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이 학문을 닦아 선정을 펴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리다
진선(進善)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기를,
"신이 병들어 먼 시골에 엎드려 있으나 때로는 오가는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듣기도 하는데, 전하께서 한 가지라도 선정을 행하셨다는 말을 들으면 기뻐서 먹는 것도 잊을 정도이며 잘못된 정사가 있다는 말을 들으면 걱정스러워 잠을 이루지 못하고 때로는 눈물까지 흘리곤 합니다. 지금 일일이 진달하자니 신의 병세가 위독해서 정력이 미치지 못하고, 한마디 말도 없이 죽자니 사무치는 고충(孤忠)에 무궁한 한이 될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감히 병든 몸으로 아픔을 참고 미천한 정성이나마 대략 올림으로써 채택하시는 자료로 제공할까 합니다.
신이 삼가 듣건대, 요즘 전하께서 성학(聖學)에 더욱 힘쓰시어 하루에 세 번씩 경연에 나아가신다고 하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뜻을 겸손히 하고 항상 힘씀으로써 자신을 닦고 정치를 세우는 근본을 삼으려고 하는 것이니, 먼 지방에서 전해 듣고 모두 흠모하며 우러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학문은 무엇보다도 요점을 알아야 하고 일은 성실하게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겉으로 형식적으로만 응하면서 내실이 없다면, 하루에 책 1천 장을 독파하고 1만 축(軸) 사이에 마음을 노닌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보고 듣기에 아름답게 여겨질 뿐이지 자신을 위하여 날로 새롭게 되는 요체를 터득하는 데에는 아무 이익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신이 주자(朱子)의 글을 조금 읽어 보니 한 글자 한 구절도 지론(至論)이며 격언(格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또 제왕(帝王)의 학문에 절실한 것이 있었고, 동시에 오늘날의 병통을 적중시킨 것도 있었는데, 마치 성명(聖明)을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둔 것과 같았으므로 감히 몇 조목을 구성하여 다음과 같이 올립니다.
삼가 생각건대, 이런 말들은 이미 예람(睿覽)을 거쳤을 것이고 경연의 신하들도 이미 강하여 들려드렸을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나 이와 같이 간절하고 지극한 가르침은 마땅히 탕(湯)임금의 반명(盤銘)에 비견되는 것으로 늘 보아도 싫지 않은 것이고 보면, 다시 올린다고 하여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신이 배운 것은 이 정도 밖에 되지 않으니, 가령 다행히 죽지 않고 전하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된다 하더라도 자문에 응할 것은 또한 이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이것을 법으로 삼고 자성(自省)하는 자료로 삼아 마음에 체득하고 일에 징험하시어 마치 건순(乾淳) 연간의 대유(大儒)를 대하듯 날마다 한가한 틈에 접하소서. 그러면 성학이 날로 고명해지고 치도(治道)도 날로 아름답고 빛나는 경지에 올라 우뚝하게 동방의 요(堯) 순(舜)이 되실 것입니다. 성명께서는 살펴주소서."
하고, 이어 주자가 송 효종(宋孝宗)에게 올린 봉사(封事)와 학문의 요점을 논한 두 조목을 써 올리면서 아뢰기를,
"신은 삼가 생각건대, 삼대(三代) 이후로 습속이 비루해진 나머지 도학(道學)을 오활하여 현실적으로 시행하는 데에는 절실하지 못한 것이라고들 여겼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운영해 갈 때 사용한 방법은 권모 술수와 지력(智力)밖에는 없었습니다. 이에 도학과 정치가 두 길로 나뉘어져 이에 도학은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니, 탄식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주자는 평소 이 점에 분개하여 학문을 논할 때 현실적인 일을 빠뜨리지 않았고 정치를 논하면서도 반드시 학문에 근본을 두었기 때문에 다스림에 있어 그 도(道)를 얻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대체로 이른바 체용(體用)은 한 근원이며 현미(顯微)는 간격이 없다는 것으로서 이것이야말로 제왕의 본통(本統)이며 성학의 연원인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선뜻 올라오기를 내가 날마다 바라고 있는데, 어찌하여 이토록 핑계대고 사양만 하는가. 상소 속의 정성스러운 뜻은 모두 나를 사랑하는 충성스러운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천리 밖에서 상소를 올리는 것이 어찌 직접 나와서 계몽해 주는 것만 하겠는가. 속히 올라와 나의 뜻에 부응하라."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4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
○進善宋時烈上疏曰:
臣病伏遐陬, 時聽於道路, 苟聞殿下行一善政, 則喜而忘食; 聞有疵政, 則憂不能寐, 或至於隕涕也。 今欲一一陳瀆, 則臣病已危, 精力不逮, 欲終無一言而死, 則孤忠耿耿, 抱恨無窮。 故敢力疾忍痛, 略進芹曝, 以備採擇焉。 臣伏聞, 殿下比來益懋聖學, 一日三御經筵, 蓋將遜志時敏, 以爲修己立政之本也, 遠方傳聞, 莫不欽仰。 然學貴知要, 事在誠實, 不然而外應文具, 內實罔殆, 則雖日閱千紙, 心涵萬軸, 徒爲觀聽之美, 而無益於爲己日新之要也。 臣少讀朱子書, 其一字一句, 無非至論格言, 而其中又有尤切於帝王之學者, 亦有正中今日之病, 而似若預爲我聖明, 准備者然, 故敢繳進數段加左。 伏想此說已經睿覽, 而筵臣亦已講聞。 然此等切至之訓, 當比《湯銘》, 不厭常目, 則亦何嫌於瀆進哉? 臣之所學, 止於如此, 假饒無死, 得至殿下之前, 其所備問, 亦不過此。 伏乞殿下, 以是爲則, 以是自省, 體之於心, 驗之於事, 儼乎若乾淳大儒, 日接燕閒, 則聖學日臻於高明, 治道日升於休熙, 卓然爲東方堯、舜之主矣。 伏惟聖明, 垂察焉。
臣竊惟, 三代以後, 習俗卑陋, 以道學爲迂闊, 不切於施爲, 而所以把持牽架者, 不過權謀、智力而已。 於是道學、政事, 分爲二道, 而道學爲無用之物, 可勝歎哉? 朱子一生, 慨然於斯, 論學不遺乎物, 論治必本於學, 故治得其道。 蓋所謂體用一原, 顯微無間者, 此固帝王之本統, 聖學之淵源也。
答曰: "幡然上來, 予日望之, 引疾控辭, 何乃至此? 疏中惓惓之意, 無非愛予之忠悃, 可不體念哉? 與其千里封章, 曷若身親啓沃? 須速上來, 以副予意。"
- 【태백산사고본】 5책 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48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경연(經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