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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실록 3권, 효종 1년 2월 22일 을사 2번째기사 1650년 청 순치(順治) 7년

경상도 진사 유직 등 9백 명이 이이와 성혼의 성묘에의 종사를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다

경상도의 진사(進士) 유직(柳稷) 등 9백여 인이 상소하기를,

"근래에 홍위(洪葳)이원상(李元相) 등이 여러 차례 소장(疏章)을 올려서 고(故) 문성공(文成公)이이(李珥)문간공(文簡公)성혼(成渾)을 성묘(聖廟)에 종사(從祀)할 것을 청하였는데, 신들은 삼가 의혹스럽게 생각합니다. 아, 성묘가 어떤 곳이며, 두 신하는 과연 어떤 사람입니까. 대체로 두 신하를 종사의 반열에 청하는 것은 그들의 어짐을 가지고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그 실상을 논하면 전혀 그렇지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시험삼아 두 신하의 출처(出處)와 도덕(道德)이 어떠한가를 보소서. 과연 하나하나 옛날의 현인에 부끄러움이 없습니까. 두 신하가 살던 시대가 이토록 가까워 보고 듣는 바로 그들의 사람됨을 알 수 있으니, 현부(賢否)와 시비(是非)의 구분은 자연 감출 수가 없습니다.

요컨대 두 신하는 역시 한때의 명인(名人)이니 어찌 한두 가지 일컬을 만한 일이야 없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의 평생을 살펴보면 결점이 매우 많습니다. 사람을 논하는 법은 반드시 대절(大節)이 우선이니, 대절이 손상되었으면 나머지는 족히 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이가 천륜(天倫)을 끊고서 공문(空門)006) 에 도망하여 숨은 것은 참으로 명교(名敎)에 죄를 얻은 것이니, 그 당시에도 사마시에 뽑혀서 성묘(聖廟)에 배알하는 것을 오히려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성혼은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고서도 임금이 파천하던 날 달려오지 않은 것은 참으로 왕법에 용서받지 못할 바로서 선묘(宣廟)께서 내린 준엄한 하교가 어제의 일 같습니다.

아, 어질면서 그 어버이를 버리는 자는 없으며, 의로우면서 그 임금을 소홀히 하는 자는 없습니다. 다른 일은 논할 것도 없이 이 한 가지만으로도 족히 두 신하에 대한 단안(斷案)이 됩니다. 그 이외에도 충현(忠賢)을 교묘하게 헐뜯고, 붕당을 그릇되게 비호하였으며, 걸핏하면 나라를 다스리는 실무(實務)라고 하고 언론의 향방을 마음대로 조정하여 족히 위세를 드날렸지만 한 일과 말들은 치우치고 소루함을 면치 못하였으니, 대체로 그의 마음 중에 크게 의심스러운 것이 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는 천근한 것일 뿐이며, 학문의 폐단에 있어서는 이보다 더욱 큰 것이 있습니다. 이이는 일찍이 이교(異敎)를 섬겨서 그 구습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엽등(躐等)하기를 좋아하여 진실한 길을 가지 못한 채 허황한 환상을 하였으니 우리 유가(儒家)의 계책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면목(面目)을 바꾸어 그 설을 스스로 성취시켰습니다만, 선정신(先正臣)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도 일찍이 깊이 염려하고 엄히 경계하였으니 ‘새로 하려는 것은 달갑지 않고 익숙한 곳은 잊기 어려워서 오곡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돌피의 가을이 갑자기 닥친다.’는 등의 말씀007) 은 참으로 그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이의 학(學)은 오로지 기(氣)자만을 주장하여 기를 이(理)로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와 기를 같은 것으로 여겨 다시 분별함이 없었으며, 심지어 마음이 바로 기이고 사단(四端)과 칠정(七情)이 모두 기에서 생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병통의 근본은 원래 도(道)와 기(器)를 변별하지 않은 육구연(陸九淵)의 견해에서 나온 것으로서 그 폐해는 작용(作用)을 성(性)의 체(體)라고 한 석씨(釋氏)의 주장과 같습니다. 대체로 이와 기의 분별은 바로 학문의 생사(生死)가 걸린 갈림길이며,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정밀한 한계와, 유도(儒道)와 이단(異端)의 다른 점과 옳고 그름이 모두 이에서 판가름 되는 것입니다. 이황은 도(道)의 체(體)를 분명하게 보고, 인성에 대해 힘써 공부하여, 염(濂)·락(洛)008) 의 서로 전해온 은미한 뜻의 근원을 추급하고, 자양(紫陽)009) 이 이미 천명해 놓은 요결(要訣)을 밝혀서 천명도(天命圖)와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를 지어 체(體)와 용(用), 현(顯)과 미(微)를 섬세하고도 극진하게 규명하였고, 사단과 칠정의 구분에 있어서도 더욱 그 묘를 다하여, 천고의 숨겨진 자물쇠를 열어 놓았으니, 백세 이후 성인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의혹됨이 없을 것입니다.

이이는 평소 이러한 점을 털끝만큼도 깨달음이 없이 흐리멍덩하게 묵은 학문에 떨어져 있다가 이황이 죽은 뒤에 이황의 학을 있는 힘을 다해 공격하였습니다. 그의 설이 모두 그의 문집에 있으나 종횡으로 잘못된 것들을 모두 다 기록할 수가 없습니다. 이황의 말을 지적하여 이(理)를 해친 것이라 하는가 하면 이황의 말은 성(性)을 모른 것이라고 하였으며, 심지어는 ‘주자가 참으로 이와 기가 호발(互發)하여 각기 상대해서 나오는 것이라고 하였다면 주자도 잘못한 것이니 어찌 주자라 하겠는가?’ 하였으니, 편견과 착각으로 감히 전현(前賢)을 이토록 헐뜯을 수가 있습니까. 삼가 주자의 설을 살펴보면 이(理)가 있은 연후에 기(氣)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와 기는 결단코 둘이며 ‘사단(四端)은 이에서 발하고, 칠정(七情)은 기에서 발한 것이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이와 기가 호발한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주자의 정론(定論)이 이토록 명백한데도 오히려 믿지 않았습니다. 이황의 학은 바로 주자의 학이었으니 이이에게서 배척을 당한 것은 당연합니다.

성혼(成渾)의 학은 대체로 이이와 같은 맥락으로, 이른바 ‘이와 기는 같이 발한다.’는 등의 말은 필경 큰 근본에 깨달은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학을 논하는 상소에 애초 궁리(窮理)나 격물(格物)에 관한 일을 강구하여 밝힌 것은 없고, 다만 정신을 보존하고 아껴야 한다는 말로 제일의 법문(法門)으로 삼았는데, 이는 바로 도가(道家)의 유파에 해당되는 것으로 자사자리(自私自利)의 설이니, 우리 유가의 학문하는 규모가 아닙니다. 이는 본래 치우친 학술을 수용한 데서 연유한 것인데, 더구나 그의 재기와 역량이 이이의 풍도에 비해 아래인 데이겠습니까. 아, 유자(儒者)가 귀중하고 존상(尊尙)되는 것은 바른 학문이 있기 때문이며, 진실한 덕이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런데 두 신하의 행적을 상고해 보면 천륜을 어겨 풍교(風敎)를 손상시키고, 도(道)를 문란시켜 성인의 법을 배반하였는데, 그들을 성묘(聖廟)에 배향하여 제사를 받드는 것이 옳겠습니까? 이는 사체가 중대한 것으로, 일시적으로만 받드는 것이 아니라 백세토록 우러러 받들게 되는 것이니, 모름지기 천하에 지극히 합당하게 처리해야 합니다. 어찌 그 사람됨을 논하여 실상을 따지지 않고서 당을 비호하고 억지로 끌어대어 합당하지도 않고 공정하지도 못한 일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 을해010) 연간에 송시형(宋時瑩) 등이 처음 이런 요청을 하였는데, 성학(聖學)이 고명하신 인조 대왕께서 의연히 물리쳐 그 일이 마침내 중지되었습니다. 성인(聖人)의 하신 일이 일반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데서 나왔으므로 참으로 영원히 바꿀 수 없는 법이라 할 것입니다. 당시의 비답(批答)이 정녕할 뿐 아니라 통쾌하여 지금까지도 끊임없이 칭송되고 있어 자신도 모르게 감동되고 격앙됩니다. 아, 인심의 향배와 사습(士習)의 사정(邪正)이 모두 그 시초에 달렸습니다. 숭장(崇奬)하는 일이 한번 잘못되어, 추종하여 휩쓸리거나 등을 돌려 방황해서 다시 바루어지지 못하면, 장차 위로는 선성(先聖)을 욕되게 하고 아래로는 후학을 그르쳐 우리 도(道)의 연원이 종식되게 될 것입니다. 위아래로 수백 년 사이에 이에 참여된 선유(先儒)는 겨우 다섯 신하입니다. 이밖에도 공덕이 있고 하자가 없는 굉유(宏儒)와 석사(碩士)가 전후하여 많았으니, 어찌 이 두 신하보다 나은 이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조종(祖宗)의 훌륭한 시대에 언제 쉽게 논의한 적이 있었습니까.

이제 이 논의를 주장하는 자는 일체 자기가 좋아하는 바에 아부하여 성고(聖考)의 큰 훈시를 무시한 채 백세의 공의(公議)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고 하는가 하면 유림의 정론(正論)을 사론(邪論)으로 지적하고 온 나라가 분리된 것을 귀일(歸一)되었다고 지목하면서 중대하기 그지없는 법을 힘으로 도모할 수 있다고 하며 서로 견강부회하여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두려워서 감히 아무 말도 못하고 위세만 점차로 더해가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신들의 오늘날 이 일이 시의(時議)에 용납되지 못할 줄을 참으로 알지마는 인심은 속이기 어렵고 천리는 지극히 공정하니, 격발한 중론(衆論)을 전하에게 아뢰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의리의 바름을 깊이 생각하시어 참람하고 망령된 요청을 통렬히 물리치소서."

하였는데, 상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고 답하였다.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1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물(人物)

  • [註 006]
    공문(空門) : 불가(佛家).
  • [註 007]
    새로 하려는 것은 달갑지 않고 익숙한 곳은 잊기 어려워서 오곡의 열매가 익기도 전에 돌피의 가을이 갑자기 닥친다.’는 등의 말씀 : 젊었을 때 불가에 입문했던 것을 후회하고, 학문의 부진을 한탄한 이이의 편지에 대해 이황이 답서에서 한 말로서, 지난날의 잘못을 솔직히 말하고 새로 유학에 정진하려는 것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다만 두려운 것은 이런 점이라고 한 말을 인용한 것이다. 《퇴계집(退溪集)》 권16 답이숙헌(答李叔獻).
  • [註 008]
    염(濂)·락(洛) : 주돈이(周敦頤)와 정호(程顥)정이(程頤).
  • [註 009]
    자양(紫陽) : 주희(朱熹).
  • [註 010]
    을해 : 1635 인조 13년.

慶尙道進士柳㮨等九百餘人上疏曰:

邇者, 洪葳李元相等累陳疏章, 請以故文成公李珥、文簡公臣成渾, 從祀聖廟, 臣等竊惑焉。 嗚呼! 聖廟是何等地也, 二臣果何如人也? 夫以二臣請列於從祀者, 豈不以賢乎? 然而以其實論之, 大有所不然者。 試觀二臣之出處何如, 道德何如。 其果一一無愧於古之賢人耶? 二臣之世, 若是其不遠, 耳目所逮, 可知其爲人, 則其賢否是非之分, 自有所不可掩者。 要之二臣者, 亦一時之名人, 豈無一二可稱之事乎? 顧其平生, 疵累甚多。 論人之法, 必先其大節, 大節旣虧, 餘不足觀。 李珥之割棄天倫, 逃遁空門, 固已得罪於名敎, 其時尙不許司馬謁聖。 成渾之受國厚恩, 奔問不至, 誠所不容於王法, 宣廟御敎, 澟如昨日。 噫! 未有仁而遺其親者也, 未有義而後其君者也。 毋論別事, 只此一款, 足爲二臣之斷案。 其他巧詆忠賢, 曲護朋比, 動稱經濟實務, 專擅言論風旨, 足以張皇而震耀, 施措云爲, 未免偏弊而踈謬, 凡其心跡之間, 大可疑者類此。 雖然, 此特其粗淺處耳, 至其學問之弊, 尤有大於此者。 李珥早事異敎, 舊習未袪, 好爲躐等而實地未踏, 蜃樓虛幻, 旣非吾儒家計, 而剝換面目, 以自濟其說, 先正臣文純公 李滉, 蓋嘗深慮而痛戒之, 有 "新嗜靡甘, 熟處難忘, 五穀之實未熟, 稊稗之秋遽及。" 等語, 其意固有在也。 且之學, 專主氣字, 認氣爲理, 故以理氣爲一物, 而無復分別, 至以爲 "心是氣也, 四端、七情, 皆氣之發。" 是其病根, 元出於家不分道、器之見, 其爲害, 同歸於釋氏作用爲性之體也。 蓋理氣之辨, 乃學問生死門路也, 天理、人欲之界至分數, 吾道異端之同異得失, 莫不於是乎判焉。 李滉的見道、體, 喫緊爲人, 推本濂洛相傳之微旨, 發明紫陽已闡之的訣, 定著《天命圖》《心統性情圖》, 體用、顯微, 究極纖悉, 至於四七之分, 尤臻其妙, 殆開千古之秘鍵, 百世以竢聖人, 而無惑者也。 李珥平日旣無絲毫契悟於此, 而落在儱侗之科臼, 李滉沒後, 所以攻李滉之學者, 不遺餘力。 今其說, 俱在集中, 縱橫謬戾, 不可殫記。 一則以李滉之言爲害理, 一則以李滉之言爲不知性, 至曰: "朱子眞以爲理氣互發, 相對各出, 則朱子亦誤也, 何以爲朱子?" 其偏見錯認, 敢詆前賢, 一至此哉? 謹按, 朱子之說有曰: "有理而後有氣。" 理與氣, 決是二物, 四端理之發, 七情氣之發, 此非所謂理氣互發者耶? 朱子定論, 若是其明白, 而尙且不信。 李滉之學, 乃朱子之學, 則其見斥於, 固也。 成渾之學, 大抵與, 同一關捩, 所謂理氣一發等語, 畢竟於大本上, 未有得力。 且其論學之疏, 初未嘗言講明窮、格之事, 而特擧保惜精神之語, 爲第一法門, 此乃道家者流, 自私自利之說, 非吾儒爲學底規模。 蓋由學術頗僻, 素所受用者然也。 況其才氣、力量, 又視風, 斯下矣。 嗚呼! 所貴乎儒者, 而尊尙之者, 以其有正學也, 以其有實德也。 夷考二臣之行, 適足以違倫而傷敎, 亂道而反經, 則其將俎豆乎聖廟, 尸而祝之可乎? 不可乎? 玆事體大, 不但爲一時之所矜式, 亦將爲百世之所瞻仰, 則要須一以天下之至當處之。 豈可不論其人, 不究其實, 而護黨傅會, 爲不合不公之擧也? 往在乙亥年間, 宋時瑩等始有此請, 而仁祖大王聖學高明, 毅然屛斥, 其事遂寢。 聖人所作爲, 出尋常萬萬, 眞可謂永世不易之典。 當時御批, 不啻丁寧而痛快, 至今莊誦, 不覺感動而激昻。 嗚呼! 人心之向背、士習之邪正, 罔不在厥初。 崇奬一差, 趨向立異, 風靡波蕩, 不可復正, 則將至於上辱先聖, 下誤後學, 而吾道之淵源, 或幾乎熄矣。 上下數百年間, 儒先之與於此者, 僅五臣焉。 此外宏儒碩士, 有功德而無疵累者, 前後相望, 豈無賢於二臣者, 而祖宗盛時, 何嘗容易而擬議也耶? 今之爲此論者, 一切阿其所好, 聖考大訓, 謂不足恤; 百世公議, 謂不足畏, 儒林正論, 指爲邪論, 擧國分離, 目爲歸一, 莫重莫大之典, 謂可以力圖, 回互遷就, 無所不至。 人心怵迫, 不敢出聲, 積威之漸, 誠可寒心。 臣等今日之擧, 固知不容於時議, 而人心難誣, 天理至公, 衆論所激, 不得不達於紸纊之下。 伏願殿下, 深惟義理之正, 痛斥僭妄之請。

答曰: "疏辭知道。"


  • 【태백산사고본】 3책 3권 10장 A면【국편영인본】 35책 413면
  • 【분류】
    정론-정론(政論) / 사상-유학(儒學) / 교육-인문교육(人文敎育) / 인물(人物)