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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4권, 효종 1년 5월 3일 을묘 3번째기사 1650년 청 순치(順治) 7년

연주를 개제함에 본국것과 청국의 휘호 중 택하는 문제를 논의하다

예조가 아뢰기를,

"연주(練主)를 개제(改題)할 시기가 이미 임박하였습니다. 《오례의(五禮儀)》 연제의(練祭儀)에는 ‘모호(某號) 대왕이라고 개제한다.’고만 되어 있는데, 종묘 열성(列聖)의 신주(神主) 경우에는 ‘모조(某朝) 【유명(有明)을 말함.】 증시(贈諡) 모호(某號) 【태조의 경우 강헌(康獻)이라고 쓰는 것.】 모조(某祖) 【태조의 경우 태조라고 쓰는 것.】 모휘호(某徽號) 대왕’이라고 쓰며, 각 제사의 축문(祝文)에는 ‘모조 증시(某朝贈諡)’ 네 글자를 빼고 ‘모조 모시호 모휘호 대왕’ 이라고만 쓰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예를 따라 개제(改題)해야 합니까? 중대한 일이니, 대신에게 의논하소서."

하니, 하교하기를,

"해방 승지가 대신에게 밀의(密議)하라."

하였는데, 이는 우주(虞主)의 경우엔 휘호만 쓰지만 연주(練主)부터는 중조(中朝)의 증시 및 묘호(廟號)를 쓰는 것이 예(禮)이기 때문이었다. 예방 승지 이래(李䅘)가 대신에게 수의(收議)한 뒤 밀봉(密封)해서 들였다. 영의정 이경여(李敬輿)가 아뢰기를,

"생각건대 우리 인조 대왕께서는 불행히도 재난의 운세를 만나 외로운 성에 파월(播越)하셨으나 시종일관 의리를 지키셨습니다. 급기야 국가의 운명이 이미 결정되자 낙천적인 인자함으로 종사와 생민을 위해 계책을 세우셨으나 중국을 향한 정성이야 어찌 하루라도 잊은 적이 있으셨겠습니까. 신이 일찍이 탑전에 입시하여 황명(皇明)에 대한 말을 언급하자 오열하며 제대로 말씀을 하지도 못하셨는데, 신이 지금도 생각하노라면 나도 모르게 간장이 찢어지는 듯합니다.

오늘날 천하의 사세가 지난날과는 딴판이니, 연주(練主)를 개제(改題)할 때 청국이 준 시호를 써야 될 것인지의 여부를 의논드리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다만 앞으로 부묘(祔廟)한 뒤를 생각해 보건대, 열성(列聖)의 혼이 오르내리고 엄숙하기 그지없는 청묘(淸廟) 안에 소목(昭穆)의 엄연한 순서에 따라 보좌(寶座)가 나란히 배열되어 있는데, 신위(神位)에 쓰인 시호 위의 두 글자가 유독 차이가 난다면 영욕과 중대한 관련이 있는 만큼 실로 미안한 일일뿐더러, 13년 동안 와신상담했던 선조(先朝)의 본심과도 어긋날테니, 권도(權道)를 쓰는 것이 합당하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인심이 좋지 못하여, 이익이 되는 것이면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반드시 저쪽에 누설시키는데, 이 일이 혹시라도 탄로날 경우 국가의 존망과 직결될 것입니다. 신의 얕은 식견으로 감히 자신의 견해만 옳다고 할 수 없으니, 다른 대신 및 사려가 깊은 2, 3명의 중신에게 은밀히 자문을 구하시어 의리를 참작하고 충분히 강구하여 처리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고, 우의정 조익(趙翼)은 아뢰기를,

"이처럼 막중한 일을 쉽사리 단정지을 수는 없으니, 충분히 생각한 뒤에 아뢰겠습니다."

하였는데, 이날 조익이 밀계하기를,

"선조(先朝)에서 이미 썼던 방식대로 쓰는 것이야말로 그만둘 수 없는 일입니다. 다만 나라 안의 일이 대부분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데, 혹시라도 누설되지 않을까 하는 이 점을 또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신의 망령된 의견을 근거로 결정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건대 친히 믿는 중신에게 다시 자문을 구하시어 처리하소서."

하였다. 의논이 들어오자 상이 제주관(題主官)인 좌부승지 신유(申濡)를 인견하였다. 사관(史官) 1인만 입시하고 환관은 모두 물리치도록 명한 뒤에, 이어 영상과 우상의 밀계를 보이면서 이르기를,

"대신의 의견이 이와 같은데 내가 상의해 보고 싶었으나 혹시라도 누설될까 염려되어 하지 못했다. 승지는 제주(題主)를 담당했으니 모쪼록 이 뜻을 알고 쓰도록 하라. 일찍이 지문(誌文) 중에 나오는 말 때문에 염려했는데, 이번은 지문의 경우와는 다르니, 입을 조심하도록 하라."

하니, 【장릉(長陵)의 지문 가운데 청국에 저촉되는 말이 많았고 또 순치(順治)의 연호를 쓰지 않았기 때문에 청나라 사신이 왔을 때 상이 이 점을 무척 걱정하였다.】 대답하기를,

"신이 어찌 감히 명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글자 수는 어느 정도로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묘호와 휘호만 쓰고, 글자 모양은 권도(權道)를 써서 작게 쓰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신유에게 이르기를,

"근래 객사(客使)가 잇달아 왕래하는 바람에 3도가 특히 혹독하게 피해를 받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관서(關西)가 더욱 그러하다. 이런 때인데도 수령들이 일이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공무를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암행 어사를 나눠 파견하여 그들을 적발해 중하게 다스리는 일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나는 사람을 알아보는 식견이 없어서 어떤 사람을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시종 중에 어사 자격이 있는 자를 대신으로 하여금 넉넉히 가려 아뢰게 함으로써 선택해 보낼 수 있도록 하라."

하니, 【그 뒤에 영의정 이경여는 홍명하(洪命夏)·조복양(趙復陽)·김휘(金徽)·김좌명(金佐明)·김시진(金始振)을 천거하였고, 우의정 조익은 홍명하·홍처량(洪處亮)·조한영(曺漢英)·김좌명·이경철(李慶徹)·임의백(任義伯)·김시진을 천거하였다.】 신유가 아뢰기를,

"어사를 보내면 수령이야 단속되겠습니다만, 현재 객사(客使)가 서울에 있는데다가 한창 농사 일이 바쁜 이때에 어사를 나누어 파견하여 사행(使行)과 겹치게 할 경우, 탐오한 수령들이야 본디 말할 것도 없지만 잘 다스리는 수령들까지도 수족을 놀릴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전일 어사를 보냈을 때에 수령을 너무나 많이 교체시켰는데, 그들을 영송(迎送)하는 폐단이 어찌 탐관오리가 침탈하는 폐단보다 못했겠습니까. 이것도 백성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이니, 원하건대 상께서 헤아려 조처하소서."

하자, 상이 옳게 여겼다.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2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禮曹啓曰: "練主改題, 日期已迫。 《五禮儀》練祭儀, 只稱某號大王改題云, 宗廟列聖神主則書以某朝 【謂有明。】 贈謚某號 【如太祖則書康獻。】 某祖 【如太祖則書太祖。】 某徽號大王, 而各祭祝文, 則無某朝贈謚四字, 只書某祖某謚號某徽號大王矣。 今從何例改題乎? 事係重大, 請議于大臣。" 下敎曰: "該房承旨密議于大臣。" 凡虞主只書徽號, 練主始書中朝贈謚及廟號, 禮也。 禮房承旨李䅘收議于大臣, 密封以入。 領議政李敬輿以爲: "惟我仁祖大王, 不幸値陽九之運, 播越孤城, 終始秉義。 及至國事已去, 以樂天之仁, 爲宗社、生民之計, 萬折必東之誠, 曷嘗一日忘哉? 臣嘗入侍榻前, 語及皇, 至於嗚咽不能言, 臣至今思之, 不覺五內崩裂。 式至今日, 天下事勢與向日有異, 練主改題時, 淸國賜謚之書與不書, 固難輕議, 而但他日昇祔之後, 淸廟肅雝之地, 列聖陟降之庭, 寶座相聯, 昭穆儼列, 而神位所題謚號上二字, 獨有異同, 則榮辱所關, 實爲未安, 而亦非先朝十三年薪膽之本心, 合有權宜之道, 而我國人心不淑, 利之所在, 事無微細, 必漏於彼, 此事若或宣露, 係國存亡。 愚臣淺識, 不敢自是己見, 密詢他大臣及二三重臣深謀遠慮者, 參以義理, 孰講以處似當。" 右議政趙翼以爲: "此莫重之事, 不可容易斷定, 當熟思以啓。" 是日密啓曰: "依先朝已書之例而書之, 誠所不可已也。 但國中凡事多不秘, 如或漏泄, 此亦不可不慮也。 然臣之妄見, 何可據以爲定? 伏願更詢于親信重臣以處。" 議入, 上引見題主官左副承旨申濡, 命史官一員入侍, 盡屛宦官, 仍示領右相密啓曰: "大臣之意如此, 予欲相議, 而恐或漏洩, 未果也。 承旨當題主, 須知此意而書之。 曾以誌文中語爲慮矣, 此則異於誌文, 所愼者在口。" 【長陵誌文中多有觸諱淸國之語, 又不書順治年號, 故淸使之來也, 上深以此爲憂。】 對曰: "臣敢不唯命? 第未知字數幾許。" 上曰: "只書廟號、徽號而已, 字樣則用權道細書可矣。" 上謂曰: "近者客使往來如織, 受害之處, 三道偏酷, 三道之中, 關西爲甚。 此時守令, 以有事爲幸, 憑公營私者, 比比有之。 必須分遣暗行, 以爲摘發重治之地, 而予無知人之鑑, 未知某人之可使。 侍從中可爲御史者, 令大臣優數抄啓, 以備擇遣。" 【其後領議政李敬輿薦洪命夏、趙復陽、金徽、金佐明、金始振, 右議政趙翼薦洪命夏、洪處亮、曺漢英、金佐明、李慶徽、任義伯、金始振。】 曰: "御史之行, 守令誠爲畏戢, 而當此客使在京, 農務方劇之日, 分遣御史, 參錯於使行, 則守令之貪汚者, 固不足道, 至於善治者, 亦無以措手足矣。 前日御史之行, 遞易甚多, 迎送之弊, 豈下於貪吏侵漁之患乎? 是亦民弊, 願上量處。" 上然之。


  • 【태백산사고본】 4책 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27면
  •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외교-야(野)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