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학 안적 등의 전 좌랑 이유태를 박취문이 모함했다는 내용의 상소
유학(幼學) 안적(安績) 등이 상소하기를,
"신들이 삼가 금산(錦山) 사람 박정(朴珽)의 아들 박취문(朴就文)의 상언(上言)을 보니, 전 좌랑 이유태(李惟泰)를 모함함에 있어 별의별 말을 다하였습니다. 신들은 유태와 다 사제간의 의가 있어 유태의 사람됨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유태는 어릴 때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품행을 잘 갖추었으며 실제의 덕을 안으로 닦아 명성이 밖으로 드러났으니, 성상의 후하신 예우를 받고 사림의 무거운 촉망을 진 것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습니까.
금산 고을은 궁벽한 산중에 위치하여 풍속이 고루하고 상스러워 문헌(文獻)044) 이 없는 곳인데, 유태가 옮겨와서 산 지 오랜 시일이 지나자 성묘(聖廟)를 존숭하고 현사(賢祀)를 수리하며 의재(義齋)를 세우고 향숙(鄕塾)을 짓는가 하면, 초하루와 보름으로 학문을 강론하여 그 과정(課程)을 엄격하게 하고 봄가을로 법전을 읽어 그 의절(儀節)을 익히게 하였습니다. 여러 유생들에게 마음을 세우는 근본과 행실을 바르게 하는 방도를 가르침에 있어서는 그 또한 언제나 염치를 숭상하며 선을 권장하고 악을 미워하는 의리에 치중하였습니다. 이러므로 한 고을의 풍속이 차츰 아름다워지면서 박정의 악이 차츰 드러나니, 박정이 울분과 유감을 품고 은연중 그것을 터뜨릴 기회를 엿보던 것이 하루이틀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 유태의 종형(從兄) 이유항(李惟恒)을 장사지낼 때 그 무덤이 박정의 아내가 묻힌 곳과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는데도 박정은 감히 논쟁을 일으킬 심산으로 관아에서 술에 만취하여 유태에게 욕설을 퍼부었으며, 또 가명으로 감사에게 정소(呈訴)하여 유태가 남의 전답을 빼앗았다고 하였는데, 대체로 그 뜻은 감사에게 유태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주지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뒤에 박정은 스스로 자기의 정상을 가리기 어렵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본심이 드러난 것을 알고는 사악하고 도리에 어긋난 짓을 자행하여 더욱 기탄이 없으므로 온 경내가 다 미워하여 노소가 이구동성으로 죄를 성토해 관가에 고발하여 말감(末減)으로 벌을 가했습니다. 이는 곧 한 고을의 공통된 의논으로서 사실 유태가 거기에 간여하여 알 바가 아니었습니다.
아, 박정의 사악함을 낱낱이 들추자면 말이 길기 때문에 우선 유태를 모함한 일을 가지고 대략 그 정상을 밝힐까 합니다. 이른바 ‘유태의 형제가 한 고을의 권세를 함께 쥐었다.’고 한 것은, 유태의 형제가 사실 다섯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어미의 성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 여러 아들을 가르칠 때 반드시 의로운 방도로 하였기 때문에 여러 아들이 다 선사(善士)로 불리웠으니, 어찌 고을의 권세에 간섭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른바 ‘유태는 본성이 이사다니기를 좋아한다.’고 한 것은, 이는 그러한 사실이 있습니다. 대체로 몇 해 전부터 다른 데로 옮겨갈 뜻이 있었으나 적당한 곳을 잡지 못하다가 지난 겨울에 비로소 이웃 경내에 넓은 땅을 잡았는데, 곧 벗 전 진선(進善) 송준길(宋浚吉)의 밭이었습니다. 그 주인이 이미 허락하였으면 가령 보리를 베어 버리고 짓는다 하더라도 사실 박정이 제지할 일이 아닌데 더구나 집을 건축한 것은 추수한 뒤에 있었으니, 무슨 관계가 있겠습니까.
신들의 동문(同門)과 고을 사람 1백여 인이 한번 억울한 사정을 밝히기 위해 이구동성으로 함께 서명하여 감히 상언을 하였으니, 어찌 거짓 이름을 빌려 성상을 기망할 리가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승정원의 승지는 한 사람의 필치로 서명한 것이라고 하여 시행하지 말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는데도 감히 한 개인의 견해로 물리쳐버렸으니, 왕명의 출납을 올바르게 하는 뜻이 과연 이와 같단 말입니까. 분명히 조사하여 계문하라는 분부까지 내렸으면 도신(道臣)045) 으로 있는 자는 빨리 봉행해야 할 것인데도 한달 두달 끌어가며 조사해 볼 생각을 하지 않아 박정이 정장(呈狀)하여 대질하여 시비를 가리고 싶지 않다고 하면 좋을 대로 하라고 허락을 하며, 금산 사람이 정장하여 빨리 처결해 달라고 청하면 자질구레한 말로 물리쳐버립니다. 이는 승정원의 소행과 동일한 법으로서 사실 깊이 이상하게 여길 것은 못 되지만 전하께서 승선(承宣)046) 의 책임을 부여하신 데에는 어찌 이렇게만 하기를 바란 것이겠습니까.
신들은 진실로 사문(師門)이 부당하게 모함을 받는 것을 차마 무심히 보아넘길 수 없어 소장을 봉해 놓고 여러 날을 올리려다가 그만두곤 하였는데, 이는 실로 고을 사람들이 억울함을 호소한 글이 방금 올라갔고 도신(道臣)이 조사한 계사가 오래지 않아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마는, 이제는 그 정장이 이미 퇴각당했고 조사하는 것도 또한 언제나 할지 기약이 없고 보니, 신들이 어찌 감히 한번 호소하여 유태의 억울한 사정을 밝히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 이유태는 성상께서 왕위를 이으신 초기에 현사(賢士)로 초빙하여 특별한 예로 대우하였는데, 한번 김자점(金自點)의 당을 배척한 뒤로 세상 사람들의 큰 악인이 되어 비난과 욕설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장차 몸을 용납할 데가 없이 만들었습니다. 향초와 악초가 같은 그릇을 함께할 수 없고 얼음과 숫불이 서로 맞지 않은 것은 이치가 사실 그렇다고는 하지만 인심과 세도(世道)가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신들은 삼가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옛날에 공문중(孔文仲)은 정자(程子)를 ‘비루하고 간사하여 본디 행검이 없다.’고 무함하고, 심계조(沈繼祖)는 주자(朱子)를 ‘대간인(大奸人)이며 대악인이다.’고 무함하여 소정묘(少正卯)의 주벌047) 을 가하자고 청하였습니다. 아, 옛날의 대현들도 오히려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의 모욕을 면치 못하였으니 유태가 오늘날 무함을 받는 것이 또한 어찌 이상할 것이 있겠습니까. 삼가 성상께서는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는 마음을 분명히 보이고 빨리 그 죄를 바루어 사문(斯文)의 기대하는 마음을 달래어 주소서."
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하교하기를,
"안적(安績)의 상소에 이른바, 거절당한 상언(上言)은 수많은 사람이 서명했다는 것에 대해 과연 각자의 필적인가를 승지는 자세히 살펴 아뢰어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이만영(李萬榮) 등의 상언에 서명한 것을 다시 자세히 보니, 그 필적의 숙련도와 글자 획의 굵기가 조금도 다름이 없어 한 사람의 손에서 나온 듯하였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당초에 나는 이미 한 붓으로 서명한 것인 줄을 알았고 외방 사람의 상언은 으레 사실이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에 상례에 따라 계하하였었다. 그런데 안적의 소를 대강 보니 그의 스승 유태를 정(程) 주(朱)에 견주었는데 이 또한 괴이한 일이 아닌가. 분노의 파장이 미쳐가지 않은 데가 없고 관원들을 침해하고 모욕하여 조금도 기탄함이 없으니, 이 무슨 도리인가."
하였다. 이에 앞서 금산 사람 박정(朴珽)이 유태에게 원한을 품고 갖은 모욕과 비난을 자행하므로 고을 사람이 관아에 고발하여 그 죄를 다스리자, 정의 아들 취문(就文)이 상언하여 또 유태를 무함하니, 상이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뢸 것을 명하였다. 그러자 유태의 문인 이만영 등이 또 상언하여 유태의 억울한 사정을 논쟁하였는데, 승지 오정일(吳挺一)이 상언 가운데 여러 사람의 서명이 한 사람의 솜씨인 듯하다고 방계(防啓)하여 시행하지 말라고 하였기 때문에 안적 등이 또 진소(陳疏)하여 쟁변하면서 정원을 오로지 공격하였다. 정일이 이 때문에 진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 [註 044]문헌(文獻) : 문(文)은 전장(典章) 제도와 관계가 있는 문자를 말하고 헌은 문견이 많아 장고(掌故)를 익히 아는 사람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요약하여 제도 문물을 뜻한다.
- [註 045]
도신(道臣) : 관찰사.- [註 046]
승선(承宣) : 위로 임금의 명을 받들어 아래에 전달하는 것으로서 승지와 관찰사의 책무이다.- [註 047]
소정묘(少正卯)의 주벌 : 소정묘는 춘추 시대 노(魯)나라의 대부인데 노 정공(魯定公) 14년에 공자(孔子)가 노나라의 사구(司寇)로 있으면서 소정묘가 오악(五惡)으로 국정을 어지럽힌다는 죄로 사형시켰음. 《공자가어(孔子家語)》 권1 시주(始誅).○幼學安績等上疏曰:
臣等伏見, 錦山人朴珽子就文上言, 則構誣前佐郞李惟泰, 無所不至。 臣等於惟泰, 皆有師生之義, 熟知惟泰之爲人。 惟泰髫年志學, 行誼醇備, 實德內修, 名聲外著, 所以致聖明側席之勤, 負多士屬望之重者, 豈偶然哉? 惟是錦山爲縣, 處於窮峽, 樸陋鄙野, 文獻無徵, 惟泰寓居日久, 尊聖廟修賢祀, 立義齋建鄕塾, 朔望講學, 嚴其課程, 春秋讀法, 習其儀節。 至其所以敎諸生, 立心之本, 制行之術, 則又未嘗不惓惓於崇廉尙恥, 善善惡惡之義。 是故, 一鄕之俗漸美, 而珽之惡漸彰, 珽之懷忿蓄憾, 隱然伺發者, 非一日矣。 及惟泰從兄惟恒之葬也, 與珽妻所葬之地, 步數遼闊, 而珽也敢生爭詰之計, 醉酗公廨, 詬辱惟泰, 且以虛名, 呈訴監司, 謂惟泰奪人田土, 蓋其意欲令方伯, 認惟泰爲不義也。 珽也自知情跡之難掩, 肺腑之敗露, 肆其凶悖, 益無忌憚, 一境咸憝, 大小合辭, 聲罪告官, 末減施罰。 是乃一鄕公共之議, 實非惟泰所可預知也。 嗚呼! 珽之惡, 如欲歷擧, 言之長也, 姑以構誣惟泰之事, 略明其情狀也。 其曰惟泰兄弟, 共執鄕權者, 惟泰兄弟, 果有五人, 而其母性嚴有法度, 訓諸子, 必以義方, 故諸子皆稱善士, 豈有干涉鄕權之理乎? 其曰惟泰性好移徙者, 此則有之。 蓋自往歲, 有色斯之意, 而未卜其地, 去冬始於隣境, 卜得寬閑之域, 卽友人前進善宋浚吉之田。 其主旣許, 則假令刈去牟麥, 固非珽之所可呵禁, 況其營搆, 又在秋穫之後乎? 臣等同門及鄕人百有餘人, 欲一伸暴, 齊聲合署, 敢爲上言, 豈有假借僞名, 欺罔聖明之理, 而喉舌之臣, 乃謂一筆着押, 啓請不施。 夫旣經睿覽, 而敢以私見揮斥之, 出納惟允之義, 果如是哉? 至於明査啓聞之敎, 爲道臣者, 所當從速奉行, 而留時引月, 不肯考覈, 珽也呈狀, 不欲對辨, 則許其任意, 錦人呈狀, 請速處決, 則費辭揮却。 此與政院所爲, 同一規模, 固不足深怪, 而殿下所以畀承宣之責者, 豈欲如是而已哉? 臣等誠不忍恝視師門橫被搆捏, 封章累日, 將進復止者, 誠以鄕人訟冤之狀, 纔已呈達, 道臣査覈之啓, 匪久當上, 而今則其狀已被斥却, 査覈又無其期, 則臣等何敢不爲之一鳴, 以暴惟泰之冤哉? 噫! 李惟泰當聖上嗣服之初, 徵以賢士, 待以殊禮, 一自譏斥自點之黨, 爲世大僇, 群咻衆怒, 焱至蝟集, 將無所容其身。 薰蕕氷炭, 理固如此, 而人心、世道一至於此, 臣等竊痛焉。 昔孔文仲誣程子以汚下憸巧, 素無鄕行; 沈繼祖誣朱子以大奸大憝, 請加少正卯之誅。 噫! 古之大賢, 尙未免媢疾者之汚衊, 惟泰之被誣於今日者, 又何足怪哉? 伏乞聖明, 明示好惡, 亟正其罪, 以慰斯文之望。
疏入, 下敎曰: "安績上疏所謂見斥上言, 許多人着署, 果是各人之筆跡乎? 承旨詳察以啓。" 政院啓曰: "李萬榮等上言着署, 臣等更加諦觀, 則其筆跡之生熟、字畫之巨細, 少無分別, 似出於一手矣。" 答曰: "當初予已知其一筆所着, 而外方人上言, 例多不實, 故循例啓下矣。 槪觀安績之疏, 其師惟泰, 比之程、朱, 不亦異乎? 忿怒餘波, 無處不到, 侵辱諸官, 少無顧忌, 此何理耶?" 先是, 錦山人朴珽, 與惟泰搆怨, 極肆醜詆, 鄕人告官治其罪, 珽之子就文上言, 又誣惟泰, 上命本道査啓。 惟泰門人李萬榮等亦上言, 訟惟泰冤, 而承旨吳挺一, 以上言中諸人着署如出一手, 防啓勿施, 故績等又陳疏以辨, 而專攻政院。 挺一以此陳疏乞免, 上不許。
- 【태백산사고본】 6책 6권 2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7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치안(治安)
- [註 0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