로 생각하였습니다. 이제 현일(玄逸)이 손수 제 어미를 죽였는데도 정형(正刑)을 하지 못하여 죄에 걸맞는 벌을 주지 못했으니, 소급하여 주륙을 가하는 것이 무방할 듯합니다. 다만 추후에 형을 가하는 율은 법문(法文)에 없으므로 상례를 벗어나 특별히 벌을 주는 것은 신이 감히 함부로 의논할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율문에 없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의 변은 새짐승도 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실로 부득이해서 그러는 것이다. 특별히 상례 이외의 무거운 율을 써서 그 죄를 바룰 것이며, 앞으로는 이를 끌어다가 규례로 삼지 말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윤리(倫理)

  • [註 050]
    왕돈(王敦)이 죽은 뒤에 무릎을 꿇리고 목을 베자 : 왕돈은 동진(東晋)의 대신으로 진 무제(晋武帝)의 사위인데, 원제(元帝)가 즉위하여 유외(劉隗)와 조협(刁協) 등을 등용, 심복으로 삼고 왕씨의 세력을 배제하자, 이에 불만을 품은 왕돈이 영창(永昌) 원년(322)에 반역을 일으켜 건강(建康)으로 쳐들어가 조협 등을 죽이고, 그 뒤에도 계속 조정을 위협하였다. 태령(太寧) 2년(324)에 진 명제(晋明帝)가 그의 병세가 위독한 것을 틈타 정벌할 때 군중에서 병사하였는데 역적을 완전히 토벌한 뒤에 유사(有司)의 헌의에 따라 임시로 묻어 놓은 그의 시신을 꺼내다가 그의 의관을 불태우고 무릎을 꿇려 참수하였다. 《진서(晋書)》 권98 왕돈전(王敦傳).
  • [註 051]
    주온(朱溫) : 후량(後梁)의 태조(太祖) 주전충(朱全忠)임. 처음에 황소(黃巢)의 반란군에 가담하였다가 항복하니 당 희종(唐僖宗)이 좌금오위 대장군(左金吾衛大將軍)에 제수하고 이름을 전충(全忠)이라 하사하였다. 나중에 막강한 권력을 잡아 소종(昭宗)을 살해하고 이축(李柷)을 황제로 즉위시켰다가 개평(開平) 원년(907)에 그를 폐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어 후량을 세우고 변(卞:지금의 하남 개봉시)에다 도읍을 정하였다. 건화(乾化) 2년(912)에 그의 세째 아들 우규(友珪)에게 살해되었다. 《신오대사(新五代史)》 권1 양본기(梁本紀).

○壬申/刑曹啓曰: "全南道 咸悅縣柳玄逸以木椎椎弑其母。 綱常之變, 何代無之, 而未有如此賊之凶慘者, 徑先致斃, 事極痛駭。 其弟世龍旣知實狀, 而初不直告, 厥罪惟均。 本道監司一施刑訊, 旋卽放送, 殊失按獄之體。 宜還囚世龍, 更加嚴刑, 期於得情。" 上從之。 仍下敎曰: "玄逸罪係大逆, 不可諉之已死而置之。 追施典刑, 未爲不可, 問于大臣處之。" 領議政金堉獻議曰: "子而手弑其母, 兇逆之狀, 與反賊何異? 所當依法正刑, 而未及就獄, 徑先自斃, 失刑甚矣。 但追施之典, 律文之所不載, 國家或施之於逆魁, 而至於綱常之變, 雖有未及正刑者, 未聞有追施者, 臣以爲不可。" 又下敎曰: "自古兇逆, 未有如此賊之手弑其母者。 如無別樣處置, 何以警此惡俗? 此由於敎化之不明, 實是寡昧之罪也。 家之逆子與國之逆臣, 何以異也? 更議于領中樞府事李敬輿。" 敬輿獻議曰: "天下之惡一也, 弑逆之變, 家國何異? 昔者王敦之死, 跽而斬之, 當時以爲快; 朱溫之得免追戮, 後世以爲恨。 今玄逸手戕其母, 未得正刑, 旣失其討, 追施顯戮, 恐無所妨, 而但追刑之律, 不在法文, 格外別見, 臣不敢輕議。" 上下敎曰: "非不知律文之所無, 而今日之變, 禽獸之所不爲, 實緣不得已也。 特用格外重律, 以正其罪, 後勿援以爲例。"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8면
  • 【분류】
    사법-행형(行刑) / 윤리(倫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