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의정 조익이 연제에 입을 복식에 대하여 아뢰니 신하에게 의논하게 하다
우의정 조익이 상차하기를,
"삼가 살피건대 《가례(家禮)》 소상조(小祥條) 진연복(陳練服) 주(註)에 ‘남자는 연관(練冠)을 쓰고 수질(首絰)·부판(負版)·벽령(辟領)·최(衰)를 제거한다.’ 하였고, 구준(丘濬)의 의절(儀節)에는 ‘복문(服問)032) 에 이르기를 「삼년상의 경우, 연제(練祭)를 지낸 뒤에는 공최(功衰)033) 를 입는다.」 하였고, 잡기(雜記)034) 의 「부모상에도 공최를 입는다.」고 한 귀절의 주에 「삼년상을 지내면서 연제를 행한 뒤에 입는 최복(衰服)은 승(升)035) 의 수가 대공(大功)과 같기 때문에 공최라고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소상(小祥) 때에 따로 최복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헤아려 보건대 관은 조금 고운 마포(麻布)로 만들고, 복장은 일체 대공의 최복과 같이 하되 포(布)는 조금 거친 마포로 해야 될 듯하다.’고 하였습니다.
위의 주장을 살펴보건대 소상복에는 숙포(熟布)036) 로 최복을 만들어야 마땅하겠습니다만, 신이 요즈음 이모저모로 상고하고 검토해 본 결과 그렇지 않으리라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대체로 위에 인용한 복문과 잡기의 공최에 대한 글을 살펴보건대, 소상에 별도의 최복이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 주에는 승(升)의 수가 대공과 같다는 점만 언급했지 연숙(練熟)한 포(布)를 써야 한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이를 보건대 연제를 지낸 후의 최복은 그 승의 수가 연제를 지내기 전과 비교해서 촘촘하기는 하지만, 포 자체는 표백하지 않는 생포(生布)를 그대로 쓰는 것인 듯합니다.
또 단궁(檀弓)037) 을 상고하건대 ‘연제를 지낸 뒤에는 황색으로 안을 받치고 적색으로 선을 두른다.[練後黃裏縓緣]’고 한 귀절의 소(疏)에 ‘소상이 되면 연관(練冠)과 연중의(練中衣)를 착용하기 때문에 소상을 연이라고 하는 것이다. 연의(練衣)라는 것은 연(練)038) 으로 중의(中衣)를 만든 것이고, 황리(黃裏)라는 것은 황색으로 중의의 안감을 삼는 것이다. 정복(正服)은 변할 수 없지만 중의는 정복이 아니기 때문에 최복의 형식만 빌리는 것이다. 전(縓)은 옅은 적색이고, 정복은 최복을 말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보면 소상 때에는 관과 중의만 연사(練絲)로 하고 최복은 연사로 하지 않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의절》의 이른바 ‘소상에 별도의 최복이 있다.’고 한 말은 옳지만, ‘숙포(熟布)로 최복을 만든다.’고 한 말은 그렇지 않을 듯합니다.
삼가 《오례의(五禮儀)》를 살펴 보건대 ‘소상복에 연관(練冠)만 쓰지 최복은 변하지 않는다.’ 하였고, 선왕조의 《등록(謄錄)》에도 모두 이 제도를 쓰고 있는데, 이는 대체로 《가례》의 소상조를 적용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지금 공사 간의 모든 예(禮)에 《가례》를 적용하고 있으니, 이에 의거하여 행하는 것이 본래 당연하긴 합니다. 그러나 예는 절문(節文)이 있는 것으로서, 옛사람들이 예를 만든 본래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예기(禮記)》에 이르기를 ‘상사(喪事)는 갈수록 낫게 하지, 못하게 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가벼운 복(服)으로 바꿔 입게 되는 것이다.’ 하였는데, 간전(間傳)039) 의 글을 보건대 ‘참최(斬衰)의 포는 처음엔 3승으로 했다가 우제(虞祭)와 졸곡(卒哭)이 지나면 성포(成布)040) 6승으로 한다.’ 하였고, 복문과 잡기에 의거하건대 ‘소상이 지난 뒤에 포의 승수(升數)는 대공복(大功服)과 같다. 그런데 대공복의 경우 강복(降服)은 7승이고 정복(正服)은 8승이니, 이 소상의 경우는 7승으로 하게 된다. 그리고 대상(大祥) 때에 흰 마포(麻布)는 15승짜리로 하고 심의(深衣)는 마(麻)로 하는데, 담제(禫祭) 때 섬(纖)041) 을 입는 것은 곧 길복(吉服)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옛제도에 의거하건대 초상 때부터 복을 벗을 때까지 점차 변복하는 것이 이와 같았습니다. 그런데 《가례》에 변제(變制)에 대한 사항이 없는데, 이 점에 대해서는 내용이 불충실한 듯싶습니다. 인주(人主)가 행하는 예는 온 나라의 의칙(儀則)이 되는 만큼, 이 한 절목은 마땅히 옛제도에 의거하여 연포관(練布冠)을 만들고 또 연중의(練中衣)와 최복을 만들되 약간 촘촘한 생포(生布)로 만들어야만 점차 변복해 가는 옛사람의 도에 합치되리라 여겨집니다. 그리고 상으로부터 인평 대군(麟坪大君)까지의 복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되고 친상(親喪)을 당한 온 나라 사람들도 이 제도를 따라야 하겠습니다만, 백관의 복제(服制)의 경우는 본래 옛제도를 따른 것이 아니라 그저 후세의 조복(朝服)에 맞추어 포(布)로 만든 것인 만큼 꼭 바꿀 필요없이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삼가 원하건대 예관으로 하여금 다시 상고하여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그 차자를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대신 및 유신(儒臣)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의정 이경여가 아뢰기를,
"신은 본래 예학(禮學)에 어두운데, 어찌 감히 예경(禮經)의 남긴 뜻을 강구하여 스스로 외람되다는 비난을 자초하겠습니까."
하고, 영돈녕부사 김상헌(金尙憲)이 아뢰기를,
"본래 예학에 어두운데다가 나이들어 정신이 혼미하니, 이미 정해진 국조(國朝)의 제도에 대해서 감히 경솔하게 의논드리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전 판서 김집(金集)이 아뢰기를,
"정복(正服)을 바꾸지 않고 중의(中衣)만 연(練)으로 한다는 것은 《예기》의 주에 나오고, 연제 때 대공포(大功布)로 복을 만든다고 한 것은 《의례경전통해(儀禮經典通解)》에 나오는데, 통해는 곧 황면재(黃勉齋)042) 가 직접 주자의 지시를 받아 찬정(撰定)한 책인 만큼 그 말이야말로 정론(正論)이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에 이미 예전부터 행해온 제도가 있고 원로들도 저처럼 의논을 드리고 있으니, 오직 상께서 재결하시기에 달렸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2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註 032]복문(服問) : 《예기》의 편명.
- [註 033]
공최(功衰) : 대공(大功) 최마복(衰麻服)을 말함.- [註 034]
잡기(雜記) : 《예기》의 편명.- [註 035]
승(升) : 천의 올.- [註 036]
숙포(熟布) : 곱게 누인 포(布).- [註 037]
단궁(檀弓) : 《예기》의 편명.- [註 038]
연(練) : 표백한 실.- [註 039]
간전(間傳) : 《예기》의 편명.- [註 040]
○己未/右議政趙翼上箚曰:
謹按, 《家禮》小祥條, 陳練服註: "男子以練爲冠, 去首絰、負版、辟領、衰。" 丘濬 《儀節》曰: "《服問》云: ‘三年之喪, 旣練矣則服其功衰。’ 《雜記》有 ‘父母之喪, 尙功衰。’ 註謂: ‘三年喪, 練後之衰升數, 與大功同故, 云功衰也。’ 則小祥別有衰明矣。 今擬, 冠用稍熟麻布爲之, 而服則一如大功衰服, 而布用稍粗麻布爲之。" 以此所論觀之, 小祥之服, 當以熟布爲衰服也, 臣近者反復考閱, 乃疑其未然也。 蓋以此所引《服問》、《雜記》功衰之文觀之, 則小祥別有衰明矣。 然其註只云升數與大功同, 而不云其布練熟。 以此觀之, 竊恐練後之衰, 其升數比練前爲細, 而布則仍用生布不練也。 又考《檀弓》, 練後黃裏縓緣疏曰: "小祥而着練冠、練中衣, 故曰練也。 練衣者, 以練爲中衣也; 黃裹者, 黃爲中衣裹也。 正服不可變, 中衣非正服, 但承衰而已。 縓, 淺絳色也, 正服謂衰服也。 以此觀之, 小祥只練冠與中衣, 衰服則不練明矣。 然則《儀節》所謂小祥別有衰是矣, 以熟布爲衰, 則竊恐其不然也。 竊見《五禮儀》, 小祥之服, 只用練冠, 衰服則不變, 先王朝《謄錄》, 皆用此制, 蓋從《家禮》小祥條而然也。 今公私大小禮, 皆從《家禮》, 依此行之, 固宜也。 然禮有節文, 古人制禮, 自作義意。 《記》曰: "喪事,有進而無退, 故有易以輕服。" 《間傳》之文, 則斬衰布, 初三升, 旣虞、卒哭, 則受以成布六升。 《服問》、《雜記》則小祥後布升數, 與大功同。 大功服, 降服七升, 正服八升, 是小祥則七升也。 大祥而素縞麻布則十五升, 麻深衣也, 禫而纖卽吉也。 古制, 自初喪至脫服, 其漸變如此。 《家禮》無有變除, 此則恐其文之不足也。 人主行禮, 當爲一國儀則, 竊恐此一節, 當依古制, 製練布冠, 又製練中衣衰服, 以稍細生布爲之, 庶合於古人漸變之道也。 且自上及麟坪大君服, 當如此, 凡國人遭親喪者, 皆當從此制, 至於百官服制, 則本非古制, 只因後世朝服而以布爲之, 此則恐當因舊, 不必變也。 伏願令禮官, 更考稟處。
上下其箚於禮曹, 禮曹請議于大臣及儒臣。 領議政李敬輿以爲: "臣素昧禮學, 何敢究禮經遺意, 自犯於汰哉之譏哉?" 領敦寧府事金尙憲以爲: "素昧禮學, 加以老耄, 其於國朝已定之制, 不敢輕議。" 前判書金集以爲: "正服不變, 只練中衣之說, 出於《禮記》註, 以練大功布爲服云者, 出於《儀禮經傳通解》。 《通解》乃黃勉齋親承朱子指意, 撰定之書也。 其言固是正論, 而國家已有曾行之制, 元老獻議又如彼, 唯在上裁。" 上命依議。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5책 427면
- 【분류】정론-정론(政論) /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예복(禮服)
- [註 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