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학생들이 유직에게 벌을 내린 것을 논의하며 태학을 나가니 달래도록 이르다
태학생(太學生) 박세채(朴世采) 등이 상소하기를,
"두 분의 현신(賢臣)088) 을 종사(從祀)하자는 청(請)이 있은 뒤로 일종의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사람들이 함부로 선정(先正)에게 추악한 말을 하고 있어서 사림들이 통탄스럽게 여겨 온 지가 오래 되었습니다. 저 유직이란 자는 얼마나 괴귀(怪鬼)한 위인이기에 사론(邪論)을 떠벌려 죄안(罪案)을 만들고는 말하기를 ‘어버이를 유기하고 임금을 뒤로 미루어 명교(名敎)에 죄를 얻었다.’고 한단 말입니까. 아, 사람의 마음은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라고 하지만 어찌 이처럼 극도에 이르렀단 말입니까. 그래서 지난번 많은 선비들이 모였을 때 공론(公論)이 더욱 격렬하여 앞서 시행한 벌이 죄에 비해 오히려 가볍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마침내 부황하는 거조가 있게 되었는데, 동참한 유생들은 이견을 가진 자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다만 목래선(睦來善)·이희년(李喜年) 등이 함께 음관(蔭官)으로서 재론(齋論)에 참여하지 않고 나가자는 의논을 앞장 서서 꺼내어 한 떼의 사람들을 선동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세 가지 이유를 내세웠는데, 첫째는 ‘유직을 부황하였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하였고, 둘째는 ‘재론(齋論)할 때에 가부(可否)를 묻지 않았기 때문에 나간 것이다.’ 하였고, 셋째는 ‘제류(儕流)들이 모두 나갔기 때문에 할 수 없이 나간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대저 재벌(齋罰)로 가벼운 것은 손도(損徒)이고 무거운 것은 삭적(削籍)하거나 부황하는 것입니다. 이 전례가 어느 때에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만, 어찌 꼭 윤기(倫紀)를 범한 다음에야 비로소 부황할 수 있는 것이겠습니까. 만약 다른 의견을 세우고자 한다면 쟁론도 가능합니다. 그런데 일찍이 한마디 말도 여기에 대해 언급하지 않다가 물러가서야 뒷말을 하면서 이것을 꼬집어 허물로 삼고 있으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자들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염우(廉隅)에 관계된 것인데, 어찌 스스로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고 하여 편안하게 여기고 굳게 앉아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이 따라 나온 것은 대체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신들이 전후하여 권당(捲堂)한 것은 진실로 부득이하여 취한 것입니다. 그 뒤 성상께서 가능한한 조화시키려는 뜻을 두시고 특별히 대종백(大宗伯)을 보내 곡진하게 유시하셨는데, 얼굴을 대하고 명하는 것과 같을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명을 받들고 두려운 나머지 즉시 식당(食堂)으로 들어갔는데, 먼저 나간 자들은 한 사람도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끝내 마음에 불안한 바가 있어 바야흐로 주저하고 있을 때 대신이 유직을 부황한 표지를 제거하기를 청하자, 상이 본관(本館)089) 에 분부하여 타이르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유직에게 벌을 더한 것은 실로 공공(公共)의 논의에서 나온 것인 만큼 한 때 진정시키려는 거조 때문에 구차하게 오르내려서는 안 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진이를 무함한 벌에 대해서 더하기도 하고 풀어주기도 하는 것은 본래 사자(士子)들의 책임이지 결코 대신(大臣)과 조정(朝廷)이 지휘할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이 길이 한번 열리면 뒷날 있을 무궁한 폐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들이 감히 명을 받들지 않았던 것인데, 어찌 엄한 비답을 갑자기 내리시면서 준절(峻截)하게 말씀하실 줄이야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대체로 명령을 어기는 것은 신하의 극죄(極罪)이며, 나라 안에 있지 않으면 이는 바로 교화(敎化) 밖의 백성입니다. 이와 같은 죄악을 지고는 감히 일각도 성묘(聖廟)의 아래에 숨쉬고 살 수 없는 바이기 때문에 시골에 물러가 살면서 공손히 현륙(顯戮)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이번에 성상께서 넓은 도량으로 신들을 포용하시어 윤음(綸音)을 여러 번 내리셨으므로 신들도 감히 한결같이 물러가 움츠리고만 있을 수 없기에 힘써 도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명령을 어긴 죄만은 여전히 신의 몸에 있습니다. 이와 같은 죄를 범하여 지고 있으면서도 한번 가슴속의 말을 드러내지 않는다면 끝끝내 임금을 업신여긴 율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신은 한 말씀을 내려 결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만약 양신(兩臣)을 어질다고 여긴다면 높여 숭상하는 자가 옳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잘못이며, 만약 양신을 어질지 않다고 여긴다면 공격하여 배척하는 자가 옳고 높여 숭상하는 자가 그른 것이니, 옳고 그름이 한번 밝혀지면 간사함과 정직함이 즉시 판명될 것입니다. 이밖에는 다른 의논이 있을 수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통쾌하게 결단을 내려 주시어 높여 숭상하고 공격하여 배척하는 사이에서 좋아하고 싫어하심을 분명하게 보여 주소서. 그러면 시비가 혼동되지 않고 사정(邪正)이 저절로 판명될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하교하기를,
"이미 말하기를 ‘결코 대신과 조정이 지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였는데, 글을 올릴 일이 뭐가 있겠는가. 이 상소를 도로 내어 주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유생들의 상소에 답을 내리지 않는 것은 자못 선비를 대우하는 도리에 결함이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분명하게 비답을 내리시어 상하가 막히지 않게 하고 유생들이 스스로 안정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나와 대신이 다 사체(事體)에 어둡고 거조(擧措)에 마땅함을 잃어 유생들로 하여금 더욱더 불평하는 마음만 갖게 만들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러워 답할 말이 없다."
하였다. 태학(太學)의 유생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성상의 분부가 간절하여 태학에 도로 들어오긴 했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졌고 또 상소를 물리치는 거조가 있었으니, 그대로 현관(賢關)에 거처하고 있을 수 없다."
하고, 대궐에서 물러나와 태학에 돌아가 성묘(聖廟)에 하직 인사를 올리고 그 길로 흩어져 갔다. 상이 유생들이 권당하고 나갔다는 말을 듣고,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한 뒤 큰 소리로 이르기를,
"내가 선처하지 못하여 유생들이 지금 또 성균관을 비웠다. 처음에는 나도 앞서 말한 것에 대한 잘못을 뉘우치고 근시(近侍)를 보내어 타일렀는데, 지금은 상소 속의 말 뜻을 보건대 명령을 어겼다고 한 것을 집언(執言)하는 꼬투리로 삼고 안으로 탐색하여 시험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다. 유생은 매양 염치를 소중하게 여기는데, 인군만 유독 염치를 돌아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내가 그래서 답하지 않고 그저 부끄럽다고만 한 것인데, 이것이 어찌 공관(空館)까지 할 일인가. 사방에서 보고 들으면 반드시 해괴하게 여길 것이다."
하니, 우의정 조익(趙翼)이 아뢰기를,
"유생은 본디 지휘해서는 안 되고 또 위협해서도 안 되니, 특별히 포용하는 아량을 보여 온화한 비답을 내리시면, 저 유생들이 어찌 끝끝내 들어오지 않겠습니까."
하고, 대사성 이후원(李厚源)이 아뢰기를,
"신이 사장(師長) 자리에 있지만 유생의 논의에는 간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상소의 말이 어떠했는지 몰랐는데, 공관(空館)한 뒤에 그 뜻을 재임(齋任)에게 물어보니, 그가 말하기를 ‘상께서 명령을 어긴다는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감히 그래도 현관(賢關)에 거처할 수 없었다. 그러나 돈독하신 유시가 세 번이나 이르렀으므로 할수없이 들어왔으나, 이미 명령을 어긴 죄를 지고 있었기 때문에 대략 소장을 진달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답은 내리지 않으시고 도리어 엄한 분부를 내리셨으므로 유생들이 감히 태연히 재(齋)에 거처하지 못하고 서로 더불어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향당(鄕黨)에서 사심없이 좋아하는 자들도 양신(兩臣)을 어질다고 말하고 있으니 참으로 어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종사(從祀)하는 일은 중대한 예전(禮典)이니 경솔하게 논의해서는 안 된다. 유생들의 이 행동이 어진이를 높이는 일이라고 하더라도 실은 노리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임금이 아랫사람을 부리는 도리상 어찌 피차(彼此)에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두어 치우친 일을 하겠는가. 나도 전에 태학에 들어 갔는데, 지금 태학에 직숙(直宿)하면서 인(仁)에 처하고 의(義)를 실천할 계획을 하려 한다. 결코 돈독히 타이를 수는 없다."
"선비는 국가의 원기(元氣)이니, 사기(士氣)를 북돋아 세우는 것이 임금이 할 도리입니다. 선비에게 잘못이 있더라도 사람마다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하니, 상이 후원에게 이르기를,
"유생들이 자기들의 뜻을 펼 목적으로 번번이 이런 식으로 임금을 협박할 계획을 하니, 이런 폐단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경의 뜻으로 타이르는 것이 온당하겠다."
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4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太學生朴世采等上疏曰:
自有兩賢臣從祀之請, 一種異議之人, 肆爲醜正之說, 士林之痛久矣。 彼柳㮨者, 是何等怪鬼, 譸張邪論, 搆成罪案, 乃曰: "遺親後君, 得罪名敎。" 噫! 人心之叵測, 何至此極耶? 頃於多士之會, 公論益激, 以爲前施之罰, 視罪猶輕, 遂有付黃之擧, 同參諸生無有異同者。 獨睦來善、李喜年等, 俱以蔭官, 不參齋論, 而首倡出去之議, 鼓動一隊之人。 一則曰柳㮨付黃之故去, 一則曰齋論時不詢可否故去, 一則曰儕流皆去故不得不爾。 大抵齋罰, 輕者損徒, 重者削籍, 或付黃。 雖未知此例創於何時, 而豈必犯倫紀, 然後方可付黃也? 如欲立異, 爭之可也。 曾無一言及此, 退有後語, 執此爲咎, 誠不可知者也。 雖然, 廉隅所關, 何可自以爲吾無所失, 而偃然牢坐乎? 臣等之隨而出者, 蓋以此也。 臣等之前後捲堂, 誠出於不得已也。 其後聖意, 務在調和, 特遣大宗伯, 敦諭丁寧, 不啻面命。 臣等承命惶蹙, 卽入食堂, 而先出者無一人來到。 故終有所不安於心, 方爲趑趄之際, 大臣請去柳㮨籤黃, 上敎本館開諭, 而㮨之加罰, 實出公共之論, 不可以一時鎭靜之擧, 苟且低昻者明矣。 夫誣賢之罰, 或加或解, 自有士子之責, 決非大臣、朝廷所可指揮。 此路一開, 日後無窮之弊, 不可勝言, 故臣等不敢承命矣。 豈意嚴批遽下, 辭旨峻截? 夫方命, 人臣之極罪, 不在四境之內, 卽化外之民也。 負此罪惡, 所不敢一刻容息於聖廟之下, 退處村閭, 恭竢顯戮。 不圖玆者, 聖度包容, 綸音累降, 臣等亦不敢一向退縮, 黽勉還入, 而抑其方命之罪, 猶在臣身。 犯負如此而不爲一暴, 則終無以自脫於慢君之律, 臣請一言而決之。 如以兩臣爲賢也, 則尊崇者爲是, 而攻斥者爲非; 如以兩臣爲非賢也, 則攻斥者爲是, 而尊崇者爲非。 是非一明, 則邪正立判, 此外無他議矣。 伏乞聖明, 俯賜夬斷, 尊崇攻斥之間, 明示其好惡, 則是非不混, 邪正自別。
疏入, 上下敎曰: "旣謂之決非大臣、朝廷所可指揮, 則有何上章之事乎? 此疏還出給。" 政院以爲: "不答儒疏, 殊欠待士之道。 宜明賜批敎, 使上下無阻, 而諸生自安也。" 答曰: "予與大臣, 俱昧事體, 擧措失宜, 使諸生輾轉不平, 予甚愧忸, 無以爲答也。" 太學諸生, 相與議曰: "雖因聖敎懃懇, 還入大學, 而旣負方命之罪, 又有却疏之擧, 不可仍處賢關。" 自闕下退歸太學, 拜辭聖廟, 仍散去。 上聞儒生捲堂而出, 引見大臣及備局諸臣, 厲聲而言曰: "寡昧不能善處, 儒生今又空館。 初則予亦悔前言之過, 遣近侍開諭矣, 今則疏中語意, 以方命爲執言之端, 而內有探試之計。 儒生每以廉恥爲重, 人君獨不可顧廉恥乎? 予以此不答, 只曰愧忸云爾, 則此豈空館之事乎? 四方觀聽, 必以爲駭矣。" 右議政趙翼曰: "儒生固不可指揮, 又不可威脅, 特示包容之量, 賜以溫批, 則彼儒生終豈不入乎?" 大司成李厚源曰: "臣雖忝師長, 不干於儒生之論, 故初不知疏語之如何。 空館之後, 問其意於齋任, 則其言曰: ‘上有方命之敎, 不敢仍處賢關, 敦諭至三, 不得不入, 而旣負方命之罪, 故略陳疏章, 而不賜批敎, 反下嚴旨, 儒生不敢晏然處齋, 相與出來。’ 云矣。" 上曰: "鄕黨自好者, 亦謂之賢兩臣, 固不可不謂之賢, 而從祀, 重典也, 不可輕議。 儒生此擧, 雖曰尊賢, 而實有將心。 人君御下之道, 有何愛憎於彼此, 而乃爲偏係之擧也? 予於昔者, 入太學矣。 今欲直宿太學, 以爲處仁遷義之計, 決不可敦諭也。" 李基祚、朴遾等曰: "士者, 國家之元氣, 培植士氣, 人君之道也。 士雖有過, 不可人人而罪之也。" 上謂厚源曰: "諸生欲伸己志, 每以此爲脅迫人主之計, 此弊不可不念。 宜以卿意諭之。"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33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41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